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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 지나 27세 때 을사조약이 체결된 소식을 듣고 일본의 불법침략을 세계에 알리고자 상해로 건너갔으나 부친의 부음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부친을 여윈 의사는 집을 진남포로 옮기고 재산을 기울여 돈의학교를 세워 구국인재를 양성하기에 애쓰는 동시에 애국지사의 강연회를 열어 민심계몽에 전력을 다하다가 가슴에 끓는 피를 누를 길이 없어 29세에 해삼위로 나가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 등의 이름을 띄고서 무력에 의한 치열한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었다. 30세에는 의병 300여 명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와 경흥에서 일본 경찰과 교전하였고 50여 명을 쓰러뜨리고 회령에서는 5천여 명의 일본수비군과도 격전하였으며 31세에 노령 카리에서 결사 동지 11명과 함께 모여 손가락을 끊어 태극기에 대한독립 넉자를 혈서했었다. 그러자 이등박문이 러시아 대장 대신 꼬꼬프체프와 만나 동양정책을 협의하려고 북만주를 시찰 계획을 발표했는데 의사는 이때야말로 나라와 겨레의 원수를 갚을 때라 하고 원흉을 없애려 우덕순 동지와 함께 하르빈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