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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9월30일 월요일 12 (제153호) 기획 인 조는 1 637년 1 월 성 문을 열 고 나 가 삼전 도 에서 청 태종 앞 에 세 번 절 하고 아 홉 번 머 리 를 땅 에 찧는 항 복 의식 을 치 렀 다. 이 처럼 병 자호 란은 가 장 치욕적인난 으로기록된다.지금까지병자호란과관련된일기는병자년12월12일부터의경험과실상을나만갑(羅萬甲)이기술 한병자남한일기(丙子南漢日記),병자년12 월14일부터석지형(石之珩)이기록한남한일기(南漢日記),병자년12월17일부터호란의상황을어느궁녀가기술 한것으로알려진산성일기(山城日記),일기 체형식을로필사한정지호(鄭之虎)의기록(南漢日記),습와유집((習窩遺集)에나오는1636년(인조14)12월15일부터 그이듬해 3월 28일 까지 의 병 자 호란 일기 (丙 子胡亂日記)등많은일기가전해진다.이들이일기는주로남한산성에서의일기가주류를이룬다.그러나북방의최 일선에서12월9일부터오랑캐를 맞 으면 서 그실상을자세히기록한일기는명천도호부사(明川都護府使)박효순(朴孝純)공(公)의일기가유일하지않는가조 심스럽게진단해보면서옮겨본다.본일기 는선인들의충절을기리고후세를격려하려는북촌공의정신을이어받기를바라는마음에서그의후손박병훈현 종(병산박씨대종회장)이번역했다. 북촌공 조선 첫 통신사 율정(栗亭) 박서생(朴瑞 生의 9세손이며 아버지는 1592년 임진(壬辰)에 왜 적이 침략하자 붓을 던지고 칼을 잡으며 분연히 일 어나 전장에 나아가 전투마다 승리로 이끌고 1600 년 절충장군 충무위 호분당상관이 되었으며, 1605 년 선무원종공신에 오르고,1607년 청성진(淸城鎭) 첨절제사(僉節制使)에 오른 병애공 휘 충인(忠仁) 으로 1621년 18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33세 되던 병 자년 청(淸)의 침략을 예견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그해6월영변부원수신경원의휘하에들어가12월 9일청의침략엿새만에금치(金峙)에적을만나격 렬한 전투로 많은 적을 베었으나 公또한 온몸에 상 처를 입었다. 부상한 몸으로 23일 영변군수를 만나 “임금이포위되었으니급히성아래로진격하여죽 을 각오로 한번 싸우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라고 독전하였다. 북천공의 이 충용(忠勇)함은 참 무인 (武人)의 표식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최전선의 지휘관으로 참상을 현장감 있게 기록한 병란일기 (丙亂日記)는감동적인기록으로남아있다. 그리고 병란 후 빛나는 무공에 대해 포상으로 관 직을 내리자 이를 사양하고 대신 고향 ‘비안’의 과단 한 군액을 반감해 줄 것을 청원하여 절반으로 줄이 게 되는 등 철저한 애민정신의 소유자라 할 수 있으 며,전란에서 전사한 동지의 청원한 글에는 그의 너 무나 도 감동적인 명문장으로 公의 충정과 동지애 그리고 문무겸전(文武兼全)한 公의 면모가 잘 나타 나 있다. 청(淸)과의 강화를 통분이 여기고 고향에 돌아와 북촌에 집을 짓고 ‘천지를 새롭게 하고 해와 달을 다시 밝게 하리라’는 맹서의 글을 벽에 부쳐놓 고,병서를 읽을 벗삼고 칼을 어루만지며 국치를 씻 으려는 염원으로 지내다가 1645년 1월 18일 영면하 니 후에 비안의 후촌(後村)에 세운 ‘병호충렬사(屛 湖忠烈祠)’에아버지병애공과함께배향되었다. □1632년(崇禎5年)壬申9月체찰사(體察使)인 김시근(金時謹) 판서(判書)로부터 군관(軍官) 자 망(自望,이조에서 敍任하지 않고 該當長官[판서] 이 임의로 추천하여 임명하는 것)을 위한 소집장 이 왔 을 때 품 관 (品 官)으 로 임 명 되 어 즉 시 상 경 하 여외삼촌김주부(主簿)댁에기숙하게되었다. △12월. 내금위(內禁衛)의 장교로 복무를 하게 되었다.-생략- □ 1636(丙子) 2月 오랑캐의 사신(使臣) 용골대 (龍骨大)가80여명의오랑캐를인솔하고왔다.홍익 한(洪翼漢) 오달제(吳達濟)는 그때 사간원 관리로 서 <먼저 사자를 참수하고 척화(和親을 排斥)하자> 는 논의를 하였다. 이 소문을 듣고 오랑캐의 사자들 이 격노하여 도망을 가므로 세상이 술렁거렸다. 그 들이 척화하자는 것은, 오랑캐가 처음엔 형제 국으 로 평등한 처지에서 국교를 하자고 했는데, 이젠 그 맹약을어기고제국행세를하려는때문이었다. △3月 군위(軍威)의 정의립, 이천서, 비안의 이사 립, 김 갱,박효순, 충원(忠原)의 김OO, 조의길, 전라 (全羅)의김정진.이시영서울의이진종,이익창춘천 (春川)의 이자립 이천의 김유신(1인 빠짐) 이응란, 평양의 김경일,황해의 이사원,정승남,홍천립 등 19 人이모두시대상황에상처받고격분하여.......-생략- △12월 9일 부원수 예하 모든 군병이 성(城)을 나갔는데, 같은 날 초경에 의주부윤으로부터 적 의침략보고가들어왔다. △10일 부원수가 영솔하는 군병들은 약산성 (藥山城)으로들어갔다. △11일 호장 마부대(胡將 馬夫大)가 기병 100 여 기(騎)를 거느리고 안주를 지나고 호왕한(胡 王汗)이 거느린 군병은 봉황성으로 부터 와서 압 록 강 을 나 는 듯 이 건 너 , 청 천 강 서 쪽 까 지 진 영 이 이어져,파발(擺撥),봉화(烽火)등 통신체계가 바 람에 등불 같이무너지고,한(汗)의 군대가 갑자기 이 르 매 세 궁 역 진 (勢窮 力盡 )한 아 군 은 어 찌 할 바 를 몰 라 성 을 지 킬 수 없 었 다 . 관 서 (寬恕 )의 여 러 성 들 은 평 소 에 방 비 가 잘 되 어 있 어 서 적 들 이 가 벼 이 덤비지 못했으나, 나머지 다른 성들은 끝까지 성을지킨것은만(萬)의하나에불과했다. △ 12일적병일부가청천강변에다다랐으나부원 수수하군병2천도안되어,외로운성을지키고있을 뿐 어찌할 수 없었다. 오직 우리 자원대원 19인 중에 서적의정황을정탐하러갈뜻을부원수에게보고하 고 김경일, 이익창, 이설생 등 5인을 차출하여 적정 (敵情)을 정탐하러 보냈다. 그리고 영장(領將) 가산 의정흥립등50여명이일시에마당에모여서원수에 게말하기를“사도(使道)는성을지키기만하는장수 가 아니요 나아가 정벌하는 대장이 아닙니까? 적의 선봉대가이미왕도를침범하고적의대진이차츰진 영을 넓혀갑니다. 의주, 백마, 철산, 검산, 곽산, 능한 등 산성은 사도의 관장지가 아닌 곳이 없는데 존폐 예부도알지못하고도울수도없으니실책뿐만이아 니고 죄도 없지 않습니다. 외딴 성을 지키기만 하고 있다면,며칠 아니 가서 적병이 온 산야에 덮이게 되 고 성중엔 비축한 것도 많지 않으며,샘물도 이미 말 랐으니 집에 헐어 불 때고 풀뿌리 즙이 말똥을 먹는 어려움을겪게될것입니다.하오니급히나가전진하 여 도원수 진하에 합세하여 상의하여 상의하고 몸 바 쳐 죽어야, 이것이 사도께서 충군하는 직분을 다 했 다고 할 것입니다.”고 한즉 사도는 욕설을 하며 거들 떠보지도않았다. 오직우리갑사(甲士)49인이나가 싸우기를 청원하여 영변에서 개천을 향하여 출발하 였다.전라순천에서복수를위해자원한신여장등1 1인이 역시 함께 갔는데 소사진(所事津)에 도착 해보 니신(申)등은낙후해버리고없었다. 정흥립 등 49인이 밤을 새워 개천의 서촌에 도착 하니 이익창 역시 와 있었다. 여기 온 연유를 물으 니,저들 탐정 나갔던 5인은 <敵情을 살피려 嘉山으 로 갔는데,赤豆坪에서 敵을 만나 서로 싸우다가 같 이가던白公은戰死하고,李雪生역시화살을맞고 말에서 떨어지고 저희들만 간신히 피해서 여기에 이르렀다>고말했다.계속함께가면서자세히물어 보니 이익창(李益昌)의 말이 전후가 맞지 않아 적 을 만나기도 전에 도망해 온 것을 알 수 있었다. 즉시 효수(梟首)하여타인을경계하려했으나여러의견 이 통일되지 않아 끝내 처벌하지 못했다. 이런 일에 영수(領袖)가 용열하여 군율을 새우지 못하니, 이 런자와더불어어찌난을감당하겠는가? △13일 새벽 개천에 도착하고 계속하여 안주를 향하였다. △14일 안주 동면 두모촌에 도착하여 우경준, 조응노,박경노 등 6인을 안주에 정탐으로 보냈는 데 이 익 창 은 뒤 쳐 졌 다 가 도 망 해 버 렸 다 . △15일새벽두모령을넘으니유공(公)이급히보 고하기를사방에주둔해있는적은별로없으나다만 오랑캐기마병둘이갑자기응암촌에이르러박경노 등 3인을 잡아 갔다고 하였다. 정 등 40여 명이 일시 에 갑옷을 갖추어 입고 추격하니 조응노는 이미 적 (敵)의 손에전사하고박성노역시 창검에 부상당한 상태였다. 나와 이여신은 각기 수하 10여 인씩 거느 리고나는 오른쪽에서李는왼쪽에서금치(金峙)를 압박하여 응암촌에서 전투하다가 포로 되었던 인마 (人馬)를모두탈환하고적병10여기(騎)를만나응 전하였다. 丁 등 20餘 人은 응암촌에 남게 되었는데, 사방이불통(不通)하여적의수를짐작할수없었다. 李는왼쪽에서높은山으로올라가고나는平地에 있는데 敵 100여 기(騎)가 우리를 포위 하였다.피차 간의병력이너무현격(懸隔)하여어떻게할수가없 었다.우리는몇사람씩을거느리고죽음을무릅쓰고 한참 싸우는데, 김유신 等이 말을 달려 포위망을 뚫 고 나가나가려는 찰라 내가 탄 말도 함께 뛰었다.그 때 나는 이미 활을 겨누고 있어 말고삐를 잡지 않았 기에말을어거하지못해말이실족하여넘어졌다.이 에나도함께넘어지게되었다.그리고갑옷을갖추어 입었기에 빨리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중, 적 기병이 칼을빼들고나를공격하였다.나역시칼을빼서적 의 말 다리를 쳤다. 적 기병은 세 방향에서 나를 에워 싸고활을쏘기시작하므로나도화살10여발을날렸 다.그중한 발이명중하여 적병이 말에서추락하고, 말은 내 앞으로 오게 되었다.나는 즉시 고삐를 잡고 말에 올라타려는데 또 한 기병이 칼을 빼들고 나를 공격하였다.이렇게하기를세번이나당했으나갑옷 이 견고하여 상(傷)하지 않았다. 이럴 때 창을 든 보 병을만났더라면내목숨은부지하지못했을것이다. 기 병 은 말 위 에 서 한 번 공 격 후 에 재 공 격 이 어 려워 나는 몸을 보전 할 수 있었지만 몸엔 화살이 비늘처럼 덮였고 왼쪽 다리를 부상하여 몸을 가 벼이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래서 말을 올라 탈수도 없어, 말을 버리고 겨우 참고 행진하여 바위아래 이르러, 바위를 의지하고 머리를 들고 바라보니 기병 하나가 나를 추격 하여 와서 살피고 있는 것 이다. 그러나 놈은 화살은 없이 활을 쏘는 시늉만 하고 내 앞을 서성거리고 있기에, 한 발을 쏘았더 니적은즉시도망가고다시나타나지않았다.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 갑옷을 벗고 제대로 숨 쉬 게 되어 스스로 오늘 일을 생각하니 실로 천운이었 다. 조금 쉬고 나니 배고픔을 느껴, 찐쌀을 전대(纏 帶)에서 내어 먹으려는데 마른 쌀이 모두 목구멍에 붙어삼킬수가없었다.그래서눈을가리고겨우삼 켰다. 이때의 어려움을 어찌 말로 다 표현 할 수 있겠 는가! 밤이 깊은 뒤에 산허리를 돌아 나오니 작은 암 자(庵子)하나를 만나게 되어 들어가 쉬게 되었다. 암자의 스님이 술과 음식을 제공하여 먹었는데 술 때문에 피로가 와서 벽을기대고잠시 쉬고 있는중 에 적 오랑캐가 나를추격해 와서 울타리밖에서맴 돌고 있었다. 피할 길이 전혀 없어, 스님을 불러 함 께 죽을 결심으로 밀약(密約)을 하였다.조금 지나 한명의 적병이 넘어와 나를 칼로 공격하기에 나도 검으로 그의 가슴을 지르니 그 오랑캐는 큰 비명을 질렀다 .울타리 밖에 다른 오랑캐 들은 울타리가 견 고하여 한꺼번에 침입해 들어오지는 못하고 두 놈 씩 이어 들어와 스님을 격살(擊殺)하려고 하였다. 나는 즉시 다섯 놈의 목을 베어 수급(首級)을 바위 밑에 묻고 스님과 더불어 뒷산에 올라가 밤을 새웠 다. 이날 금치에서의 전사자는 유 식, 김유신, 정의 립, 이천서, 정중생, 김시익, 조응로 등 7인이었다. 남은 사람은 각기 흩어 저서 진(陳)으로 돌아왔다 . △16일 창삭(昌朔) 귀태(龜泰)로부터 나오니 적 병 이 영 변 안 주 개 천 등 지 역 세 가 득 히 산 야 를 덮고 있으며, 재물과 가축을 약탈하고 사람을 수 없이 잡아가는데 고립된 데다 몸조차 병신되어 도 울 수가 없으니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낮에는 산에 오르고 밤에는 전진하여 본진으로 돌아가고 자 했으나 주위에 적세가 강하고 길을 막고 있어 진에 도달할 수 없었다. 개천에서 당산을 거처 진 으 로 돌 아 갈 계 획 으 로 만 나 는 사 람 에 게 길 을 물 었 으나 적봉의 피습으로 전신이 피투성이라 사람 같 지않은내모습에사람들은모두가멀리피해버리 니 이 사 이 신 고 (辛 苦)를 어 찌 말 로 다 하 겠 는 가 ! 이렇게맴돌며가는것이하룻밤에겨우10리였다. △17일 개천 남면 흑방에 도착하여 마침 군민 김주 (金柱)를만나함께그의피난소(避亂所)로가서극히 후한대접을받고간절히권하므로머무르게되었다. △18일 흑방에서 머물며 들으니, 이여신 등 10 여인이 15일 여기에 이르렀다가 곧 바로 순천을 향해 갔다고 하였다. 마음으로는 곧 뒤 따라가고 싶었으나 상처가 찌르듯이 아파서 부득이 개천 에서머물며조리하였다. 적의 진(陳)이 6일간 머물렀는데 공사간의 집 들과 여염집 할 것 없이 모두 태워 낮에는 연기가 하늘을 가리우고 밤에는 불빛이 하늘을 밝혔으니 그참상을어띠다말하랴! △19일순천으로가서갈령아래이르니군(郡) 의 관리 오대봉이란 이가 술과 음식을 갖추어 대 단히두터운대접을하였다. △20일 순천의 서면 이 진사의 집에 도착하였 는데 이 공(公)은 피난을 갔고 평양 황금문 안에 박동건이라 이름 하는 사람이 피난을 와 있었다. 그 母親과 妻子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며 크 게 앞아 하고 슬퍼하였다. 그에게 이여신 등이 이 곳을 지나갔는지를 물으니, 이만호라 고 하는 이 가10여명과함께여기를지났다고하였다. △21일 순천 북면에 사는 품관 조허국의 집에 이르렀는데 조 씨는 본디 큰 부자라 도착 즉시 술 을 대접하며 유숙하기를 간원하고 심지어 별미를 내 놓고 또 버선과 신발까지 꾸려주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승가는 약산성에 입대하였고 손자 현 신은나이가16세인데문필이우수하였다. △22일맹산에도착하였다.현감임승업은병사 를 모집하러 덕천에 나가고 없어서 거기서 그냥 쉬게되었다. 선비 박민익의 집에선 술과 음식을 갖추어 심 히 후하게 대접하였다. 우리는 이여신 등을 찾으 려고 어렵게 여기에 왔으나 그들이 어디로 갔는 지도무지알수가없었다. 소문을 들으니 평안병사의 군관이 전란 전에 숯 굽는 일로 城을 나갔다가 뜻밖에 적이 이르러 미처 입성을 못하고 사역병 30여 명과 함께 여기 에 와 있다고 한다. 가서 그의 사는 곳과 직(職), 성명을 물어보니 충청도 홍주 출신이며 한우문 이라고 한다. 그와 더불어 조용히 대화를 해보니 사람됨이 용열해서 함께 일하기엔 부족하다. 이 날 밤 에 현 감 이 돌 아 와 서 나 의 온 것 을 듣 고 곧 만나자고 사람을 보내었다. 나는 즉시 가서 그간 의 시말(始末)을 자세히 이야기 하였다. 현감이 말하기를 군사를 모아 적을 토벌할 計劃이었는데 나와함께할수있어다행이라고한다. △23일 현감이 군병을 모집하여 회식을 하려는데 적병이이미경내를침범하였다는소식이들어왔다. 현감은 보병과 기병 100여명을 데리고 산허리를 점 거하고요해처(要害處)에명포수를매복시켰다.적 기병 4명이 매복처에 달려드는 것을 즉시 발사하여 명중시키니 오랑캐의 말과 사람이 함께 죽었다. 나 머지 3명은 돌아 가버렸는데 그 때문에 30여 기(騎) 가 더 오게 되어 서로 싸웠으나, 우리는 큰 산을 먼저 점거하고있었기때문에적들은발붙이지못하였다. 조금지나서는또다시100여기가와서 주둔하였다. 싸움은 하지 않았으나 사면에 적이 비늘 때 같이 몰 려오는데그수를알수없고,그기세를막을길이없 어 山으로 올라갔으나 포위되었다. 山이 험하여 피 해는 없었지만 현감이 거느리던 자들이 차츰 흩어 저 남은 자가 20명이 안되었다.곧 이들과 밤중에 포 위망을뚫고나가현의동쪽30리쯤되는영변(寧邊) 에이르렀다.郡守姜芍 은명사(名士)라고일컬어온 사람이며 서울에서 왔다. 적을 토벌할 계획을 이치 를들어말하며맹산(孟山)과나와더불어한마음으 로 죽을 결심을 가지고 싸워 나라를 위해 죽자!이것 이 신하의 직분이 아니냐! 하면서 지극한 말로 피를 마시니과연그지려(志慮)가믿을만하고자못장절 (壯絶)하였다.그러나姜은우리들이포위되었다가 겨우 탈출한 경과를 듣고는 곧 나가서 그의 下人의 귀에대고서로속삭인뒤나에게말하기를“내직책 이 수령이니 마땅히 내가 맡은 읍으로 돌아가 남은 군사와 백성을 모아 상부의 분부를 기다리는 것 이 것이 수령의 도리다”라 고 하면서 즉시 영흥(永興) 쪽을향해가고자하여,내가“영변의하인들이본디 악한데이런 난리에하필혼자 가고자하십니까?생 각이 너무 심하십니다. 맹산과 함께 가며 서로 구원 하는 것이 좋은 계책일 것입니다” 라 고 한 즉 姜은 끝내나의말을듣지않고한마디말도없이내손을 잡고눈물을흘리면서떠나고자하면서도손을놓지 못하고 “원컨대 그대와 다른 날을 계획해 보는 것이 어떠냐?” 고 하여 내가 대답하기를 “영변의 말씀이 심히옳으나,임금께서 包圍되어 계시니급히성아 래로 진격하여 한번 싸우고 죽는 것이 나의 소원입 니다.”라고하였다.강은내손을놓으면서탄식하기 를 “진실로 그대 말이 옳도다. 나 역시 군사를 모아 뒤를따르겠다.”고하였다. △24일 장풍동에 있는 중에 적병 대진이 와서 읍에 주둔하면서 관사와 여염집 할 것 없이 모조 리 불태우고 사람과 재물 역시 해를 입고 시신이 사방에널려있으니이를어찌다기록하랴! △25일그대로장풍동에머물면서포수를선택하 여 마을 입구에 매복하고 있는데 적병 4기(騎)가 달 려들어 오므로 포수가 가벼이 한발 쏘니 적병은 돌 아갔다. 그러나 그 날 40여 기(騎)가 동구(洞口)를 지나갔다. 조금 있으니 단 3명의 오랑캐가 수많은 포로와 우마(牛馬)를 이끌고 가는데 그 나머지의 오랑캐는어디로갔는지알수가없다.이때현감이 포수로 하여금 인솔하는 오랑캐를 향해 발사토록 하여 포로 되었던 人馬를 모두 탈환하였다. 그리고 적병은 終日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마음에 괴이 (怪異)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저녁이 되니 敵 40 여기가 모두 걸어서 산의 앞과 좌측 양면으로 올라 와 피란하고 있는 곳을 침범해서 유린 하는데 그 흉 폭 함이 비길 대 없었다. 현감은 겨우 8명의 포수와 2 0여명의 사수로 적을 당하기 어려웠으나 8명의 포 수는 모두 명사수로 죽음을 무릅쓰고 총포를 쏘며 싸워 명중된 적의 사상자가 아주 많았다. 하지만 아 군의피상자는但한명의포수뿐이었다. 적병이 물러가고 모든 시체를 한곳에 모아 불태 우고 首級을 취하지 못하게 하였다.이날의 전투는 마침 좋은 일진을 만나 고립된 소수의 군대가 승첩 을 했지만 적의 대진이 가까이 있고 그들의 모략을 헤아리기어렵기때문에,이날밤현감은그의관속 (官屬)들을 데리고 앞쪽의 양덕(陽德)을 향하여 가는 길에 창포전(菖蒲田)에 도착하였다. 날이 이 미 밝아와 주저하고 있는데,우리를 추적하여 차유 치(車踰峙)를 넘은 놈이 100명이 넘었다.창포전과 차유치와의 거리는 7~8리 정도 밖에 안 되었다. 현 감은 어찌할 바를 몰라 도보로 산을 올라가서 겨우 해를면했으나군물과전마를모두빼앗겼다. △26일 山에서 창포전을 바라보니 적이 사람을 결박하여 앞세우고 수색하는 것이 보였다.이는 현 감이있는곳을찾으려는것이다.요행이산이험하 여화는겨우면했으나이밤에현감이거느린官屬 들은 맹산(孟山)을 회피하여 모두 걸어가게 되었 다. 현감의 모친은 연세가 80이라 걸을 수가 없고 관속과군인들도모두흩어저어찌할바를몰랐다. 김풍국이란사람이있는데처음부터현감에게정성 을 다하며 사방을 분주히 다니다가 마침 病든 말 한필 을구해왔다.현감모친은관노(官奴)4名이서로바꿔 가며업고갔다.그간의고난을어찌다記錄하겠는가! △27일 이날도 산정에 있었으나 일행은 굶주림이 너무 심 하였다.주림을 면할 길이 없어,나는 관노하 나를데리고김풍국과한마을로내려갔는데인적도 없고 집에는 좁쌀 한 톨 없어 주림과 추위가 뼈 속까 지 스며들어 엎어 저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우연히 주막하나를 만나 술을 몇 사발 얻어 마시고 또 쌀말 이나 얻었으나, 날이 이미 밝아 오고 적진은 가까이 있어조금도머뭇거릴수없었다.김풍국에게솥을지 워 겨우 산을 돌아 5리 쯤 되는 관청에 이르니 적 기병 5名이이미그마을에와있었다.이쌀로일행이주림 을면하고밤을새워현(懸)의남면한마을에전진해 가니노인부부가집에있는데,장정7人의시체가문 밖에 엎어 저 있어, 노인에게 물으니 노인은 “모른 다”하고현감의일행이대답하기를지난23일과25일 적과 더불어 서로 싸울 때 적의 사상자가 아주 많았 기때문에적도들이분을이기지못하여고을사람들 을결박해와서는산골짜기로데리고가서현감있는 곳을물었는데,죽은이사람들이모른다고사실대로 말했지만그때문에이렇게참살되었다고한다. △28일노인의집에그대로머물렀다. △29일 읍에 주둔한 적들이 27일부터 연이어 순 천과 성천을 향해 이동 했다. 이날 일행 중 관노 4 명이 모두 도망가고 급창(及唱, 관아에서 부리던 사내 아이)한명과 주절(注叱)김여도와 훈도 김풍 국 그리고 어린 아이 뿐이었다. 현감의 튼실한 종 이나절친한사람은아무도없어현감의노모와기 타 관리들의 식구들을 호솔(護率)할 길이 전혀 없 으니이때의회서(懷緖)를어찌다기록하랴! △30일 그대로 머무르고 있는데 노인 부부가 말하기를 내일은 큰 명절 이므로, 난리로 이런 처 지 지 만 한 번 크 게 취 해 보 는 것 이 어 떠 냐 ? 고 하 면서 메밀로 국수와 떡을 만들어 현감에게 드리 고 함께 먹었다. 그러나 임금님과 어버이를 생각 하니 입에 가시가 돋은 것 같아 목에 넘어 가지를 않았다.이쓰라린심정을어찌다말하랴! □1637년(丁丑) 초하루 그대로 머무르다. 지방 관리인 한 노인이 있는데 현감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그가 피난하고 있는 곳으로부터 술과 음식 을가지고왔다.이감격은말로다못하겠다. △초2일적이모두성천(成川)을향해현(縣)의동 쪽으로전진해갔는데현과의거리는40여리쯤된다. 그들이 지나간 곳에는 모든 집들이 모조리 불태워져 남은 집이 없고 시체가 그 수를 알 수 없다. 그간의 참 혹한 광경은 말로 다 형용 할 수가 없다.고을에 남녀 가현감이왔다는소문을듣고술과떡을가지고와서 위문을한다.이같은병란으로창황(蒼黃)중인데도 백성들의정이어찌이같이두터울수가있는지! △初 3日 현감과함께고을에드니이사림,이○○, 조의길 등 이 영변으로부터 와 있었다. 나와 이 사람들 은 금치전 때 각기 흩어 저 생사를 모르다가 오늘 서로 만나니 실로 뜻밖이었다. 여기 온 연유를 물으니 부원 수의 부대가 상산(常山)에 도착하여 패전하고 부원수 는포로가되었으며대원들의생사와노예들과우마의 포로여부는자세히알수없다고한다.이사이감회가 어떠하겠는가!그들과 함께 현감 있는 곳으로 가서 흩 어진백성을모아임금을호위할계책을상의하였다. △初 5일 경기도 자모군(自募軍) 박성용, 장극 명, 양효생, 박 봉, 오우질, 동(同) 오마질손, 조경 춘,김남등이부원수의패전한곳에서부터왔다. △初 6 일 경 성 의 포 수 김 남 등 8 인 이 역 시 와 서 모집에 응하고 의주 부윤 군관 임자신과 현감의 서(庶) 동생이 의주로부터 와서 비로소 의주가 안전하다는것을알았다. △初 7 일 본 현 에 머 무 르 다 . 사 민 (士 民 )과 흩 어 졌던 병졸 20여명이 모집에 응하러 와서 현감 동 생이 거느리게 되었다. 현감의 부인은 난리 전에 서울에서 출발하여 왔는데 이날 현감 조모의 상 을 당하였다. 그래서 조의길은 호상일로 남고 경 포수등은각기흩어져갔다. △8일 홍천립이 패전지로부터 와서 곧 황해도 본 향으로 가고 김 설 등도 패전지로부터 영안도를 거 쳐 곧바로 자기들의 본향으로 가고,오직 이여신 등 우리 11인은 평안감사에 소속되기를 바라 병사의 막하에들어서근왕을위하여곧순천을향했다. △9일 순천에 도착하여 감병사(監兵使)가 근왕 (勤王)하기위해부대를이동 했다는소식을들었다. △10일강동을향해가는데방방곡곡지나는곳마 다.적병이 분탕질하여온전한집은하나도없고장 약(壯弱)이나 노유(老幼)를 물론하고 모두 넘어진 시신투성이라차마볼수가없으니통곡할수밖에... △11일 성천(成川)에 도착하다. 부사 김 기는 그의 재물을아끼다가적에게피살되었다고한다.그사람 됨이비루(鄙陋)하고탐욕스러움이이로서알만하다. △12 일 감병(監兵)에 도착하니 양진(兩陣)에 소 (疎)를올리려했으나,붓이없어수행하지못했다. △13일 삼등(三登)에 도착하여 임금님께 진소 (陳訴)하여 새 부원수(副元帥)에게 소속되기를 바랐지만뜻을이루지못했다. △14일 수안(遂安)에 도착하다. 이 완 병사가 도원수 중군으로서 초 5일 토산전에서 화살을 맞 고뒤처져수일간조리를하고있다는것이다. 근왕(勤王)하러 갈 것이라 하기에 곧 李 병사 (兵使)의조치소로향하였다. △15일수안의언진산아래도착하였다. △16일 은적사(隱寂寺)에 올라가니 李 병사는 시창(矢瘡)이 자통(刺痛)하여 몸을 움직일 수 없 다고한다.우리들의품은뜻을소상히적어전하니 병사께서 즉시 나오셔서 조용히 적의 정세와 부원 수의패전상황을묻고같이일하자고요청하였다. △17일 이 병사가 황평 양도 각 관청에 공문을 발송하여 흩어진 군병들에게 28일까지 서흥(瑞 興)으로 모일 것을 알리라고 명령했다. 16日부터 이어이절에머물고있다. △2월 초 5일 강화한다는 하교가 내리고 오랑 캐 군병이 돌아가기 시작 하였는데 2月부터 3月 까지 평안도와 황해도 양도의 각 읍들은 약탈(掠 奪)이올라갈때가배나더심했다. △3월초5일공문을받고나왔다. △12일 서울에 들어와 먼저 동구내(洞口內)의 최경앙이 우거하는 곳으로 가서 고향집이 평안하 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내가 평안도에 있으면서 출전 했을 때 지난 12월 15일 전사 했다는 부원수 의 장계 때문에 일가들이 나의 葬禮를 치렀다 고 한다. 나는 이미 나라에 바친 몸인데 시신을 말가 죽에 싸서 돌아오지 못하고 노친으로 하여금 나 라 위해 죽은 줄 알게 하였으니 불효함이 막심하 다.-이하생략- 병란일기(丙亂日記)의저자박효순선 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북촌공박효순의생애 북촌박효순선생창의비(의성비안면병산정경내) [丙亂日記]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