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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10월31일 목요일 6 (제154호) 관향조 종친회·재실탐방 모선정(慕先亭) 건물은 중종 3년(1508년) 처음 창건되었으 나 선조 25년(1592년)임진왜란으로 저서 및 문헌일체와 건물 이 모두 소실되었다.현 건물은 그후 150년이 지난 영조연간(1 742~1776)에 후손들이 성력을 모아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 형 지붕으로 중건한 것으로 영남지방 사족(士族)가문의 전형 적인정자건물이다. 맨 왼쪽에 툇마루를 두었고 좌우로 방을 두어 왼쪽은 석류 재(錫類齋), 오른쪽은 덕본재(德本齋)라 하였다.동재 숭절재 (崇節齋) 전면 5칸 측면 2칸으로 1990년 건립되어 현재 밀성 박씨인당공파대종회종약소와재숙소로이용되고있다. 모선정 후원에는 1833년 창건하여 1868년(고종10) 훼철된 덕남서원(德南書院)의 후신인 덕남사(德南祠)를 1933년 사 림(士林)의 공의로 창건하여 고려 말 팔은(八隱)으로 칭하는 두문동 현인 충숙공 송은 박익(忠肅公 松隱 朴翊) 선생의 영 정을봉안하여매년9월중정(中丁)일에사림봉사하고있다. 註고 - 여말의 팔은(八隱) : 송은(松隱) 박익(朴翊), 포은(圃隱) 정몽주 (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 야은(冶隱) 길재(吉再), 성은(成隱) 김대 윤(金大潤), 동은(桐隱) 이재홍(李在弘), 휴은(休隱) 이석주(李錫周), 만은 (晩隱)홍재(洪載) 송악(松嶽)의남쪽밀주(密州)의서쪽에새로세운사묘(祠 廟)는 나의 선조이신 충숙공(忠肅公) 송은 선생(松隱先生)의 영정(影幀)을 봉안한 영정각이다.선생은 고려의 운세가 쇠약 해지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셨다. 선생은 살아서는 한 나라 의 의표(儀表)로 우뚝하였고 돌아가신 뒤에는 세세(世世)토 록 후손들의 표상이 되었다.그 기질(氣質)이 창창(蒼蒼)하니 그 면목(面目)이 후세에 전해져 지금 사람들에게 선생께서 행 하신도의를보이게되었다. 그림의 형상은 긴 수염에 십척(十尺)의 몸으로 그 외형적 형용과 내면적 진실을 모두 잘 보여준다. 봉황의 눈에 호랑이 눈썹을 하였고 얼굴빛은 맑고 불그스름하며 머리카락은 반백 (半白)이다. 눈동자에 어린 그윽한 빛은 별이나 해와 같이 반 짝이니 그 기운이 산천의 정기를 모은 것 같다.또 생생한 기질 과 늠름한 위의(威儀)는 마치 흰 백구(白鷗)가 현신(現身)한 듯하다. 소나무와 같은 절의와 대쪽 같은 심성은 당시 여러 현인(賢 人)들이 도의(道義)로 믿고 따르는 것이어서 그를 찬양하는 믿을 만한 글들이 수두룩하였다.절의와 충성을 대의(大義)로 삼고 도학적 문장을 짓는 것으로 당시 팔은(八隱)이 함께 맹 서했었다. 조선 태조가 다섯 번이나 불러도 나아가지 않은 것 은 후세의 명현(名賢)들과 공경(公卿)들이 표본으로 삼는 아 름다운 역사적 사실이 되었다. 그러므로 못난 후손이 감히 그 이상 무슨 말을 덧붙일 필요가 있으랴.선생의 영정에 붉고 푸 른색을 칠을 하고 영정각에 단청을 하여 아름답게 가꾸 는 것은 선생의 도의를 눈으 로나 마음으로 우러러 사모 하여 묘제나 유사를 올리며 나 아 가 고 물 러 나 는 때 에 엄 숙히 하여 선생의 걸음을 따 르고 그 말씀을 직접 듣고 따 르 는 것 같 이 하 려 함 이 다. 덕남서원이 철폐된 후로 그 유 적 지 를 우 러 러 보 면 채 마밭에 안개가 가득하고 시 냇가 소나무를 구름이 가린 듯 하 니 그 영 향 (影 響 ) 을 바 라볼 수 없었고 이러한 상황 이 황송하여 식은땀이 흐르 고 감개하고 슬퍼하나 제사 를 드릴 때 신령께서 오르내 리시며 살아계신 듯 느끼지 못함을위안할수없었다. 금년 봄에 뭇 사람의 의논이 모아져 드디어 모선정 뒤에 네 기둥 세 칸을 지어 중당에 봉안하였다.이로 인해 우리 선조의 아득히 가려졌던 빛이 다시 세상에 그 빛을 발하게 되었다. 그 러나 어찌 감히 이것으로 조상의 은덕을 갚는 일을 만의 하나 라도 이루었다고 하리오. 이 이후로 수천 우리 박씨 종족들은 위대한 선조를 추모하고 세세토록 후세들이 조상을 우러러 받 들고 조상을 빛나게 할 것이다.또 후손들이 그 업적을 키워가 는 법도에 마음을 다하며 그 예의범절을 다 갖출 것이니 어찌 이영정각하나에서이일이그칠것인가. 아! 강산이 변하여 지금 공의 후세로서 “달이 진 뒤 꽃잎은 날리고 온 우주는 아득하기만 하여라.” (月落花殘 天地微茫) 라는 시 구절을 암송하면 감격의 눈물이 가슴을 적시는 것을 느끼지도 못하였다. 비록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우리 후손들은 서로 마음으로 북돋우고 이끌어주어 충효를 과업으로 삼고 그 남기신 가르침을 잘 받들어 가면 조상의 덕을 더럽히지 않았 다고말하리라. 만호박기호유고에서가려뽑은글 밀양에 침을 뱉지 않는 땅이 있으니, 산은 아름답고 빼어나 여묘(廬墓)를 사는 자는 모선산(慕先山)이라 하고,물은 맑아 서 마시는 자는 모선계(慕先溪)라 한다. 산 끝자락 시내 머리 에 또 넓은 들이 평탄하게 제단(祭壇)같고 마당 같은 곳이 있 는데 풀이 우거져 황폐하고 숲과 나무로 가려진 곳으로 모선 정(慕先亭)옛터라한다. 내 젊 은 시 절 이 곳 에 와 서 감 상 하 고 그 윽 이 마 음 에 의 혹 이 있어 이르기를 “기이하도다. 정자와 시내와 산은 종류가 다르 나 부르는 이름은 같은데 어째서 그런가. 옛날을 우러러 인사 (人事)가 서로 참여함이 있어서인가?”하니 곁에 있던 농사짓 는 늙은이가 쉬다가 나를 보고 빙긋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 그네의 말과 생각은 과반이 맞다. 우리 고을에 옛날 제사를 지 냄이 있었는데, 선생의 성은 박씨며 휘는 수견(守堅)으로 태 어나면서 아름다운 바탕이 있었고, 일찍이 점필재 문하에서 유학하여 글의 실마리를 얻어 듣고 아름다움을 쌓아 폐하지 않고 집안에서 정성된 봉양으로 아름다운 정성을 붙였으니 성 스러움에서 나와 효도의 소리가 원근에 떠들썩했고 사림(士 林)사이에도 이르렀다.무릇 두 어버이를 대접하지 못하자 이 에 이곳에서 정려(旌閭)에 의거하여 우측에서 여묘를 살며 아 침저녁으로 곡하고 애통해 하니 길가의 산천초목 또한 슬퍼함 을 돕는 듯하였다. 상기(喪期)를 마쳤으나 돌아가지 않고 묘 소 돌보기를 그만두지 않았으며,천수(天壽)를 다하여 돌아가 시니 향인들이 효성에 감복하여 모선정이라 여막(廬幕)을 편 액하고 또 따라 불러 산과 시내를 모선(慕先)이라 하였다. 무 릇 사물(事物)이 사람으로 인하여 이름을 얻은 것이 옛날에도 혹 있었는데, 객(客)은 무릇 망부산(望夫山)과 내소(來蘇)의 물결을 듣지 못했는가?” 하고 일어나서 손을 들어 그 위를 가 리켰는데 과연 세 분의 묘소가 있었다.둘은 선생의 선조고(先 祖考) 부군의 묘소이고, 하나는 선생의 합장한 묘소로 아래에 따라 있는 것이었다. 내 그 말을 듣고 그 무덤을 보고서 나도 모르게 면면히 우러러온 고풍(高風)에 공경이 일어 세 번이나 탄식했다. 아!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은 사람이 나면서부터 가 지고 있는 본성인데 50년을 사모하였다고 오직 우순(虞舜)을 칭찬하고,훌륭함을 좋아함은 사람이 타고난 천성을 지킴인데 조문(弔問)하는 자가 크게 기뻐하고 겨우 등문(?文)을 만났 다 한다. 그렇다면 선생 같은 분은 생각이 우순과 같음이며 배 움이 등문과 같은 것인가. 어찌 사람으로 하여금 감모(感慕) 함이 한 결 같이 이에 이르는가.내 뒷날에 태어나 난초 가득한 집에들어가넉넉한꽃향기에목욕하지못함이한이된다. 선생의 후손 증엽(增曄)씨가 하루는 글을 가지고 달려와 이 르기를 “선조의 남기신 정자(亭子)가 임진왜란에 병화(兵火) 로 불 에 타 없 어 지 고 초 목 만 무 성 한 지 이 미 백 여 년 이 지 났 으 나, 문중이 쇄락하고 힘이 부족하여 마침내 중수하고 창건하 지 못하여 선령(先靈)으로 하여금 평일에 방황하게 하고 숨어 살게 하였으니 돌아보아 욕됨이 애통하기 그지없습니다.이제 재물을 모으고 목수를 모아 들보를 올렸으니 한 마디 말이 없 을 수 없습니다. 선생께서 선조의 유사에도 일찍이 감격한 기 쁨이 있으니 한편의 문자(文字)를 내려 주심이 어떻겠습니 까?” 하기에 내 이에 기뻐하고 말하기를 “아름답고 훌륭하도 다. 이는 이른바 세덕(世德)을 구하여 펼치는 후손들의 효도 인 것이다.내 비록 글은 잘 하지 못하지만 선생의 지위를 위함 에 어찌감히 힘쓰지 않겠는가?비록 그러하나 이 정자의 창건 이 어찌 부질없겠는가. 위로는 조상의 덕을 잇고 아래로는 후 손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것이다.모름지기 모든 군자(君子)들 은 선생께서 선조를 사모한 마음을 채득하여 몸소 실행하기를 바란다. 정자(亭子)에 나아가 선생의 자취를 생각하고 묘소 주변에 올라 묘를 돌본 모습을 생각하여 조심스레 이어가 자 기가 태어난 바를 잊지 않는다면 왕성하게 일어나는 생각은 효도와 사모의 정성 아님이 없을 것이며, 성하게 일어나는 마 음은 존경의 마음 아님이 없을 것이니 자손 대대로 따르고 받 들어 폐하지 말지니라. 후인들도 이 정자를 지나는 자는 반드 시‘박선생의남기신은택이끊어지지않고이곳이있도다.’할 것이니 선생께 영광이 있지 않겠는가.” 하고 드디어 송축(頌 祝 )의 말 을 써 서 성 한 뜻 을 막 을 뿐 이 다 . 정해년(1767년)7월하순에 후학성산여이명은기문을쓰노라 송은선생(1332~1398)은 고려 말의 충절신(忠節臣)으로 두문동 은사(杜門洞 隱士)이며 세칭 팔은(八隱)의 한분이시 다.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목은 이색(牧隱 李穡), 야은 길 재(冶隱 吉再)를 비롯한 명현과 도의교(道義交)하셨고 탁절 (卓節)이 백세(百世)에 귀감이었다. 공민왕조에 등과(登科) 하여 소감, 예부시랑, 세자이부 겸 중서령, 한림 문학 등을 역 임하시며 세 임금을 섬기고 섬나라 왜와 북방의 오랑캐를 토 벌하는데큰공을세웠다. 당시 고려 왕조가 날로 쇠퇴 하여 광정(匡正)할 기미가 없 자 관직을 버리고 아우 천경(天卿)과 더불어 밀양 향리로 돌 아와 스스로 송은(松隱)이라 호(號)하고 山水間에서 시를 읊 으며 세월을 소일했다. 이성계(李成桂)가 혁명하여 등극(登 極)한 역보(逆報)를 듣고 自歎詩를 지어 고려의 멸망을 恨歎 하셨다. 태조4년(1395) 국왕이 공조, 형조, 예조, 이조의 판서를 내 려도 응하지 아니하자 다시 예관 권근(權近)을 보내 좌의정으 로 특별히 초치(招致)하였으나 맹오라 핑계하고 오징불취(五 徵不就)로 죽음을 각오한채 왕명을 모두거절 하였다. 태조7년(무인-1398)에 별세 하셨는데 임종에 앞서 네 아들 융(融), 소(昭), 조(調),총(聰)을 불러 선천후천(先天後天)은 부자이시(父子異時)라 나는 죽어 혼이 왕씨(王氏) 신하로 돌 아가겠지마는너희들은새왕조에충성하라유언하셨다. 訃音을 들은 조정은 좌의정을 증직(贈職)하고 이듬해 정종 1년(1399)에 충숙(忠肅)의 시호(諡號)를 내리고 예관을 보내 치제(致祭)했다. 문집초간은 헌종 3년(1837)에 덕남서원에서 발행하고1935년 청도의 선암서원에서 중간(重刊)하였다. 1977년과 1999년 두 차례 國譯을 하고 初刊木板刻은 경상남 도 유형문화재 제351호로 지정되었고 2011년에 한국국학진흥 원(안동)에기탁하여보존하고있다. 묘소는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산136번지이며 산 아래에 보 본재(報本齋)와 神道碑가 있다. 2000년 墓에서 벽화가 발견되 어 2005년 국가문화재 사적 제459호로 지정되었다. 미루어 생 각건대 당시 선생의 위상(位相)이 국내에서 현저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봉향은 덕남, 용강, 신계, 운암서원과 고려충신사이 다. 인당선생(1347~1426)은 휘는 소(昭)요 호는 인당(忍堂)이 며, 송은 선생의 둘째 아들로 삽포 고향집에서 탄생하셨다. 포 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선생 문하에서 이학(理學)을 전수하 고 아버지 송은 선생이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후로 벼슬에 뜻을 버리고 孝友로 가정의 규범을 삼고 계사(戒辭)를 지어충신효제(忠信孝悌)를좌표로하였다. 삽포에서 신촌(新村-현 모선동)으로 移居하셨는데 이곳은 춘당 변중량(春堂 卞仲良),춘정 변계량(春亭 卞季良)과 같은 동리에서 이학(理學)을 강마(講磨)하고 소요자적(逍遙自 適) 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서 향당장로(鄕黨長老)와 결사수 계하여 춘추로 강회를 열어 향풍진흥(鄕風振興)에 힘썼는데 이 계가 구령동안(龜齡洞案)이며 후일 밀양향약의 기초가 되 었다. 안음 현감(현 함양 안의)으로 재임시에 휼민선정(恤民善 政)으로 청백비(淸白碑)가 안의 광풍루(安義 光風樓) 부근에 세워졌다.民飽吾飢飢反飽,子飢吾飽飽猶飢,由來飢飽關乎世, 誰得天心均飽飢”(민포오기기반포 자기오포포유기 유래기포 관호세 수득천심균포기) 이란 자관시(自寬詩)에서 휼민, 애 민(恤民,愛民)정신이잘표현돼있다. 묘는 무안면 운정산 백호 등이라 하나 실전되고 선공(先公) 송은 선생 묘 아래에 우당(憂堂), 인당(忍堂) 형제분의 제단 비(祭壇碑)를 각각 세워 춘추로 時享을 받들고 있다. 모선정 境內에 선생의 유허비(遺墟碑)가 있는데 중재 김황(重齋 金 榥)이 撰했다. 문집 원집은 덕남서원에서 간행하고 2007년 국 역증보하였다. 모선재 선생은 휘는 수견(守堅)이요 호는 모선재(慕先齋) 로 송은 선생의 玄孫이며 인당선생의 증손으로 신촌(현 모선 동)에서 나셨다. 幼時부터 천성이 순효(純孝)하고 문사(文 詞)가 조달(早達)하여 세인(世人)을 놀라게 했다. 점필재 김 종직선생의문인으로학행(學行)이높았다. 중종3년(1508)에 모친상을 당하여 구령산(龜齡山-현 모선 산)에 안장했는데 묘 옆에 초막으로 시묘실(侍墓室)을 지어 조석곡전(朝夕哭奠)을 초상시와 같이하고 3년상을 마친 후에 도 집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모선정(慕先亭)이라 편액(扁 額)하여 寄居하시며 날마다 묘역을 청소하고 성묘하는 것을 일과로 삼아 종신토록 영모지소(永慕之所)로 정하여 세상의 영욕(榮慾)을잊고수학지도(修學之道)에 전념하셨다. 이에 부관(府官)이 선생의 지극한 효성을 조정에 올렸던바 참봉(參奉)직을 수차 내렸으나 끝내 사절하고 여생을 마쳤다. 후세 사람들이 선생의 지극한 효성을 영원히 추모하기 위하여 부근의 산천방리(山川坊里)를 모선(慕先)이라 이름 한 것이 지금까지전해오고있다. 모선정(慕先亭)은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으로 著書 및 文獻과 함께 불타버렸다. 150여 년간 황폐한 유지(遺址)만이 남아 있었는데 팔세사손(八世嗣孫) 덕계공(德溪公 휘 增曄) 이 제족(諸族)과 함께 성력을 다해 영조(英祖) 연간에 중건 하였다.그 후 수차례 중수하여 보존해 왔는데 2000년에 경상 남도 문화재자료 제285호로 지정되고 2004년 관비(官費)로 크게중수(重修)하였다. 역사가 말해주듯 당대명사(當代名士)가 찬(撰)한, 모선정 기, 모선정 중건 상량문, 모선정 중건운(慕先亭重建韻), 모선 정 중건기 등이 있고, 모선재 선생 실기(慕先齋先生實紀) 한 권이 있어 선생의 행장(行狀), 사적(事蹟), 묘갈명(墓碣銘), 묘지명(墓誌銘)이전한다. 孝는 인륜(人倫)의 근본(根本)이라 모선산이 우뚝 솟아있 고 모선계(慕先溪)에 맑은 물이 흐르는 한 이 정각과 함께 선 생의모선정신(慕先精神)이길이 후세에전해가리라. 뱚재실탐방 모선정(慕先亭)과덕남사(德南祠) 경남밀양시초동면신호리(경남문화재자료제285호) 모선정전경-①덕남사②강당모선정③외삼문(求必門)④숭절재⑤인당선생유허비⑥관리사 모선정은 송은 선생의현손(玄孫)이며 인당선생의 증손인 모선재(慕先齋) 박수견(朴守堅) 선생이 중 종3년(1508)에모친상을당하여구령산(龜齡山-현 모선산)에 안장했는데 묘 옆에 초막으로 시묘실 (侍墓室)을 지어 조석곡전(朝夕哭奠)을 초상시와 같이하고 3년 상을 마친 후에도 집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모선정(慕先亭)이라 편액(扁額)하여 기 거하시며 날마다 묘역을 청소하고 성묘하는 것을 일과로 삼아 종신토록 영모지소(永慕之所)로 정하 여 세상의 영욕(榮慾)을 잊고 수학지도(修學之道) 에 전념한 곳이다. 그러나 선조25년(1592) 임진왜 란으로 저서 및문헌과 함께 불타버렸다.150여년 간 황폐한 유지(遺址)만이 남아 있었는데 팔세사 손(八世嗣孫) 덕계공(德溪公 휘 增曄)이 제족(諸 族 )과 함 께 성 력 을 다 해 영조 (英 祖 ) 연간 에 중 건 하 였다.그 후 수차례 중수하여보존해 왔는데 2000년 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85호로 지정되고 200 4년 관비(官費)로 크게 중수(重修)하여 지금에 이 른다. 그러나 모선정을 논하기 전 사당(덕남사)에 뱅향 되어 있는 송은 선생과 덕남서원을 거론하지 않을 수없다. 지금의덕남사는 고려 말 불사이군의충절을 지킨 충숙공송은박익(忠肅公松隱朴翊)선생의영정을 봉안한 사당이다.순조33년(癸巳-1833)에향도유 림(鄕道儒林)의 공의로 덕남서원(德南書院- 새월) 을 창건하여 송은 선생을 주벽(主壁)으로 長子 우 당공(憂堂公)과 次子 인당공(忍堂公)을 배향으로 춘추에 봉사해 왔다. 고종 5년(戊辰-1868)에 국령 으로 훼철되어 서원강당은 신계재 정당으로 영정 각(影幀閣)은별묘로 이건하여영정을봉안해오던 중 1933년(癸酉)모선정후원에영정각을새로지 어 유림봉사(儒林奉祀)하고 있으며 1989년(己巳) 옛사우명대로덕남사라편액(扁額)하였다. 이에 이번호에서는 덕남사 영정봉안기, 모선정기 문,제향절차등을통해모선정을소개해보고자한 다. 뱚모선정건물의구조와배치 모선정(강당) 숭절재 뱚영정각기(影幀閣記)덕남사(德南祠) 덕남사 덕남사내부. 송은선생 영정은 덕남사 외 3개 서원 (청도 용강서원, 산청 신계서원, 창원 운암서원)에 봉안되어 있다. 본 영정 은그 이전영정이다. 뱚모선정기(慕先亭記) 뱚덕남사(德南祠)三賢의略史 1.충숙공송은박익선생(忠肅公松隱朴翊先生) 2.현감인당박소선생(縣監忍堂朴昭先生) 3.징사모선재박수견선생(徵士慕先齋朴守堅先生)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