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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복역하고 나온 정후균이 이 조직을 실질적으로 지도하게 되면서 이 운동의 궁극적 목표를 '호남ML회'의 구성에 두고, 재건위원회의 명칭도 '조약도ML회건설준비공작그룹'으로 바꾸었다. 그들은 조약도 내의 타 부락과 강진.장흥.해남.영암 등 타군 지역으로까지 연락관계를 넓혀갔다. 그러나 이런 활동반경의 확대는 결국 일제 경찰의 주목을 끌었고, 1938년 10월 관산리 노동야학사건이 발단이 되어 전체 조직원이 검거되게 되었다. 약산항일독립운동의 특징은 일제의 탄압이 보다 가중되고 있었던 시기에 교육과 동맹을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전개하였다는 점이다. 특히, 야학을 개설하여 일본어.산술.조선어.창가.작문 농민가 등을 학생들에게 교육시켜 애국의 마음을 심어주었고, 이들이 향후 인재로 활동하게 되었으며, 김양식과 해조류 재취업 등 주민 대부분이 수산업을 겸하면서 구성된 조합을 적극 활용하여 조직원들이 해태양식의 분급위원 혹은 해태어업조합의 총대가 되어 활동하거나 위친계, 갑계 등을 적극 이용하는 등 합법적인 조직에 들어가 활동하는 방식으로 조직망을 견고히 하였다. 일제 36년간 완도, 그리고 약산 조약도의 항일독립운동은 구국의 한 줄기 빛이었으며, 용왕매진(勇往邁進)했던 애국지사들을 길러낸 조국수호의 요새였던 것이다. 조국을 지켰던 선열들의 뜻과, 곳곳에 숨어 있는 항일독립 정신을 숭고하게 기억하고 후세에 이어나가기 위해, 민족 해방의 성지 완도 약산에 '항일독립운동기념공원과 상징탑'을 세웠다. 우리 민족은 선열들의 처절하고 고귀한 투쟁을 기억하며 영원히 꺼지지 않는 민조곤으로 이 땅을 지킬 것이다. 2019년 8월 28일 약산항일운동기념사업회.완도군.전라남도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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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 고장 완도, 그리고 약산 전라남도 완도는 일제 식민지 암흑기에 가장 치열하게 항일 구국의 횃불을 드높게 쳐들었던 겨레의 섬이다. 1913년 사립중화학원 설립, 1914년 수의위친계 조직, 1920년 배달청년회, 1923년 사립소안학교 설립 개교, 1924년 소안 노농대성회, 1926년 살자회, 1927년 일심단 등 줄기찬 항일운동을 하며 항일독립정신을 잃지 않았고 전국에서 독립 유공자를 가장 많이 배출하였다. 완도 항일독립운동은 절해고도의 지리적 여건에도 불구하고 국내는 물론 중국.일본까지 무대로 하였고, 완도군에 속하면서 강진.장흥과 인접한 작은 섬이엇던 조약도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의 격동기에 다른 어느 지역 못지않게 적극적으로 역사의 물결에 참여하였다. 특히 교육사업을 통해서 민족의식을 깨우쳤고, 비밀결사를 통해 요원을 항일 격전지에 파견하였으며, 불법적 법률에 대해 법정에서 맞서 싸웠다. 1920년대 후반 사립약산학교에서는 민족의식과 사회의식을 학생들에게 교육시켜 인재들을 양성하였고, 1930년대 약산 항일민족운동의 주역이 바로 그 제자들이었다. 1930년대에는 '전남운동협의회재건위원회'를 중심으로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정후균.김옥도.정부균.정문두.김경태.정병래.이영식.박천세.곽사길.최선일 등은 1933년에 결성된 '전남운동협의회'에 관련되어 활동하던 중 1934년 2월 일경의 대검거로 인해 조직이 와해되자, 검거된 정후균과 김옥도를 제외한 정문두.김경태.정병래.이영식.박천세.곽사길.최선일 등이 1930년대 '전남운동협의회재건위원회'를 조직하였고, 전남운동협의회와 마찬가지로 청년반.농민반.소년반 등을 구성하였다. 또한 러시아혁명기념일.메이데이기념일.망년회 등의 모임을 통해 조직원들의 의식을 높이고 단결을 굳건히 하였다. 이들은 외부적인 활동보다 내실을 다지는데 중점을 두었고, 이런 방침은 그들의 조직을 4년간 보존할 수 있게 하는 바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