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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9월30일 월요일 6 (제153호) 기 획 찬성공파의 파조는 고려조 첨의정승(僉議政丞)휘 원정(元 挺)의 차남으로 고려 충렬왕 때 삼중대광(三重大匡) 보국숭 록대부(輔國崇祿大夫)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에 상산부원 군(商山府院君)에 봉해진 휘 여(侶)이다.관직을 따 찬성공파 라 한다. 찬성공은 고려 충선왕 기유(己酉,1309년) 밀직부사, 경술(庚戌, 1310년)에 동지밀직사사, 1312년 밀직사사로 원 나라 국가경사에 축하사절 정사(正使)로 파견되었다. 1319년 (충숙왕 6)에 평리(評理), 1321년 삼사사(三司使)을 역임했 다. 찬성공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의 휘는 지헌(之軒)으로 광정대부 밀직사사, 좌부대언판서, 전리판서를 지냈으며, 차 남 지영(之永)은 첨의평리(僉議評理)와 조선 때 평택현감에 제수되어그곳지명을따평택박씨로분관하였다. 밀직사사(密直司事) 지헌(之軒)의 아들 돈(惇)은 봉익대 부 예의판서, 손자 양생(良生)은 자헌대부 이조판서, 증손 유 (濡)는 사헌부감찰과 문화현령, 가선대부 대사헌으로 아들 삼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인지(寅地)의 자(字)는 명중(明仲) 호(號)는 치당(致堂)이다. 현감으로 혹은 영의정이라는 설이 있으나 정확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아들 래손(來孫), 래숭 (來崇), 내동(來同), 내장(來章) 등 4형제를 두었으나 구보에 거상주(居尙州)라고하는데전해지지않아혹병난(兵難)으 로 소재불문하고 선계(先系)는 누락되어 기록할 수 없었는지 누보(漏譜)되었다. 감찰공 휘 유(濡)의 차남 형지(亨地)는 사헌부 장령(司憲 府掌令)을 지내 후손들은 관직을 따 장령공파(掌令公派)로 세계를 이루고 있다. 삼남 정지(貞地)는 통훈대부 내자시정, 통례원찬의(通禮院贊儀)를 지내고 아들관(瓘,원주목사),증 ( ), 심(琛, 都事), 인(璘) 등 4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관(瓘) 의 아 들 계 손 (繼 孫 )이 수 ·양 ·색 등 삼 형 제 가 전 해 지 나 이 후 누보되어 알 수가 없고, 삼남 심(琛)은 도사를 지냈으나 손자 지(芝)에 이르러 후사(아들)가 없어 차남 증( )과 사남 인 (璘)의후손들이크게번성하였다. 차남 휘 증은 진사(進仕)로 선공감부정을 지냈다. 아들 4형 제를 두었으니 장남 윤문(允文)의 자는덕장(德章)호는 옥곡 (玉谷)으로 1475년(성종6)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우뚝한 기상과 바른 행동은 군자로서의 법도와 위풍과도 같으며 부 모에게 효도를 성심성의하고 특히 세상의 접하는 모든 것에 억매이지 않고 출세에 연연하지 않았다. 성품이 너그럽고 남 에게 비치는 유여(有餘)가 깊었다. 가난한 가운데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고 시문이 뛰어나 동문선에 수록되기도 했다. 생 원시에 오르고 현량과에 천거되어 통정대부 부호군에 제수되 었으나 뜻이 아니라 벼슬을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청주에 은거하니 그 뜻은 주황회(朱黃晦)의 발자취가 임천(林泉)으 로 돌아왔다고 하였다. 아들(휘 培) 하나를 두었으니 율촌파 (栗村派)의파조이다. 진사공(휘 증)의 차남 윤무(允武)는 조지서별제(造紙署別 提) 봉열대부(奉列大夫) 守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으로 판 윤공파이고, 삼남 윤준(允俊)은 전설사별제이나 아들 기(機, 첨정)에 이르러 무후(无后)이다. 사남 윤걸(允傑)은 남부주 부(南部主簿, 서울 한성에 설치한 행정 구역 가운데 남부에 베푼관직가운데하나)를지내주부공파의파조가된다. 통례원찬의(通禮院贊儀, 휘 정지)공의 4남 휘 인(璘)은 생 원으로 관직은 공조좌랑이다. 성품이 강직하고 곧아 가정에 법도를 세웠으며,아들 4형제를 모두 훌륭하게 성취시켜 정암 조광조 선생을 비롯한 여러 어진 분들이 맹모삼천지교를 보 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장남 광보(光輔)는 금서재공파(琴書齋 公派), 차남 광필(光弼)은 1519년 생원으로 문과에 을과로 급 제하여 정선군수와 파주군수, 사성(司成)을 지냈으나 무후이 고,삼남광좌(光佐)는1525년문과(을과)에급제하여문의현 령, 선공감정, 형조판서를 지내고 아들 사형제를 두었으나 후 사가전해지지않는다. 사남 광우(侊佑)는 문과에 급제하고 필재공파(筆齋公派) 의 파조가 되는 등 4형제가 소과1명 대과 3명이 합격 생원공 (휘 인)의 덕업을 짐작할 만 하다.그리고 위에서 보았듯 찬성 공파는 6世~9世에 이르러 장령공파, 율촌공파, 판윤공파, 주 부공파, 금서재공파, 필재공파로 분파되어 각 소파로 세분화 되었다. △장령공파(掌令公派) 장령공파는 가선대부 대사헌 유(濡)의 차남으로 사헌부 장 령을 지낸 휘 형지(亨地)를 파조로 한다. 장령공의 아들 안종 (安宗)은 내금위장, 그 두 아들 사필(士弼)은 훈련원부정, 사 창(士昌)은 첨사이고 아들 유눌은 군수로 무후이다. 사필(士 弼 )의 아 들 선 눌 (善 訥 ) 은 현 령 , 그 아 들 후 생 ( 厚 生 )은 아 들 3 형제를 두었으나 무후(无后)이기에 장령공파 후손은 전해지 지 않 는 다 . △율촌공파(栗村公派) 율촌공파의 파조는 학문이 뛰어나 현량과에 천거되어 통정 대부 부호군에 제수되었으나 뜻이 아니라며 사양하고 청주에 은거한 휘 윤문(允文)의 아들 배(培)이다. 자(字)는 익지(益 之) 호는 율촌(栗村)으로 1504년(연산10) 태어나 1549년 생 원시에 오르고 명종조에 특별히 병절교위에 제수되었는데 공 이 마지못해 벼슬하고 다시 세자시강원 익위사좌위수에 이르 렀는데 다른 말에 의하면 세자사부를 지냈다고도 한다. 율촌 공은 충암(沖庵) 김정(金淨),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양 선생과 금서재(휘 光輔),필재(휘 광우)양숙(兩叔)에게 배우 고 그 학통을 이었다.출세에 뜻을 끊고 영달을 멀리하면서 깨 끗한행위로숨어작은초옥에율촌(栗村)이라편액하고자호 (自號)했다. 도연명의 처세술을 사모하고 율곡 이이 선생이 행의를듣고벼슬에천거했다. 율촌공은 아들 4형제를 두었으니 사원(士元), 사형(士亨), 사인(士仁), 사정(士貞)으로 장자 사원(士元)은 무후(无后) 이고차남사형(士亨)은선무랑통례원인의이고그의아들응 란(應蘭)은 생원시에 올라 영조 때 한성부좌윤을 지냈다. 손 자 동도(東道)는 영조 때 병조참의, 증손 이계(以桂)는 통훈 대부 장악원정, 병조참판으로 후손들은 충북 증평읍 율리에 세거한다. 율촌공의 삼남 사인(士仁)은 선교랑이다.가정의 교훈으로 유희를 즐기거나 화려한 모습과 화장을 멀리하고 오직 서책 만을가까이했다. △판윤공파(判尹公派) 판윤공파는 진사공(휘 증)의 차남 윤무(允武) 公이 조지서 별제(造紙署別提) 봉열대부(奉列大夫) 守 한성부판윤(漢城 府判尹)을 지냄으로써 후손들이 판윤공파로 세계를 이어온 다. 판윤공의 장자 겸(謙)은 현감(縣監), 차자 함( )은 교수 (敎授),삼자 전(詮)은 부사(府使)이나 후손들이 황해도 재령 에 거주하면서 분단되어 남쪽의 문중과 교류가 끊어져 누보 (漏譜)되어정확히알수없어아쉽다. △주부공파(主簿公派) 주부공파는 서울 한성에 설치한 행정 구역 가운데 하나인 남부의 주부(主簿)를 지낸 휘 윤걸(允傑)이다.진사공(휘 증) 의삼남이고한성부판윤윤무(允武)의동생으로이또한후손 들이황해도재령에거주한다. 주부공의 아들 지( 폴)는 참봉으로 효행으로써 세상이 이름 이 났다. 부모 돌아가신 후 여묘살이때 경차관이 갑자기 여묘 에 들러 공이 요대 굴전을 갖춘 집상 모습이 온갖 고초를 참아 가는 옛 효자 모습과 그 행위가 같아 조정에 계문하니 임금이 칭찬하기길심천거사가효성스럽다면서감찰벼슬을내렸다. △금서재공파(琴書齋公派) 금서재공은 공조좌랑을 지낸 휘 인(璘)의 장남으로 자(字)는 국주(國柱) 또는 국정(國貞), 호 (號)는 금서재(琴書齋)이다. 벼 슬은 진사(進仕), 장사랑(將士 郞), 부장(部將)으로 혹은 남도 주부를지낸것으로전해진다. 효제충신의 기본으로 곧고 근 엄하다. 경사에 박학(博學)하였 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를 겪 으면서 청주 목과동(木果洞)으 로 물러나 은둔하면서 부귀를 겨 자와 같이 생각하고 오직 글을 읽고 거문고로 소일하였다.중종 조에유일(遺逸)로천거되어임금의부름이있었으나평생나 가지않고뜻을굽히지않았다. 금서재공은 아들 옹, 윤양, 영(領), 영(潁) 등 4형제를 두었 으나 장남 옹, 사남 영은 무후이고 차남 윤양(尹楊)은 이모부 양공(梁公)을 종신토록 평안히 모시고 봉양(奉養)하니 이것 으로 세상에 이름이 나서 장사랑으로 부장에 올랐다. 아들 대 유(大裕), 경유(景裕), 장유(長裕)를 두었는데, 셋째 장유(長 裕)는 숙부 필재공의 아들(휘 受) 후(后)로 출계하였으며, 8 대손건중(建中,景裕后)이크게명성을떨쳤다. 휘 건중의 자(字)는 사표(士標) 호(號)는 선곡(仙谷)이다. 선생은 유학에 충실했던 학자답게 부모가 살아계실 때는 목 숨을 살리기 위해 3개월간에 걸쳐 생혈을 드리고 부모가 돌아 가시고나서는장례(葬禮)와제례(祭禮)를한 치의착오없이 진행하여 가정의 노비들까지도 모범을 보인 당시 인륜지 대 사인효행실천의선구자였다. 상례비요보(喪禮備要補) 12책, 비요촬약조해(備要撮略條 害) 4책 및 집안의 여자와 어린아이들도 볼 수 있도록 한글로 만든 븮초종예요람븯(初終禮要覽)1책으로 총17책(권)의 저서 를 남겼으며, 통훈대부 사헌부지평에 증직되고 괴산군 화암 서원에배향되었다. 금서재공의 삼남 영(領)은 동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이조참 판에 증직되고 아들 백유(伯裕, 증 사헌부집의), 중유(仲裕, 증사헌부지평),계유(季裕)를두면서크게번성한다. △필재공파(筆齋公派) 필재공은 공조좌랑 휘 인(璘)의 사 남으로 금서재공의 아우이다. 중종조 (中宗朝)의 명현으로 자(字)는 국이 (國耳) 호(號)는 필재( 齋), 시호(諡 號)는 정절공(貞節公)이고 휘(諱)는 광우(光佑)이다.1519년(중종14년)2 5세에 형 광좌(光佐)와 생원진사과 (生員進士科)에 입격(入格)되어 성 균관 태학생(太學生)으로 있었던 선 생은 태학생 수 십 명을 창솔하여 대 궐 안으로 들어가 뜰 앞에서 통곡하 며기묘사화의억울함을호소하였다. 이에 나졸들의 구출(驅出)로 심한 상처를 입어 유혈이 낭자함을 무릅쓰 고 옷자락을 찢어 머리를 싸매고 궁궐외랑(宮闕外廊) 대청에 정좌하여 당시 나이 젊고 글씨에 능한 참판 이찬(李澯)과 첨 지 김로(金魯)에게 붓을 잡게 하고 자신이 신원소를 불러 쓰 게 하였는데, 그 문사(文詞)가 용솟음치듯 함으로써 그의 절 의와 문장을 나타내었다. 1525년(중종20) 31세로 중형(仲兄) 광좌(光佐)와 함께 명경과(明經科)에 합격하였고 선생은 갑 과(甲科)2등에올랐다. 선생은집에있을때에는지극한효성으로어머님을봉양하 고 벼 슬 길 에 나 가 있 을 때 에 는 가 까 이 서 모 시 지 못 함 을 늘 한 탄하였다. 사택은 비록 두었으나 백씨(伯氏) 금서재공 광보 (光輔)가어머님을모시고충북청원군강외면고노리에은퇴 하여 있었으므로 휴직시(休職時)에는 반드시 집에 돌아와 성 심으로어머님을봉양하여집안에화기(和氣)가가득하였다. 뱚파조별약사 상주(상산)박씨찬성공파 찬성공이하 선조제단과 필재박광우선생의사당전경. 상주(상산)박씨는 신라(新羅)제54대 경명왕(景明王) 의 아들인 언창(彦昌)이 사벌대군(沙伐大君)에 봉해 지고,사벌주(沙伐州:지금의상주)를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아문호(門戶)가열리게되었다.아들욱 (昱)이 고려조에서 개국공신(開國功臣)에 책록되고 예부상서(禮部尙書)와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낸 것을 시작으로 후손들이 벼슬길에 나가 명문(名門) 의 기틀을 다졌으며. 사벌대군의 10世에 이르러 휘 원정(元挺)은 첨의정승(僉議政丞)으로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전( 櫻)은 봉상대부 전법총랑(奉常大 夫 典法摠郞)으로 총랑공파,차남 여(侶)는 삼중대광 보국숭록대부첨의찬성사(三重大匡輔國崇祿大夫僉 議贊成事)에상산부원군(商山府院君)에봉해져찬성 공파로각각파조가된다.삼남영(瑛)은고려부정(高 麗副正)하였다.이어총랑공의아들휘문로(文老)는 판사재시사(判事宰寺事)에올라의정부우참찬에증 직되고 아들 오형제를 두었는데 안충(安忠),안의(安 義), 안례(安禮), 안지(安智), 안신(安信)으로 이중 장 남 안충(安忠)은 실전(失傳)이고, 차남 안의(安義)는 상암공파(商巖公派),삼남 안례(安禮)는 판서공파(判 書公派), 사남 안지(安智)는 예판공파(禮判公派), 오 남 안신(安信)은 정숙공파(貞肅公派)로 분파되었으 며, 총랑공(휘 전)의 차남 문유(文有)는 판원사공파 (判院事公派)로 세계를 이룬다. 이번호에서는 충북 청주지역과괴산군,경기파주지역에집성촌을이루 고있는찬성공파(贊成公派)를소개해본다. 뱚찬성공파약사 선곡박건중선생존영. 필재박광우선생존영 7면으로계속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