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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8월31일 토요일 4 (제152호) 기 획 용 산 서 원 은 전남 보성출신 의 죽 천 박 광 전(竹川 朴光 前, 1526~159 7)선생을 추모 제향하고, 후 학들의 면학을 조성하는 강학의 공간이다. 1868년 훼철되었다가 2011년 복원 사업이 진행되었다. 이 서원의 창설은 1607년 보성군 미력면 덕림리에 죽천의 학덕과 충의를 평소 흠모하였던 이 지방 유림 들에의하여추진창건되었다. 1607년 죽천의 문인 우산 안방준(牛山 安邦俊)이 건원통문 (建院通文)을 작성하여 열읍과 유림에게 전하고 정길(鄭佶) 을비롯한도내사림들의협조를얻어서원을건립하였다. 이로부터 2년 뒤인 1610년(광해군 2)에는 광해군이 왕세자 시절 그의 사부였던 죽천에게 승정원좌승지겸 경연참찬관을 증직하였고,가묘에예관을보내어치제(致祭)하기도하였다. 창건 이후 100여년이 지난 1705년(숙종31)에는 호남 유생 임치당 등이 용산서원의 사액을 청하는 청액소를 올렸다.당시 청액의 이유로는 우선 이미 건립된 지 100여년이 경과하여 제 향 하여 왔다는 점과 다른 설처(設處)가 없다는 점, 그리고 학 덕과 행의가 사림의 추앙을 받을 만 하다는 사실이 지적되었 고,당시 조정에서는 예조판서 조태채가 주선하여 사액의 지명 을 받았다.1707년(숙종33) 용산서원이라 사액되었고,이는 당 시용산서원의원장이었던권상하,이만성,신임,김홍경,이재, 조연빈 등의 합계가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이후 한차례의 중 수가 있었는데 죽천의 7대손인 박형덕과 윤종의의 ‘용산서원 중수상량문’이 그 사정을 알려주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가 없 다. 1871년(고종7) 훼철령에 의해 철향되어 1987년 용산서원 유 허지길가에유허비를수립하였다. 2011년에는 전라남도 보성군과 도내 유림들의 협조로 현 위 치에 복설(復設)을 시작하여,2016년 12월에 준공하게 되었다. 용산서원의 편액은 옛 서원의 암벽에 새겨져 있는 사액현판 (賜額懸板)을 탁본하여새겼다. 한편 죽천선생의 문집 죽천집에는 용산서원 건립을 위한 통 문, 사액을 청하는 상소문, 재헌(齋憲) 9數가 전해져 조선시대 서원건립과 운영 등을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 인용해 본다. 이 통 문 은 합사(合辭·合 啓)로 소장을 올려 죽천 박 광 전 선 생 의 사우(祠宇) 건 립 을 청 하 기 위 한 것 입 니 다. 삼가 생각 건대, 선생의 뛰어난 도(道) 와 높 은 덕 (德)은 실로 백대(百代)의 큰 스 승 이 되 고 일세(一世) 의 흠 모 와 추 앙을 받았음은 오 늘 날 다 시 말 하 필 요 가 없습니다. 선생은 퇴도(退陶, 퇴계 이황)의 적전(嫡傳)으로 의발(衣 鉢)의 부탁을 받았고, 연원(淵源)의 정통을 이었습니다. 그 조 예(造詣)의 깊고 옅음과 체용(體用,본체와 작용)의 정밀함과 미묘함은 후생(後生)과 소자(小子)들이 감히 엿보거나 헤아 릴 수 없지만, 이 세상에 기강이 된 그 덕행(德行)과 공화(功 化)는 뚜렷이 사람들의 이목에 남아 있어서 속일 수는 없는 것 입니다. 대개 선생의 학문은 한결 같이 사문(師門)의 종지를 준수하 여 낙민(洛民, 정자와 주자)의 정맥이 이었는데, 특히 자양부 자(紫陽夫子, 주자)의 글을 가장 깊게 공부하였습니다. 퇴도 (退陶)가 준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8책은 위기지학(爲己 之學, 자신을 위한 학문, 곧 도학)의 요체와 깊이 관련되어 있 는데, 선생은 의심스러운 곳을 질문하여 한 책을 만들어서 후 락에게 남겨주어 정주(程朱)의 도(道)로 하여금 다시 세상에 밝아지게 하였습니다.또한 선유(先儒)들이 논한 이기선후(理 氣先後)와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학설을 절충하여 분석 하였고,고금의 전례(典禮)도 고증하여 학설을 세워 세상 사람 들로 하여금 모두 교화를 받아 나아갈 올바른 방향을 잃지 않 게 하였으니 이 어찌 선생의 훌륭한 덕과 큰 사업이 사문(斯文, 유교의문화)에공을세운것이아니겠습니까? 근자에 선생이 갑자기 돌아가시니 산악(山嶽)이 무너져 대 지를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문(斯文)이 땅에 떨어져 세 도(世道)가 손상되었으니 우리 사림(士林)들이 한없는 슬픔 이 어떠하겠습니까? 국가에서 유현(儒賢)을 숭상하여 보답하 는 것과 후학이 선사(先師,돌아가신 스승)를 바라보고 의지하 는 것은 반드시 사우(祠宇)를 세워 영령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있는데,우리고을을돌아보면그윽이느끼는바가있습니다. 옛날 선조(宣祖) 대왕께서 사문(斯文)을 숭상하는 훌륭한 덕과 지극한 뜻으로 폐백을 가지고 초야에서 초빙하여 융숭한 예로 접견하고 사부(師傅)의 직책을 맡기며 선생의 정밀하고 밝은 학문을 추켜세웠으니, 성조(聖朝븡거룩한 선조 임금의 조 정)의예우와칭송은또한천하후세에모범이될만합니다. 임진년(1592)과정유년(1597)의 왜란에 거듭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이 되어 적의 급소를 누르고 적의 창칼을 막아 세 번이 나 승리하였습니다.이로 인하여 병을 얻어 돌아가시니 절의를 지키다 순숙한 마음은 바로 중봉(重峰,조헌),제봉(霽峰,고경 명)의 어진 마음과 서로 비슷하여 온 나라가 떠들썩하게 칭송 하고있습니다. 그와 같은 도덕과 그와 같은 절의를 그대로 묻어두어 먼 훗 날까지 일컬어지지 않게 놔둘수 없으니 서원(書院)을 세워 숭 상하고 떠받들어 추모하는 뜻을 나타내는 것은 참으로 사문 (斯文)의 훌륭한 일입니다. 우리 고을의 용산(龍山)은 선생이 독서하고 강학하던 곳이므로 우리들이 서로 발의하여 장차 원 우(院宇, 서원과 사우)를 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한편 으로는 옛 사적을 들춰내어 영원히 우러러 볼 곳으로 삼고, 한 편으로는 선생의 높은 덕을 흠모하여 사림(士林)들을 일으켜 세울 곳으로 삼기 위해서입니다.그러나 이것은 우리 고을에서 만 사사로이 할 것이 아니라,마땅히 오당(吾黨,공자를 추종하 는 유생들)의 많은 선비들은 모두 흔쾌히 따라야 할 것입니다. 모월 모일에 일제히 중학(中學,서울중부에 있는 사학의 하나) 에 모여 천문(天門,임금이 계시는 대궐 문)에 소장을 올리고 윤허한다는 비답(批答)을 받아야 합니다. 이는 오늘날 그만둘 수 없는 성대한 예(禮)입니다. 우리 사림들 모두가 똑같이 덕 을 좋아하는 마음과 선현을 추모하는 정성을 지니고 있으니, 반드시 기쁜 마음으로 즐겁게 듣고 힘차게 움직여 동참하리라 생각합니다.일제히 회의에 참석하여 서원을 세우고 제사를 드 리는 자리를 마련한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 문강공 안방 준 지 음 - 하나,장의(掌議)1명 색장(色掌)2명을 중망이 있는 사람으 로 잘 뽑아서 동솔하는 데 본부기로 삼되 서원의 모든일을 이 모저모 살펴서 자세하게 타일러 소략하거나 빼먹는 폐단이 없 도록한다. 하나, 봄과 가을에 제사를 드릴 때 제물(祭物)은 정성을 다 해 깨끗하게 마련하고 음식과 술잔을 드리는 일은 한결같이 예 식(禮式)을 따라야 한다. 그리고 제물을 봉하여 올릴 때 만일 깨끗하지 않거나 부족한 폐단이 있으면 전사(典祀)가 곧 관아 에보고하여다시알아듣도록타일러봉행해야한다. 하나, 제사를 드릴 때 헌관(獻官) 3명과 집사(執事) 18명은 문필이 있어 제사의 의례를 익히 아는 자를 잘 가려 뽑아 사무 를 맡 겨 야 한 다 . 하나,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집강(執綱)한 명씩을 교체하여 향(香)을사르게하고아울러닦고쓸게해야한다. 하나, 전곡(典穀) 1명을 서재(西齋) 가운데서 근간하고 착 실한 사람으로 가려 뽑되 가을에 결실이 되었을 때 서원 전답 의 곡식에 대해 창고마다 직접 조사한 뒤에 세를 걷어서 빠지 거나잃는폐단이없도록해야한다. 하나, 원생 30명은 서민 중에서 준수한 사람으로 가려 뽑아 사계절 초하루에 모두 서원에 모여 강의를 베풀어 일과를 권장 하는 자리를 마련하되 서원의 학규를 따르지 않는 자는 최를 다스린후관아에보고하여면직시켜야한다. 하나,수호군(守護軍)30명은 건실한 사람으로 가려 뽑아 봄 가을로제사를드릴때에지휘를받아일을해야한다. 하나,임원들은1주년마다바꾸어야한다. 하나,먼 고을의 학궁(學宮)에 간혹 뜻밖의 도리에 어긋나는 폐단이 없지 않은데 가벼운 것은 재(齋)에서 벌을 논하고 무거 운 것은 조정의 명령을 따라 관아에 보고하고 엄히 처벌하여 징계하고격려하는자리를마련해야한다. 용 산 서 원 은 사우(祠 宇) 경덕사 (敬德祀)와 내삼문 숭모 문(崇慕門) 이 있 고 강 당인 용산서 원은 전면 5 칸 측 면 2 칸 으로 양쪽 1칸씩은 방으로 되어있다. 동재는 수인재(修仁齋), 서재는 숭의재(崇義齋), 외삼문은 진선문(進善門)이고 서원 입구에홍살문이있다. 서원의 동재와 서재를 수인재(修仁齋)·숭의재(崇義齋)라 함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죽천 선생은 퇴계 이황의 문 인으로 함열 현감 등을 하면서 仁을 실천했고, 임진왜란과 정 유재란에의병장으로활약하여義를숭앙했다. 함열현감으로 재임 시 선생은 관사와 동헌에 ‘시민여상(視 民如傷)’네 글자를 크게 써 붙여 놓고 백성을 자애롭고 편안하 게다스렸다. 시민여상(視民如傷)은 븮춘추좌씨전븯 애공(哀公)편에 나오 는 말로 “나라의 흥성은 백성보기를 다친 사람을 보는 것처럼 하는 데 있으니 이것이 복이 되고, 나라의 쇠망은 백성을 흙이 나 쓰레기처럼 하찮게 여기는 데 있으니 이것이 화가 된다.”라 는 글에서 유래하고 있어 편액하나하나에 죽천 선생이 백성을 가 장 먼 저 생 각 하 는 왕 도 정 치 에 충 실 한 유 학 자 임 을 알 수 있 다. 용산서원은 도학과 절의의 선비,의병장 죽천 박광전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죽천선생의 본관은 진원(珍原),휘(諱) 는 광전(光前), 자(字)는 현재(顯哉), 호(號)는 죽천(竹川) 또 는해교(海嶠),경곡(瓊谷)으로도불린다. 아버지는 진사(進士) 이의(而誼)이고, 어머니는 낭주최씨 (朗州崔氏)이다.죽천선생은 1526년 정월 16일 전남 보성군 조 양리(현,조성면용전리)에서장남으로태어났다. 선생은 자질이 뛰어나 아름다운 품격을 갖추었다.그는 어린 나이부터 수학하였는데 그 재능이 뛰어났다. 수학한지 3년 혹 은 4년 밖에 되지 않았을 때 유학의 진수가 담기 시구를 지었 다.“도(道)는 하늘로부터 명(命)하는 것이니 어찌인위(人爲) 로 하는 것이라 한번 공자의 도를 크게 이루리라!(道自天命 豈 人爲 爲一大成孔子道)”이는 ‘도위(道爲)’와 위도(爲道)‘의 두 글자를 가지고 시를 지어보라는 아버지의 시제(詩題)에 즉석 에서 지은 시이다. 이일을 계기로 죽천선생의 학문에 대한 자 질과장래성은주위사람들의기대를한껏높여주었다. [배움의길을따라] 죽천선생은 부친의 권유에 따라 흥양(興陽,현 고흥군)에 귀 양온 인재 홍섬(忍齋 洪暹, 1504~1585, 조선중기 문신)에게서 수학하였다. 그는 매일 자신의 집에서 흥양까지 수 십리 길을 걸어 다녔다. 그의 문명이 전라감사에게까지 알려졌다. 이에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과거공부에 열중이었으나 사장학보다 내면의 수양에 힘쓰는 도학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성리대전(性理大典)’을 구해유학의기본원리 연구에더 많은 시간을 두었으며, ‘중용(中庸)’ 등을 읽으면서 스스로 깨우치 는바가많았다. 죽천 선생은 20세에 과거를 보러 갔다가 석천(石川) 임억령 (林億齡,1496~1568)을 만나 율기(律己) 공부에 치중하기 위해 과거를 포기하고 귀향했다. 21세에 장흥 유치의 진사 문양지 (文씨亮之,증참의)의딸과혼인하였다. 22세 때에는 송천(松川) 양응(梁應鼎)에게 수학하였다. 죽 천 선생은 치인(治人)보다 수기(修己)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 여 수학하였다.출사하여 출세하기보다는 학문연구와 강학(講 學)에 더 큰 의미를 둔 것이다. 30대에는 보성강의상류인 죽천 (지금의 광탄)위에 정사(亭舍)를 마련하고 학문연구에 심혈 을 기울였다. 천봉산(天鳳山) 대원사와 우계(遇溪) 등에 들어 가 강학에 열심이었다. 꾸준히 도학에 관심을 갖고 자신의 학 문을 연마하는데 노력하였다.관직에는 관심이 없었다.접반사 윤의중(尹毅中)의종사관에천거되었으나사양하였다. 또 스승인 인재 홍섬이 재상으로 복귀하여 만나기를 원했지 만권문에출입하는것은아니라하여찾아뵙지않았다. [퇴계문하에들다] 죽천선생은 학문을 더 연구하여 41세에(1566년) 안동 예안 에 계신 이황을 찾아가 수학하였다.퇴계이황은 그의 진지함에 놀라 정성껏 대하였다. 죽천선생이 퇴계를 떠나 올 때 퇴계는 손수 초사(抄寫)한 ‘주자서절요븯(朱子節要) 초본 8책을 그에 게 주었다.그리고 퇴계선생이 죽천에게 지어준 시에는 각별한 마음이담겨있다. “늦게 좋은 친구를 만났으나 이제 작별하는 이 마당에 어찌 한마디 말이 있을 수 없겠는가(晩逢好友 遽爾相別 島得無言)” 하면서 시 5수를 지어주었다. “늙고 병들어 부끄럽게 실추된 점이 많았는데, 그대가 일깨워 주는 바람에 여러 가지 깨우침 있었네(老病極漸 多失墜待 君提更明)”라는 시구를 다시 덧붙 여 준 것이다.이 시를 통해 퇴계 선생이 죽천을 얼마나 아꼈는 지,석별의 아쉬움이 얼마 컸는지를 알 수 있다.퇴계 선생은 죽 천보다 25살이나 위였다. 죽천선생은 ‘주서절요’를 더욱 연구 하여 의문나는 사항은 조목조목 기록하여 서신을 통해 묻고 답 을 구했다. 묻고 답하는 글을 묶어서 ‘절요질의(節要質疑)’라 는귀중한책이나오게되었다. [백성을상처입은사람보살피듯] 죽천은 늦은 나이에 진사시에 급제하였다.이후 46세에 유희 춘의 천거에 의해 경기전 참봉에 제수되어 관계에 처음 나갔 다. 이때 유희춘이 호남 안찰사로 있으면서 선비 다섯 사람을 천거함에 선생을 제일인자로 삼았다. 선생은 이어서 헌릉(獻 陵,태종과원경왕후의능)참봉으로나갔다. 죽천 선생은 경기전과 헌릉의 참봉으로 재임시 원내에서 잡 희(雜戱)유연(遊宴) 전렵(田獵)등을 금지하였다.그 후에 동 빙고 별좌를 거쳐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어 광해군을 가르 쳤는데 기초 공부를 철저하게 시켰다. 이에 그는 왕자사부로 선조의 치하를 받았다.이후 감찰을 마지막으로 내직에서 벗어 나 함열, 회덕 등의 현감을 지냈다. 그는 외직에 있는 동안 ‘시 민여상(視民如傷)을 좌우명으로 삼아 애민(愛民), 송사(訟 事)엄정,관고보전(官庫保全)을철저히하였다. 64세에 귀향하여 학문과 강학에 열성을 쏟았다.67세에 임진 왜란을 맞아 임계영, 김익복, 문위세 등과 의병을 모았다. 그는 노령과 병으로 의병을 통솔할 수 없어서 임계영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죽천 선생은 70이 넘은 나이 에도 불구하고 창의를 이끌고 화순 동복 등에서 왜군과 싸웠 다. 그러나 그는 병이 심해져 11월 18일 운면을 달리하였다. 이 때나이72세였다. [우국애민을실헌한도학과절의의학문과사상] 죽천선생의 학문 세계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외화적 세계가 아닌 안으로 체험하고 밖에서 구하지 않고, 효제에 근본하여 근신과 공손을 실천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후학들을 지도할 때에도 학문하는 것은 기송사장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도를 실 천함에 있는 것임을 강조하고.만약 학문을 할려면 위기지학의 본의에뜻을두어야한다고강조하였다. 선생은 전라감사 유희춘의 천거로 경기전 참봉으로 관료생 활을 시작하여 왕자(광해군)사부가 되었다. 이때 죽천은 광해 군에게 조정의 일에 관여하지 말며,지식으로써 정성을 다하여 효도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수식(修飾, 겉모양을 꾸밈)하는 것 을경계하게하였다. 외직인 현감에 봉직하면서는 시민여상(視民如傷,백성보기 를 상처입은 사람같이 보라)을 좌우명으로 삼고 애민위민을 위하여열의를쏟았고,공사의구별을분명히하였다. 임진왜란시 격문을 보면 왕에 대한 어구보다 ‘생민’,‘생령’으 로 표현된 백성에 대한 걱정을 더하였으며, ‘우리 생민이 몸둘 곳이 어디이고,집 삼을 곳이 어디인가?하고 백성의 고통과 고 난을 걱정하였다.의병모집의 궁극적인 의의를 ’생민보호와 안 녕‘에 둔 사상은 신분적 봉건사회인 군왕중심의 사회에서 자칫 위태로울 정도의 사고이며,상당히 진취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애민,위민의충정을가지고의군의선봉에섰던것이다. 왕세자가 무군사를 이끌고 완주에 행차하였을 때 상신한 시 무책의 일부를 보면 ‘오늘의 민생이 저렇게 보금자리를 잃고 살려는 생각이 없다고’고 통분하며 사람이 먹지 못하면 죽으니 백 성 이 살 길 은 밭 을 갈 고 샘 을 파 서 비 록 스 스 로 생 육 하 는 일 이 있을지라도 농사하는 시기는 어기지 않은 것이 왕도의 시작 이라고 하였다.아울러 왕도는 민심을 수습하는 것이요 민심의 수습은 세금의 감면과 식량의 보충이라고 하는 것 등을 살펴보 면 선생의 도학과 절의는 무두 실천적 우국애민에 있었던 것이 다. [임진왜란과의병창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남에 남도의 열읍에 ‘국운의 존망이 경각이니 어이 좌이대사하랴. 일제히 봉기하여 생민을 보고하 고 나라를 구하자.’고 거의 격문을 냈다.이때 창모에 순응한 애 국투사가 700여명과 군량미 300여석을 모곡하여 7월 20일 전 남 보성 동헌 관문에서 출전식을 거행하였다.죽천선생은 67세 의 노령을 한탄하며 임계영을 전라좌의병장으로 추대하였으 며,문인 안방준을 도체찰사 정철에게 군무를 품의케하고 장자 근효를 참모관으로 처남 문위세를 양향관으로, 정사제를 종사 관으로 하여 ‘호(虎)’자를 장표로 하고 낙안 순천 구례 남원을 거쳐 금산과 무주에서 적을 무찌르고 성주와 개령을 수호하여 전공을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에 문인 안방준과 생원 박사길 등이 의병장 으로 추대하니 72세의 노구를 이끌고 화순 동복에 진입하여 전 판관 송홍렬을 부장으로 하여 적벽전에서 대승하였으나 기력 이쇠진되어1597년 11월 18일 모후산에서 서거하였다. 뱚서/원/탐/방 문강공죽천박광전선생 용산서원 <전남보성군노동면명복리> 용산서원①사우경덕사②내삼문숭모문③강당용산서원④동재수인재⑤서재숭의재⑥외삼문진선문⑦의병기념관 용산서원은 남도의병의 아버지로 민생안전과 우국충 정을 몸소 보여준 죽천 박광전 선생을 기리고 호남학 맥의맹주였던선생의높은학문을이어온강학의장소 이다. 1607년 죽천의 학덕과 충의를 평소 흠모하였던 이 지 방 유림들에 의하여건립되었으나 대원군의서원철폐 령에의해훼철되었다가2011년복원사업이진행되어 2016년12월에준공복원되었다. 죽천 박광전 선생은 퇴계의문인으로 퇴계선생 은 “늦 게 좋은 친구를 만났으나 이제 작별하는 이 마당에 어 찌 한마디 말이 있을 수 없겠는가(晩逢好友 遽爾相別 島得無言)”하면서시5수를지어주었다.“늙고병들어 부끄럽게 실추된 점이 많았는데, 그대가 일깨워 주는 바람에 여러 가지 깨우침 있었네(老病極漸 多失墜待 君提更明)”하였다.라고평가하고있어죽천선생의높 은 학 문 을 가 늠 해 볼 수 있 다 . 뱚용산서원(龍山書院)의건립과복설 강당인용산서원과 동서재전경. 뱚용산서원건립을위한통문(建院通文) 용산서원유허비(전남보성군미력면덕림리우와곡) 묘정비와복설사적비(서원경내) 용산서원암각(보성군미력면덕림리). 용산서원암각(현서원경내) 뱚용산서원의재헌(齋憲) 뱚용산서원의구조 사우(祠宇)경덕사 뱚배향인물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