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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곳에 와서 하소연 하오니 원하옵건대 신라 시조왕께옵서는 하늘이 내리신 신인(神人)으로 동경(東京)에 오읍하사 사방(四方)을 개척(開招)하시와 공(功)이 삼한(三韓)에 으뜸됨은 역 사(歷史)에 소상히 실려 있으므로 되풀이할 것도 없사옵고 이곳 영남(鎭南)은 실로 우리나라 근본 되는 땅으로 그 백성이 후덕()享德)하고 진실하여 끼친 풍속(風↑섭)이 오히려 남아 있사 오며 하물며 큰 가뭄 「한(뿔)J 을 당하면 지금도 숭덕전의 나정(羅井)에 기우제(析雨察)를 올리면 받드시 영험(靈驗)이 있으나 하늘에 계시는 정령(精靈)이 남몰래 우리나라와 백성을 보우(保佑)하심을 알수 있습니다. 옛적에 우리 세종대왕께서 특히 시조왕릉의 황폐(훈廢)함을 진념(較念)하시와 묘전(J朝顧) 을 세우시고 또한 경종대왕께서 숭덕전(몇德願)의 전호(顧號)를 하사(下陽) 하시와 성손(姓 孫)으로 참봉을 삼아 전수(典守)하게 하시니 또한 숭인전에 기자(箕子) 후손(後孫)인 선우씨 (뺑、¥子lf:)로 참봉을 삼아 수호하게 한데서 따른 것으로 숭봉(뿔奉)하는 법전(法典)이 거의 유 감(遺'1感、)이 없다 하겠사오나 가만히 있어서 높은 공되을 찬양하여 뒷 세상에 전하였느니 , 천 백년 뒤에도 누구인들 우러러 높은 덕(德)을 상상(想像)하지 않으랴오 마는 홀로 숭덕전(뽕 德觀)만은 아직 비(牌)가 없어서 한산언되이 황폐된 능(1埈)이 헛되제 길손들의 개탄('1解歡)하 는 바가 되오 왔기 때문에 일찍이 병인(內寅)에 도신(道닮 감사) 김상로(金尙舊)가 장계(狀 뽑)하여 묘표를 세우라는 바답(批答)을 받았사오나 아직까지 거행(購行)되지 못하여 지금에 이르렀기로 신(면) 등이 신라왕의 후손으로 개연(搬然)한 마음을 금치 못하여 이에 사사로이 재력(財力)을 모아 묘비(基牌) 세우기를 꾀하였으나 나라의 존봉(尊奉)하는 곳에 감히 사사 로이 할 수 없어서 이에 소회(素懷)를 말씀 올려 윤허(允許)를 정하는 바이오며 또한 다시 생 각하오매 시조왕께서 인문(A文)이 미개한 시대에 처음으로 동방(東方)의 임금이 되시었고 왕(王)의 후손중에는 여러 변 성대(聖代)의 왕비로 책봉되시기도 하셨으니 국가(國家)의 숭 봉하는 법전도 마땅히 전조(前朝)의 여러 왕릉(王陸)과는 다를 것이옵기로 전번 임자년에 별 관을 보내어 본전(本觀)에 치제(致察)하심이 실로 숭봉(뿔奉)하는 성의(聖意)에서 나온 줄 사 료(思料)됩니다. 신(많) 등이 성은(聖恩)에 감격(感、激)함이 더욱 자별(自別)하오나 다만 전수(典守)하는 능관 (1埈官)을 예조에서 직첩(職뼈)을 발급(發給)하니 관직이 임시직으로 받는 사람도 중하게 여 기지 않아서 수호(守護)하는 범절(凡節)이 왕릉의 체모(體線)를 이루지 못하여 조정이 관원 을 두어 수호하는 본의(本意)에 어긋나고 또한 숭인전의 참봉관을 정주(政注)에서 임명하는 것과도 다르오니 사체(事體)를 중히 하는 뭇에서 혹이나 잘못이 있는 듯 하오니 원하옵건대 저하(邱下)께옵서는 특히 살피시옵고 패히 명령을 내리시와 묘표(훌表)를 세울 것을 윤허(允 듭쑤)하시옵고 전(願)을 지거는 관원(官員)도 또한 비삼망(備三望)하여 실직(實職)으로 임명하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