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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11월30일 토요일 8 (제155호) 관향조 종친회·충주 박씨 충주박씨 호서지방의 문호를 연 참의 공(휘 풂)의 기해년 시향이 지난 달 28 일 오전 11시 묘소가 있는 대전 서구 도 마동에서있었다. 이날 제향은 추원사에 배향된 관조인 고려부정(高麗副正) 박영(朴英)을 비 롯 참 의 공 휘 진 ( 풂)의 아버지인 의랑공 (議郞公) 휘 광리(光理)까지 八世 先祖 의 제향을 모신 후 장소를 묘역으로 이 동하여 철기(鐵基) 집례관의 집전으로 상기(上基) 현종이 초헌관으로 헌작하 고 이어 상호(商鎬),상구(常求)현종이 아헌과종헌으로각각헌작하였으며,축 은 우선(愚善)현종이 맡아 독축하고 우 천(愚天) 원로고문이 직일(直日)을 맡 아제례를관장하였다. 참의공이 현 대전 도마동에 입향한지 는 600여년이 지난 일이다.고려 말 사헌 부감찰을 거쳐 진해 직산 감무를 지냈던 참의공께서 은산군사를 역임한 동생 판 서공(휘 蘇)와 함께 어지러움을 피하여 충청도덕진현가장골(현대전광역시서 구도마동)로은거하여살게된것이다. 참의공의 휘는 진( 풂), 관 조 휘 영 (英)의 9세(世)로 개성소윤을 역임하고 사복시정에 증직된 휘 광리(光理)와 합 천이씨(陜川李氏)의 아들 삼형제중 둘 째로 1366년(공민왕 丙午)에 태어났다. 진사(進士)가 되어 나라가 어지러짐 을 알고 공명의 뜻을 버리고 덕진현 유 성리에 은거(隱居)하여 후학을 가르치 며 여생을 유유자적(悠悠自適)하다 조 선조에이르러사헌부감찰에제수되고, 이어 진해·직산감무가 되어 많은 치적 을 남기고 1422년(세종 4, 壬寅)년에 하 세하니 향년 57세로 손자 형무(衡武)의 귀(貴)로 인하여 병조참의(兵曹參議) 에 추증되었으며, 본리(本里) 도솔봉 (兜率峯) 아래 신좌원(辛坐原)에 예장 (禮葬)되고, 참의공파(參議公派)의 문 호를열었다. 부인 보안임씨(保安林氏)와의 사이 에 아들 넷을 두었으니 효함(孝誠)충함 (忠誠) 제함(悌誠) 신함(信誠)으로 문 중은 크게 번성하였다. 동생 소(蘇)는 인흥(仁興), 례흥(禮興), 신흥(信興), 지흥(智興), 신흥(信興) 등 5형제를 두 고 이 들 이름을 효제충 신과 오상(五常)의 근 본이 되는 인의예지신 으로 하여 가문의 내역 을 엿 볼 수 있 으 며 , 忠 孝를 傳해가고 敦睦을 지켜가자는 뜻의 가전 충효 세수돈목(家傳忠 孝 世守敦睦)의 여덟 자 가훈(家訓)은 깊이 새겨 간직할 만한 하다. 한편 이날 참의공 제향 직전에는 영모 재 뒤 편 추 원 사 의 위 패 는 西 에 서 東 으 로 부정공(副正公), 장군공(將軍公) 휘 신 (臣), 우사공(右使公) 휘 원숭(元崇), 평리공(評理公) 휘 득승(得升), 판원사 공(判院事公) 휘 덕린(德麟), 상서공 (尙書公) 휘 지성(之誠), 첨의공(僉議 公) 휘 세량(世梁), 의랑공(議郞公) 휘 광리(光理)순으로봉안되어있다. 충주박씨영모재·참의공시향봉 행 추원사와묘역에서후손100여명참례븣추원보본의정성다해 충주박씨영모재전경-대전광역시서구배재로197번길56 참의공묘제광경 성품이 청렴 강직하고 청백함으로 명 성을 떨쳤던 충주박씨 강릉공(휘 효함) 의 시향이 지난 29일 대전 대덕구 삼정 동 묘역에서 강릉공파종친회(회장 우 숙)주관으로봉행되었다. 강릉공은 대전에 문호를 연 참의공의 장남으로 휘는 효함(孝誠),호는 청간재 (廳澗齋)로 성품이 청렴 강직하여 처음 근위병(近衛兵)으로 명성을 날렸고, 해 풍 고 을 을 관 장 함 에 정 사 를 모 두 으 뜸 으로 펼치고,녹봉(祿俸)외에는 취하지 않으니 청백함이 명성을 떨쳤다. 특히 세종 경술년(1430) 가을 보령에 해구 (海寇)가 침입하여 걱정거리임에도 적 임자가 없었으나 청백함으로 선발되어 부임즉시 순찰사 최윤덕과 감사 박안신 으 로 더 불 어 함 께 성 동 쪽 일 리 ( 一 里 ) 지점 당산(唐山)남쪽을 살펴 면밀한 계 획으로 몇 달 되지 않아 축성을 마치니 백성이 별로 힘들이지 않고 도적이 자취 를 감 췄 다 . 얼 마 되 지 않 아 첨 추 (僉 樞 ) 가 되었고 또 얼마 후 나아가서 강릉대 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가 되었다. 이에강릉공파로세계를이룬다. 강릉공은 아들 원직(原直)과 원창(原 昌)을 두었으며, 차남 원창은 우리나라 족보사상 처음으로 수보한 성화보를 조 선 성종 5년(1474) 수보하였으며, 성화 보는 대전시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 되었다. 강릉공 묘소 앞에 세워진 신도비는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45년 간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의 여섯 임금을 모셨으며 신흥왕조의 기틀 을 잡고 문풍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 했던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지 었다. 비의 전면 대자는 ‘有名朝鮮 嘉善 大 夫 行 江 陵 都 護 府 使 贈 吏 曹 參 判 忠 州 朴公孝咸神道碑銘幷字’라고 새겨져 있 으며 대전시 비지정문화재로 등록되어 있 으 며 충 주 호 둘 레 길 에 자 리 하 고 있 어 뭇사람들의발길을잡는다. 장남 원직은 사헌부 감찰과 사복시 주 부를 거쳐 영동현감으로 영동에 출수하 여 크게 치적이 있어 그 사적이 영동읍 지에 실려 있으며, 아들 도( 떳), 인(湮), 규(圭), 지(址)를 두었으며, 차남 원창 (原昌)은 아들 훈(壎),서(墅)를 두면서 크게번성하였고,충북영동을중심으로 큰집성촌을이루고있다. 종중에서 후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 기 위한 서당으로 흥학당(興學堂, 충북 유형문화재 제152호)을 지어 이곳에서 많은 인재를 배출하는 등 많은 유적 또 한 산 재 해 있 다 . 한편 이날 제향에는 우숙(愚淑) 회장 이 직일을 맡아 제향을 관장(管掌)하였 고, 초헌관 우천(愚天), 아헌관 성근(性 根), 종헌관 동기(東基), 대축 기원(基 原), 집례 희진(熙振), 좌집사 한식, 우 집사 명기(明基), 진설 중노(中老), 산 신제관 계원(啓遠),축관 재원(在原)현 종이 각각 맡아 소임을 다해 제례가 더 욱돋보였다. 청백함의명성떨쳤던강릉공(휘효함)시 향봉행 선조의청렴하고투철한애민사상을본받으려는정성가득 강릉공묘역전경-왼쪽의신도비가대전시비지정문화재로 등록되어있으며충주호둘레길에자리 하고있어뭇사람들의발길을잡는다. 제례후참석한 종인들이 기념촬영을하고있다. 강직한 성품과 청백리로 유명한 눌재 박상(訥齋 朴祥, 1474~1530) 선생의 재 사(齋舍·丙舍)가창건100년만에새롭게 중건되어그웅장한자태가드러났다. 봉산재(鳳山齋)는1919년창건되었는 데 창 건 당 시 다 른 곳 의 집 을 옮 겨 세 웠 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00년의 세월은 이를 지켜내지 못해 2016년 총회에서 결 의하여 경계복원측량과 함께 이사 전원 이 나주, 화순, 장흥 등의 선진지 답사를 통해 설계에 반영하고 지난 4월 25일 기 공식을갖고첫삽을떴다.5월15일상량 식에 이어 7월 본체와 대문을 완공하고 마당과 담장을 축조하여 지난 11월 1일 오전11시낙성식을갖게되었다. 재호(齋號)를 봉산재라 함은 뒷산이 름이 봉황산으로 눌재선생을 봉산거사 라 하여 봉산재이고, 퇴계선생은 눌재 선생을 원우의 완인 이라 했으며 절의 를 완성했다는 뜻으로 대문을 완절문 (完節門)이라 하였으며, 중건기는 고당 김충호, 상량문은 노강 박래호, 주련글 은 원파 박수섭 선생이 각각 짓고 취석 박원해선생이뙣다. 이날 낙성식에는 천정배 국회의원을 비롯 서대석 광주서구청장과 각급 단체 장, 박성수 광주전남 연구원장을 비롯 한 학계인사와 충주박씨 중앙종친회 우 숙 공사원(강릉공파 회장)을 비롯한 종 중 임원진등 150여명이 참석 준공을 축 하했다. 박종률 문간공파종중회장은 이날 인사말을 통해 삼복더위 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땀 흘려 봉사한 덕분에 완공하게 되어 이들 모두에게 감사에 인사를 드린다고 말하 고 “눌재집에 면앙정 송순이 정만종에게 쓴 글에서 눌재 선생 의 경의사상에 대한 가르침을 治心以敬(치심이경) 하고 處事 以義(처사이의)라 했습니다. 즉, 매사에 마음을 경으로 다스 리고 일을 의로 대처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곧게 새워 나태 함을 경계하고, 일을 행할 때는 방정하게하고 사욕을 경계하 라는것입니다.오늘을사는우리들도눌재선생의경의사상을 본받아올바른삶을살아가야하겠습니다.”라고하였다. 천정배국회의원은눌재선생은광주뿐만 아니라나라의스 승이라 생각한다고 말하고 사간원 헌납으로 재직 시 종친들 의 중용을 반대하다 하옥 된 적도 있다며 현세의 정치인들이 배워야할 덕목이라고 강조하고 선생의 사상을 본받아 갈 것 을다짐했다. 이어서대석광주서구청장,박성수광주·전남 연구원장,박 우숙 충주박씨 강릉공파 회장의 축사가 이어진 가운데 서대 석 구청장은 봉산재와 절골을 의(義)와예(禮)가 잘접합되는 공간으로 활성화 할 것이라고 밝혔으며, 박우숙 회장은 충주 인 모두의 자랑이라며 낙성 을축하했다. 한편 이날 낙성식에서 박 종률 회장은 김양수 대목장 과 감독을 맡은 박화조 이사 에게 감사패와 공로패를 전 달하며 고마움을 표했으며, 박화조이사는경과보고에서 지대한 관심과 열의를 보여준 하원 전 회장이 준공식을 보지 못하고 저 하늘의 별이 되어 떠나가심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며지난달20일타개한고인을추모했다. 눌재 선생은 광주광역시 서구 방하동에서 부친 지흥(智興) 과 어머니 계성서씨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났다. 눌재의 형은 하 촌 공 휘 정 (禎 ) 이 고 동 생 은 육 봉 공 휘 우 (祐 )이 다 . 삼 형 제 모두 문장이 뛰어나 중국의 삼소[三蘇, 송나라때 소순(蘇洵) 과그의 아들소식(蘇軾)·소철(蘇轍)]에 비견하여 ‘동국삼박 (東國三朴)이라 칭한다.28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 가 56세까지 공직자로서 책무를 다했다. 전라 도사를 역임하 던 중에 그 딸이 연산군의 궁인이 되자 온작 횡포를 자행하던 우부리(牛夫里)를 처단한 일, 사간원 헌납직에서 외척 중용 을 반대한 일, 담양부사 시절 춘창군수 김정과 함께 신비복위 상소를 올린 일 등으로 옥고를 치르거나 유배당했으며, 담양 부사와충주목사로재임시청백리로두번이나뽑혔다. 1200여 수의 시(詩)와 부(賦)가 담긴 문집 ‘눌재집’과 역사 서 ‘동국사략(東國史略)’등을 남겼으며, 1795년(정조19) 부 조(不?)의 명이 내려졌다. 1843년에 송호영당에 제사지냈고, 1859년에신도비를세웠다. /박상섭 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충주박씨봉산재중건낙성식븮落成式븯가져 창건100년븣2016년총회결의후3년여완공 새롭게웅장한 모습으로 선보인봉산재전경 박종률 회장이 인사말 을 하 고 있다. 박우숙 회장이 축사를 하고있다. 경과보고를 하고 있는 박화조이사 지난 12일 눌재선생의 시향을 준공된 재실에서 올리고 종원들이 함께하 고있다. 내부 제향광경 븮松筠節操水月精神,송균절조 수월정 신븯 선조임금이 사암선생을 두고 한 말 이다. 소나무와 대나무의 곧은 절조에 맑은 물과 밝은 달 같은 깨끗한 정신의 소유자라는 뜻으로 한 신하에게 바치는 찬사로는 대단한 내용이다.그만큼 지절 이 높았고 깨끗한 마음의 소유자였다는 뜻이다. 이처럼 조선의 명재상이었던 사암 박 순 선생의 추모제향이 지난 달 30일 오 전11시 외손인 전주이씨 참봉공 후손들 에 의해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 묘소에서 방계후손인 충주박씨 문간공 임원진들이 대거 참례한가운데 엄숙 봉 행되었다. 사암 박순(思庵 朴淳,1523~1589) 선 생은 명종 8년(1553)에 친시문과(親試 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한 이래 관도(官 途)에 올라 선조 5년(1572)부터 전후 14 년 동안이나 정승(政丞)을 지낸 우리 역 사 에 서 잊 을 수 없 는 대 재 상 (大 宰 相 )이 다. 사암선생은 숙부 눌재공(訥齋公)에 서 친부(親父)육봉공(六峯公,휘 우)으 로 이어지는 강직 근엄한 가풍(家風)을 계승했다. 명종 말년에 외척(外戚)으로 영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횡포(橫暴)가 이루 말 할 수 없었던 윤원형을 사암선생은 생명 의 위험을 무릅쓰고 장문의 장계(狀啓) 를 올려 탄핵하였고, 그 일이 발단이 되 어 윤원형은 마침내 권좌(權座)에서 밀 려나가기에이르렀다. 숙부인 눌재공이 ‘신비복위소(愼妃復 位疏)’를 올려 훈구파(勳舊派)의 포학 무도(暴虐無道)함을 성토한 일을 연상 (聯想)하게한다. 선조조에는 현능(賢能)한 인재를 조 정에 추거(推擧)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와 우계 성혼(牛 溪 成渾)은 선생이 추거한 인물들이고 율곡과는 특히 의기가 투합(投合)하여 국정을 바로 이끌어가기 위해 흉금(胸 襟)을 털어 놓고 숙의(熟議)하기도 하 였다.퇴계 이황(退溪 李滉)은 선생에게 는 장배(長輩)였으나 조정에서는 동열 (同列)이었다. 선생은 퇴계의 학덕(學 德 )을 존 경 하 여 겸 허 하 게 문 진 (問 津 ) 하 기를서슴치않았다. 선조 초년에 선생이 양관대제학에 있 을 때 자신보다 학문도 뛰어나고 연륜이 높은 이황을 자신의 아래(提學)에 둔다 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 어 문형(文衡)을 퇴계에게 이수(移授) 할 것을 청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져 한 때 문형이 퇴계에게로 옮겨졌다. 그 후 이일은미담으로전해지게되었다. 당대의 제일 인물로 이조와 예조판서 를 거쳐 양관대제학과 우의정 좌의정 영 의정을 지내면서 청백리로 이름을 떨치 고 시단의 종주, 당나라 풍의 시를 복원 한 시인으로 문학과 학 문에 깊은 조예까 지 인정받아 임금은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내렸다. 그러나 아쉽게도 후사(後嗣)가 없어 외손인 전주이씨 문중에서 향화를 받들 어 오다 몇해전부터 방계후손들이 격년 제로 시향을 받들고 있어 이번 시향은 초헌관이경훈,아헌관박종율문간공종 중 회장, 종헌관 이종복, 축관 이종우 씨 가맡았다. 전주이씨 참봉공(휘 택)은 박순 선생 의 외손자로 양녕대군의 후예이다.북부 참봉선교랑이다. /박진수명예기자(경기도포천시지부) 조선의명재상사암박순선생시향 봉행 전주이씨참봉공종중외손봉사븣방후손문간공후손참례 사암 박순선생묘-포천시향토유적제47호.지난 가을외손과 후손들에의해재정비되었다. 문간공종중박종률 회장이 아헌관으로 헌작하고있다. 이날 제향은전주이씨종중의가례(家禮)에 따라봉행되었으며,포천시문화관광과 직원들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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