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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9월30일 월요일 7 (제153호) 기 획 밀성박씨밀성부원군행산공파 (杏山公派) 신간대동보편찬안내 뱚○수단접수기한:2019년 12월 31일 뱚○수단접수처: 뱚뱚인터넷:홈페이지www.hengsan.co.kr 포털사이트(네이버,다음)“행산원”검색 뱚뱚우편 :경남 거제시 아주동 해와루 106동 606호,박행산 뱚뱚문의 :010-9689-2525, 사무실 055-731-1206,팩스 055-731-1214,행산대동정보원 ※수단이접수되지않은종원은전자대동보에등재되지않으며,추후등재시수단비용이점차증액될예정이 오니 가급적정하여진기한내에완료될수있도록협조바랍니다. 뱚■수단유사명단: 뱚뱚◆편수위원장 박수옥(010-7402-6572) ◆찬성사지파 박수경(010-7918-7567),박규석 (010-9370-2358),박진 흠 (010-3541-2344),박정현 (010-4331-9093) ◆광산지파박정웅(010-8561-2747),박을수 (010-3572-3335) ◆풍산지파 박재화(010-2557-9317),박인천 (010-3808-1909) ◆전주지파 박찬우(010-8642-7276),박철균 (0 10-3251-7489)◆소윤공지파박봉호(010-4655-1956),박광희 (010-4420-6822)◆진사공지파 박경무(010-4952-1153), 박종대 (010-7276-0607) ◆ 대구광역시 및 경상북도 일원 박규석(010-9370-2358), 박준 석(010-3829-9809) 밀성박씨밀성부원군행산공파대종회는1997년정축보수보이후20여년이경과 함에따라최근새롭게개발된전자보서시스템을활용하여신간대동보를발간하 기로 하고2018년11월부터인터넷및우편등으로수단접수를진행중에있습니다.정 해진수보기간동안에가능한많은현종님들이동참하여소중한우리 의 혈 통 에 대 한 근 본을올바르게하고가보(家寶)로자손만대보전될수있도록적극적인협조를당부 드립니다. -아 래- ※ 각 소문 중 별 수단 유사 가 정 해지 지 않은 종 중 은 빠 른 기간 내 에 유사 를 추대 하여 수보 / 발간 에 도움 이 되 도록 협 조하여 주시 면 감사 하겠 습니다 . 아울러 , 주변에 계시 는 행산 공 파 일 가 분 들 에 게신간대동보발간소식을널리알려주시기바랍니다. 밀성박씨밀성부원군행산공파대동보편수위원장박 수 옥 승문관(承文館) 교리(校理)로 재임 시 국사 여지승람을 찬 술하였고 1539년(중종34) 봄 강릉부사로 부임하였는데, 지난 해의큰흉년으로굶주리는부민(府民)들이아주많아서나라 에 상소하여 곡식을 들여와 부민들을 살렸고 선생이 받은 록 (祿)으로 세금과 요역(나라에서 구실대신 시키던 일)을 면제 하여주었으며학교를설립하여인재를양성하였다. 1545년(인종원년) 봄 내직으로 옮기자 부민들이 더 있기를 간청하며 애원하였고 그 후 선생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 하여 성금으로 모아 븮府使朴光佑去思碑븯를 강릉시 명륜동 향 교 구내에 세우고 정면1칸 측면1칸 맛배지붕의 풍판(風板)을 달은 목조와집(木造瓦葺)의 비각(碑閣)까지 동시에 세워 지 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강릉의 임경당(臨鏡堂), 오죽헌(烏 竹軒), 해운정(海雲亭), 보진당(빡眞堂), 명암정(鳴岩亭) 등 에도 선생이 친필로 시를 쓴 현판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그 글 이당시의명문장(名文章)으로이름이높다. 홍문관교리, 사험부집의, 사간원사간지제교로 승진하였으 며, 1544년(중종39) 11월 10일 왕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 였다가 1년 만에 승하하자 1545년 명종이 12세로 즉위하자 문 정왕후(文定王后) 윤씨(尹氏)의 수렴청정(垂簾聽政)시 그 친정 동생 윤원형 등 소인배가 음모한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자임금님용안을대하여국정(國政)을바르게할것과 윤원형의 제거를 직간(直諫)하다가 대궐 뜰에서 곤장 60에도 불복하지 않고 감옥에 갇힐 때 븮求仁得仁하니 又何怨尤 인을 구하려다 인을 구하였으니 무었을 원망하리오븯하였다. 문정 왕후가이말을듣고형벌을중지하고봉산역(鳳山驛)으로정 배(유배)명령을 내렸다.유배 길로 돈의문(敦義門)을 나오는 데 악형의 장독으로 생명이 위태로웠다. 영결 차 나온 친구가 참상(慘狀)을보고눈물을흘리며말조차하지못하니말하기 를 삶을 버리고 의리를 따르니 하늘과 땅에 부끄러움이 없다 하고 나의삼자(三子)를그대가아니면누구에게부탁하리요. 학문은 힘쓰되 과장(科場)은 나가지 말라하고 절명하니 명종 원년(1545년)10월 5일 향년 51세이다. 1570년(선조4) 율곡선생이 을사사화에 피화(被禍)된 명현 들의 억울한 사실을 설원(雪 쪼)해 주고자 41차례의 상소를 하여 23년만에 선생의 관직과 재산을 회복하였다.(梅山錄 과 東儒師友綠) 또, 1687년(숙종13) 우암 송시열이 묘표(墓表) 를 찬술(撰述)하였고 1710(숙종36)에 유림에서 청주의 송천 서원(松泉書院)에배향하였다. 필재공의 장자 수(受)는 조정에서 사포서사포, 공조좌랑, 토산현감, 도사 등의 관직을 받았으나 선고(先考)의 유언에 따라 관직에 나가지 않았으며, 후사가 없어 종형 윤양(尹楊) 의 셋째 장유(長裕)로 하여금 후사를 이었다. 차남 용(容)은 통사랑으로 부친 필재공의 유언에 따라 누차 천거가 있었으 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독서하면서 주변을 관상하고 즐기 니 스스로 속된 것을 벗어났다.삼자 의(宜)는 처음 벼슬이 감 역(監役)으로 나아가 양주목사가 되고 아들 은생(殷生)이 정 사공신이되어호조참판에증직되었다. 아들둘을두었으니장자은생은무과에급제하여은성부사 로 병자호란에 정사훈1등으로 토산에서 전사 병조참판에 증 직되고 차자 정생(定生)은 돈녕부참봉으로 사복시정에 증직 되었다. 찬성공파는 이와 같이 율촌공파, 금서재공파, 필재공파로 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중에서도 율촌공파가 제일 번성 였으며,다음은금서재공파와필재공파이다. 찬성공은 고려조 삼중대광 보국숭록대부 첨의찬성사로 이 후 후 손 들 이 관 직 에 중 용 되 면 서 개 경 과 한 양 에 서 주 로 거 주 하였으나 조선조 기묘사화를 정점으로 한양에서 남하하여 충 청북도 청주 지역을 새로운 세거지로 정한다. 진사로 선공부 정을 지낸 휘 증( )이 처음 청주에 입향했다.그의 아들 율촌 공(휘 배)이 충암(沖庵) 김정(金淨), 규암(圭庵) 송인수(宋 麟壽) 양 선생과 금서재(휘 光輔), 필재(휘 광우) 양숙(兩叔) 에게 배우고 신진사류인 정암의 학통을 이어받았기에 기묘사 화를지켜보고낙향을택한것이다. 이후 금서재공이 청주 강외면 상정리로 낙향 은거함으로서 청주지역은찬성공후예들이곳곳에산재하게된다. 율촌공의 차자 사형(士亨)의 후손들은 다시 증평군 증평읍 율리로 이거하고 삼남 사인(士仁)의 후손들은 입향지인 오송 과 청주 흥덕에 세거하고 금서재공의 후예들은 장자 윤양(胤 楊)은 부장공종중으로 그의 아들 경유(景裕) 公이 남이면 석 실마을로 이주면서 청주의 남서쪽(수대리,산남,미평,개신) , 차남휘 영(領)은참판공종중으로그의 증손시립(時立)이괴 산군 청천면 강평리로 이주하였으며 나머지 후손들은 선대의 세거지인오송읍을중심으로세거한다. 필재공파의 장자 수(受)의 후손들은 파주시 조리면 오산리 에,차남 용(容)의 후손들은 충북 괴산군 지촌,삼남 의(宜)의 후손은경기용인시이동면송전리가세거지이다. △경모단( 충북청주시서원구남이면수대리산73-6) 경모단은고려충렬왕시삼중대광첨의찬성사에오르고상 산부원군에 봉해진 휘 여(呂)의 묘소가 경기 양주시 화도면 묵현리 천마산에 있다고 전해지나 실전하여 그를 수위(首位) 로 하고 그 아들 광정대부 밀직사사 좌부대언 전리판서 휘 지 헌(之軒)과 그의 아들 봉익대부 예의판서 휘 돈(惇)과 그의 아들조선의자헌대부이조판서양생(良生)과그아들사헌부 감찰 문화현령 대사헌 유(濡)와 그 아들 통훈대부 내자시정 통례원찬의정지(貞地)와그아들중훈대부진사선공부정증 과 4대를 내려와 가선대부 한성좌윤 휘 응란(應蘭) 등 8位 선 조의 제단으로 1954년4월 오송읍 쌍청리에 창설하고, 도시개 발로인하여2010년2월대소종중이함께계획하여세웠다. △숭인사와신도비 숭인사는 경모단 옆에 있으며, 정절공 박광우 선생의 유물 을 전시하고 제향을 하는 곳이다. 선생의 유택을 경기도 파주 에서 청주로 이장하는 과정에 발굴된 유물은 학계의 비상한 관심과 우리나라 묘제(墓制)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인정받은 바 있는 목관과 내관 안에 만들어진 칠성판,청동방울,청화백 자의 파편 도자기 등이 충청북도 문화재 제6호로 지정 보존관 리 되 고 있 으 며 , 선 생 의 묘 소 는 충 북 문 화 재 제 7 1 호 로 지 정 되 었다. 충청북도 문화재 제6호로 지정된 목관(木棺)은 내관과 외 관으로 되었으며 재료는 향나무로 썼는데 내외관은 모두 윗 부분이넓고아랫부분이좁은전형적인형태를취하고있다. 내관은 크기가 길이255㎝ 폭 68.2㎝ 깊이46.5㎝이며 외관은 길이280㎝ 폭99.5㎝ 깊이79.5㎝이나 하나의 특징은 내관 안에 크기에맞게판자를넣고칠성판을올려놓았다. 선생의 묘소이장을 계기로 학계에서는 비상한 관심을 갖고 연구 논문을 발표하는가 하면 후손들 또한 1975년 선생이 배 향된 송천서원을 복원하고 1990년 12월 선생의 묘소 아래 사 당(崇仁祠)를 준공하는 등, 선생의 많은 유적에 대하여 학술 적연구등이활발히펼쳐지고있다. 신도비는 정절공 박광우 선생을 기록한 비(碑)로 숭인사 앞 마당에세워졌다. △파평윤씨열부문(충북청주시서원구남이면석실리94) 사헌부 감찰 박진( )의 소실 윤씨의 지조와 열(烈)을 기리 기 위 해 건 립 한 문 (門 )으 로 숭 정 후 세 번 째 임 술 (壬 戌 ,1 7 4 2 ) 에내려졌다. [열부윤씨전(烈婦 尹氏傳)] 司憲府監察(사헌부감찰)朴公(박공) (진)의 측실(側室 - 小室)尹氏(윤씨)는 즉 參軍(참군) (척)의 庶女(서녀)인데 성질이 貞淑(정숙)하더니 일찍 모친(母親)을 잃고 군모(君母 -嫡母)를 섬김에 그 성효(誠孝)를 독실이 하여 令譽(령예)가 일찍드러났었다. 때에 監察公(감찰공)이 客地(객지)에서 벼슬하고 있을 때 尹氏의 적형(嫡兄-正室에서 난 오라버님)으로 더불어 서로 從遊(종유)하였는데 장차 복성(卜姓-小室을 택함)하여 尹氏 의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가기(佳期-結婚日字)를 約定(약정) 하였는데 겨우 며칠을 남겨 놓고 公이 문득 病을 얻게 되어 자 리에눕게되었다. 이에 尹公이 이르기를 뷺비록 行禮(행예)는 아니했지만 어 찌 가히 言約(언약)을 어기리오.뷻하고 본래 擇定(택정)한 날 에 婚需一公(혼수일공)를 꾸려 監察公(감찰공)의 旅邸(려 저)로보냈으니이때 尹氏의 나이 十七세였다. 시집의 門에 들자마자 조금도 주저하는 뜻이 없이 곧 病者 (병자)의결에가니 혹어떤사람이권하여말하기를뷺아직別 處(별처)에 머무르라.뷻고 하니 尹氏가 대답하기를 뷺나의 處地 (처지)가 비록 다른 사람과 다르지만 어찌 감히 三日된 新婦 모양으로 하여 病(병)을 救護(구호)하는 절차를 조금이라도 지체할 수 있는가.뷻하고 드디어 左右(좌우)로 부축하여 밤낮 을 가리지않고湯藥(탕약)을달여 올리는 등供奉(공봉)하는 도리를 心力을 다하며 弱(약)한 체질로서 寢食(침식)을 全廢 (전폐)하고朝夕을모르고간호에열중하니보는사람들이민 망하고측은함을탄식하지않음이없었다. 公이 마침 이 病으로 돌아가시니 崇禎癸亥(숭정계해) (肅 宗九年.西紀一六八三年)五月 初三日이었다.尹氏가 물 한 모 금 입에 들이지 않고 스스로 自決(자결)할 것을 결심하고 그 返 (반친)을 따라 돌아와서 빈소 곁을 떠나기 않고 상복을 벗지않고말하기를뷺내가조금이라도슬픈뜻을펴는것은오 직 이 服喪(복상) 한 가지 일뿐이라.뷻하고 이미 葬禮(장례)를 마치고는 묘소 곁에 막집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拜哭(배곡)하 여비가오나눈이오나폐하지아니하였다. 三年喪(삼년상)을 마친 후에 嫡兄(적형) 尹公이 木川고을 員(원)으로 와서 親家로 데려가고자 여러 차례 書信(서신)으 로 권함이 심히 간절하였으나 尹氏가 마침내 듣지 않으니 木 川 尹公이 와서 보고 尹氏에게 말하기를 뷺내가 婚需(혼수)를 챙겨 너를 보낸 것이 실로 심한 경거망동으로 너로 하여금 이 런窮天(궁천)의 痛恨(통한)을 품게 하였으니 내마음에참담 함이날이갈수록더하니어데무슨일이이보다더하리요.이 제내가 마침近邑(근읍)에守令(수령)으로 왔으니너는親家 에돌아가서나의父母任을뵙고이마음을위로하여라.뷻하니 尹氏가 그 탈지(奪志-志操를빼앗음)할 것을 의심하고 一言 도 대답하지 않고 곧 바로 公의 墓所(묘소)에 가서 스스로 소 나무에 목을 매니 한 계집종이 급히 달려가서 목에 줄을 풀어 구하였다. 尹公이 더욱 놀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뷺내 실로 너 의 情狀(정상)을 불쌍히 여기고 너와 함께 서로 의지하려 함 이었지 어찌 다른 연유가 있었겠느냐.뷻하면서 드디어 여러 가 지로위로하여깨우치고돌아갔다. 尹氏가 말하기를 뷺영연(靈筵-靈位를 모신 곳)을 이미 撤去 (철거)하였으니 이대로 쫓아 한 번 죽음은 이에 나의 소원이 었다.뷻하고 이에 食飮을 全廢하고 墓下에서 죽으니 한집안 사 람들이 다 슬퍼함을 더하였다.監察公(감찰공)墓下(묘하)약 간떨어진곳에장사를지냈다. 嫡夫人(正室) 韓氏가 子孫에게 遺言하여 경계하여 말하기 를 『尹氏의 生死는 진실로 가히 불쌍하니 監察公의 墓(묘)에 제사를 지낼 때는 또한 반드시 남은 힘을 따라 尹氏의 묘에도 제사를 지내어 길이 그치지 말라.』하였으니 이는 실로 韓氏夫 人의 아랫사람에게 베푼 지극한 뜻을 더욱 징험하겠으며 尹 氏의 賢淑함이 다만 貞烈의 한 절개만 있는 것이 아니로다.오 호!아름답도다. 恩津宋煥箕(은진-송환기)는 이르노니 우리 東方에 烈女에 게내리는旌表(정표)의特典이간간이있었는데옛날에節婦 (절부)는 自抉(자결)하여 하종(下從-아내가 남편의 뒤를 따 라 자결함)하지 않으면 烈行(열행)으로 치지 아니하였으나 지금 尹氏는 몸소 건즐(巾櫛-머리를 빗고 낯을 씻는 일)을 한 번도받들지못하였으나 病床(병상)의간호에고심초사(苦心 흗思-걱정하고 애태움)하였고 그 喪(상)을 당하여 묘를 지키 고 三喪을 지내어 食飮을 일체 끊고 운명하여 그 미특(靡慝) 한뜻을 이루었으니이 같은그의始終(시종)의 苦節(고절)은 가히옛의烈婦와같도다. 오호! 前後에 걸쳐 선비들의 여러 차례 영부(營府-고을 官 廳)에 호소하는 등 가히 傳誦(전송)됨이 족히 징거가 있는데 애석하도다.朝家의 褒典(포전)이 있지못하였으니 公의 後孫 들이그泯沒(민몰)함을심히恨하니또한슬픈일이로다. △숭덕사(崇德祠)(충북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석실리 66-1 1) 금 서 재 공 의 손 자 휘 경 유 (景 裕 ) 와 그 의 아 들 조 봉 대 부 선 공 감역으로통훈대부사복시정에증직된휘헌(軒)과그의후손 들을제향하는곳이다. 뱚6면에서계속 뱚찬 성 공 파 주 요 세 거 지 집성촌-충북 청주시남이면석실리전경. 뱚주요유적과유물 경모단 과 숭인사전경. 경모단. 숭인사. 박광우선생묘소유물(관곽및내관)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