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page

뱚2019년 10월 31일 (음 10월 4일) 목요일(신라기원 2076년) 인체파동원리 http://cafe.daum.net/jjongboo79 손을 얹으면 아픈 곳이 낫는 보석체험,상주낙동강역사 이야기관. 문의:010-2336-7582 2007년1월24일창간 제154호 12면(월간)뱚 뷺팔대군의 으뜸으로 밀성대군을 봉하였는데 지금 밀양부에 이궁대, 풍류현, 세루정이 있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라왕 이 노닐던곳이라한다.대군은신라왕(경명왕)의적장자로서 이곳에 분봉 받았다.이 본궁에는 처음에 신라의 어진 이가 있 었으나 새로운 백성들이 동화 되었으니 이는 동경의 태평성 세라 할 것인즉 궁,현,정의 이름도 다시 일반 풍속에 딸린 말 이다.뷻 밀성대군을 일러 전해지는 것으로 대군의 치세를 일컫 는 것이다. 박문(朴門)에서 가장 번성한 후예로 이를 반영하 듯 대군의 유지를 기리는 추향제례가 지난 7일 밀양의 밀성대 군단,8일 밀양 무안면의 경덕단,9일 경북 경산의 율산서원에 서각각봉행됐다. 밀성재의 춘향은 6일저녁전국에서많은종원들이입재(入 齋)하여개좌를열고전례위원회에서1개월전부터추천을받 아 인선한 오집사(초·아·종헌관, 집례, 대축)의 추인과 제례 를도울내외집사의분정을3명의조사(曹司)와5명의공사원 (公事員)을각각추대하여마무리했다. 다음날인7일오전8시직일을맡은진국명예회장으로부터 정당에서 제관을 상대로 제례에 임하는 자세와 절차 등을 숙 지하고, 10시 우천관계로 정당에서 순제 집례관의 창홀에 따 라 중희(仲熙) 행상공파종회장, 석휘(錫輝) 前농민신문사 사 장, 지금(智金) 청년회 지도위원 순으로 각각 헌작하고 을수 (乙銖)행산공파감사독축으로30여분에걸쳐진행되었다. 대군단 제향에 이어 아드님인 삼한벽공도대장군 휘 욱, 손 자 요동독포사 휘 란의 제향은 경내에 있는 익성사에서 종식 집례관의집전으로이어졌다.▶제관은사진설명참조 밀성재는 박성의 성지인 밀양시 내일동 331번지 아북산 남 쪽 기슭에 자리한 밀성박씨의 재소이며, 유래를 살피면 서기 1925년(乙丑)에 13道대종회의 공의로 박씨 종약소를 설립하 여 종약소의 주관으로 거국적인 사업으로 영남루북정(北庭) 에 발현된 대군 유지에 설단하게 되어 부대사업(附帶事業)으 로 재사건립을 하게 되어 부대사업(附帶事業)으로 재사건립 을 계획하여 밀양시 밀양면 내일동(당시) 소재 아북산 산하 토지 수 천 평을 대지용으로 매입하였으나 십 수 년이 지나도 록 건립공사가 착수되지 못하다가 1971년 춘향 후 임원을 개 임하여 영남루 북정(北庭)의 대군단을 상망하는 방위에 정하 여 건축설계와 배치를 심의하여 공사의 규모를 확정, 1972년 에 정당의 정초(定礎)로서 기공하여 전 공정을 착수한 후 197 8년(戊午)에 전 공정이 준성(竣成)하여 정당에 밀성재(密城 齋)라편액을달았다. 한편 이날 제향 전 개좌에서 원주 대종회 장은 많은 종원들 이 성원하여 대종회가 잘 운영되고 있으나 그래도 아직 해결 하지 못한 일들이 산적하여 이번 추향을 계기로 더욱 돈독하 고 애종하는 대종회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하고 제관으로 천 거된 종원은 물론 참제원 모두가 경건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제례에임해줄것을당부했다. /박봉준명예기자(경기고양시지부) 밀성대군추향대제봉행 경덕단,율산서원등븣적장자로밀성을식읍으로분봉받아태평성세이끌어 밀성대군단소-밀양영남루광장:1924년 윤 5월 13일에 큰 비가 쏟아져 겉 흙이 패인 뒤에 영남루 북쪽 뜰에 하나의 큰 묘자리 흔적이 있어 여러 종 인들이 확인하여이듬해총독부로부터12평을인가받아 세우고 븮密城大 君之壇븯의六字는이강공전하(李堈公殿下)의전서(篆書)음각하였다. 밀성대군제관-오른쪽부터중희,석휘,지금,을수,순제順 익성사제관 (왼쪽부터휘욱/휘난 順):초헌관 순오(淳午)/ 창재(昌在) 아헌관 주정(柱廷)/임택(任澤) 종헌관 재상(載相)/수한 (秀漢) 분헌관 홍제(洪 濟)대축동상(東相)/종대(鍾大)집례종식(鍾植) 경명왕의 아들로 사벌주를 식읍으로 사벌대군에 봉해진 후 본국과 연락이 두절되어 스스로 사벌국을 세우고 신라수성을 위해 고군분투한 사벌국왕의 추향 제례가 지난 23일(음9.25) 오전 11시 능침(陵寢)이 있는 경북 상주시 사벌면 화달리 능 소(陵所)에서 홍민(洪玟, 34世) 판서공 后 남포공종중 회장 (前 순천향교 전교)의 집례로 말석(末錫, 33世) 초헌관의 분 향과 전폐례에 이어 헌작하고 병기(炳基, 36世) 대종회 前사 무국장이 축관으로 독축했다. 이어 양근(亮根,35世), 회승(會 昇,38世)사벌왕릉 참봉이 각각 아헌과 종헌관으로 헌작하며 40여분에걸쳐엄숙한분위기속에질서정연하게봉행되었다. 이날 제향은 상주(상산)박씨대종회(이하 상주박씨) 대종 회 산하 지파에서 윤번제로 주관함에 따라 판서공파종친회 (회장 인기)에서 주관, 제관을 맡은 종원들이 전날 순천에서 출발 상주에 도착 제례에 관한 예절 등을 숙지하고,당일 여행 연습을 하는 등 만전을 기해 참여한 종원들로부터 호평을 얻 었으며,신라 시조왕릉 박수복 참봉을 비롯한 6명의 능참봉이 참례하였고, 사주박물관에서는 제례 전 과정을 녹화하여 자 료로남기는취재가이어졌다. 한편 이날 제례 후에는 회승 참봉의 임기(1년) 만료에 의해 신임 박 원(30世, 경북 영양) 현종이 사벌왕릉 참봉으로 도임 하였으며, 판서공 후 남포공종중 박재근 총무와 조선대 4학년 박유나 학생에게 효행상과 의림장학회 장학금이 각각 전달되 었다. 재근 현종은 9남매 중 장남으로 때어나 천성이 정직하고 효 성이 지극하여 어려서부터 어른을 섬기고 형제간의 우애가 두터워 주위에서 칭송이 자자하고 특히 공직에서 퇴임 후 숭 조정신 진작과 문중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선조 행적을 정리하였으며 90세의 노모를 분양함에 예(禮)에 어긋남이 없 어 상주박씨 위상을 높여왔다. 특히 임란공신 남포공(휘 대 붕)종중의 총무를 맡아 종원들의 숭조정신 함양과 돈독한 정 을 나눌 수 있는 조력자 역할을 성실히 수행함으로써 타의 모 범이되어와이번수상에많은종원들의축하가이어졌다. 이날 장학금을 전달한 의림장학회는 1982년 재일동포이자 대종회 병순 전 회장의 형님인 병용 현종(전남 순천 출생)이 사벌왕릉 보존회에 왕릉 성역화 및 종중발전에 사용 하도록 당시 4천만원의 거금을 헌성(獻誠), 보존회에서는 병용 현종 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아호를 따 의림장학회를 설립하고 숭 조정신이 투철하며 학업 성적이 우수하여 타에 모범이 되는 학생을 추천받아 심의를 거친 후 매년 장학금을 지급하여 왔 다. 지금까지 200여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수여하여 지역민 들과종원들로부터호평을받고있다. 사벌국은 경명왕이 아들 휘 언창(彦昌)을 사벌 방어장(沙 伐防禦將)으로 삼 아 사 벌 주 의 수 호 (守護)를 명(命)하 자, 그는 직접 군대 (軍隊)를 이끌고 견훤(甄훤萱)을 격 퇴시킨 후 지금의 사벌동(沙伐洞)과 흔국촌(欣國村)에 방 위 본 영 ( 防 衛 本 營 ) 을 두 고 병 풍 산 성(屛風山城)·이부 곡 산 성 ( 吏 部 谷 山 城)·자산산성(子山 山城·일명 자양산성) 등을 축조(築造), 제 반군비(諸般軍備) 를 강화하여 내침하는 적과 대항하였다. 그러나 고려와 백제 등 혼돈의 시대에 신라는 풍전등화에 이르렀고, 급기야 사벌 주는 본국(本國)과의 교통(交通)이 두절되고 고립상태에 빠 짐으로써 918년(경명왕 2) 자립으로 사벌국(沙伐國)을 세워 국도(國都)를 사벌동(沙伐洞)과 흔국촌(欣國村)에 정(定)하 고 성루(城壘:사벌왕성) 및 궁전(宮殿)을 축건하여 둔진산 (屯陳山)을 군사(軍士)의 주둔지로 수비의 완벽을 기했다.그 러나 927년(경순왕 3) 9월 낙동강을 도하(渡河)하여 급습해 온 견훤 군사를 맞아 싸웠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항전 (抗戰)13년,재위11년만에패망(敗亡)하게되었다. 한편대종회종순회장은인사말을통해원근거리를마다하 지 않고 참석해준 종원 여러분과 내외 귀빈들에게 감사드린 다고 말하고 임기동안 사벌대왕의 업적과 문화재보존관리, 종원여러분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선대 회장님의 업적을 계승 발전시키는데최선을다할것을다짐했다. /박상섭 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신라기원2076년사벌국왕추향봉행 사벌국왕추향이 지난 23일전국의성손400여명이 참석질성정연하고엄숙하게봉행된가운데제향후제관들이 한자리에모였다 .왼쪽다섯번째부터 직일인기,초헌관 말석,아헌관 양근,종헌관 회승,집례홍민,축관 병기,도임참봉원順. 항전13년븡재위11년,고군분투한유지기려븣판서공파주관 병기대축관이 독축하고있다. 박종송 대종회장(中)이 효행의 모범을 보여준 박재근 남포공종중 총무(右)와 박유나 학생의 장학금을어머니에게전달하고함께하고있다. 이날 효행상의 부상으로는 은수저 1셋트, 장학 금으로는1백만원이 전달됐다. 태조 왕건이 의형제로 가장 신뢰했던 고려 개국공신 면천 군 박술희 장군 의 설 단 제 막 식 과 고유제가 지 난 14일(음9.16) 11시 충남 당진 시 면천면 성상 리 면천읍성 몽 산 관광지에서 지역 단체장과 내외귀빈·후손 등이 참여한 가운데 성황 리에열렸다. 이날 제막식은 면천박씨대종회 박경 석 부회장(경희대명예교수, 공학박사) 의 사회로 내빈소개, 경과보고, 제막식, 종친회장 인사, 내·외빈 축사, 고유제 봉 행순으로진행됐다. 박연용 대종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1천 여 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야 시조님의 관 향에 설단을 설립하게 된 것을 후손들로 서 너무나도 죄송한 마음을 금할 길 없으 나 이제라도 관향의 제 자리에서 후손만 대로 평안하게 모시게 되어 큰 기쁨으로 생각하며 그간 협조해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린다고 말하고 이곳에서 태어 나 자라는 어린이들이 이 지역에서 탄생 한 위대한 위인의 큰 뜻을 깊이 새겨보면 서 성장하여 훌륭한 인재들이 많이 배출 될 수 있기를 빌고 많은 시민 학생 국민 들이 방문하여 뜻을 정리해 보신다면 큰 의의가 있을 것이라며 성지로 승화되길 기대한다는뜻을밝혔다. 고려건국 1100주년 기념사업회 윤용 혁 회장은 태조 왕건이 가장 신뢰했던 장 군이었으나 결국 한을 안고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운명한 장군의 설단이 면천의 역 사와 함께 더 알려져 역사를 회고 할 수 있었으면 한다고 하였으며, 김인재 면장 은 면천의 자랑인 박술희 장군의 설단을 적극 홍보하여 학생들이 찾아와 학습의 현장으로 만들 수 있도록 적극 뒷받침하 고 노력하겠다. 박철준 박술희장군 기념 사업회장은 2009년 9월 11일 기념사업회 발족이후 이렇다 할 성과를 보지 못했으 나 이번 종중에서 설단을 세워 이를 계기 로 기념공원화하고 전국의 많은 사람이 찾아와 고려사의 시작은 이곳 면천에서 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강 형철 박술희 장군 기념사업회 상임고문 (복지겸장군기념사업회장) 당진의 큰 문화재로 승화시키도록 함께 노력하자 며각각내외빈축사를하였다. 면천박씨대종회는 1980년 시조인 박 술희 장군이 당시 전장에서 활약하였다 고 추정하는 의정부시 민락동에 종친들 의 성금으로 추모지단인 면천대를 설단 하고 매년 4월에 제향을 받들어 왔다. 그 러 나 의정부시 개발사업에 편입 공원화 하여 충효시설로 남기고, 장군의 출생지 에 설 단 키 로 하 여 종 원 들 의 성 금 약 7 억 여원으로 설단과 함께 주변을 기념 공원 화하여 면천을 찾은 관광객들에게 면천 이 낳 은 성 의 유 적 으 로 알 리 고 자 사 업 에 착수이날제막식을갖게되었다. 설단 모형은 의정부시에 있는 설단과 모형을 같게 하고 보령에서 생산된 오석 으로 5M의 비신과 쌍용으로 조각된 비 수를 올려 웅장함이 드러난다. 전면에는 장군의 관직과 시호, 휘자를, 뒷면에는 공 의 공 적 을 측 면 에 는 공 의 후 예 의 유 래 를새겼다. 면천면 관광단지에는 면천읍성이 복 원되고 몽산산성을 중심으로 고려개국 의 역사유적이 복원되고 있어 그 중심의 인물로 면천에서 태어나 고려개국의 혁 혁한 공을 세웠던 면천군 엄의공 박술희 장군을 기리는 기념사업회가 태동되고, 이번 건립된 설단과 기 념공원이 면천의 주변유적지와 더불어 국내외 관광객 방 문 을 유 도 할 유 서 깊 은 관 광 지 로 거 듭 태 어날것을지역민들은기대한다. 면천박씨의 득관조(得貫祖,시조)인 박술희(述熙) 장군은 시조대왕 휘 혁거 세(諱 赫居世)의 25世로 파사왕(婆娑王 -신라 5대왕)의 후손이며, 망부석(望夫 石)으로 유명한 신라 충절의 대명사인 관설당 박제상(觀雪堂 朴堤上)의 9世로 서 삼중대광(三重大匡) 휘 득의(諱 得 宜)의 아드님으로 혜성군(현 면천)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호협하고 용맹스러 우며 특히 신의가 출중하였다. 고려태조 왕건 (高麗太祖 王建)을 도와 후삼국통 일(後三國 統一)과 고려창업(高麗創業) 에 크게 공을 세웠으며. 그 후 태조가 승 하할 때에는 편전(便殿)으로 친히 불러 후사(後事)를 부탁하며 훈요십조(訓要 十條)를 전수(傳授)했다고 한다. 이후, 오직 고려 태조와 2代 혜종(惠宗)을 위 하여 온갖 충성을 다 하다가 정치적 딴 뜻이 있는 간악한 무리들에 야합하지 않 고 끝 내 이 들 에 의 하 여 현 강 화 도 갑 곶 (甲串)에서희생되었다. 그 후 정국(政局)이 안정되면서 사필 귀정으로 무고임이 밝혀져 모든 관직이 회복되고 엄의(嚴毅)라 시호(諡號)를 받고 혜종묘정 (惠宗廟庭)에 배향(配 享) 되었다. /박상섭 편집국장(parkss1012@ hanmail.net) 고려개국공신면천군엄의공박술희장 군설단제막식및고유제봉행 면천의 자랑 학생들의 학습현장과 관광지로 승화 기대 박연용 회장이 인사말을 하고있다.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