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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몰제 농학도 추념비 건립경과 모교 출신 전몰호국용사 38명의 명자가 새겨진 이 6.25 전몰제농학도추념비는 고남화(高南化 제40회) 예비역대령이 주동하여 세운 충혼비이다. 농업중학교 6학년 19세 고남화는 1950년 2월 청년방위대 간부후보생에 응모하여 충남 온양의 육군방위사관학교에 입교했고, 3월 한달 동안 군사교육을 이수한 후 육군 에비역 소위로 임관했다. 그 해 4월 청년방위대가 조직됐고 5월 2일 학도호국대가 재편성하면서 대 지휘관 겸 학도호국대 대장으로 활약했다. 학교와 지역.직장 단위의 청년들을 전원 방위대원으로 규합하여 유사시 병력화 하려는 준비과정에서 6.25전쟁이 일어났다. 1950년 6월 25일 6.25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수많은 제농학우들이 자원입대하였고, 7월 30일 모교 학생 145명이 자발적으로 '학도돌격대'를 조직하고 오현단 교정에서 출정준비를 서둘렀다. 이를 지휘한 이가 농업중 학도대장 고남화였다. 학도돌격대는 당시 보병 5사단 예하의 독립부대로 최전선 출정을 갈망하였으나 5사단은 광주에서 후퇴해 재편성 중이었으므로 제주지역계엄사령관이며 해병대사령관인 신현준(申鉉俊) 대령과 면담 끝에 해병대 입대로 선회했다. 동문들의 해병대 출정을 홀로 전송한 육군소위 고남화의 첫 부임지는 육군훈련소 3교육대 소대장이었다. 이어 건봉산 564고지 전투에서 1개 소대 병력을 이끌고 적 1개 중대를 섬멸하는 큰 공을 세웠다. 이때 필사필생 필생필사(必死必生 必生必死)라는 교훈을 얻었다. 그러나 '용감히 싸워 이기고 학교에 돌아오겠다'며 자원입대한 제주농업중 학도병들의 결의나 군 당국의 약속은 어긋났다. 육군 26명, 해병대 12명 등 38명은 조국의 수호신으로 산화했고, 살아서 돌아온 재학생(40회기)들에게는 문교부 방침에 따라 이미 졸업장이 발부되어 중단했던 공부를 다시 할 수 없는 아픔을 겪었다. 6.25참변 생존 제농학우들은 1991년 경 '환갑을 전후한 우리 세대마저 눈을 감으면 어느 누가 그들을 기억해 줄까?'하는 안타까운 마음에 충혼탑 건립을 의논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