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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양재 鳳陽齋 역사 HISTORY OF BONGYANGJAE 삼기 대평산음에 봉산재가 있었으나 봉기리 산소까지 거리가 멀어 1925년(을축년) 봄에 문중협의로 용주면 봉기리 236번 지에 봉양재 신축하였다. 그 후 1993년 5월 13일 진주 임시총회에서 중건안을 확정하고 1996, 1997 년에 부지를 매입하였으 며, IMF로 모금등의 어려움을 겪은 후 2004년 2월 29일 구재실 철거, 3월17일 기공식, 7월 11일 상량 식, 2012년 11월 17일 준 공식을 진행하였다. ■ 봉양재 중건기 鳳陽齋 重建記 밀성박씨(密城朴氏)는 신라(新羅)와 고려(高麗) 이래로 온 나라를 통틀어 드러난 성씨(姓氏)가 되었 다. 고려 말 조선 초(麗 末鮮初)에 이르러 송은선생(松隱先生) 충숙공(忠肅公) 같은 이는 문장(文章)과 풍절(風節)로서 한 시대의 본보기가 되었는 데, 그 아들인 우당(憂堂), 인당(忍堂), 아당(啞堂), 졸당(拙堂) 네 형제가 마치 지란(芝蘭)과 옥수(玉樹 )처럼 광채가 뒤섞이어 서로 비치었다. 이로부터 오백년(五百年)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그 자손의 수(數)가 번성하여 거의 한 지방에 두루 퍼지었다. 우성(佑成)은 밀성(密城)의 향인(鄕人)으로서 교유(交遊)하는 사람으로 박씨(朴氏)가 많았는데, 갑신년(甲申: 2004) 겨울 에 졸당공파대종회장(拙堂公派大宗會長) 종현(鍾現)과 그 종인(宗人) 등줄(登茁)이 고양(高陽)의 우 거(寓居)로 우성(佑成) 을 찾아와서 말하기를 “우리 졸당선조(拙堂先祖)의 산소가 합천(陜川)의 봉기(鳳基)에 있어, 해마다 서리가 내리면 원근(遠 近)의 자손들이 모두 와서 향화(香火)를 받드는데 정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산소 아래에 있는 재실(齋 室)을 봉양재(鳳陽齋)라 하는데, 실지로 자손들이 제사를 지내고 성묘(省墓)를 할 때 제숙(齊宿)의 장소로 삼고 있습니다. 왕년 에 중재(重齋) 김공(金 公) 황(榥)이 지은 기문을 그 헌미(幹楣)에 달았으나, 세월이 또한 오래되어 재사(齋舍)가 허물어져 무 너짐에, 종현이 그 의논 을 주도하고 여러 일가들이 뜻을 모아 건물을 철거했습니다. 그 옛터를 개척하여 넓히고 그 재목을 새 로 구입하여 경영(經營) 하고 축조(築造)하기를 한해가 걸렸는데 새 건물이 날아갈 듯 산뜻합니다. 이에 우리 선생의 글을 얻어 그 사실을 기록함으로 써 그 외관(外觀)을 꾸미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연방실기(聯芳實記)』라는 한 책자를 내어 보이면서 말하기를 “실기(實記)는 상·하(上下 ) 두 편이 있는데 그 하 편(下篇)은 우리 졸당공의 시문(詩文) 몇 편과 그 부록(附錄) 문자로 되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우 성(佑成)이 그 대강의 줄 거리를 훑어보고 돌려주며 이르기를 “전에도 봉양(鳳陽)이라 한 것은 봉산(鳳山)의 재실이 별도로 있 어서이고, 삼기(三岐)의 대평(大平)에 있는 것 또한 졸당공 묘소의 재실에 소속된 것이다. 곽면우(郭俛宇) 징군(徵君: 徵士의 존칭)의 기문(記文)에 상세히 그 경위(經緯)가 서술되어 졸당공의 덕의(德義)의 추술(追述)에 정성을 다하였고, 중재(重齋) 김공(金公)의 기문에도 또한 그 스승의 말씀을 더욱 보완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선조의 아름다움을 기리고 찬양함에 거의 유감 이 없는데, 다시 무엇으 로 얽어 중언 부언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두 사람은 말을 합쳐 대답하기를 “재실이 이미 중건(重建)되어 마땅하 별도의 기문이 있어야 하거늘 , 선생이 지어주신 글이 없어서야....”라고 하였다. 때문에 그 집의 짜임새를 대략 말하건대 재실은 무릇 5간으로 가운데에 2간 은 당마루(堂廳)로 하였 고, 동·서(東西)로는 방(房)을 두었는데 동쪽 방이 1간이요 서쪽 방이 2간이다. 재실 앞쪽에는 별도로 동재(東齋)와 서재(西 齋)를 건립하니 각각 3간인데 동재의 편액(扁額)은 추사당(追思堂)이라 하고 서재의 편액은 정화당( 情話堂)이라 하였다. 나 아가 그 남쪽에는 다시 문사(門舍) 3간을 짓고 편액을 내의문(來儀門)이라 하였다. 비록 규모는 간략 하게 갖추었으나 이른바 ‘그런대로 완전하고 아름다운(苟完苟美)’ 집이 된 것이다. 우성(佑成)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오늘날 세속(世俗)의 기호(嗜好)가 크게 변하여 오로지 물질(物 質)만을 숭상한다. 옛 성 현(聖賢)들이 인륜(人倫)의 기강(紀網)을 유지함으로써 세상의 가르침을 확고하게 세우고자 한 일이 모두 황폐함을 면하지 못해, 지각(知覺)이 있는 인사(人士)들이 자나 깨나 걱정하고 탄식을 한다. 이에 오늘 박씨 일문(一門 )이 먼 조상을 추모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