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page


64page

마침내 역사적인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반 삼엄한 하르빈역 머리에 천지를 뒤흔드는 정의의 총소리. 각국 대표의 환영과 군대의 호위 속에 하차한 이등박문은 단신으로 달려든 의사의 벼락같은 사격 3탄에 즉사하고 계속하여 터져나오는 제4,5,6탄에 원흉의 수행자들인 천상준연과 삼태이랑과 전중청차랑들이 모두 쓰러지자 의사의 총을 내던지고 코리아 후라를 몇번이나 외친 다음 신이여 포악한 자를 무찌르게 하시오니 감사합니다하며 유쾌히 웃으면서 노국 헌병의 손에 태연히 포박되었다. 이 통쾌한 소식이 전파를 통하여 세계 각국에 널리 퍼지자 우리와 중국인민들로서는 기뻐 뛰지않는 이가 없었는데 의사는 다시 곧 일본 헌병의 손으로 넘어가 여순감옥에서 다섯 달 동안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끝까지 굽히지 않고 만국의 자유평등을 외치는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는 한편 이듬해 2월 7일부터 14일까지 무릇 6회의 공판에서 한국의 국토 국권을 침해하고 동양의 평화를 유린한 것 등 이등박문의 열다섯 가지 큰 죄목을 들어 규탄함과 아울러 의거의 이유를 밝히는 태도야말로 늠름할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