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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 미군정은 무장봉기가 발생하자 4월 5일 경찰 100여명을 응원대로 제주에 급파하는 한편 서청(기독교서북청년단) 단원들도 증원하였습니다. 또한 4월 17일 미군정은 모슬포 주둔 국방경비대 9연대에 사태 진압을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경찰에 비해 민족적인 성향이 강했던 9연대는 이 사건을 경찰및 서청과 같은 극우 세력의 횡포로 야기된 것으로 판단하고 무장대와의 평화적인 해결방안을 모색했습니다. 그리하여 1948년 4월 말 9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무장대측 군사총책 김달삼이 만나 '72시간 안의 전투중지, 무장 해제와 하산이 이루어지면 책음을 묻지 않는다.'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평화협상을 성사시켰습니다. 그러나 미군정 하지 사령관은 무력 진압 방침을 세웠고, 평화협상 직후인 5월 1일 우익청년들이 오라리 마을에 방화를 저지르고 미군정과 경찰이 이를 폭도들의 행위로 조작하면서 김익렬중렬이 해임되고 박진경중령리 9연대를 지휘 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무장대는 5월 10일 남한의 단독선거에서 적극적인 거부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5월 7일부터 10일까지 선거사무소를 집중 공격하고 선거관계 공무원을 납치.살해하는 한편, 선거인명부를 탈취했습니다. 5월 10일 선거 당일에 무장대에 동조하여 포선,조천 등지에서 투표소를 공격했으며 다수의 주민들은 무장대에 동조하여 입산, 선거를 거부하였습니다. 결국 전국 200개 선거구 중에서 3개의 선거구가 있는 제주도의 북제주군 2개 선거구가 유일하게 투표율 미달로 무효처리 되었습니다. 미군정은 5.10선거의 거부를 자신들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였고 8,000여명을 검거하는 강도 높은 진압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나 무리한 토벌에 반대하여 9연대 병사들이 집단으로 탈출하였고 6월 18일에 9연대장 박진경이 부하에게 사살됩니다. 미군정은 8,000여명에 달하는 입산자를 붙잡으며 6월 23일 재선거를 실시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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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살 : 1948년 8월 15일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제주도 소요사태를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하였습니다. 더구나 김달삼을 비롯한 무장대의 지도부가 북한 정권을 지지하고 나섬으로써 제주도는 더욱 정부의 강경 진압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1948년 10월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습니다. 1948년 10월 17일 송요찬 9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의 사람들을 모두 폭도로 간주하여 살해하겠다는 포고령을 발표하면서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었고 결국 1948년 11월 17일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1949년 3월까지 참혹한 집단 살상이 발생합니다. 중산간 마을 주민들을 해안마을로 강제로 이동시키는 소개령이 내려졌으나 병자.노인.어린이등을 포함한 일부 주민은 마을을 떠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았고 소개령을 전달받지 못한 마을들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군인과 경찰에 의한 마을과 사람들에 대한 방화와 학살이 자행되었습니다. 더구나 해안마을로 피해온 사람들의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사라지면 '도피자 가족'이라 하여 총살하였습니다. 이러한 무분별한 학살이 주민들의 공포에 빠트려 오히려 주민들이 도피 입산하게 만들면서 수많은 주민의 희생과 사태의 장기화를 가져왔습니다. 결국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부터 1949년 3월까지 몇 달 사이에 군.경 토벌대의 진압작전과 무장대의 보복 살상으로 수만명의 인명이 희생되었고 중산간 마을 130여곳이 초토화되면서 제주공동체는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