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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신사(京城神社) 터 이야기 숭의 정신이 일본 제신(祭神)을 누르다 일제는 한일합병 이전부터 일본의 국가신도를 조선에 강제하려는 정책으로 일본신을 모시는 신사를 조선 각 지역에 설립하고 조선 백성들에게 강제로 참배케 하였다. 조선 백성들의 영혼까지 일본의 신민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경성을 시내를 내려다보며 조선 지배의 꿈을 키우고자 했던 일제는 1898년 10월 조선정벌의 상징인 이곳에 서울의 일본거류민단이 일본 이세신궁(伊勢神宮)에 모셔진 신체(神體) 일부를 가지고 와서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으로 창건하였다. 1916년 5월에 경성신사(京城神社)로 개칭하였으며, 1929년 9월 서쪽 지점인 이 터에 신사를 다시 짓고 천좌식(遷座式)을 가졌다. 예전 건물은 절사(社)인 팔번궁(八幡宮)의 사전(社殿)이 되었다. 1930년 9월에는 경성부에서 1907년 10월 한국을 방문한 일본 황태자 요시히토(嘉仁: 다이쇼천황)가 갑오전역기념비(甲午戰役記念碑) 부근을 둘러본 것을 기념하는 비석(’皇太子殿下御駐駕之處‘)을 경성신사 경내에 세웠으며, 1934년에는 일본의 전쟁영웅 내목장군을 기념하는 내목신사(乃木神社)도 건립되었다. 1936년 8월 1일 조선총독부가 관리비용 일체를 부담하는 국폐소사로 격상되었고 절사로 팔번궁(八幡宮)과 천만궁(天滿宮)·도하사(稻荷社)가 있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경성신사는 일부 해체되었으며 경성신사의 철거지에는 일시적으로 단군성조묘(檀君聖祖廟)가 세워지기도 했었다. 1953년 숭의가 창립 50주년이 되던 해, 현재 명동역 부근의 송죽원에서 다시 재건된 숭의는 1954년 군경자녀원으로부터 양도증을 받아 그해 6월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당시 신사경내에는 7, 8개의 신사건물들이 남아있었는데 그 건물들은 임시로 각각 교무실, 음악실, 서무실, 교장실로 사용했다. 그 중에서도 일제가 가장 중요시 여겼던 신전건물은 교무실로 사용하기로 하고 아침조회시간 마다 태극기를 걸었다. 그 신전자리가 바로 이 자리이다. 1938년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자진 폐교하였던 숭의. 일본의 신사참배에 대한 강요와 협박, 지시와 명령이 반복되었지만 숭의는 본래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일제와 맞서 강력히 싸웠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학교는 존재의 의미가 없으며, 신사참배는 우상 숭배이니 결단코 할 수 없다는 것이 숭의의 뜻이었다. 이러한 소신은 "죽음으로 살리라"(요한복음 12:4, 고린도전서 15:31)라는 성경 말씀에 따라 폐교를 감행함으로써 영원히 하는 순절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신사참배로 인한 자진폐교, 일본이 경성의 심장부에 만들었던 경성신사 자리에 보란 듯이 신사건물을 직접 허물고 그 곳에 재건한 숭의. 결국 숭의를 생각했던 하나님의 사랑이 일본 제신(祭神)을 누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