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page

2019년9월30일 월요일 2 (제153호) 기 획 경애왕의 두터운 은택은 왕건의 하는 일마다 두루 미쳤다. 이것은 지극히 크고 지극히 넓은 천지(天地)와 같아서 만분의 일이라도왕건이보답하거나그려낼수있는것이아니었다. 그럼에도 왕건이, 견훤이 세운 김부와 정치적 거래를 했고, 신라를 귀부 받는 대가로 김부와 중첩된 혼인을 했다. 이것은 지난날 경애왕과의 신의와 의리, 은혜를 배반했고, 향후 할 것 이란사실을뚜렷이한행위였다. 실리를 위주로 사물을 바라보는 왕건의 본성이 여실히 드러 난 이 일 련 의 행 위 에 서 다 시 한 번 왕 건 은 실 리 를 우 선 하 여 신 의와의리를소홀히여겼음이드러난다. 그럴지언정 천년사직을 단번에 병탄키 어렵다고 판단한 왕 건은 시일을 끌면서 신라 지역 민심을 세심히 관찰했다. 김부 의 매국을 즉각적으로 받아들일 경우 그동안 자신이 내세운 존 왕 尊王의 행위가 위선이었음을 고백하는 것과 같았다.기회가 무르익어 민심이 돌아설 때까지 극도의 인내심을 갖자고 왕건 은자신을다독였다. 왕건의 속내를 여실히 간파한 김부는 송악에 도착한 지 16일 뒤인 935년 11월 28일, 공식적인 문서의 형태로 항복을 허락해 줄 것 을 재 차 요 청 했 다 . -본국은오랫동안 상란(喪亂)을 겪으니, 역서(曆數 나라의 운수)가 이미 다하여다시기업(基業)을보전하기를바랄수가없으니, 청컨대신하의예 로 뵙게하소서.(븮고려사븯세가2태조18년11월조) 개경에 도착한 김부의 행렬은 서라벌로 쉬 돌아갈 수도 없 다. 이러할 것이란 점에서 왕건에게 있어 신라란 이미 손안에 들어온 것과 같았다. 항전의 정신을 잃어 언제든 장악할 수 있 는 주머니 안의 구슬 같은 것이었다. 이틀이 지난 935년 11월 3 0일,고려의 신하들이 다시 장단을 맞춰 항복 의례를 재청했다. 이틀상간으로그들은말과행동을맞췄다. -하 늘에는 두 해가 없고 땅에는 두 임 금이 없는 법입 니다. 한 나라에 두 임금이 있으면, 백성이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원컨대 신라왕의 청을 들 어주소서.(븮고려사븯세가2태조18년11월조) 그러자 이튿날인 12월 1일, 왕건은 자신의 속내를 철저히 감 춘 채 천덕전(天德殿)에 임어하여 백료(百僚)를 모으고 구슬 픈어조로말을이었다. -짐이 신라와더불어피를마시고동맹하여거의두나라가우호를함께 하여각기사직을보전하여왔다.그러나이제신라왕이 칭신(稱臣)하기를 굳이 청하고,경들도또한 가하다고재촉하고있다.이제짐의마음이 비록 부끄러우나 여러 사람들의 뜻을 어기기 진실로 어렵도다.(븮고려사븯 세가 2 태조18년12월조) 김부의 항복 행렬을 송악까지 오게끔 비밀리 군사를 풀어 옹 위했던 왕건이, 감춰둔 속내와 는 다른 해괴한 말을 내뱉고 있 었다. 무력으로라도 신라를 삼키겠다며 야욕을 불태운 왕건이 지 금, 여러 사람들의 말 때문에 신라의 항복을 받을 수밖에 없다 며 참담한 표정으로 자신의 심정을 읊고 있었다. 가면 속에 감 춰졌던왕건의면모가한꺼풀벗겨지는순간이었다. 12월신유(辛酉)에신하들이 아뢰기를, “하늘에두해가없고땅에두임 금이 없다하거늘한 나라에두임금을백성이 어떻게감당하겠나이까. 원 하옵건대신라왕의청을들어주옵소서.”라고하였다.임신(壬申)에천덕전 (天德殿)에나아가서백관(百官)을모으고말하기를, “짐이 신라와함께 삽 혈(삽血)하고 동맹(同盟)하여 양국이 호의(好誼)를 길이 맺어 각각 사직(社 稷)을 보전할까 하였는데 이제 신라왕이 굳이 신하가 되기를 청하고 여러 신하들도 또한 이렇게 하는 것을 옳게 여기니 짐이 마음으로는 비록 부끄 럽게여기나여러사람의뜻을어기기가어렵도다.”라하고신라왕을뜰아래 에서알현(謁見)하는예를받으니신하들의축하소리가궁궐을울렸다. 이에김부(金傅)를정승(政丞)을삼고태자의상위(上位)에두어세록(歲 祿)1,000석(碩)을급여하고신란궁(神鸞宮)을세워그에게내려주었다.그 를시종하던자들도아울러수록(收錄)하여전록(田祿)을넉넉히내리고신 라국(新羅國)을 삭제하여 경주(慶州)라 하고 이어 식읍(食邑)으로 삼아 주 었다.(븮고려사븯세가2태조18년12월) 927년 11월, 견훤을 아비라 부르며 예를 올렸던 김부는 935 년 12월 1일 송악의 고려 궁궐 뜰에 무릎을 굻고 왕건을 주군이 라부르며신례(臣禮)했다. 왕건이 보좌에 버티고 앉아 신라왕 김부를 내려 보며 절을 받았다. 박씨는 열 왕, 석씨는 여덟 왕, 김씨는 서른여섯 왕, 총 54왕을 거친 끝에 김부의 손에 의해 992년 만에 신라는 스스로 멸망했다.문성왕은 청해진을 허물더니 그의 후손 김부는 서라 벌천년사직을허물었다. 한편 왕건의 청혼을 떠올린 김부는 왕건에게 자신의 사촌 누 이를천거했다. -백부(伯父)김억렴(金億廉)에게딸이 있어덕(德)과 용모가쌍미(雙美) 하니 이가 아니면 내정(內政)을 구비(具備)할 수 없을 것입니다. (븮삼국사 기븯권12신라본기12경순왕9년12월조) 왕건이 그녀를 맞아들여 욱(郁 안종(安宗)을 낳았다. 욱의 아들은 뒷날 현종(顯宗)이 되었다. 손자 현종은 할미를 신성 왕태후(神成王太后)로 추시(追諡)하였고 그녀의 능(陵)은 이 후지금까지정릉(貞陵)이라일컬어진다. 왕건은 김부를 정승으로 제배하여 관광순화 위국공신 상주 국 낙랑왕 식읍팔천호(觀光順化衛國功臣上柱國樂浪王食邑八 千戶)로 봉하고, 그 지위는 태자의 위에 있게 했다. 해마다 녹 (祿) 1천 석을 주고, 신란궁(神鸞宮)을 창건하여 하사했다. 그 종자(從者)들도 아울러 거두어 녹용(錄用)하고 전토와 녹을 후히내렸다. 이로 말미암아 서라벌 왕도(王都) 땅은 귀부(歸附)의 경사 스 런 소 식 을 들 은 땅 이 란 경 주 (慶 州 ) 라 폄 칭 되 고 김 부 의 식 읍 으로주어졌다. 식읍은 공신에게 내린 땅으로, 그 땅의 소출로 공신이 생활 한 만큼 김부는 자신이 팔아넘긴 백성에게 다시 세금을 받아 구차한 목숨을 연명하게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왕건은 굳이 왕도를 경주라 다시 부르게 하여 신라의 역사 또한 말끔히 지 워낼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아무튼 김부는 부호장(副戶長) 이하의 관직 임면(任免)을 행사하는 한편 그 대가로 신라 땅의 반역을살피며,사심(事審)의책임을온전히맡게되었다. 아아! 천년 사직 신라는 한 졸렬한 인간, 김부의 등장으로 마 침내망하였다.안정복은피를토하며다음과같이평하였다. 백제가 망할 적에는 계백(階伯)만이 있었고 고구려가 망할 적에는 죽어 절개를지킨자가하나도없었다. 고구려ㆍ백제의절의가퇴폐된것이 이 같 았으니, 어찌신라를대적(對敵)할수있었으랴! 중략… 난신ㆍ적자가연이 어일어나서, 적(賊) 견훤(甄萱)이 쳐들어오자공경대신(公卿大臣)들이 뒤 질까 두려워하며 항복하였고,김부(金傅)가항복할때에굴복하지않은 자는 오직 왕자 한 사람이었다. 이러고서도 나라가 어찌 망하지 아니하 랴!”(븮동사강목븯4하 신문왕4년11월조,사론) … 아아, 신라가융성하던때에는절의있는인사가대대로 없지않았으 나, 그 망함에 미쳐서는 한 사람도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이는 다 른까닭이 아니다. 그 임금김부가이와같으므로 그 등용된자모두탐욕 스럽고 비루하고 아첨하고 간사한 무리였다. 오직 나라를 팔아넘기는 것 이 능사인줄로 알 뿐이었으니, 어찌나라를위하여순절하는것이 의리가 됨을알았겠는가? 이는족히괴이쩍게생각할것이 없다. 김부(傅)가고려 에이르러영토를바치고신하라칭하니고려가김부를정승(政丞)으로 삼 고, 나라를 없애어 경주(慶州)라 했다. 아아! 신라는 망하였다.(븮동사강목븯 5하 김부 9년10월조,사론) 936년12월 13일 대광(大匡)배현경(裵玄慶)이 죽었다.담력 이 남보다 뛰어났고 항오(行伍븡병졸을 뜻한다)에서 기신(起 身)했다. 왕건을 따라 외지를 정토(征討)함에 공이 많았다.또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함에 있어 공을 세워 일등 공신으로 책봉 된 바 있었다.왕건은 그를 김춘추와 비교하여 무열(武烈)이란 시호를 내렸다.하지만 일개 신하에게 신라왕의 묘호를 내렸다 는 것은 그 자체로 신라 왕실에 대한 잠재적인 모독이자 공공 연한능멸이었다. 한편 왕건이 김부에게 내린 대우 역시 전에 없던 것이었다. 이는 물론 신라세력을 회유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고려조에서 경주김씨(慶州金氏)의 세력은 매국의 대가로 욱일승천의 기세를 이어갔다. 김부(金傅)가 왕건의 사위가 되 고, 다시 경종(景宗)이 김부의 사위가 되면서, 또 김부의 사촌 누이 신성왕후(神成王后)의 소생 안종(安宗)(욱(郁))의 아들 현종(顯宗)이 왕위를 계승함으로써 그 기세는 더욱 굳어져만 갔다.현종(顯宗)이후 고려 왕실은 신라왕실의 외손이라 자부 하기도 했다. 한편 김부식(金富軾)은 삼국사기를 집필하며 사 론(史論)에서이를자랑스레밝히기도했다. - ‘우리 태조(太祖)는 비빈(妃嬪)이 많고 그 자손 또한 번연하고, 현종이 신라의외손으로 보위(寶位)에올랐으며이 뒤로 왕통의계승자는모두그 자손이니, 어찌 음덕의 갚음이 아니리요’ (븮삼국사기븯 권12 신라본기12 경 순왕9년조사론) 경주김씨(慶州金氏)는 고려전기 최고 문중으로 행세했고 인종의 치세, 특히 김부식(金富軾)대에 이르러선 가문의 성세 가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 포석정 사건 의 전모를 확실히 밝힐 통로가 원천적으로 차단되었음을 의미 하는것이기도했다. 937년 5월 2일, 정승(政丞) 김부(金傅)가 천사옥대를 왕건 에게바쳤다.왕건이그토록갈망했던옥대였었다. 淸泰四年丁酉五月에政丞金傅가金으로새기고玉으로장식한腰帶하 나를 바치니 長이 十圍요 鐫꾕 가 62개인데 이것은 진평왕의 天賜玉帶라 하 였다.太祖가받아서內庫에藏置하였다…中略…고려왕이신라를치려하면 서말하기를 뷺신라에 세 가지보물이있어침범할수 없다고 하였으니그것 이무엇인가.뷻좌우가말하기를뷺황룡사의장육존상이그첫째요,그절의9 층탑이 둘째이며, 진평왕의 처사옥대 가그 셋째입니다.뷻이 말을듣고신라 를공격할계획을그만두었다.(븮三國遺事븯권1기이천사옥대) 20年5月癸丑에金傅가鐫金安玉排方腰帶를바쳤는데길이가열뼘이요 六十二 꾕 로 되어 있었다. 新羅가 寶物로 秘藏하여 오기를 거의 400年이나 되었으며, 세상에서聖帝帶라傳稱하던것이다.…中略… 王이드디어南庫 를 열어보매 風雨가 갑자기 일어나고 대낮이 어두컴컴하여 볼 수가 없는지 라 이에 날을 擇하여 齋祭를 지낸 후에야 이를 볼 수 있었다 國人은 眞平王 이 聖骨의 王이므로 일컬어 聖帝帶라 하였다. (븮高麗史븯 卷2 世家2 太祖2 20 년 5월) 이에 관한한, 나라와 백성을 왕건에게 바친 김부이건만, 이 태나 더 옥대를 말없이 간직했었다. 이것은 그가 영달이 보장 되고서도 마지막까지 옥대를 두고,섬세한 계산을 했다는 말이 된다. 그토록 갈망했던 옥대를 눈앞에 대하자 왕건은 만감이 교차 했다. 옥대의 확보는 혼인만으로 확보할 수 없었던 천명의 상 징을 왕건이 부여받은 것이었다. 또한, 사실상의 신라 왕통의 계승자란대의를내외에과시하는일대사건이기도했다. 김부는 나라와 백성에 이어 진평왕의 정통성과 천명까지 스 스로 왕건에게 할양한 셈이 되었다. 경명왕이 옥대를 찾던 날, 풍우를 일으키며 반대했던 김씨 세력은 이번에는 아무 저항의 움직임이 없었다. 원윤(元尹) 익훤에 명해 물장고에 간수하게 했다.구름이없는데도하늘에선비가왔다. 백제가 무너지자 울분과 번민으로 견훤이 죽고,그 5년 뒤 명 장 유금필이 죽었으며 이태 뒤 왕건이 67세의 나이로 죽었다. 후삼국 동란의 주역들이 사라진 세상에서,신라를 자멸로 이끈 김부 만이, 생존했다. 그러면서 매국의 대가라 할, 이승의 영화 를굳건히만끽했다. 혜종이 34세, 정종이 27세, 광종이 51세의 나이로 죽어갔다. 왕 건 이 죽 고 3 명 의 왕 들 이 바 꿔 가 며 4 0 년 의 세 월 이 어 김 없 이 흘렀건만,그래도 김부는 변함없이 건재했다.인명이 재천이라 한다면하늘은너무무심했다. 일신의 안위만 돌보는 김부에게 명을 재촉할 특별한 사안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의 행적에서, 하늘조차 굳이 다투어 데려 갈필요성을느끼지못한건지알수없는일이었다. 김부가 왕건에게서 하사받은 낙랑공주는 왕건(王建)과 왕 건의 3비 충주 유씨(劉氏) 사이에서 태어난 맏딸이었다. 그 아 래 동기로는 태자 태(泰)와 정종, 광종, 문원대왕 정, 증통국사 (證通國師)등 다섯왕자와흥방(興芳)공주가 있었다. 따라서 김부는 3대 정종, 4대 광종의 친자형이었다. 그런즉 그 권세가 만만찮았다. 광종의 숙청에서도 세력을 온전히 했 고,여기에다 왕건의 후비 성무부인(聖茂夫人)박씨 소생의 공 주와도중혼했다. 그런 터였으니 나라를 왕건에게 바친 대가와 영광을 풍족히 거머쥐고 남았다. 같은 항복자인 견훤이 통분과 심화 心火로 일찍 죽은 것에 비추어, 김부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 속에서 항 복과매국의달콤한열매를충분히맛보고남은셈이되었다. 고려 왕실에서 공주는 주로 왕실 내 왕자와만 근친혼을 행했 다. 까닭에 다른 성(姓)과 혼인하는 예는 극히 드물었다. 김부 에게만 2명의 공주를 혼인시켰다는 것은, 귀부(歸附)한 김부 에 대한 예우인 동시에,신라왕실과의 이중혼인을 통해 고려왕 실을 신라왕실과 대등하게 상승시켜 신라의 정통성을 한반도 지배에 용이하게 보장받으려는 얄팍한 의도의 일단이기도 했 다. 또 고구려 계승을 내세운 만큼이나, 왕건은 신라 정통성의 계승에 골몰했던 방증이기도 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왕 건 은 고 구 려 든 신 라 든 통 치 에 도 움 만 줄 수 있 다 면 굳 이 그 계통을 따지지 않았다. 뒤집어 그들의 계승을 표방한 저변엔 순수함과열정이철저히결여돼있었다. 최승로는 적기를, 중략…경신년으로부터 을해년에 이르기까지 16년간 에는 간흉이 다투어 나오고 참소와 헐뜯음이 크게 일어나니, 군자는 용납 될곳이 없었고, 소인은활개를쳤다. 드디어자식이 부모를거역하고종이 그 주인을논박하기까지되어상하가서로 마음이 떠나고군신(君臣)은해 이(解弛)해졌으며,구신(舊臣)과 숙장(宿將)이 차례로 죽임을당하고골육 친척이 모두 멸망되었다. 더구나 혜종이 형제를 잘 보전하고 정종이 방가 (邦家)를 잘 보존한 것은 은혜나 의리로 논할 것 같으면 무겁다 할 만한데, 양조(兩朝)가 모두 아들 하나만 있었는데 그들의 성명(性命)을 보존치 못 하게하였으니그의덕을갚지않을뿐만 아니라또다시그들의원한을깊 이 맺었던 것이다. 또 말년에 이르러서는 자기의 한 아들까지도 의심하고 꺼렸으므로 경종(景宗)이 동궁에있을적에매양편안치못해하였는데다 행히왕위는잇게되었다.(븮동사강목븯6상광종26년조) 975년 10월 26일,광종의 뒤를 이어 태자 주가 스물의 나이로 경종으로 즉위했다. 최승로의 지적처럼 혜종븡정종븡광종 세 임 금이 왕위를 이은 처음,모든 일이 안정되지 못했다. 그 과정에 서 개경과 서경, 양경(兩京)의 문무관이 반이나 살상되었다. 하물며 광종 말년에는 세상이 어지럽고 참소가 일어나, 무릇 형장(刑章)에 걸리면 죄가 없어도 죽어야 했다. 사서(史書)에 ‘광종은청단(聽斷)에밝았다.’고했다. 무릇 밝은 자는 살피기를 좋아한다(好察). 지나치게 살피게 되면 의심이 생긴다. 의심이 생기면 시기가 일어난다. 시기가 일어나면그다음,살육이행해지는것은필연의형세였다. 그러므로구신(舊臣)과숙장(宿將)이차례로죽임을당하고 골육 친척이 모두 멸망되었다. 그 와중에 혜종은 물론이고 같 은 피를 나눈 정종의 유일한 혈손마저 광종이 벌인 살육의 광 풍에성명(性命)을보존치못했다. 경종이 즉위하니 광종 26년 치세에 살아남은 구신(舊臣)이 40여 인뿐이었다. 광종의 칼부림을 유일하게 비껴 간 세력은 광종의 친누이의 남편, 김부였다. 광종 치세에 유일하게 견제 되지 않은 김부만이 그 영향력을 보전했다. 극단적인 왕권 강 화 작업은 그 결과 뜻하지 않게 왕실의 위축을 가져왔다. 그러 나 김부 만은 무풍지대에 서 있었고 세력이 온존했다. 친형 정 종의 유일한 자식까지 죽인 광종의 성정을 고려할 때 김부의 생존을단순히혼맥婚脈의덕택으로만규정하긴어렵다. 처세와 치부에 달관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애초 불가능한 것 이었는지 모른다. 하여튼 그는 가장 혼란한 시기에도 철저히 목숨과 권력을 부지하며 남다른 처세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 했다. 김부는 몸이 우빈(虞賓 나라의 임금을 일컫는 말)이 되고 왕의 작위를 누렸다. 연이어 국척(國戚)과 혼인하여 사위와 외손이 대대로 군왕(君王) 이 되었다. 부후(富厚)와 복록(福祿)이 당세에 견줄 이가 없었다.(븮동사강 목븯6상경종3년4월조) 경종은 자신의 배후를 지켜줄 왕실 세력을 찾았다. 그 결과 김부에게 주목했을 것은 당연했다.김부와 낙랑공주 사이의 딸 이 마침내 경종에게 시집가 내외종간 근친혼을 하여 헌숙왕후 獻肅王后가되었다.이혼인의바탕역시정략이었다. 경종은 빙장 김부를 후삼국 동란을 마감하는데 공이 있다고 하여 상보 도성령(尙父都省令)의 호를 더하고 식읍을 일만 호 로 늘렸다. 제(制)하여 학사(學士) 왕융(王融)으로 하여금 조 서를내려포장했다. 주나라 희씨(姬氏)가 나라를 처음 세울 때 여망(呂望)을 봉했고 한나라 유씨(劉氏)가흥왕(興王)한 시초에소하(蕭何)를책봉했다. 이로부터 크게 천하(天下)를 정하고 널리 기업(基業)을 열어 20대(代)나 용도(龍圖)를 세 우고 400년이나 인지(麟趾)를 밟으매 임금과 신하가 모두 현명하였고[日 月重明] 만물이 평안했다[乾坤交泰]. 비록스스로 무위(無爲)한 임금이라 할지라도 또한 치리(致理)에 관련된 신하(臣下)로다. 관광 순화 위국 공신 (觀光順化衛國功臣) 상주국(上柱國) 낙랑왕(樂浪王) 정승(政丞) 식읍(食 邑) 8,000호(戶) 김부(金傅)는 대대로 계림(鷄林)에 거하여 벼슬은 왕의 지 위[王爵]를 누렸다. 빼어난 재주[英烈]는 능운(凌雲)의 기(氣)를 떨치고 문 장은척지(擲地)의재(才)에날렸으며부(富)는춘추(春秋)를누렸고귀(貴) 는 모토(茅土)에 거(居)하였다. 육도(六韜)와 삼략(三略)을 가슴속[胸襟]에 간직하고 칠종(七縱)과 오신(五申)을 손바닥 가리키듯 하였다. 우리 태조 (太祖)께서는처음에인접한 국가와친목(親睦)하는호의(好誼)를닦아일 찍이 그 유풍(遺風)을 알아주었으며 부마(駙馬)로 혼인을 허락하시니 마 음속으로 대절(大節)로 보답했다. 나라가이미 통일되었고임금과 신하는 완전히 삼한(三韓)에서 합해졌다. 영명(令名 미명(美名))을 크게 드날리고 의범(懿範)을 빛나게 숭상하였다. 상보(尙父) 도성령(都省令)이라 덧붙여 부르고 또한 추충순의숭덕수절 공신(推忠順義崇德守節功臣)의 호(號)를 내리며훈봉(勳封)은종전대로 하되식읍(食邑)은이전것을합(通算)하여 10,000호(戶)로 한다.】 고하였다. 이 달에6대(代)의조상에게존호(尊號) 를더하여높였다.(븮고려사븯권2세가2경종즉위년10월) 전 쟁 한 번 없 이 나 라 를 왕 건 에 게 통 째 넘 긴 그 였 다 . 그 런 그 에게,빼어난 재주가 구름처럼 떨쳤고 육도삼략의 군략을 품었 다는칭송이온통쏟아졌다. 글을 짓는 자는 고려의 신하였고, 글을 짓게 한 자는 고려의 왕이었다. 그 대상은 고려왕의 빙장이 된 그였다. 그런즉 그 글 의 대상이 된 것만으로도 김부는 신라왕의 자격을 잃었음이 입 증된다.장려한 미사여구로도 매국의 행위마저 가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 개골산에서 마의를 입고 초근목피로 연명한다는 태자는 생 사조차 끊겼다. 신선이 되었다고도 했고, 죽어서 영원히 깨지 지 않을 돌부처가 되었다고도 했다. 그러나 2천호의 식읍을 더 하여 영화의 극치에 올라선 김부는 날마다 찰진 밥과 기름진 음식을 목구멍에 넘기며 호사를 다했다.그러면서 고려 조정의 시혜아래온갖영화와특권을누렸다. 돌이켜보건대, 이번호(33)로써 어느덧 필자는 대략 3년에 걸쳐 연재를 해 온 셈이 된다. 앞으로의 연재는 이제 마지막을 향해달려가고있다. 필자는 원래 김씨로서 최초로 신라왕이 된 미추, 신라 통일 전쟁의 서막을 연 김춘추를 주로 연구했다. 신라 왕위 계승에 대한 연구를 전공했으나, 신라 말의 상황은 관심 밖의 사안이 었다. 필자가 경애왕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데에는 10여 년 전, 박씨 대종회장님 이하 여러 족친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격 려, 부탁이 기제로 작용했다. 이래 필자는 경애왕에 대한 관심 을 오랜 기간 경주해왔다. 이제 이 일탈은 필자가 나아갈 길이 되 었 다 . 현 재 국 내 외 를 통 틀 어 경 애 왕 에 대 한 가 장 많 은 논 문 , 글을 작성했다.자의반 타의반 필자는 어느새 경애왕의 권위자 가되었다. 역사의 물줄기 아래에서 오랜 시간 탐욕과 방탕, 주폭의 대 명사로 일컬어지며 주홍글씨를 지닌 채 회자되어야 했던 경애 왕. 그의 신원은 이제 금세기, 필자와 우리 세대의 손에서 마침 표를 찍어야 하리라 생각한다.왕건,견훤,김부 등 당시 권력자 들의 농간과 저열한 계산에 의해 경애왕이 꾀한 신라 중흥의 꿈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이후 권력의 입김에 물든 김부식의 사필과 비평 의식조차 없던 아둔하고 고루한 조선 사대부에 의 해 경애왕은 만고의 주정뱅이로 낙인찍혀왔다. 1천년의 세월 에 걸쳐 박씨들의 가슴을 사정없이 후벼 파고 짓눌렀던 경애왕 의 치세를 명명백백하게 밝혀 책으로,팩션으로 마무리해야 할 시점에이르렀다.이른바역사를역사로바로잡는셈이된다. 필자는 이제 한 두 편의 논문을 더하여 학술서적 1권,사진과 그림에다 평이하게 풀어쓴 팩션 1권을 출간하려 한다. 이에 쿠 라우딩 펀딩(Crowding Funding)의 형태로 성금을 모으되, 향후 출간될 책에 특정 페이지(Honors)를 두어 납부한 성금 액수, 성명, 00파 00대손 등을 기재하여 역사에 남기고자 한다. 뜻 있는 많은 족친들의 도움이야말로 경애왕의 역사를 신원하 는밑거름이되리라생각한다. 경애왕(신라55대왕.재위924~927 ) 뱚역사비정(33) 뱛Ⅰ.왕건의속내 박 순 교 뱛Ⅱ.신례(臣禮) 뱛Ⅲ.신라의멸망 뱛Ⅳ.천사옥대 뱛Ⅴ.정략결혼 뱛Ⅵ.영화(榮華)의종말 뱛Ⅶ.필자의변(辯) 뱚▶대구은행26213011353 뱚▶예금주박순교EMail;chunchukim@naver.com 목 차 Ⅰ.왕건의속내 Ⅱ.신례(臣禮) Ⅲ.신라의멸망 Ⅳ.천사옥대 Ⅴ.정략결혼 Ⅵ.영화(榮華)의종말 Ⅷ.필자의변(辯)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