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page


184page

조동호는 1908년 측량학교(測量學校)에 입학하여 수학하던 중 여운형(呂運亨)과 교우하였다. 1914년 여운형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 난징[南京]에 있는 진링대학[金陵大學] 사범과에 입학하였다. 1918년 8월 상하이[上海]에서 여운형·장덕수(張德秀)·김철(金澈)·선우혁(鮮于爀)·한진교(韓鎭敎)등과 함께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하고, 파리강화회의와 미국 윌슨대통령에게 제출하기 위한 ‘조선독립청원서’를 여운형 등과 함께 영문으로 작성하였다. 1919년 4월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충청도의원(忠淸道議員)과 국무위원을 겸직하였고, 임시정부 임시사료조사편찬부(臨時史料調査編纂部) 위원으로 재직하면서 이원익(李元益)·김병조(金秉祚) 등과『한일관계사료집(韓日關係史料集)』4권을 완성해 국제연맹에 제출하였다. 1919년 차리석(車利錫)등과 함께 상해판『독립신문』발간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921년 한·중 친선 및 한국독립과 중국혁명을 위한 상호협조를 목적으로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조직하고, 한국측 대표로 참석하였다. 1922년 김구(金九)·최석순(崔錫淳)·여운형 등과 함께 발기인으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창립하였다. 한국노병회는 ‘10년 동안 1만명의 노병 양성과 백만원 이상의 전비 확보’를 목표로 하여 조직한 단체였다. 이 무렵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그는 국내에서 사회주의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1923년 말 귀국한 후, 표면적으로는 동아일보 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1925년 조선공산당이 창당할 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이때 그는 당의 강령과 규약을 기초하고,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기 위한 대표로 모스크바에 파견되었다. 모스크바에서 상하이[上海]로 돌아와 조선공산당 상해지부에서 활동하던 중 1928년 2월 상하이일본영사관 경찰에 붙잡혀 4년의 옥고를 치렀다. 1932년 11월 출옥 후 조선중앙일보 논설부 기자로 활동하는 한편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벌이다가 1934년 1월 다시 일경에 검거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44년 8월 일본의 패망을 확신한 그는 여운형과 함께 조선건국동맹(朝鮮建國同盟)을 조직하였으며, 선전부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