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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도돌격대(학도병) 학도돌격대(학도병)는 1950년 7월 30일 오현단에서 '국가존망의 위기에 적을 무찌르자'는 결의로 편성된 자발적인 145명 학생조직이었다. 학생들(고교생과 그 이하의 소년들)에게는 국방의 의무나 공적인 소집이 없었음에도 학생간부들은 초대 학련위원장 김호산(제39회)을 중심으로 연일 모임을 갖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출하고자 출정준비를 서둘렀다. 우선 학련 제1기 학도군사훈련 수료생들은 김호산 대장 송봉규(제39회) 교관과 농업중 학도대장 고남화(제40회)의 지휘 아래, 대원 모집은 하기 방학 중이어서 1950년 7월 28일 제주신보에 공고를 냈고 친구들을 통한 릴레이식 전달방법으로 연락하니 7월 30일 오후 4시 오현중 교정에 180여 명이 모여들었다. 그중에 독자, 병약자와 연소자는 귀가토록 하고, 건강한 지원자 145명으로 학도돌격대를 편성, 제주여중에서 군대식 합숙훈련을 시작했다. 8월 2일 2차 모임을 갖고 돌격대장에 김호산을 추대하여 4개 대로 편성하고, "남북통일은 우리의 손으로!"라 외치며 시가행진을 하면서 출정의지를 과시했다. 학도돌격대의 출정소식이 도민에게 알려지자 찬사와 격려가 끊이지 않았다. 돌격대는 당시 보병5사단 예하의 독립부대로 최전선 출정을 희망하였으나 출정학도 대표 홍문표 김홍수 김문성 김호종 고남화 등이 제주지역계엄사령관 신현준 대령과 면담결과 보병5사단은 후퇴하여 재편성 중이었으므로 육군 입대가 좌절되어 해병대로 선회했다. 학도돌격대로 해병대에 출정한 일진의 뒤를 이어 대한학도의용대 제주도지부가 설치되고 각 학교에 지대를 조직편성했다. 모교 지대는 강병효 교무주임의 지도 아래 의용대 60명으로 출발했다. 이때 주도한 학생은 지대장 임문호(제40회) 지도요원 송석범 김형섭(이상 제41회) 홍경표 한금섭 좌종식(이상 제42회)이었다. 학생의 신분으로 단순히 자원입대하여 전쟁에 참가한 제주도의 학도병 또는 학도의용권(義勇軍)은 육지부와 달리 군번을 부여한 정규 부대원이었고 강훈(强訓)을 받은 후 조국수호의 간성이 되었다. 군사훈련은 모교구내(飼作圃 해병막사)에서 실시되었다. 양치종 당시 교감(1949.11.1~1951.8 재임)은 "해병대 신병들은 제주농중 막사에서 도두봉까지 8㎞를 완전무장으로 구보했다. 남문로 관덕정 입구에서 학교까지 '마의 고갯길'이었고, 이런 극한적인 훈련을 극복해냈다."고 증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