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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8월31일 토요일 6 (제152호) 관향조 종친회 1393년 판윤공(휘 가권)은 조정에 있을 때 난리가 날 징조 가 엿보이므로 항시 벼슬에서 물러날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 데 상기(喪期)를마칠무렵 국가에 이미 역성혁명(易姓革命) 이 일어나 조선조(朝鮮朝)가 개국되니 두문동(杜門洞)을 나 와서 조령(鳥嶺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과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경계에 있는 고개)을 넘어 남쪽 가야산(伽倻山)에 도 착하였는데마을과산곡(山谷)이깊고나무가울창한것을보 고그곳에서여생을마치기로결심하였다. 이때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년~1419년)선생도 일선 (一善,현구미시)의금오산(金烏山)으로들어가므로세상사 람들은 길입금오 박입가야(吉入金烏 朴入伽倻)라고 하였다. 가야산은 산벽(山壁)이 만 길이나 되어 공(公)의 절의(節義) 와같았다. 그리고 깊은 산곡도 그윽하고 아름다운데다가 대숲과 잣나 무도많았으며방명(坊名,동네이름)도지사(志士)라고하였 으니 그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곳에 잡목을 베어내고 집 한 채 를 지 어 놓 고 살 면 서 상 록 수 를 많 이 심 어 그 우 호 (寓 號)를 죽백(竹柏)이라고 하였으며,또 그가 살고 있는 마을을 수륜동(修倫洞)이라고 하여 그의 수양이 윤리(倫理)를 지키 는데있음을나타냈다. 개성판윤공(휘 가권)은 무과에 등제하여 도첨의시중(都僉 議侍中)에 올랐고, 공민왕을 공근(恭勤)히 섬겨 평양부원군 (平陽府院君)에 오른 휘 천상(天祥)의 3남 1녀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어머니는성산이씨(星山李氏)이다. 어렸을 때부터 옛날 사기(史記)를 읽었는데 충신전(忠臣 傳)이나 효자전(孝子傳)을 볼 때는 개연(慨然)히 경의(敬意) 를 표하여 「남의 신하가 되거나 아들이 된 사람은 당연히 이 와 같 이 해 야 할 것 이 다 .」라 고 하 고 그 글 을 다 읽 은 후 에 는 좋 은글귀를발췌하여삶의지표로삼았다. 일찍이 관직에 나아가 벼슬이 개성판윤에 올라 재임 시 공 평하고 청렴하여 청백리(淸白吏)로 칭송받았으며, 그 후 얼 마 안 되어 부친(父親, 평양부원군)의 상(喪)을 당하자 관직 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와 상례(喪禮)를 지키며 3년 상(喪)을 마치므로효자(孝子)라는칭송이자자했다. 고려의국운이기울고역성혁명의기조를보이자경북성주 가야산에은거하며불사이군의절의를지켰다. 이때 신조(新朝)가 이미 들어서서 은둔한 고사(高士, 인격 이 고결한 선비)를 찾으므로 그의 친족과 친구들은 벼슬을 한 사람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판윤공의 경륜(經綸)을 추대하 니 태종조(太宗朝, 이방원)에서 세 번이나 정경(正卿,정이품 의 벼슬인 의정부 참찬, 육조의 판서, 한성부 판윤, 홍문관 대 제학 등을 이르는 말)으로 불렀으나 공(公)은 끝까지 나아가 지 않았으며 ‘나는 왕씨(王氏)의 신하인데 어찌 이씨(李氏) 에게 벼슬을 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함으로 태종은 공의 뜻을 가상하게생각하여억지로기용하지않았다. 그러나 판윤공은 1426년(세종8년) 임종할 때 유언을 내려 비갈(碑碣)을쓸 때고려의직함(職啣)을사용하게하여이씨 의 신하가 아니라는 것을 보이고,또 자제들 에게 말하기를 ‘너 희들은 왕씨에게 몸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이씨의 조정에 나 아가서 벼슬을 해도 될 것이다.(我爲我王 爾爲爾王)’라고 하 였다. 경상북도 가야산의 불이문(不二門), 장구지소(杖 넓之所), 지동암(志同巖) 등지는 망국(亡國)의 한(恨)을 달래며 은둔 한 곳이며공(公)의 꿋꿋한 충절을 말해주는 유소(遺所)로 62 0여년의세월속에서도고스란히남아있다. 이에 공의 위업을 기리기 위하여 사림(士林)에서 덕봉서원 (德峯書院)을 지어 향사(享祀)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 령에 의해 훼철되고 지금은 유허비와 600여 년을 지켜온 종택 (宗宅,죽백고택)과 죽백사(竹柏祠,廟宇)가남아있다. 한편 판윤공의 세계를 보면 상계를 보면 보문각 대제학을 역임한 휘 숙정(淑貞)은 증조부가 되고 조부는 익재 이재현 선생과 근재 안축 선생 등 당대의 거유와 종유(從遊)하고 이 부 시 랑 (吏 部 侍 郞 )에 올 라 청 렴 고 결 하 고 모 든 일 에 있 어 공 평 하게 처리 하였던 휘 원룡(元龍)이고, 무과에 급제하여 도첨 의시중에 오르고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에 봉해진 휘 천상 (天祥)은 아버지이다. 평양부원군의 첫 번째 부인 원주원씨 (原州元氏)는 성안부원군(成安府院君)원호(元顥)의 따님이 며, 그의 외조부는 복안부원군(福安府院君) 권겸(權謙)이다. 후배(後配)성산이씨(星山李氏)는 경원공(敬元公)포(褒)의 따님이자정당문학의대가이조년선생의손녀이다. 판윤공의 첫 째 부인 정부인(貞夫人) 야성송씨(冶城宋氏) 는 야성군(冶城君) 길창(吉昌)의 따님으로 감사(監司) 구 ( 넣)의 손녀인데 무자녀(無子女)이고 계배(繼配) 남양홍씨 (南陽洪氏)는 판중추(判中樞) 언수(彦修)의 따님으로 부녀 자가 지켜야할 덕행을 두루 갖추어 슬하에 2남(유성, 두성) 2 녀를 두었는데 장남 유성은 의주목사공파, 차남 두성은 진사 공파로세계를이룬다. 장남 유성(柳星)은 효성이 지극하여 일찍이 벼슬길에 나아 가지않았으나판윤공의유훈을받들어출사하였다.종성부사 (鍾城府使, 현 함경북도 종성군)로 나아가 공평청렴하고 자 애로운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은 공덕비를 세워 은혜와 공덕 을 칭송하였으며,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그 행색(行色) 이너무도소연(蕭然)하여임금이그청렴함을가상히여기어 청백리로 봉하여 단서(丹書)를 내리고 의주목사를 제수하니 더욱 엄하고 튼튼하게 변방을 방비하고 위민선정(爲民善政) 을 베풀었다. 이후 황해도 절도사로 부임도중 병이나 48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아들 삼형제를 두니 인손(仁孫), 예손(禮 孫),신손(信孫)이다. 장남 인손의 후예는 성주 수륜을 위시하여 충남 금산, 전북 진안 등으로 이주하였고, 차남 예손은 1495년 합천 야로 숭산 남교(현 야로면 매안리)로 이거하여 아들과 사위(한훤당 김 굉필)의 학업을 위해 숭산(현 매안리 989번지)에 소학당(小 學堂)을건립,이들에게학문의대성을이루게하였다.후손들 은 합천 남교, 경남 산청 신등, 합천 영창, 토포, 성주 수륜에 거주한다. 삼남 신손의 후손들은 성주 수륜의 선조 입향 정착지 주변 에세거한다. 판 윤 공 의 차 남 두 성 의 후 손 들 은 경 북 고 령 쌍 림 등 으 로 각 각이주집성촌을이룬다. 뱚집성촌 탐방 경북성주군수륜면수륜리윤동마 을 경북 성주군수륜면수륜리윤동마을전경. 뱚순천박씨판윤공의입향과지명유래 죽백고택과 사우죽백사. 죽백고택(竹栢古宅)은 판윤공이 입향한 이후 600여 년간 이어온 판윤공 파의종택이다. 가옥의최초건립연대는알수없으나여러차례보수와개 축을거쳐현재에이르고있다. 택호죽백은판윤공이 불사이군의절의를 지켜 남쪽으로 내려와윤동마을에입향한 이후가옥 주위에대나무와잣 나무등을많이 심어가꾸면서후세사람들이 그를죽백선생이라불렀던 것에서유래된다.고택은조선시대양반가의기본적인구성형태가되는사 랑채와안채대문채, 고방채등으로 구성되어있으며, 우측부에도건물이 있어 터진 ‘□’자를 이루어 안마당을 감싸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 재는 남아 있지 않다. 또한 안채의 우측 뒤편의 높은 축대위에 사각형의 토석담장을돌린일곽내에사당이 위치하고있다. 죽백고택은보수와개 축등으로 건축물들의연원이 오래되지는않았지만, 입향한 당대에건립 된 이후 600여년 동안 세거한 역사를 담고 있으며, 안채의건너방우측에 퇴칸을 설치한 평면적인 특징, 살림채보다 건립연대가 이른 것으로 추정 되는 사당 문틀의 모서리 맞춤수법이나 가구수법 등에서 높은 문화재적 가치를지니고있다. 죽백사는판윤공의위패를봉안한 곳으로 이후의민 공이현, 충장공영서를추배하였으나충장공의위패는 논산으로 이안하 여가고판윤공과 의민공의위패만 봉안하고있다. 뱚입향조판윤공의생애 덕봉서원성인당. 덕봉서원과 성인당은 판윤공, 의민공, 충장공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세 웠으나건립연대를알수없다. 그러나펄폐령에따라훼철되고현재는‘성 인당’이라하여재사(齋舍)로 사용되고있다. 충신문-경북 문화재자료 제502호. 경북 성주군수륜면수륜리477(윤동마을) 판윤공의6대손의민공박이현과 그의아들영서의충절을기리기위해건 립된정려(旌閭)이다. 뱚판윤공후예세거지변천 어머니 오늘은 참 특별한 날입니다. 어머니께서 이 땅에 오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생신이 다가오면 그 주 일요일에 엄마 아빠 이름으로 만든 ‘호경장학회’에서 장학금을 주어왔습니다. 어머니 께서도잘알고계시는일입니다. 그런데 올해에는 어머니 생신일과 일요일이 딱 맞아서 어머니 오신 날에 이렇게 우리 가족들이 모 이게되었습니다. 참으로 기쁘고 행복한 날입니다.또 언제 오늘 같 은날이올까요? 어머니! 올해에는 장성 문향고의 임정경 학생과 광주 성덕고의 박남우 학생이 장학생으로 추천되 어장학금을받게되었습니다. 두 학생 모두 공부를 잘하고 타인의 모범이 되는 착한학생으로알고있습니다. 부디 우리나라를 세계에 빛내는 당당하고 아름 다운 큰 기둥으로 성장하시기를 기도하고 기원합 니다. 어머니! 어머니께서도 한없이 기쁘시지요? 작년보다는 그래도 덜 더워서 그럭저럭 여름을 견디고 있습니 다. 이 여름날 선풍기 한 대로 버티시며 늘 부지런 히일하시는어머니모습이선명합니다. 항상바쁘셨지요. 재봉틀 앞에서, 방바닥에서 한복옷을 만드시는 어머니 늘 삶에 긍정적이셨던 어머니! 어머니께서 는 한평생 살아가시면서 살기 싫다는, 죽고싶다는 말씀을 한번도 하지 않으셨지요. 늘 삶에 성실하셨 던 어머니.제가 어머니의 그 삶의 비결을 생각해보 니 평 소 에 노 래 를 즐 기 신 것 이 큰 힘 이 되 신 것 같 습니다. 일하신면서 항상 흥얼흥얼 하셨지요. 가수 현철 이나 이미자의 노래를 즐기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머니는 외모가 이미자를 닮아서 ‘가수 이미자’로 불리시는 것을 좋아하셨고, 동백아가씨나 섬마을 선생님을즐겨부르셨습니다. 어머니도 아시다시피 저는 이미자의 노래는 좋 아했지만 외모는 별로여서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 요. 특히 어머니께서는 장성군편 송해의 ‘전국노래 자랑’에 나가셔서 완창하셨다는 말을 듣고 놀랐습 니다.조금 창피한 생각도 들고요.예선에서 낙방하 시고 더 연습해서 다음에는 ‘딩동댕’하시겠다는 다 부진모습을보이셨습니다. 지나고 보니 어머니의 그 도전정신이 좋았습니 다.어머니의 영향으로 저도 음악을 즐기고 특히 명 상음악을들으며공부하고있습니다. 어머니의 또 다른 삶의 비결은 겸손과 친절이라 고 생각됩니다.어떤 사람을 만나도 항상 밝게 인사 하고 친절하게 대하셨지요. 저는 어머니랑 함께 살 면서한번도모질게말씀하신것을들은적이없습 니다.그리고 자지 주장이 없으셨지요.너의 생각은 어떠냐?하시면서상대방의의견을존중하셨지요. 어렵고 힘든 이웃을 대하면서 돈을 꿔주고 못 받 아 손해를많이보신것으로압니다. 어머니! 이제는 이 모든 것이 다 지난 일입니다. 한바탕꿈처럼아련할뿐입니다. 늘내마음속에청심당으로살아계시는어머니! 어머니는 저의 일생에 제일 큰 선물이셨습니다. 마침 우연히 나태주님의 ‘선물’이라는 시를 보게 되었습니다.어머니읽어드릴테니들어주십시오 -선물,나태주- 나에게이 세상은하루 하루가선물입니다? 아침에일어 나만나는밝은햇빛이며새소리? 맑은바람이 우선선물입 니다문득푸르른산하나마주했다면그것도선물이고서럽 게서럽게뱀꼬리를흔들며사라지는강물을보았다면그 또 한 선물입니다한낮의햇살받아손바닥뒤집는잎사귀넓은 키 큰 나무들도 선물 이 고 길 가다 발 밑에 깔린 이 름 없어 가 여운풀꽃들하나하나도선물입니다무엇보다도먼저이 지 구가 나에게 가장 큰 선물이고 지구에 와서 만난 당신 당신 이 우선적으로 가장좋으신선물입니다저녁하늘에붉은노 을이 번진다해도부디마음아파하거나너무섭하게생각지 마세요나도 또한 이제는 당신에게 좋은 선물이었으면 합니 다? 그리운어머니! 우리가족 모두 서로서로에게 좋은 선물, 기쁨의 선물이 되기를 약속합니다. 그러니 늘 평안하십시 오. 2019.8.11. 엄마생신날에큰아들편지올림 뱚孝열전 그리운어머니! 한빛신문은성손여러분이 함께 만들어가는 소중한 자산입니다 1인 2명의 구독자 배가운동에 적극 동참하시여 한빛신문이 더 많은 자료를 만들어 후손들에게 물려줄수있도록힘을실어주시기바랍니다. 한빛신문은 창간 12주년 동안 선조님의행장과 종중의약사 집성촌,본관별세 거지변천사등수많은자료를기록으로남기는방대한작업을하고있는‘성손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종보’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 선조님의현창사 업과 후손들에게 물려줄 박문(朴門)의뿌리를 연구하고 다듬어 데이터베이스 화하는데앞장서겠습니다. 한빛신문임직원일동 뱚제보및구독신청안내:053-588-7300,070-4250-0078 Fax053-581-0067 e-mail:parkss1012@hanmail.net 뱚※성손여러분이납부하여주신구독료는 뱚신문발행에큰도움이됩니다. 구독료및후원금계좌453013-55-000691농협한빛신문 경상북도 성주군은 경북의서남에 위치하여지형은 대체로 원형을 이루며 동쪽으로는 대구광역시 달성 군과 칠곡군, 서쪽으로는 김천시와 경남 거창군 남 쪽으로는 고령군 및경남 합천군, 거창군, 북쪽으로 는김천시와칠곡군과경계를이루고있으며서북쪽 은낙동강과그지류하천이형성한평야지대로양분 되어있고낙동강및대가천연안의사질양토가폭넓 게분포되어있다특히최근성주참외가명성을떨치 면서더유명한곳이다. 수륜면 수륜리는 윤동(倫洞)·수륜동(修倫洞)·죽백 촌(竹栢村)이라 불린다 수륜리의(修倫里)의 큰마을 (大村)인 윤동(倫洞)은 고려 때는 장동(長洞),고려말 에는 죽백촌(竹栢村)이라 했고, 조선 중기에는 수륜 동(垂綸洞), 1500년대에는 수륜동(修倫洞)이라고 했 다. 죽백촌(竹栢村)은 대나무와 잣나무가 많은 마을 이라는뜻이고,수륜동(修倫洞)은인륜(人倫)을닦은 마을이라는 뜻으로 문호를 연판윤공박가권 선생과 무관치않는지명이라할것이다. 고려말조선초순천박씨판윤공파의집성촌으로많 은 후손들이 시대의 변천과 함께 인근의 고령과 합 천 충 남 논 산 등으 로 이 거 해 가 면 서 현 재 는 몇 호 남 지 않았지만 많은 유물들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 다. 이 마을은 조선 중종(中宗) 때 의성김씨들이 순천박 씨문중과 혼인하면서 입향(입향조 金關石) 현재는 큰집성촌을이루며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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