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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공원비 1885년부터 일본인들의 도성 내 거류가 정식으로 허용되고 충무로 일대가 일본인들의 거류지역이 되었다. 1908년 서울에 거주한 일본인들은 남산 기슭 30만평을 무상 임대받아 2년 여 간의 공사 끝에 1910년 5월 29일 정식으로 공원을 개원하였다. 고종은 칙사를 보내 '한양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양공원비'는 공원의 입구를 알렸던 비석으로 앞면의 '漢陽公園'은 고종의 친필로 전한다. 166㎝의 높이로 원래는 공원의 입구 쪽인 남산 3호 터널 입구에 세워졌다가 터널 공사 때 현재의 위치로 이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석 앞에는 비석 보호용으로 보이는 사각 돌기둥 3개가 꼽혀 있다. 해방 이후 행방이 알려지지 않았던 이 비석은 2002년 케이블카 승강장 근처 철조망 안쪽 풀숲에서 발견되었는데 비석 뒷면은 정으로 쪼아놓은 듯, 인위적으로 훼손이 되어 정확한 글자를 알아볼 수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1925년 '조선신궁'에서 바라본 조선의 풍경과 당시 생활상을 담은 사진집인 「은뢰」(1937)에 비석 뒷면 사진이 공개되면서 그 내용이 대부분 해독되었다. 이 비석은 명치(明治, 메이지) 45년인 1912년 조성되었으며 전체 내용은 일본인 경성거류민단장이 쓴 평범한 '한양공원기'로 전한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아픈 과거를 품고 있는 한양공원비는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등록된 문화재다. 서울시 미래유산은 국가, 서울시지정 등록문화재로 등재되지 않은 것으로 미래 세대를 위해 보존할 가치가 있는 유·무형자산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