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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톨를g~훌뀔.톨.밑뭘,ι~J페1.뜸펜-믿톨헬펜IE홉흩훌. 진 하였다. 안으로는 부모님을 모시고 가정을 가꾸며 바깥에서는 사귀어 왕래하고 응접하니 형제가 그 어느 하나 같이 어울리지 않음이 없었다. 서로 필요하고 서로 도움 주었으나 질 나발과 피리가 어울리는 음악처럼 화락하고 유쾌하 기가 그지없었다. 그래서 세덕사를 짓고 족보를 간행하고 서당을 여는 것 역시 모두 같이 한 것이니 더불어 의논하고 같이 힘써서 이룩한 것이다. 선생은 여러 번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결국 회시에서 실패하였다. 그래서 벼슬할 뜻을 과감 히 접고 동녘 산자락에 정자 하나를 세우고서 ‘만와’ 라고 편액을 달고서 늙어 마칠 때까지 지낼 뭇을 보였다. 동고공은 이를 위해 기문(記文)을 지었는데 자신의 뭇과 맞았기에 기문 짓기를 허락한 것이므로 그 지향하는 바가 서로 일치했음을 얄 수 있다. 동고공이 돌아가시니 무릇 선조를 밝히고 빛내는 일에 있어서는 자기 임무라고 욕심내었 건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이다. 그래서 선생이 종친들을 이끌고서 시조 임금 사당 숭덕전에 비를 세워 그 공적을 찬술하자고 상소하여 임금의 허락을 받았다. 또 상소하 여 고조 국당공과 중부(f中父) 술재공에게 포상하는 은전을 내리기를 청하였으나 이 모두가 애쓰는 마음과 참된 정성에서 우러러 나온 것이다. 선생은 속에 품은 학식이 많았기에 이것이 글과 말에 드러났던 바 그 단아하면서도 해박함으 로써 많이 알려질 만 했다. 그러나 화재로 인하여 남아 있는 것이 몇 되지 않으니 한탄스럽다. 1751년 영조(27) 시조대왕의 비(牌)가 전해지지 않음을 안타깝고 한탄(恨歡)스러워 하면 서 소(越)를 제기하고 경채 10만냥(현 환율가치 40억여원)을 얻어 비를 세우는 등 전대미문 의 큰 일을 해내기도 하였다. 1770년(영조46) 11월 11일 영면하시니 모두가 슬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와유고(硬뻐 遺橋)가전해진다. 回 시조왕릉입비소(始祖王陸立牌統)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황제(皇帝)와 요순(흙舞)의 후손(後孫)을 찾 아서 삼각(三'1各)을 삼아서 그 제사를 받들게 하셨으니 聖人이 덕(德)을 높이고 끊어진 혈통 을 이어 주신 뭇이 실로 아름답다 하겠습니다, 우리 성조(聖祖)가 주(周)나라와 함께 아름다 움을 함께 하시와 전대(前代)의 임금을 공경하고 숭봉(뿔奉)함이 천고(千古)의 아름다운 자 취를 본받아서 평양의 숭인전(뿔仁顧)과 마전(麻田)의 숭의전(뿔義顧)과 경주의 숭덕전(뿔德 顧)을 세워서 처음 건국(建國)한 임금의 공덕(功德)에 보답(報答)하는 법전(法典)이 주대(周 代)의 삼각(三'1各)의 거룩한 법(法)과 같이 지극하나 신(닮) 등이 나름대로 약간의 하소연하 고저 하는 바가 있사와 감히 천리(千里)길에 빌-을 싸 동이고 구중궁궐(九重宮關) 존엄(尊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