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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ll 죠!._ u 1- ^ --.:그 근 동고(東뿔, 휘 윤현) . 만와(硬뻐, 휘 윤광) 형제분은 밀성박씨 최초의 대동보인 신유보 (1741년)를 발간하였다. 그리고 1751년 시조왕릉의 비(牌) 건립의 당위성과 시조왕위판(始 祖王位版)에 왕자 표기에 대해 상소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시조왕릉의 비(牌)는 만와공의 수창으로 당시 10만냥(현재 금액 40억 상당)의 경채를 차입 하여 세우게 된다. 비(牌)는높이 3.1m, 너비 1.16m, 두께 0. 51m이다. 영조 27(1751)년에 경주 남쪽 70리 지점인 치술령 서쪽 기숨에서 석역(石짝)을 시작하여 승군(↑曾軍) 1 , 500여명을 동원하여 2년여에 걸쳐 비신(牌身)을 전(觀) 앞까지 운반(運搬)하 였다. 그후 비신(牌身)과 두 개석(頭蓋石) 좌판(坐板)을 다듬어 비문을 쓰고 각자를 하는데 8 년간의 긴 작업 끝에 완공하였다. 이 비(牌)에는 대제학 조관빈(大提學 趙觀秘)이 글을 짓고 판부사 유척기(判府事 폐ìt石基)가 전(豪)을 쓰고 지의금(知義禁) 홍봉조(洪鳳祚)가 세자(細字) 를썼다. 숭덕전에 모셔진 시조대왕의 위판은 임진왜란 이후 신라시조(新羅始祖)라고 만 되어 있었 으나 만와공을 비롯한 성손 217명의 소(표E)에 의해 신라시조왕(新羅始祖王)이라 하였으니 우리 후손들에게는 엄청난 자긍심을 부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위판 왕(王) 자(字) 개제소 일부를 소개해 본다 IF불행히 임진병화(王辰兵火) 뒤에 위판(位 版)을 다시 고쳐 쓸 때 다만 신라시조(新羅始祖)라고 쓰고 왕자(王字)를 넣지 않았는데 조정 에서 내리는 축(祝)에는 신라 시조왕(始祖王)으로 쓰여 졌으니 왕(王)의 칭호를 쓰고 안 쓰는 것은 얼마나 중대(重大)하온대 축(祝)에는 쓰고 위판(位版)에는 쓰지 않았으니 , 어찌 크게 예 절에 어긋나고 제모(體親)를 손상하지 않겠습니까 . .!] 라고 하였다. 어떤 이는 미관말직으로 역사서에도 나타나지 않음에도 관직을 고려태사 또는 시호 등 그 행적을 조작하거나 미화하여 거북좌대에 용수의 거대한 비석으로 치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두 형제분은 평생 숭봉(뿔奉)하는 것을 업(業)으로 삼았음이다. 이에 행산공파종회 중희(↑中 熙) 회장을 중심으로 후손(後孫) 권흠(權歐) 前국회의원 동고공의 종손 재철(載喆) , 만와공 의 종손 병흠(秉歡) 현종이 합심하여 2019년 밀성재 경내에 두 분의 기적비 건립은 후손 모 두가 갈망하는 것으로 두 형제분의 공적이자손 만대에 이어지길 기대해 본다. (박씨종보 한 빛신문 2018년 12월호 12변에서 옮김) 서기 2019년 10월 7일 (음 9월 9일) I 동고 · 만와 앙선생 기적비 수비추진위원회 l 수비추진위원장 악 중 희 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