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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11월30일 토요일 2 (제155호) 기 획 혜공왕의 죽음으로 시작된 신라 하대 200년은 고난과 실패, 좌절과 반란, 실정과 폐행(嬖行)의 연속이었다. 왕 들은 서로 다투고 죽이며 권력에 탐닉했고 나라를 혼돈 (混沌)으로 몰고 갔다. 애장왕이 헌덕왕의 칼을 맞아 죽 었고희강왕이민애왕의겁박에자진했다.민애왕은다시 신무왕의 칼에 죽었다.그 사이 일어난 반란만 십여 차례, 권력에눈먼골육상쟁이대부분을차지했다. 죽어 용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혼백도 병든 하대(下代)왕들의영혼과정신을일깨울수없었다. 경애왕 즉위 이전 50년간, 마흔을 넘긴 임금이 없었다. 경문왕이 서른다섯에 죽었고 헌강왕과 정강왕, 진성여 왕, 효공왕이 모두 이십대 후반에 죽었다. 그들은 어렸거 나 단명하여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시간을 얻지 못했다. 진흥왕과무열왕의광영은흔적없이증발했다. 모든 어지러움이 한꺼번에 밀어닥쳤다.나라 안의강토 가 난 리 를 만 나 니 겁 회 (劫 灰 )를 보 는 것 같 이 되 었 다 . 내던 져진해골이풀더미마냥쌓였다.창해滄海의횡류(橫流) 는 날로 심하고 곤강 昆岡의불길은 바람같이 거세다.(최 치원,븮양위표讓位表븯, 븮동문선븯권43,표전) 나라에 흉년이 드니 좀도둑이 사방에서 일어났다.…형 세를 타고 벌떼가 날 듯 성을 파괴하고 고을을 압박했다. 자욱한연기와티끌이국경을둘러싸바람과비마저제철 을잃었다.…어찌하늘의재앙이신라에만흘러들었다탓 하랴.(최치원,븮사사위표謝嗣位表븯븮동문선븯권33표전) 하늘의 재앙이 어김없이 나라를 뒤덮었다.백성들은 금 수보다 못한 삶에 시달렸다. 흉년마저 겹쳐 좀도둑이 사 방에서 일어났다. 민심이 돌아서 왕에게 저항했다. 초적 (草賊)은해인사도공격했다. 지금 온갖 재앙이 신라 천지를 지금 뒤덮고 있다. 신라 의모든고을은이제도적의소굴이되었고모든산천은전 쟁터가 되었다.또 들판에는 내팽개쳐진 시체가 밤하늘의 별들처럼흩어져있다.(최치원,븮해인사묘길상탑지븯) 나라는 뿌리부터 죽어갔다.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진 나 라는 이윽고 고려, 백제, 신라라는 후삼국으로 나뉘어져 솥발처럼 정립했다. 한번 부정당한 왕권은 영영 백성의 마음속에서회복되지않았다.신라의영광은부르고소리 쳐도 닿지 않을 시간 너머, 아련한 기억의 저편에 어렴풋 이 존재했다. 경애왕은 불행한 하늘과 땅을 마주하고 태 어난왕이었다. 박혁거세가 6촌장의 지지를 얻어 개국한 이래 신라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오래 존속한, 우리의 원형질을 형성 한 왕조였다. 하지만 신라 왕조의 마지막 부분은 베일에 가려져뭔가확연하지못하다.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술잔치를 벌이다가 예상치 못한 견훤의 침입을 받아 죽었다는 대목에선 특히 그렇다. 당 시는 후삼국 세력이 치열한 각축을 벌이던 와중이었다. 견훤의 예리한 칼날은 경애왕을 겨냥하고 있었고, 경애 왕은왕건에게연식을보내급거구원을요청하기까지했 었다. 생사의 기로에서 한없이 불면의 밤을 보냈어야 할 경애왕이, 목전의 위기에 아랑곳하기는커녕 주흥과 잔치 를 벌였다는 전승은 충격적이며 해괴하기 이를 데 없는 이율배반이 아닐 수 없다. 왜, 어디서부터, 무엇이, 어떻 게잘못된것일까. 927년 포석정 사건의 우중충한 표면을 걷어내고 이면 에 잠복되고 말살된 내막을 핍진(逼眞)하게 복원할 수는 없을까. 그간 필자는 숨겨진 역사의 회랑을 거꾸로 달려, 신라왕조의마지막멸망과정을추적하는가없는장정에 나섰다. 지난 3년 간 븮한빛신문븯지면을 채운 포석정 사건 이일어났다는정해년(丁亥年),을전후한내용은그를위 한흔적이었다. 신라 멸망을 전하는 기록들은 하나같이 괴이하다.현존 최고인븮삼국사기븯의서술을보자. ① 신라는 불가의법을 받들고, 그 폐해를 깨닫지 못하 였으며, 심지어 마을에도 탑과 절간이 늘어서고, 백성들 이사찰로도피하여승려가되었으니,군사와농사지을사 람이 점점 줄어들고, 나라는 날로 쇠퇴하게 되었으니, 어 찌 나라가 문란하지 않고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겠는가? 이때에이르러서경애왕은더욱황음하게되어,궁인과근 신을데리고포석정에나가놀면서술을마시며연회를하 다가 견훤이 오는 줄을 알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문 밖에 한금호가 온것을모른 것이나,누각 위에서 장여화를 데 리고놀다가화를당하였던것과다름이없었다. ②경순왕이 태조에게 귀순한 것은 비록 부득이한 일이 기는 하지만 또한 가상한 일이었다. 그 당시에 만약 목숨 을 걸고 태조의군사와 싸워서, 힘이 다하고 형세가 곤궁 하여졌다면,필히그의일족은멸망하고,무고한백성들에 게도 해가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나라의창고를 봉하고,군현을 기록하여태조에게 귀의하 였으니,그가고려에세운공로와백성들에게입힌은덕이 매우 크다 할 것이다.옛날 전씨가 오와 월의국토를 송나 라에 바친 것을 두고, 소자첨은 그를 충신이라고 하였으 니, 지금 신라의공덕은 그보다도 훨씬 더 훌륭한 것이다. 우리태조는비빈이많았고,그의자손들역시번창하였는 데도, 현종은 신라의 외손으로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그를 계승한 자들이 모두 그의 자손이었으니, 어찌 위와 같은 음덕의보답이 아니겠는가.(븮삼국사기븯 권12 신라본 기12경순왕9년조사론) 김부의 매국에 철저히 미화 일색이다.그러하니 매국에 이르게 된 책임은 경애왕에게 돌려졌다. 한 예로 경애왕 은 주흥에 빠져 적침(敵侵)의 사실조차 몰랐다고 한다. 견훤이고울부에서경애왕목숨을노린상황에서이런서 술은사실일리없다. 왕건은 태봉의 신하로서 주군으로 섬겼던 궁예의 등에 칼을 꽂으며 반역을 꾀했다. 또 존왕의 명분을 내세우더 니서라벌사직을무너뜨렸다.왕건에게선배신으로점철 된역사를뚜렷이읽어낼수있다. 견훤의후광으로왕위에올랐던김부는,승세가왕건에 게 기울자 왕건에게 돌아섰다. 왕건이 궁예를 거세한 것 처럼, 김부 역시 자국의 왕이던 경애왕을 배신하여 신하 의의리를저버리기도했다. 김부나 왕건의 배신은 우연적이거나 일회성이 아니며 반복적이고 연속적이다. 두 배신자는 혼인으로 결합하여 고려 왕실의 주류를 형성했다. 경애왕에 대해 말할 때마 다 인용되는 고려시대의 기록은 왕건이 죽고 난 뒤 그 뒤 를 이은 왕들과, 왕권과 밀접히 관련이 있는 사가들에 의 해 채록된 것들이다. 따라서 왕건과 왕건에게 귀부한 김 부의 행위에 최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으며, 이렇게 그들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한, 경애왕이나 기타 의 인물과 사건은 왜곡이 불가피하다. 이 점에서 적어도 경애왕에 관한 한, 고려 기록은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여 부를곰곰이되새겨볼필요가절실하다. 왕건의 인물됨을 다시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은연 중 경애왕의 도움을 입었다. 축산을 공략할 때도, 고창에 서 전세를 뒤집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운이 좋은 것 인지, 아니면 운을 좋게 만들었는지를 떠나, 어쨌든 그는 경애왕으로말미암아숱한반사이익을챙겼다.그는자신 의 힘과 지혜로 통일을 이뤘다기보다, 경애왕의 덕분에 견훤을 제치고 통일할 수 있었다는 생각마저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김부와 결합하면서 경애왕을 신원할 통로 를 원천적으로 차단한 장본인이 되었다. 왕건은 죽은 자 와의 의리보다 산자와의 실리를 우선해 챙겼다. 발해 멸 망 과정에서 보듯 그는 항상 실리를 우선했을 뿐, 민족과 의리를 중히 여기지 않았다. 고려가 발해에 관한 단 한권 의 역사서를 남기지 않은 것이나, 경애왕에 대한 왕건의 추념을 담은 글귀 하나조차 없다는 것, 압록강을 넘어 북 진의 발걸음을 꾀하지 않았음에서 대륙의 영원한 상실 등,모든책임에서왕건은결코자유로울수없다. 븮삼국사기븯를 감수한 김부식은 과연 객관적 인물일까. 그의 전력을 추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김부식은 정지상 (鄭知常)과 함께 문장으로 명성(名聲)이 비등했다. 그러 나 항상 정지상에 비해 낮은 평가를 받았었다 (지금도 송 군(送君)이란 시를 위시하여 정지상의 주옥같은 시구는 사람들의심금을애잔하게울린다). 내심 이에 불평을 품고 있던 중 묘청이 난을 일으키자 김부식은 정지상이 묘청과 내응(內應)했다는 애매한 죄 목을 뒤집어 씌워(단지 같은 고향이었다) 죽여 버렸다. 김부식의학문적열등감이타인에대한합법적핍박과살 인에이른경우였다. 김부식은 공명심도 남달랐다. 예전 윤관(별무반을 만 들어 여진을 토벌한 명장)이 임금의 조서를 받들어 대각 국사 비문을 지었다.내용이 공교(工巧)하지 못하거늘 의 천의 문도(門徒)가 비밀히 임금에게 아뢰어 김부식(富 軾 ) 을 시 켜 고 쳐 짓 게 했 다 . 때 에 윤 관 이 상 부 ( 相 府 )에 있 었으나 김부식이 사양하지 않고 드디어 지었다. 하늘을 찌르는섣부른자부심과공명심이 빚은결과였다.김부식 의 아들 김돈중은 늙은 장군 정중부의 수염을 태워 무신 정변의원인을제공하기도했다.상대를인정하지못하고 철저히 깔아뭉개고 짓밟는 부자(父子)의 속성이 결국 문 벌귀족의 붕괴로 이어진 도화선이 되었다는 것은 눈여겨 볼사실이다. 윤관의 아들 윤언이가 인종 때에 기거랑(起居郞),국자 사업(國子司業)에 있었다. 왕이 국자감(國子監)에 행차 하여 김부식에게역(易)을 강론케 하고윤언이를 묻고논 란케 했다.언이가 역(易)에 매우 정(精)하여 종(縱)으로 횡(橫)으로 변론(辨論)하고 힐문하니 부식이 대답하기 어려워 땀이 흘러 얼굴을 비 오듯 적셨다.이로 인해 원한 을품었던김부식은묘청의난이일어나자윤언이가정지 상과연루되었다며탄핵했다. 윤언이의 무고함은 뒷날 장문의 편지에서 밝혀지거니 와김부식의성정에비추어그가과연털끝만큼의죄라도 있었다면살아남지못했을것이다.이처럼김부식은음험 하고 비열했다. 나라의 일에 개인적 원한을 대입하려 기 도했었고,실제그렇게도했다. 묘청의 난은 1135년,븮삼국사기븯의 완성은 1145년,김부 식이 감수 작업을 맡은 것은 그에 대한 왕의 배려였다.김 부식은 권력의 최측근을 형성하며 그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럴수록 김부식이 왕건의 혈통을 이은 왕실의 정당화, 또 자신의 조상인 김부의 정치적 입장의 옹호 등 을 충분히 고려했을 가능성이 크다.그가 직접 자언한 바, ‘고려 왕실은 신라 왕실의 외손이다’란 대목이 명징한 예 라 할 것이다. 븮삼국사기븯의 편제에서 고구려나 백제보다 신라를 앞에 놓은 것, 갑자년을 택해 신라 기년을 설정한 것 등 그의 역사 왜곡과 누락, 삭제, 조작 등은 왕왕 포착 된다. 이러한 생각은 븮삼국유사븯를 통해 더욱 굳어진다. 주지 하듯 이 책은 승려였던 일연이 개인적으로 편찬한 책이 다.주내용은불교 관련 설화등을 포함한다.아무튼책의 편찬목적은불국토에대한찬양이며미화이다. 그런데 븮삼국유사븯三國遺事 김부대왕 편 끝의 사론에 는 븮삼국사기븯경순왕 9년조 사론을 거의 그대로 전재하고 있다. ⑤史論曰 中略 신라는 불가의 법을 받들고, 그 폐해를 깨닫지 못하였으며, 심지어 마을에도 탑과 절간이 늘어 서고, 백성들이 사찰로 도피하여 승려가 되었으니, 군사 와 농사지을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나라는 날로 쇠퇴하 게 되었으니, 어찌 나라가 문란하지 않고 멸망하지 않기 를 바라겠는가? 이때에 이르러서 경애왕은 더욱 황음하 게 되 어 , 궁인 과 근 신 을 데 리 고 포 석 정 에 나 가 놀 면 서 술 을마시며연회를하다가견훤이오는줄을알지못하였으 니, 이것이 문 밖에 한 금호가 온 것을 모른 것이나, 누각 위에서장여화를데리고놀다가화를당하였던것과다름 이없었다. ⑥경순왕이 태조에게 귀순한 것은 비록 부득이한 일이 기는 하지만 또한 가상한 일이었다.그 당시에 만약 목숨 을 걸고 태조의군사와 싸워서, 힘이 다하고 형세가 곤궁 하여졌다면, 필히 그의 일족은 멸망하고, 무고한 백성들 에게도 해가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명령을 기다리지 않 고, 나라의창고를 봉하고, 군현을 기록하여태조에게 귀 의하였으니, 그가 고려에 세운 공로와 백성들에게 입힌 은덕이매우크다할것이다.(븮三國史記븯신라본기12경순 왕9년사론을전재한븮三國遺事븯김부대왕조말미史論) 위 사론의 논점은 1)불교의 폐단, 2)경애왕 실정을 신 라 멸망 원인으로 규정하고, 김부의 귀부는 애민의 발로 라 극찬하고 있다.(⑤) 여기서 신라 멸망 원인이 불교의 폐해라 한 부분을, 일연이 그대로 전재해 수록했다는 것 은도저히납득할수없다. 잘 아 는 바 와 같 이 일 연 은 몽 고 의 말 발 굽 이 강 토 를 지 배하던시절어엿한민족정신의발흥에서이책을집필하 였다고알려진다.일연의비문에나온그의주저100선 목 록에는 븮삼국유사븯가 없다. 하지만 나머지 저작이 오리무 중인 지금 븮삼국유사븯는 그 함축하는 의의가 크다. 고구 려,백제,신라의 야승을 기록한 것은 물론 고조선의 단군 신화를 권두에 수록하여 항쟁정신과 민족자존을 드높였 다. 정사인 븮삼국사기븯가 있음에도 일연이 이 책을 새삼 저 술한것은김부식등이빠뜨리거나삭제하는등의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으려는 의도가 다분했다고 추단된다. 그리 고 그 내용의 핵심은 불교의 전파, 사탑의 건조, 승려의 행적, 백성의 신심 등 불교 관계 기사가 상세히 설명되어 있는등불적의미화를염두에두고있었다. 불교수용을 기준해 븮삼국사기븯에서 신라 상대로 구분 되던 시기를 상븡중고로 세분했다. 이는 그만큼 불교수용 을 중시했던 까닭에 말미암은 것이다. 븮삼국유사븯의 집필 목적을 알게 하는 자료들을 몇 가지 추려보면, 차례에서 부터 그러한 점이 확인된다.1장의 왕력,2장의 기이에 이 어 흥법, 탑상, 의해, 신주 감통 등 불교 관련 항목 일색이 다.불교를 극찬하고 미화한 내용 몇 가지를 또 다른 예로 들어보자. ▶다른 지방의보살이 세상에 출현하고 서역의이름난 중들이 이 땅에 오니, 이로 하여삼한이 합하여한 나라가 되고사해가합하여한집이되었다.(븮삼국유사븯권3 원종흥 법염촉순교) ▶탑을 세우고 나니 천지가 형통하고 삼한이 통일되었 으니, 어찌 탑의영감이 아니겠는가. (븮삼국유사븯권3 황룡 사구층탑) ▶대체로 불교가 동방으로 전해올 때 그 앞길이 양양했 으니경사로운일이다.(븮삼국유사븯권3전후소장사리) 일연은 일생 신앙심을 간직한 경건한 승려였다. 그런 일연이 불교를 공격하는 유학자의 사론을 무비판적으로 전재했다는 것은 븮삼국유사븯의 집필 목적이나 수록된 나 머지내용과는완전히상치된다.이런맥락에서자연스런 의문이 생기게 된다. 근본으로 돌아가, 일연이 승려로서 의 본분을 망각한 채, 무슨 의도로 이같이 폐불(廢佛)을 강조한사론을전재한것일까. 일연의 행동은 수백 년에 걸쳐 내려온 거부할 수 없는 고려의 전통,김부나 신라 왕실이 장악해 온 힘의 논리 속 에서, 진실을 앞에 두고서도 차마 밝히진 못했던 한 유약 한 학승이자 노승의,처절한 몸부림은 아니었을까?한 인 간의 의식이 깨어있다 한들 300여년 너머 내려온 거대한 흐름을거부할수는없다. 고려왕의 각별한 총애와 녹을먹고평생 고려인으로살 아온 일연 자신이었음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이 경우 진실과 불의의 기로에서 무력한 한 개인의 고뇌에 찬 현 실도피는 어떤 방향으로 표출되었을까? 적어도 븮삼국유 사븯에서 최소한의 우회적인 저항을 피력한 것은 아니었 을까? 이와 관련해 일연이 ‘경순왕’ 대신 굳이 ‘김부 대왕’을 사용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 이면 김부에 대해 신라왕의 정통성을 인정하기 힘든 항변의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 까. 또 경애왕 및 포석정과 관련한 븮三國史記븯 경애왕 4년 조의 내용이 거의 원형을 유지한 채 경애왕 편이 아닌,김 부 편에 들어가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경애왕의 죽 음이김부와관련이있음을우회적으로밝히려한피력이 나 개진은 아닐까. 경애왕과 김부에 관한한, 일연의 행위 는 여 러 의 문 점 을 남 긴 다 . 고려의 승려일연은고려에귀부한김부를중심으로하 는 거대한 왜곡 구조에 직면해 이 체제와 전재라는 극적 인 표출을 통해 자신의 반의(反意)를 전달하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그렇지않다면일연의행위는도저히해석되 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기록이 빠뜨린 진실은 과연 무엇 일까에 관해 곰곰이 생각해야 할 때에 마침내 이르렀다. 거룩한분노는거룩한생각에서만나온다. 경애왕은 혼돈의 시대에 태어나 국기(國基)의 진작에 진력한 왕이라 일컬을 수 있겠다. 자존심을 버리고 왕건 에게까지사행을보냈다.중국에의험로도마다하지않았 다. 하지만 무력한 현실 속에서 경애왕은 생애 내내 걷잡 을 수 없는 서글픈 심경에 파묻혔고, 무력감. 피로감, 억 울함. 심장에 깃들어 있던 무어라 형언할 수 없이 성스러 운 것이, 날아가 어디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음을 깨 달아야했다. 그가 치열하게 추구했던 이상, 이념은 이제 자신의 가 슴 속에서만 살고 있음을 자각해야 했다. 의문의 여지없 이, 그의 삶은 비극이었다. 그의 인생은 헛되이 흘러갔던 것으로일견비치기도한다. 평 생 동 안 시 대 와 불 화 했 지 만 온 힘 을 다 해 시 대 와 맞 서 싸운 사람.좌절하면서도 꿈꿀 수밖에 없는 인생을 그 는 오롯이 살다 갔다. 아득히 먼 길을 따라, 괴로운 일도, 슬픔의 눈물도 가슴에 묻었다. 그는 코뿔소처럼 방황했 고, 3국의 틈 속에서 끊임없이 유랑했던 고독한 군주였 다. 황량한(싸늘한) 들판 위에 흘러간 날들이 첩첩이 쌓여 갔다.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그의 희망들은 빈들에 남은 바람(찬 서리)같았고,젊은 날의 포부와 갈등,고통은 공 허한 꿈과 같았다. 무력한 과거는, 모래 위를 가로질러 온,바퀴자국처럼세파에하릴없이이지러졌다. 슬프고 망망한, 하늘 끝까지, 경애왕의 절규는 이해할 수 없는 울림으로 스러져갔다. 경애왕의 병든 가슴 속에 서,하나의시대가저물었다. <終> 경애왕(신라55대왕.재위924~92 7) 뱚 역사 비정(최종회) 뱛Ⅰ.난세의굴레 박 순 교 뱛Ⅱ.역사의수수께끼 뱛Ⅲ.역사기록의함정 뱛Ⅳ.왕건과김부의협잡 뱛Ⅴ.김부식의그림자 뱛Ⅵ.일연의단서 뱛 Ⅶ. 에 필 로 그 목 차 Ⅰ.난세의굴레 Ⅱ.역사의수수께끼 Ⅲ.역사기록의함정 Ⅳ.왕건과김부의협잡 Ⅴ.김부식의그림자 Ⅵ.일연의단서 Ⅶ.에필로그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