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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10월31일 목요일 12 (제154호) 기획 제43차세계유산위원회(6.30.~7.10.)는현지시각으로7월6일오후븮한국의서원븯을세계유산목록에등재하기 로최종결정했다.그로부터3개월이지난6 일 일요일을 맞은 탓인지 유네스코에 등재된 도동서원은 국내외 취재진과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면서 해설사 는 물론 관계자들은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한훤당김굉필선생은김종직(金宗直)의문인이다.『소학(小學)』에심취해‘소학동자(小學童子)’로불리었다.1 498년무오사화가일어나자,김종직의문도 로서붕당을만들었다는죄목으로원방부처(遠方付處)의형을받고평안도희천에유배되었다가2년뒤순천에 이배되었다.유배지에서도학문연구와 후 진 교육에 힘써,희천에서는 조광조(趙光祖)에게 학문을 전수해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맥을 잇는 계기를 마련하 였다.학문적으로는 정몽주(鄭夢周)·길재 (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으로이어지는우리나라유학사의정통을계승하였다.1610년(광해군2)대간과 성균관및각도유생들의지속적인상소에 의해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등과함께오현(五賢)으로문묘에종사되었다.한훤당 선생이이처럼큰인물로영원히추앙받고 있기까지는부인순천박씨가있다.한훤당선생의장인(휘예손)은경북성주에서1495년합천야로숭산남교( 현야로면매안리)로이거하여아들과사위 (한훤당김굉필)의학업을위해숭산(현매안리989번지)에소학당(小學堂)을건립,이들에게학문의대성을이 루게하였다.그리고부인순천박씨는‘정숙 하고단정한자질로타고난위에선생의큰덕과넓은규모에물들어서아내로서도리를잘닦아,서로대하기를 손과같이하였으며안살림을다스림에있 어서정길(貞吉)하고예절에맞지않음이없었다.’고그후손김규화는묘갈에기록하고있어한훤당선생과그부 인순천박씨에대해알아본다. ▶순천박씨부인의가계와생애 부인은 고려 말 개성판윤(開城判尹)으로 고려 가 기울고 조선이 개국하자 경북 성주군 가야산 에 은거하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킨 휘가권(可權)의증손녀이다. 판윤공의 상계를 보면 보문각 대제학을 역임한 휘 숙정(淑貞)은 증조부가 되고 조부는 익재 이재 현 선생과 근재 안축 선생 등 당대의 거유와 종유 (從遊)하고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올라 청렴 고결 하고모든 일에 있어공평하게 처리 하였던 휘 원룡 (元龍)이고,무과에급제하여도첨의시중에오르고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에 봉해진 휘 천상(天祥) 은 아버지이다. 평양부원군의 첫 번째 부인 원주원 씨(原州元氏)는 성안부원군(成安府院君) 원호(元 顥)의따님이며,그의외조부는복안부원군(福安府 院君) 권겸(權謙)이다. 후배(後配) 성산이씨(星山 李氏)는경원공(敬元公)포(褒)의따님이자정당문 학의 대가 이조년 선생의 손녀이다. 판윤공은 기질 이 아름답고 뜻이 높았으며 학문이 뛰어나 명망을 높았다. 과거에 급제하여 청직(淸職)을 두루 거치 면서몸가짐을조심하고확고하게하여시배(時輩) 들과 절대 어울리지 않았으며 개성판윤(開城判尹) 에 올랐는데 공의 관직을 따 판윤공파라 한다. 판윤 공은 슬하에 2남(유성, 두성) 2녀를 두었는데 장남 유성은 의주목사공파, 차남 두성은 진사공파로 세 계를 이룬다. 장남 유성(柳星)은 태종 9년(1409년) 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기질이 특이하고 문무겸 전의 재주가 탁월하여 판윤공의 사랑을 많이 받았 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일찍이 벼슬길에 나아가 지 않았으나 판윤공의 유훈을 받들어 출사하였다. 종성부사(鍾城府使,현함경북도종성군)로나아가 공평청렴하고자애로운선정을베풀어백성들은공 덕비를 세워 은혜와 공덕을 칭송하였으며,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그 행색(行色)이 너무도 소연 (蕭然)하여 임금이 그 청렴함을 가상히 여기어 청 백리로봉하여단서(丹書)를내리고의주목사를제 수하니 더욱 엄하고 튼튼하게 변방을 방비하고 위 민선정(爲民善政)을 베풀었다.이후 황해도 절도사 로부임도중병이나48세를일기로별세하였다. 슬하에 인손(仁孫),예손(禮孫),신손(信孫)삼형 제를 두었는데 장남 인손은 승사랑(承仕郞)으로 효 우(孝友)가돈독하고재덕을겸비하였고,차남예손 은 어모장군충무위부사맹으로 타고난 효자이다.부 모님 상을 당해 피를 토하듯 슬퍼하며 3년상을 치르 고1495년합천야로숭산남교(현야로면매안리)로 이거하여 아들과 사위(한훤당 김굉필)의 학업을 위 해숭산(현매안리989번지)에소학당(小學堂)을건 립,이들에게학문의대성을이루게하였다. 순천박씨부인은1472년김굉필 선생의 나이 19세 에 결혼했다. 부인은 후손 김규화 公이 쓴 묘갈에서 ‘정숙하고 단정한 자질로 타고난 위에 선생의 큰 덕 과 넓은 규모에 물들어서 아내로서 도리를 잘 닦아, 서로대하기를손과같이하였으며안살림을다스림 에있어서정길(貞吉)하고예절에맞지않음이없었 다.’고 평가했다. 부인은 김굉필이 무오사화에 희천 으로 유배를 갈 때 피눈물로 하늘에 하소연하였으 며, 최후의 화를 당한 사실을 접하고는 기절했다가 다시 소생했다. 김굉필 사후에 아들에게 의지하여 현풍에서 살다가 김굉필 사후 36년 만인 경자(1540 년) 8월 현풍 솔례 도동서원 김굉필 묘지위에 안장 되고 정일품 정경부인으로 추증됐다. 자손이 귀한 집에서김굉필선생과결혼하여4남5녀를얻었다.3 남언서(彦序)가일찍죽고3남5녀가모두출가해서 후손을뒀다.부인은묘갈에서도나타나듯이남편인 한훤당 김굉필 선생이 대성을 이룰 수 있도록 현명 한처신과외조가있었다고할수있을것이다. ▶한훤당김굉필의생애 김굉필(金宏弼)의 본관은 서흥(瑞興)으로 어릴 때 이름은 효동(孝童)이며 자(字)는 대유(大猷)이 고 호는 한훤당(寒暄堂)이다. 『경현록』의 김굉필 세계도에는 김굉필이 조선 단종 2년(1454년)5월 2 5일 한양 정릉(지금의 정동)에서 아버지 절충장군 김유(金紐)와 어머니 청주 한씨(淸州韓氏)사이에 서 쌍둥이로 태어났으나 형은 자라지 못했다.어머 니 한씨는 12남매를 출산하였으나 오직 선생만이 성장했다.그의 선조는 원래 황해도 서흥부 사람이 었는데증조부때현풍으로내려와자리잡았다.서 흥김씨는계보상으로보면신라김알지(金閼智)의 후손이며경주김씨의일분파이다.김알지의7대손 이미추왕(味鄒王)이되니신라의왕족이다. 김굉필 사후 227년 뒤인 영조 7년(1731) 후손 김경 (金硬)이쓴‘서흥김씨족보’서문에서모든김씨가김 알지의 후손이라고 하고는 ‘동방의 모든 김씨로써 「알지」를 할아버지로 하지 안니한 이가 없다.그러나 세대가이미멀어보첩이증거할데가없으니,지금에 감히 가리켜서 몇 대의 할아버지라 할 수는 없다.’고 했다.그러면서 고려 때 중랑공(中郞公)을 가문의 시 조로 삼았다. 본보에서는 『경현록(景賢錄)』의 ‘한훤 당 김 선생 세계’에 근거해 그 가족사를 기록한다.김 알지의34세손인김보(金寶)가고려조에금오위정용 중랑장(金吾衛精勇中郞將)을지냈다.김굉필선생에 게는 9세조가 되는데 서흥 김씨의 분파 시조로 삼는 다.김보의아들이8세조김덕인이고고려에서좌우위 정용장군이다.그아들인7세조김천록이원나라에서 무장으로 충현교위 관군총파라는 관직을 받고 본국 고려에서도 왜병을 크게 물리쳐 명장으로 ‘광정대부 도첨의시랑 찬성사 상장군 판판도사사 서흥군(匡靖 大夫 都僉議侍郞贊成事上將軍 判版圖司事)’이라는 직위를받았다.진도에서왜병과싸울때포위된배위 로뛰어들어오는왜병을짧은칼로맞아물리쳐온군 대가살아나는공을세웠다.그후일본정벌에서도크 게공을세워원나라도원수로부터칭찬을듣고원나 라로부터 벼슬을 받게 되었다. 나라에서 서흥군으로 봉했고비로써‘서흥김씨’라는관향을쓰기시작했다. 고조부 김선보(金善保)는 봉순대부 판서운관 사(奉順大夫判書雲觀事) 벼슬을 했다. 증조보 김 중곤(金中坤)은 조선에서 과거에 올라 태조, 정 종, 태종, 세조 네 임금을 차례로 섬겼다. 부인인 김굉필의 증조모가 공조전서 곽주(郭珠)의 딸이 었고,증조부는처가가있는현풍으로내려왔다. 할아버지 김소형(金小亨)은 문음(선대에 벼슬한 자녀에게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직을 주는 제도)으 로붕훈랑의영고사(奉訓郞義盈庫使)를지냈고,부 인은 부흥군復興君) 조반(趙볼 )의 딸이다. 부흥군 조반은고려말누이가원나라대상(大相)의부인이 되자북경에들어가영화를누리다가본국으로돌아 왔다. 조선이 개국하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개 국승인을받고‘조선’이란국호를얻어옴으로써개 국공신이되고참찬문하부사를지냈다.아버지김유 는세조때무과에합격하여어모장군행중좌위사용 (司勇)을지냈다.김굉필의어머니는증병조판서행 중추원부사한승순의딸청주한씨다.서흥김씨의세 거지 현풍의 대니산(戴尼山)은 이는 공자의 이름인 중니(仲尼)에서 니(尼)만 살리고 받들 대(戴)를 써 서 ‘공자를 받드는 산’이라 이름 한 것이다. 이 산을 한때는 ‘공자의 뒤를 잇는다’는 뜻의 대니(代尼)로 쓴적이있는데“이것은크게어리석고또외람된것 이다. 다행히 선생(퇴계)께서 꾸짖어 바로 잡았다” 경현록‘사실’에서기록하고있다. 김굉필은 어릴 때부터 활달하고 영기(英氣)가 빼어났으며 특히 정의감이 투철했다. 당시 서울에 서 대대로 벼슬을 한 명문대가의 자제로 자라면서 귀여움을 독차지 했고 영리하며 정의감까지 갖췄 으니 어린 김굉필은이미특출한 아이였다.예닐곱 어린시절동네아이들과함께장난을치면서도아 이들이 김굉필을 두려워하여 피했다. 김굉필은 무 례 하게 굴거나 남을 조롱하거나 거만스러운 사람 이 있으면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바로 잡아야했다.장사치들이 속이 거나 잘못 하는 것을 보면 파는 고기나 두부 등을 갖고 다니는 채칙으로 내려쳐 선생이 나타난다는 소리를듣기만해도모두물건을감추어야했다. 김굉필의 자(字)는 대유(大猷)였으나 스스로는 사옹( 范 翁)이라고불리기를좋아했다고김굉필의20 대 종손인 김백용 선생은 말한다. 사옹은 비올 때 입는 도롱이다. 비를 맞아 겉은 젖어 차갑지만 속은 따뜻하 니‘겉은차갑고속은따듯한한훤(寒暄)과도같은말 이다.선생이평생을강직하게살면서속은언제나활 화산처럼 뜨겁게 불타고 있었음을비치는 말이다.이 에 대해 남명 조식은 “선생이 처음 호를 사옹이라 하 면서 ‘비록 큰 비를 만나서 겉은 젖어도 안은 젖지 않 는다.’하였다.이 두가지 일을 보면 곧 선생의 덕망과 그릇이 근엄하고 두텁기가 천성에서 나온 것이어서 화(禍)가 미치지 않을 것인데도 마침내 화를 면하지 못한 것은 하늘의 뜻이다.”고 안타까워하였다. 특히 김굉필은 아랫사람에게 관대했고 잘못을 용서했으 며,겉으로는엄하게채찍질하더라도따뜻이포옹함 으로써 인간적 온기를 간직하고 있었음이 여헌 장현 광의 「신도비명」에서 나타나고 있다. 김굉필은 19살 이되던성종3년(1472)합천군야로현말곡남고동에 사는 순천박씨에게 장가든다. 장인 되는 사맹(四孟) 예손(禮孫)은 절제사 유성의 아들이며 판윤공 가권 의손자다.원래성주가천에서살았고부인박씨도시 집올때까지는가천에서자랐다.김굉필은결혼한뒤 합천야로근처개울가에조그만서재를짓고한훤당 (寒暄堂)이라고 붙였다. 그때부터 선생을 한훤당이 라고불렀다.한훤당선생이합천야로의처가인근에 한훤당을짓고글을읽었던것은제자김안국의시에 서 잘 그려져 있다. 부인 박씨와의 사이에 4남 5녀을 얻었다.20살에 첫딸을 낳았고 자라서 남부참봉인 진 주하박(河珀)에게출가했다.2년뒤에는둘째딸을낳 았는데 그는 선생의 친구인 이승언(李承彦)의 아들 인 성주인 훈련원정 이장배에게 출가했다.25세인 성 종 9년(1478년) 바라던 첫째아들 언숙(彦塾)을 얻었 다. 자는 사훈(士訓)으로 자라서 전력부위가 되었다. 손자김대(金垈)는호조정랑을했다.29세때셋째딸 을 낳았는데 자라서 정응상(鄭應祥)에게 시집갔다. 정응상은 증 이조판서 사중(思中) 증 승지 사성(思 誠),증승지사경(思敬)삼형제를두었다.사중(思中) 은 또 괄(适), 규(逵, 뒤에 곤수로 개명)와 구(逑) 등 삼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영의정과 좌참찬을 추증 받 은대학자요 명신들이다.정응상의 손자가한강 정구 이니그는곧김굉필의외증손이된다.31살에셋째아 들언서를얻었으나일찍죽고34세되던성종18(1487 년) 10월에 낳은 넷째딸은 선생의 문인인 진사 강흔 (姜欣)의 아들 강문숙에게 출가했다.38살에 넷째 아 들 언학(彦學)을 낳았고 다섯째 딸은 충의위 동래 정 성린에게 출가시켰다.셋째 딸을 시집보내기전에박 씨부인이꿈을꾸었는데붉은기운이집뒤에서일어 나 반공중에 뻗쳐서 둘러 성주 유촌(柳村)으로 들어 가는것을보았다.잠에서깬부인이이상하게여겨알 아보니정응상이유촌에산다는말을듣고는딸을시 집보내니서천정곤수(鄭崑壽)와한강정구(鄭逑)두 선생이그집에서났다.대현의출생은범인과달라진 실로 미리 나타나는 징조가 반드시 있다고 서흥김씨 실기는적고있다. ▶효자김굉필 김굉필이 34세 되던 성종 18년(1487) 12월 12 일 부친상을 당했다. 선생은 죽만 먹으며 너무 슬 피 울어 기절했다가 소생했다. 부친을 오설리 보 로동 언덕에 장사지내고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 3 년 상을 치렀는데 정성을 다하여 묘소를 살폈다. 선생의지극한효성에동리사람들이감화됐다. 아버지 3년상을 마친 김굉필은 드디어 상복을 벗었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혼자 남은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날마다 닭이 울면 일어나 반드시 머리를 빗고 낯을 씻고는 의관을 갖추고 먼저 아버지를 비롯한 조상들의 신주를 모신 가 묘에절하고다음어머님께문안을드렸다. 김굉필의 이런 단호하고 분명한 성격 형성에는 어려서부터 스스로가 선악과 시비의 사리 가치 분 별을 강화시킨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다 항상 예법 을갖추고있던어머니의영향이크게자리잡고있 었다. 어머니 청주한씨는 성품이 엄격하고 예법이 있었다. 아들로 하여금 새벽마다 마루아래서 어른 들에게 문안 인사를 하도록 하는 한 편 조금이라도 마음이 불편하면 얼굴빛을 엄정히 하여 말하지 않 았다.이럴 때면 김굉필은 황송하여 감히 물러나지 를 못했다.그러다가 아들이 공경의 도리를 다하는 것을본다음에야좋은기색을보였다.여헌장현광 이 지은 김굉필의 신도비명에는 김굉필의 어머니 청주한씨의 성품을 이렇게 설명하고 “어머니가 정 색하면 김굉필은 감히 물러나지 못하고 반드시 공 경을 다시 하고 효성하는 도리를 다하여 시간이 오 래 걸리더라도 기뻐하는 기색을 본 뒤에야 물러났 다.”고 적었다. 물러나서는 서재로 가서 흙으로 빚 은 소상처럼 가만히 꿇어 앉아 독서하기를 게을리 하지않았다.그리고저녁이되면다시어머님께문 안하기를 예절대고 하고 밤이 깊도록 책을 펴고 글 을읽었다.선생의부모공경예절과공부는하루도 빠지지 않고 어느 하나 절도에서 벗어나지 않았으 니주위사람들이두려워하고공경해마지않았다. ▶김굉필의관직(官職) 김굉필의 관직근기 지방의 성남(城南)·미원(迷 原)등지에도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나, 주로 영남 지방의 현풍 및 합천의 야로(冶爐: 처가), 성주의 가천(伽川: 처외가) 등지 를내왕하면서사류(士類)들과사귀고학문을닦았 다. 이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소학 (小學)』을 배웠다. 이를 계기로 『소학』에 심취해 스 스로를 ‘소학동자’라 일컬었고,이에서 받은 감명을 "글을 읽어도 아직 천기를 알지 못했더니, 소학 속 에서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았네. 이제부터는 마음 을 다해 자식 구실을 하려 하노니, 어찌 구구히 가볍 고따스한가죽옷과살찐말을부러워하리오."라고 술회했다고 한다. 이후 평생토록 『소학』을 독신(篤 信)하고모든처신을그것에따라행해『소학』의화 신이라는 평을 들었으며, 나이 삼십에 이르러서야 다른책을접했고육경(六經)을섭렵하였다. 1480년(성종 11)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 학하였다. 이때에 장문의 상소를 올려 원각사(圓 覺寺) 승려의 불법을 다스릴 것을 포함한 척불과 유학의진흥에관한견해를피력하기도하였다.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이 이학(理 學)에 밝고 지조가 굳다는 명목의 유일지사(遺逸之 士)로 천거해 남부참봉에 제수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어서 전생서참봉·북부주부 등을 거 쳐, 1496년 군자감주부에 제수되었으며, 곧 사헌부 감찰을거쳐이듬해에는형조좌랑이되었다.1498년 훈구파가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해 무오사화를 일으 켰을 때,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고 하 여 장형을 받고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 조광조 (趙光祖)가그에게서〈소학〉을배운것은이때의일 이다. 2년 뒤에 유배지가 순천으로 옮겨졌다가 1504 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당인이라는 죄목으로 죽음을 당했다. 중종반정 뒤 신원되었으며, 1507년 (중종 2) 도승지에 추증되고 1517년 홍문관부제학 김정(金淨)등의상소로다시우의정에추증되었다. ▶무오사화와김굉필의유배 사관들이 『성종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실록청(實 錄廳)에서지금까지모아둔사초들을전부꺼내어서 내용을 추려나갔다.실록 편찬 총책임자였던 당상관 이극돈은 사초를 확인하다가 깜짝 놀랐다.김일손의 사초에서 자기가 세조의 왕비 정희황후 상중에 기생 을 끼고 논 것이나 뇌물을 받은 일 등이 기록되어 있 음을 발견한 것이다. 이극돈은 하늘이 노래졌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자신은 큰 벌을 피할 수 없게 된 것 이다.김일손에게사정도하고협박도했다.“이내용 을 빼주면 앞으로 승진을 도와주겠다.”고 협상을 시 도했지만 거절당한다.사림 출신에 비판의식으로 무 장된김종진의제자김일손이승낙할리없는일이었 다.앙심을품은이극돈은김일손의약점을잡으려고 사초를 뒤지다가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포함된것을확인한다.조의제문은진나라말기항우 (項羽)가 조카인 어린 의제(義帝)를 모시고 창의군 (倡義軍)을 일으켰다가 세력이 커지자 의제를 죽이 고패권을차지한사실을비판한내용이다. 여기에다 김일손은 이 글을 사초에 담으면서 “이 로써 충성스런 울분을 표현하였다.(以寓忠憤)”라는 평까지 붙였다. 그러니 ‘조의제문’은 단순히 불쌍한 의제를 조문하는 글이 아니었다. 결국 김종직의 ‘조 의제문’은조카를죽인항우를빗대서단종을죽이고 왕위를찬탈한세조에대한반감을표현한글이었다. 이극돈은이사실을유자광에게알리고유자광은이 것을세조가단종으로부터왕위를빼앗은일을비방 한 글이라며 사림파를 싫어하는 연산군에게 고자질 하였다.그렇잖아도선대성종이후로사헌부사간원 홍문관등삼사의위세가세어지고사림의세력이커 지는데대해불만을갖고있던연산군이었다.연산군 은김일손을비롯한사림파관련자들을대거체포해 서심문한다.그리고이와같은죄악은스승김종직이 선동한것이라하여이미죽은김종직의관을파헤쳐 그시체의목을베었다.부관참시(剖棺斬屍)이일로 사림파 김일손 권오복 이목 허빈 권경유 등은 선왕 (先王)을무록(誣綠)한죄로참수되었고,정여창,강 겸, 이수공, 정승조, 홍한, 정희랑, 등은 난을 고하지 않은죄로김굉필,이종준,이주,박한주,임희재,강백 진,등은김종직의제자로서붕당을이루어조의제문 의 삽입을 방조한 죄로 멀리 유배됐다. 당시 30명이 형을받고일거나유배되었으니무오년에일어난사 화였고,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 당인이라 는죄목으로극형에처해진것이다. ▶맺음말 김굉필은죽은뒤더욱유명해졌다.그의작품이많 이 남아 있지 않았고 그의 학문적 완성이 저서로도 남아있지않았지만그를통하지않고서는도무지조 선시대성리학을이야기할방법이없다.그러니김굉 필이전의모든성리학은김굉필에와서야비로써실 체를드러냈고,김김굉필이후의모든성리학은김굉 필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니까 김굉필이 도(道)의 종주(宗主)가된것은지극히당연하다.정몽주가도 학의 시조라면 김굉필은 도학의 정점이었다.그로인 해조광조를거쳐김안국이언적이황으로조선의도 학이이어졌다.갑자사화로인간김굉필은생을마감 했다.그러나 김굉필이죽은뒤 그가죄가없음을,아 니 오히려 그의 덕을 숭상하고 그의 벼슬을 높여야 한다는상소가끊이지않았다.그는연산군이왕좌에 서끌려내려온뒤중중이등극하면서사면된다.그리 고 나라는 그의 벼슬을 높인다. 그의 부인 박씨에게 정경부인 시호가 내려지고 아들들에게는 음직과 벼 슬이내려진다.연이어그런정도로는부족하다는소 가잇달아임금에게올라오고임금은김굉필을‘대광 보국숭록대부의정부우의정겸영경연사’라는벼슬 을 증직한다. 선조 8년(1575년)에는 문경(文敬)이란 시호도 내린다.문(文)은 “도덕이 있고 들은 것이 넓 다”는 뜻이고 경(敬)은 “새벽에 일어나고 늦게 잠자 서 깨우치고 조심함”을 이른 것이다. 지금 김굉필을 다시 불러내는 것은 이 시대 지식인의 사명을 새로 인식하기위해서이기도하다. 김굉필이 꿈꾸었던 세상, 진실이 대우받고 인 간 사회가 질서를 유지하고 그런 가운데 서로 위 하면서 아름답게 사는 세상은 지금도 여전히 진 행형이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김굉필에게 빚 을 지고 오늘을 살고 있는 셈이다. 오늘따라 김굉 필선생이더욱그립다. /자료제공한훤당20대종손김백용옹 글정리/사진박상섭편집국장(parkss1012@ha nmail.net) 순천박씨부인과한훤당김굉필 선조 유지를찾아븣 소학당-경남문화재자료제137호.경남합천군가야면매안리989.사맹공박예손이사위한훤당김굉필과자녀들의공부를위해지 은학당이다.①소학당강당②화산사(남계박이문을비 롯한안동권씨벽진이씨의현조의위패를봉안)③송현사(김굉필정여창의위패봉안)④협문⑤관리사⑥사주문(정문) 도동서원전경-대구달성군구지면구지서로726.도동서원(達城道東書院)은조선오현의한사람인한훤당김굉필의학문 과덕행을추모하기위하여1568년(선조1) 지방유림들의공의로현풍현비슬산기슭에세우고쌍계서원이라했다. 임진왜 란때소실되었으나,그후1605년(선조38)지금의자리로이건하여사우를중건하고당시의동명이보로동이었으므로보로 동서원이라불렀다.그후2년뒤인1607년사액서원으로승격되면서공자의도가동래하였다는의미로도동서원이라고하 였다.이때동(洞)이름도도동리로개칭되었다.1678년(숙종4)정구(鄭逑)를추가배향하였다.행사와교육이이루어지는중 정당·사당·담장(達城道東書院中正堂·祠堂·담장)은1963년1월21일대한민국의보물제350호로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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