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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8월31일 토요일 2 (제152호) 기 획 931년 2월 자신이 임해전에서 견훤을 비난한 것처럼, 이제 견훤은 왕건에게 전죄를 참회하고 경애왕 시해의 책임을 김부 자신에게 떠넘기려 할 것이 틀림없었다. 왕건과 견훤이 함께 조소하는소리가귀를간질였다. 925년 10월 을해(乙亥)에 왕이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견훤(甄 萱)과 조물군(曹物郡)에서 싸왔는데 유금필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함께 하니 견훤(甄萱)이 두려워하여 화의를 청하고 사위 진호(眞虎)를 인질로 삼으니왕도또한 사촌동생원윤(元尹) 왕신(王信)으로써인질로 교환하고 견훤이 10년의 연장자이므로 상보(尙父)라 칭하였다. (븮고려사븯 세가 2 태 조 8 년 10월) 견훤(甄萱)이 막내아들 능예(能乂)와 딸 애복(哀福)과 애첩(愛妾) 고비 (姑比) 등과 함께 나주(羅州)로 달아났다가 입조(入朝)하기를 청하므로 장군(將軍) 유금필(庾黔弼), 대광(大匡) 만세(萬歲) 원보(元甫) 향예(香乂), 오담(吳淡), 능선(能宣), 충질(忠質) 등을 보내어 군함 40여 척을 거느리고 바다로나아가그를맞이하게하였다.견훤이도착하자다시견훤을일컬 어 상부(尙父)라 하고 남궁(南宮)을 관사(館舍)로 주고 지위를 백관(百官) 의 위에 차지하 게 하 며 양주(楊 州 )를 내려주어 식읍(食邑)을 삼게 하 고 겸 하여금과 비단 그리고노비각각40명과 구마(廐馬)10필을내려주었으며 앞서 항복해 온 사람 신강(信康)으로 아관(衙官)을 삼았다. (븮고려사븯세가 2 태조 18 년 6월) 왕건은 20여 년에 걸쳐 견원지간이던 견훤을 받아들였다.순 식간에 다시 상보(尙父)라 부르고 남궁(南宮)에 관사를 주며, 지위는 백료의 위에 두고 양주(楊州)를 식읍(食邑)으로 삼게 했으며,금백(金帛)과 노비 각 40인과 구마(廐馬)10필을 내렸 다.왕건의처사는놀라울따름이었다. 4년 전 임해전 회합 때 견훤을 욕하고 전죄를 참회하는 자신 의 눈물에 함께 울었던 그가, 견훤에 대한 징벌을 다짐하며 자 신을 위로했던 그가,표변하여 하루아침에 적수賊首견훤을 하 늘의해처럼떠받드는것에서왕건의무서움이느껴졌다. 견훤에의 우대는 백제 지역 수습과 장악에 그를 동원하려는 왕건의 책략일 것이지만,이용가치만 있으면 수십 년의 숙적도 웃으며 맞아들이는 그의 처세와 정략에는 김부도 가슴이 벌렁 거릴정도였다. 견훤을 두둔하는 입장에 선 왕건의 눈에, 그리고 장차 힘센 백제를 병합하고 난 왕건의 눈에, 약소국 신라의 왕인 자신은 어떻게 비칠지 두려웠다. 왕건과 싸워 이길 수 없다면 하루라 도빨리귀부의길을택해야옳다고생각했다. 자신에 대한 왕건의 관심이 멀어지기 전에, 왕건의 입장이 견훤에게로 확실히 굳어지기 전에 김부는 나라를 들어 왕건에 게 항복하기로 결심했다. 몸만 빼어 항복한 견훤보다, 나라를 들어 항복하는 자신에게 왕건은 다시 흔연히 돌아설 것이라 여 겼다. 견훤의 편에 붙어 신라의 왕이 된 그는, 견훤을 배신하고 왕건에 붙어 자신의 영화를 이어가려 했고, 이제 그마저 여의 치않자나라를들어왕건의환심을사려했다. 군신들을 소집한 그는 자신의 속내를 감춘 채 겉으로는 백성 들의안위를명분으로귀부에대한동조를구했다. -사방의토지가모두왕건과 신검의소유가되었다. 국세가외롭고미약 해져 능히 스스로 편안할 수 없는 즉, 이에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고려에 항복할 것을 모의하려 하는 바이다. (븮삼국사기븯 권12 신라본기12 경순왕 9년조) 필부의 충(忠)도 그보다는 나을 것이었다.왕의 입에서 나와 서는 안 될, 가당찮은 말에 처음 황망함이 감돌아 감히 사태를 수습할 수 없었다. 태자는 가늘게 자탄 섞인 한숨을 지었다. 조 인광좌중(稠人廣座中)에 망국의 일을 신하에게 채근하는 것 을 터놓고 들으니, 아무리 아비의 말이라 해도 듣기에 괴란쩍 고 너무나 야속했다. 태자가 나서 아비의 잘못을 지적하고 나 섰다. -나라의존망은반드시천명(天命)이 있습니다.마땅히충신의사와더불 어민심을수합(收合)하여죽음으로써스스로 지키다가힘이 다한 뒤에그 만둘 것인데, 어찌일천 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가볍게 남에게 주려 하십니 까. (븮삼국사기븯권12신라본기12경순왕9년조) 아들은,잇속만 생각하다 염치조차 잊어버린 아비에게,왕도 와,충과,인간 본분에 대해 얘기했다.그러자 아비가 나라를 왕 건에게넘겨야되는이유를설명했다. -외롭고 위태로움이 이와 같아 형세가 능히 보전할 수 없다. 이미 능히 강해질수도없고또능히약해질수도없게되었다. 무고한 백성으로 하여 금참혹한 죽음에이르게함은내차마못하겠다. (븮삼국사기븯권12신라본 기12경순왕9년조) 국망여망(國亡與亡)조차 가슴에 간직하지 못한 김부는 정 신부터 썩어 있었다. 왕이 아닌 왕자조차 천년사직을 위해 목 숨을 걸려 하는데 정작 왕이란 자는 천연스레 나라를 넘겨야 살수있다며해괴한망언을늘어놓고있었다. 골육상쟁으로 솥발처럼 분열된 천년 사직은 급기야 신라의 기개와 긍지를 잃어버린, 이 미친 권력자의 등장으로 스스로 자멸의 길을 택하려 하고 있었다. 인고의 세월을 거쳐 초석이 다져진 나라를 자청해 바치려는 이 못난 신라왕은, 지금 동서 고금을통틀어초유의일을하루빨리저지르지못해안달했다. 자식이 그리하려 해도 말릴 아비가, 자식이 말리는 데도 부 끄러움을 깨닫지 못한 채,고려로의 귀부를 백성과 신하들에게 호소하고 있었다.왕이 되지 말아야 할,혼과 넋이 빠진 자가 왕 이 된 파국은 처절했다. 견훤이 왜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죽이 고 김부를 신라왕으로 세웠는지 뚜렷이 징험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안】예로부터나라가망하여항복한 임금이 하나둘이 아니었으나, 모두 그 형세가 꺾이고 힘이 다하여 죽지 못해서 어쩔 수 없어 그런 것이 요, 즐겨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옛날 주(周)나라 난왕이 망할 적에 븮강 목(綱目)븯에 특서(特書)하기를 ‘왕이 진(秦)에 들어가 그 고을을 모두 바쳤 다.’ 하였다. 그러나난왕은오히려진나라의핍박을두려워해서였으니, 정 상이 오히려용서할만하다. 그러나김부는고려에서일찍이 굴욕을당한 거동이나공박(攻迫)을받은형세가있지않았으되,한갓외롭고쇠약하여 능히 스스로 보존할 수가 없기 때문에 사직을 들어 남에게 주고 항복을 청 하여마지않았으니,이도또한 주나라난왕이 하지않은바이다. 아아, 신라가 융성하던 때에는 절의 있는 인사가 대대로 없지 않았었는 데, 그 망함에 미쳐서는 한 사람도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니, 이는 다른 까닭이 아니다. 그 임금이 이와 같으므로 그 등용된 자가 모두 탐욕스럽 고 비루하고 아첨하고 간사한 무리여서, 오직 나라를 팔아넘기는 것이 능 사인줄로 알 뿐이었으니, 어찌나라를위하여순절하는것이 의리가됨을 알았겠는가? 이는족히괴이쩍게생각할것이 없다. (븮동사강목븯 권3 김부 9년10월조.사론) 태자가 반대하며 사직의 안위를 얘기하고 있음에도 그는 사 리(私利)를우선한결과,그맥락을파악하지못하고있다. 이야말로 주나라 난왕 조차 하지 않은 망동(妄動)이었다.아 아! 신라의 마지막 조정에는 신라의 왕도, 신라의 신하도 없었 다.드디어신라는망하려는것인가.망하고야말것인가. 신라의 조정은 혼연일체가 되어, 한 사람도 목숨을 끊어 왕 의 잘못을 간하는 자 없이, 자멸의 길을 간절히 원하기 시작했 다. 그 임금이 이와 같으므로 등용된 무리 또한 다르지 않았다. 모두 탐욕스럽고 비루하고 아첨하고 간사했다. 나라를 팔아넘 겨 영화를 이어가는 것만 오직 능사로 알았고, 행여 거세게 반 대했다가왕건의후환이있지않을까전전긍긍할뿐이었다. 태자는 천년사직의 종말이 눈앞에 다가왔음을 느꼈다. 희망 은 없고 절망만 있는 서라벌 궁궐에서 태자는 흡사 자신의 최 후를 하늘과 땅에 고하는 야수처럼, 지쳐 땅바닥에 쓰러질 때 까지 울었다. 통곡의 소리로 인하여 신라의 혼을 되살리려 작 정한듯,목숨을걸고광인처럼크게울부짖었다. 월성의 남쪽,즐비한 고가에까지 태자의 울부짖는 소리와 궁 궐의 야단법석은 생생히 들렸다.군왕이라면 나라의 위기에 최 후의발악이라도해야마땅했다. -견훤의 60일 시위에 목숨을 걸고 저항한 경애왕처럼은 아니라 해도 왕 건의 60일 시위에 항복을 자청하고 나선 것은 군왕의 길이 아니다. 아비는 줄줄이 왕건에게사신을보내귀부의뜻을밝히더니,드디어는나라를왕건 에게바치려하고있다. 9년 겨울 10월, 사방의 국토가 모두 타인의 소유로 되어, 국세가 약하고 고립되었으므로, 왕은나라를스스로 보존할수없다고판단하고, 여러신 하들과 함께 태조에게 항복할 것을 의논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였 으나, 옳다는 사람도 있었고, 옳지 않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때 왕자 가 “나라의 존속과 멸망은 반드시 하늘의 운명에 달려 있으니, 다만 충신 의사들과 함께 민심을수습하여, 우리자신을공고히하고힘이 다한 뒤에 망할지언정, 어찌 1천년의 역사를 가진 사직을 하루아침에 경솔히 남에게 주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왕은 “고립되고 위태로운 상황이 이와 같아서 는나라를보전할수없다.강하지도못하고약하지도않으면서, 무고한 백 성들이 참혹하게 죽도록 하는 것은, 나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라 고말하고, 곧시랑김봉휴로 하여금태조에게편지를보내항복을청하였 다. 왕자는통곡하면서 왕에게 하직인사를하고, 산길을 따라개골산으로 들어갔다. 그는바위아래에집을짓고, 삼베옷을입고풀잎을먹으며일생 을마쳤다.(븮삼국사기븯권12신라본기12경순왕9년조) 아비의 죄는 백성과 사직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분명한 반역이었다. 태자는 추운 땅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자신만이 라도 신라인으로 남아야 한다고 결심했다.그것만이 아비의 죄 에 대한 속죄라 믿었다. 아비는 끝내 신라왕의 자리로 돌아오 지 않았다. 태자는 추한 아비의 피를 이은 자신을 보여주기 싫 어, 심산유곡으로 들어가 바위로 집을 삼고, 삼베옷에 초식(草 食)으로 연명했다. 막내아들 역시 머리를 깎고 출가했다. 그들 의삶은이윽고사람들의입을타고전설처럼전해졌다. 청태(淸 泰) 2년 을미 (乙未; 9 3 5) 10월에 사방 땅이 모두 남의 나라 소유 가 되고 나라는 약하고 형세가 외로우니 스스로 지탱할 수가 없었으므로 여러 신하들과 함께 국토(國土)를 들어 고려 태조(太祖)에게 항복할 것을 의논했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의 의논이 분분하여끝나지않는지라왕태 자(王太子)가말했다. 뷺나라의존망(存亡)은반드시하늘의명에있는것이 니 마땅히 충신(忠臣)·의사(義士)들과 함께 민심(民心)을 수습해서 힘이 다한 뒤에야그만둘 일이지어찌천년의사직(社稷)을경솔하게남에게내 주겠습니까?뷻왕은말한다.뷺외롭고위태롭기가이와같으니형세는보전 될수없다. 이미 강해질수도없고더약해질수도없으니죄없는백성들로 하여금간뇌도지(肝腦塗地)케하는것은내가차마할수없는일이다.뷻 이 에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를 시켜서 국서(國書)를 가지고 태조에게 가 서 항복하기를청했다. 그러나 태자는울면서왕을하직하고바로 개골산 (皆骨山)으로 들어가서 삼베 옷을 입고 풀을 먹다가 세상을 마쳤다. 그의 막내아들은머리를깎고화엄종(華嚴宗)에들어가중이 되어승명(僧名)을 범공(梵空)이라 했는데 그 뒤로 법수사(法水寺)와 해인사(海印寺)에 있었 다한다.(븮삼국유사븯권2기이2김부대왕9년10월) 10월 1일 김부(金溥)가 시랑(侍朗) 김봉휴(金封休) 편에 항 복을 청했다. 왕건은 섭시중(攝侍中) 왕철(王鐵)과 시랑(侍 郞) 한헌옹(韓憲邕) 등을 통해 허락할 뜻을 회보했다. 겸하여 김부에게다음과같이전했다. -지금 왕이 나라를 과인에게 주니 그 내림(賜)이 큽니다. 종실(宗室)과 서로 혼인의 의를 맺고 삽혈 동맹하여 생구(甥舅)의 친호(親好)를 길이 하 려합니다. (븮삼국사기븯권12신라본기12경순왕9년조) 왕건은 자신의 맏딸 낙랑공주를 김부에게 혼인시킬 뜻을 전 했다. 그러자 김부(金傅)는 백부(伯父) 김억렴(金億廉)의 딸 을 왕건(王建)의 후비(신성왕후(神成王后)로 들여보내길 청 했다. 처음신라가항복하였을때,태조가매우기뻐하여후한예로대우하였 고, 사자를 보내 왕에게 말하기를 “이제 왕이 나에게 나라를 주었으니, 이 는 위대한 선물입니다. 원컨대 저의 종실과 혼인하여, 영원히 집안 관계를 맺고자합니다.”라고하였다.왕은“나의백부 잡간억렴이 지대야군사로 있 었는데, 그의딸이 덕행이 훌륭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니, 이 외에는집안을 받들만한 자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태조가 마침내 그 여자와 결혼 하여아들을낳았다. 이 사람이 곧현종의아버지로서, 후에안종으로 추봉 되었다. 경종헌화대왕때에이르러, 정승공의딸을맞아왕비로 삼고, 정승 공을상보령으로 봉하였다. (븮삼국사기븯권12신라본기12경순왕9년조) 그러나 두 사람의 엇갈린 결혼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게 하고 자했던정략이고계산일뿐이었다. 935년 11월 3일, 아들의 충절을 신라의 땅에 남겨둔 채 김부 는 겨울바람을 뚫고 고려로의 길을 떠나기 시작했다. 봄이 오 면날씨라도풀리련만그때까지김부는기다리지못했다. 태자의 소동이 있고부터 백성들은 궁궐을 궁궐로 여기지 않 았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바람처럼 퍼지는 소문을 담 기에는 서라벌은 역시 좁은 동네였다.매국의 행위에 쏟아지고 있는 비난을 면하려면 고려의 송악이 훨씬 마음에 편할 것이 틀림없었다. 겸하여 왕건의 궁궐에 하루빨리 신례(臣禮)를 행 하여부귀영화를보장받고싶었다. 김부가 행렬의 선두에 섰다. 백료가 뒤를 따랐다. 충효를 가 슴 에 품 고 살 아 야 할 사 서 (士 庶 )가 그 뒤 를 이 었 다 . 책 에 서 읽 고 배운 충절을 더 이상 그들은 머리와 가슴에 두지 않았다.향 거(香車)와 보마(寶馬)가 30여 리나 뻗쳐 도로를 메웠다.나라 를없애는매국의행렬은크고화려했다. 11월 갑오(甲午)에 신라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왕도(王都)를 출발하니 , 사대부와서민(庶民)들이 모두 그를따랐다. 향거(香車)와보마(寶馬)가3 0여리에뻗혔고, 길은사람으로 꽉차서막혔으며, 구경꾼들이 쭉둘러서 있었다. 길 가에 있는 주(州) 븡현(懸)에서는 접대가 매우 성대하였고 , 왕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하고 위로하였다. (븮고려사절요븯 권1태조신성대왕 18 년11월조) 갑오(甲午)에 신라왕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왕도(王都)를 떠남에 사인 (士人) 서민(庶民)들이 다 뒤를 따랐다. 향거(香車)와 보마(寶馬)가 연달아 30여 리(里)에 뻗치고 도로가 꽉 메어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을 둘러 싼 것 같았다. 연로(沿路)의 주(州)·현(縣)의 공대(供待)가 매우 성대하였는데 왕은사람을보내어위로하였다.(븮고려사븯세가2태조18년11월조) 11월, 태조가 왕의 편지를 받고, 대상 왕 철 등을 보내 왕을 영접하 게 하 였다.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태조에게 가는데, 향나무 수 레와구슬로 장식한 말이 30여리에이어지니, 길이 막히고구경꾼은울타 리를두른것같았다. (븮삼국사기븯권12신라본기12경순왕9년11월조) 왕건은 사신을 보내 여정을 격려하며 또 다른 한편으로 밀정 을 풀어 백성들의 동향을 면밀히 살피게 했다. 또 군사를 요소 마다 매복시켜 김부의 행렬을 방해하는 신라 백성의 거사를 철 저히차단하게했다. 고양이가 발톱을 숨기며 쥐에게 다가가듯 왕건은 천천히 신 라라는 먹이에게 접근했다. 항상 역사의 축이자 동력이었으면 서도 한 번도 그 대가를 온전히 누리지 못한, 백성들이 나라의 멸망을 앞에 두고 걷잡을 수 없는 회한의 눈물을 가슴으로 쏟 아냈다. 도끼질에 가슴이 쪼개지듯 아픔이 서서히 밀려왔다. 땅을 치고 하늘에 부르짖으니,마치 간장(肝腸)이 떨어지고 등 뼈가으스러지는듯했다.그들은눈물을적시며생각했다. -경애왕도 견훤에게 항복했더라면 어떠했을까. 아마 죽진 않았을 것이 다.항복하여목숨을구걸하는것은쉽되죽음을무릅쓰고저항하기란어 렵다. 그런데도 경애왕은 쉬운 길을 버려두고 어려운 길을 택했다. 까닭에 그해 가을에 시작된 경애왕과 견훤의 충돌은 심상찮은 것이었으며, 견훤 이 두달이나영천에머물 때비극적예후는짐작됐었다. 그리고왕은견훤 의손에죽었다. 하지만 그때 통일을 도모한 왕건은 그 대상이 하나라도 줄어 들면 좋다고 여겼고 현장을 외면했다.신라를 버렸다면 목숨만 은건졌을경애왕은고집을부리다처참하게죽었다. 왕건의 지금 심정은 어떠할까. 견훤이 변변치 못한 인물을 세워 신라를 조종하려 한 결실이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왔으 니 왕건은 새삼 견훤의 행위를 고맙게 여기고 있을 것이고, 예 전신라의위기를방관한행위를옳았다고자부할것이다. - 피한 방울 흘리지않았는데신라가항복을자청하여오고있다. 왕건 은 아마도 견훤과 김부의 행위가 너무 흡족하여 웃음을 참을 수 없을 런지 모른다. 김부의 행렬은 영천을 통과하는 지점에서부터 불복(不服) 하는무리에막힐위기에봉착했다. 영천 오천(吾川)의 백성들은 죽음을 걸고 김부의 행차를 막 고 신라의 정신을 지키려 했다. 왕건은 숨겼던 군사를 풀어 거 사가일어나기직전,일대의백성들을무차별학살했다. 장군곡(藏軍谷): 군 동쪽 8里에 있다. 속담에 전하기를, 고려 太祖가 나 라를통합할때오천(吾川) 사람들이 불복하므로 이곳에병사를숨겨두었 다가이를격파했다고한다.(븮신증동국여지승람븯제25권영천군) 태자는 통곡하며 왕과 작별하고 곧바로 개골산으로 들어가 마의와 초식으로 생을 마쳤다.또한 경순왕의 막내아들도 출가 하여 승려가 되었다.븣중략븣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반대하 는경우가나타나태조에게적지않은부담을주고있었다. 신라의 얼과 혼을 지키려는 신라인의 움직임에 왕건은 통상 적인 무력 진압의 방식을 적용했다. 적어도 지금껏, 용케 억눌 렀던 왕건의 야수성은 맹렬히 불타올랐다.신라를 병합하는 것 과 신라인을 보호하는 것은 왕건에겐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이제 신라인의 저항쯤이야 힘을 앞세운다면 모래성처럼 쉽게 허물어지리라확신했다. 신라인이 부모라 외쳤던 왕건이 보낸 거대한 창검의 무리는 신라 백성들을 에워쌌고, 신라 백성들의 염원과 희망, 아니 저 항은신기루처럼허공에퍼져존재가희미했다. 날카롭고 강인한 금속 물체가 섬광과 함께 허공을 휘감기 시 작하자, 선홍빛 피가 머리에서 솟구치더니 하늘과 땅을 적셨 다. 왕건이 군사를 숨긴 계곡은 살아남은 몇몇의 입을 통해 군 사를숨겨둔계곡이란장군곡(藏軍谷)으로불렸다. 백성의 학살 소식을 듣고도 김부는 짐짓 모른 체 함구했다. 행렬의 누구도 올곧은 백성들의 처참한 죽음을 발설치 않았다. 힘없는 자의 정의는 힘 있는 자의 명분만 될 뿐이런가. 정신이 썩어 문드러진 위정자들은 깨우침을 얻기는커녕 사방에 방패 를 쌓아 방비를 더욱 강화하기만 했다. 고려의 군사가 비밀리 옹위하는 가운데 장엄한 매국 행렬은 천천히 송악을 목표로 삼 아전진했다. 신라의 혼과 정신은 한 걸음 한 걸음 그들이 떼는 걸음과 더 불어 연기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신라의 백성에게 보호 받지 못한 신라왕의 행렬은, 신라 백성을 적으로 돌리면서 고려 군 사의옹위하에하염없이북으로갔다. 935년 11월 3일, 김부는 서라벌 왕도를 떠났다. 9일 만인 935 년11월12일,김부의행렬은송악외곽에도착했다. 11월 갑오(甲午)에 신라왕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왕도(王都)를 떠남에 사인(士人) 서민(庶民)들이 다 뒤를 따랐다. 향거(香車)와 보마(寶馬)가 연 달아 30여 리(里)에 뻗치고 도로가 꽉 메어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을 둘 러 싼 것 같았다. 연로(沿路)의 주(州)·현(縣)의 공대(供待)가 매우 성대하 였는데 왕은 사람을 보내어 위로하였다. 계묘(癸卯)에 신라왕이 왕철(王 鐵) 등과 함께 개경(開京)에 들어오니 왕은 의장(儀仗)을 갖추고 교외(郊 外)에 나와 맞아 위로하고 태자와 여러 재신(宰臣)에게 명하여 호위하고 들어와유화궁(柳花宮)에들어가머무르게하였다.(븮고려사븯세가2태조18 년11월조) 왕건이 의장을 갖추고 교외에 나와 맞이하여 여정을 위로했 다. 대략 4년 전인 931년 2월 9일, 왕건은 5천여의 정기精騎 및 그 밖의 대군을 거느리고 송악을 출발, 2주 만인 2월 23일, 천 백리 길을 행군해 왕도 언저리에 도착했었다. 한겨울 바람을 등에업고서대략하루에팔십리를달린셈이었다. 봄 2월 정유(丁酉)에 신라왕이 태수(太守) 겸용(兼用)을 보내어 다시 만 나보기를청하였다. (2월) 신해(辛亥)에왕이 신라에행차할제50여기(騎) 를거느리고기내(畿內)에이르렀다. (븮高麗史븯 권1세가1태조신성대왕14 년2월조.) 한데 김부는 한겨울 거친 바람을 얼굴에 맞으면서 9일 만에 송악에 도착했다. 이른바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도망치듯, 김 부는 천 백리 길을 하루에 120여 리씩을 달려 도착한 셈이다. 서라벌과 백성들을 등진 권력자의,가히 힘차고 재빠른 줄행랑 이었다. 6월,견훤의 항복을 치하했던 왕건은,11월 김부의 항복을 치 하했다. 아비와 불화해 성까지 바꾼 견훤은 아들 신검에 의해 하극상을 겪다 항복하고 말았고, 김부 역시 그 견훤을 끌어들 여 왕위를 얻었으나 변화하는 관계에 휩쓸려 자청해 항복하고 말았다. 왕건은 유화궁(柳花宮)을 김부의 객관으로 정해 주고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삼게 했다. 도시 유화와 낙랑이 누구이던가. 하백(河伯)의 맏딸 유화는 압록강에서 해모수와 상관해 뒷날 고구려를 세운 주몽을 낳았다.낙랑공주란 주몽의 고구려와 대립하다 처참하게 멸망당한 한나라 4군현의 하나, 낙랑군최리의딸의이름이다. -왕건은 왜 끔찍이도 애지중지했던 자신의 첫딸에게 비련의 여인 낙랑 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던가! 호동왕자와 정략 결혼했으되 사랑에 눈이 멀 어호국의상징이던북과 뿔피리를 부숴 사랑과 나라를한꺼번에잃은가 련한 여인…. 끝내는 자신의 목숨조차 아비의 손길에서 보호받지 못한 비련의 여인, 낙랑. 아아! 낙랑으로 불리던 순간부터, 왕건의 딸은 정략으로 활용될 숙 명을부여받았다고한다면지나친억측 일런가븣. 김부는 고구려 국조(國祖)의 어미 이름을 딴 궁전에서, 낙랑 군 공주 이름을 딴 여인과 합방에 들어갔다.고구려와 낙랑의 엇 갈린운명을,망국의신라왕은자청해맞이하여들인것이었다. 왕건은 나라를 자신에게 바치려는 김부에게 자신의 딸을 줌 으로써 부귀영화를 약조한 셈이었다.동시에 그것은 왕건이 통 일을 거두기까지 결정적 도움을 제공했던 경애왕의 은의를 저 버리는행위이기도했다. 견훤과의 힘겨루기에서 왕건은 일방적 열세였다. 그런 왕건 이 경애왕의 도움으로 축산을 얻었고, 경애왕 죽음에 한을 품 은 고창 토호의 조력을 받아 고창에서 견훤을 제압에 성공했 다. 이후 전세는 왕건에게 급격히 돌아섰고 통일에 성공할 수 있었다. 경애왕(신라55대왕.재위924~927 ) 뱚역사비정(32) 뱛Ⅰ.김부의계산 박 순 교 뱛Ⅱ.귀부 뱛Ⅲ.태자의눈물 뱛Ⅳ.아비와아들 뱛Ⅴ.백성들의저항 뱚Ⅵ.서라벌이경주로폄하 다음호에계속뱛 목 차 Ⅰ.김부의계산 Ⅱ.귀부 Ⅲ.태자의눈물 Ⅳ.아비와아들 Ⅴ.백성들의저항 Ⅵ.서라벌이경주로폄하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