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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까지 계속되었다. 이들 예비역소위들은 4월 제주도 청년방위대가 조직되자 도단본부, 지대, 편대, 소대의 각극 지휘관 및 참모로서 지도감독 업무를 맡아 반공, 치안유지에 협력활동을 하였다. 학교와 지역, 직장 단위의 청년들은 전원 방위대원으로 규합하여 유사시 병력화 하려는 준비과정에서 6.25전쟁이 일어났다. 1950년 6월 26일 월요일 수업은 계속되었으나 국가 존망의 국란임을 확인한 학생들과 4.3희생자 유족 학생 및 토벌대로 참여했던 학생들은 즉각 출전을 주장했다. 이러한 움직임을 승화시키고자 당시 도학무국 장학관 고정일과 前 학련위원장 김호산(제38회)등은 학도호국단 제주도학생관을 설치하고 관장에 고정일 지도위원에 김호산 학생위원장에 고남화를 선임했다. 이어 7월 20일 관덕정 앞 광장에 시내 전학생이 모인 가운데 국가존망의 위기를 알리는 '공비섬멸학생총궐기대회'를 개최하고 반공의 의지를 굳건히 다지면서 학생들의 출정분위기를 이끌었는데, 그 날은 한라영봉마저 동족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슬퍼하는지 구름에 가렸고 아침부터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으나 학생들은 비를 흠뻑 맞으며 대회를 거행했다. 궐기대회에서 도지사를 대신해서 홍순원 총무국장이 훈시를 하였고 고남화 학생위원장의 궐기사, 그리고 신현준 계엄사령관 김인선 국회의원 이성수 도경국장 등의 격려사가 있었다. 이어서 대통령, 유엔사령관의 메시지 낭동이 있은 후 전 학생들은 '총진군 하자, 괴뢰군 섬멸에!', '공비소탕은 학도의 힘으로!' 등 하늘을 찌를듯한 힘찬 구호를 외치며 반공의 의지를 굳건히 다졌다. 한편 전시에 부응하여 1951년 12월 1일 학생군사훈련실시령(대통령령)에 의해 전학년 군사훈련이 실시되었고, 1953년 4월 1일부터는 국방부령 제16호, 문교부령 제577호 학생군사훈련실시령시행규칙에 따른 정규과목으로 교련교육을 학년마다 주 4시간씩 휴전(1953.7.27)시까지 실시했다. 교육과 지도는 국방부와 문교부장관이 배치한 현역장교나 예비역장교가 담당했는데, 최초 1년간은 모교 사친 회장이 발령한 김창선 소위와 조교 1명이 파견되었다. 교련교육은 휴전과 국내정세에 따라 1955년 일시 중단되었다가 1969년 3월 1일부터 문교부령으로 주 2시간 연 68시간 보통교과의 필수과목의 하나로 부활되어 군사훈련을 시행했다. 1993년 5월 18일 24년만에 안전교육 위주로 개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