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page

2019년8월31일 토요일 12 (제152호) 기획 금년은광복74주년을맞이하는해이다.수많은애국지사들이목숨을초개와같이버리고오직광복을위한일념으로싸 워왔다.이념과사상그리고종교는다르나목 표는광복이었다.당시광복군은정예군인이아니기에모든것이위태로웠다.신흥무관학교와북로군정서의역할은조 국광복을위해혁혁한공로를세웠다.이과정 에독립지사박영희장군이있다.청산리전투에서는부사령관으로,그리고신민부의보안사령관으로함께항일운동을 펼쳤던공산주의자또한민족적차원에서포 용하기위해공산당극동본부가있던불라디보스토크파견된후1930년소련비밀경찰(秘密警察:게빠우)에의하여처단 되어35세나이로순국하였다고한다. 박영희 장군은 함양 박씨(咸陽朴氏) 중시 조(中始祖) 휘(諱) 선 (善)의 29대손(代孫) 으로 1896년 12월 28일 에 생 부 (生 父 ) 박 동 익 (朴東翼)과 생모(生 母) 한양조씨(漢陽趙 氏)와의 사이에 3남 1 녀 중 의 차 남 으 로 출 생 하여 숙부(叔父) 박동 한(朴東翰)에게 입후(入后) 하게 되었다. 병조참 판 박경후(朴慶後) 8대손이기도 한 박 장군의 집 안은 조상대대로 유교에 바탕을 둔 전통적인 명 문가였다. 선대(先代)에는 대대로 벼슬을 지내셨 으나 천성이 청렴하고 결백하여 가세는 그리 풍 족하지 못한 충절의 전통을 지녔다. 출생지는 황 해도 평산군 주상리 여주동으로 명산인 멸악산(滅 惡山)의 정기를 받고 태어나서 성장하기도전에 조 부 좌승지(左承旨:정3품) 박시순(朴始淳)과 함께 명당촌(明堂村)을 찾아서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가곡리 곡부동(曲阜洞)으로 전거(奠居)하게 된다. 장군의 조부 박시순은 글재주가 뛰어나 좌승지와 면천(沔川) 임실(任實) 장연(長淵) 군수(郡守) 등 을 역임(歷任)하면서 선조사(先祖事)에 지극한 성 의와 수호(守護)로서 후대(後代)들에게 값진 교훈 을 남겼다. 또한 생부(生父) 동익(東翼)은 평생을 위선사업과 교육 사업에 몸 바치신 완고한 성품의 유학자(儒學者)로 한운야학(閑雲野鶴)을 벗 삼아 여생을 보냈다. 장군의 집안은 대대로 이어오는 명 문의 양반집으로 철저한 위선(爲先)과 위국(爲國) 의 정신이 몸에 배는 교훈과 환경에서 몸과 마음을 닦아왔다.성품(性品)은 의(義)롭고 강직하며 씩씩 한 기상으로 적극적이고 회생적이었으며, 대쪽 같 으면서도 불 같은 성품은 많은 일화를 남겼으며, 또 한 언변이 유창하여 동네는 물론 이웃마을까지도 떼를 지어 장군의 연설을 경청하러 다녔다고 하니 장군의 웅변술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으리 라. 장군은 소년시절에 정신연령이 높았던 것으로 알려지는데빼앗긴조국의독립을쟁취하는방법은 오로지 군사력에 의한 무력행사에 있다고 간파하고 심신의 단련을 위해 때때로 산중(山中)에 들어가 총검술 하는 것을 동네사람들은 자주 보았다고 한 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장군의 직선적(直線的)인 성격과기풍(氣風)은비범(非凡)하였다고함이적 절한 표현일 것이다. 향리 곡부(曲阜)에는 생부 동 익(東翼)이 한학과 신학교육을 목적으로 신명의숙 (信明義塾)을 설립 하였는데 그 곳에서 고광(古狂) 이세영(李世永) 선생의 지도하에 한학과 신학을 6 년 수학 하였다. 그 후 홀로 서울에 올라와 휘문의숙 (徽文義塾:현 휘문고등학교)에서 수학 하였다. 워 낙 의지(意志)가 굳고 두뇌(頭腦)가 명석(明晳)하 여 남다른 성과와 발전이 있었다.장군은 16세에 안 동권씨(安東權氏:부친거제군수역임)와서울에서 결혼하였으나 몇 개월 만에 진주김씨(晋州金氏)와 재혼(再婚)하여 2남 2녀를 두었으나 장남은 4살 때 병사(病死)하고 장성(長成)한 자녀는 1남 2녀였다. 즉,장녀신옥(信玉)은곡부(曲阜)에서태어나진주 김씨가 장군을 따라 만주(滿洲)로 떠날 당시 4살이 었으며 할머니와 함께 고향집에 남게 되었고 연옥 (年玉)과 2남 용문(用玟-표준음은 용민이나 조부 되시는 동익이 작명하실 때 용문으로 읽도록 하라 하였다)은만주(滿洲)에서출생하였다. 장군은 진주김씨와 혼례 식만 거행하고 집에 돌아와 잠시 부모 곁에 머물렀다가 신혼집의 준공도 보지 못하 고신부진주김씨가신행(新 行)해 오기도전에 은사이신 고광(古狂) 이세영(李世永- 충청남도 청양군 적곡면 분 향리 출신으로 후일 신흥무 관학교장역임)과더불어일 제의 쇠사슬을 끊고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굳은 일념(一念)으로 만주를 향하여 압록강을 건 너게 되었다.1915년 장군의 나이 19세로 3.1운동이 일어나기4년전의일이었으며,그로부터조국광복 을 위한 고난어린 가시덤불의 고통이 시작되었다. 이역만리 만주에서 신혼의 단꿈을 멀리하고 고난 의길을걸으며잠시고국에홀로남은부인을만주 로 불러왔으나 청운의 꿈을 펼치기에는 걸림돌이 라 생각하고 부인과 자녀들을 돌려보내고 오직 조 국광복을위한외로운사투를이어갔다. 한편 부인 진주김씨는 압록강 다리를 건너면서 장군의 대업이 조속히 성취되어 이 다리를 건너 금의환향(錦衣還鄕)하는 영광이 있게 해 주십시 오 되풀이 기원하는 것이었다. 김돈씨 등의 안내 를 받아 서울을 경유하여 고향에 도착한 진주김 씨는 예견 했던 대로 기다리던 일경에 연행되어 혹독한탄압을받기시작하였다. 장군의 독립투쟁과 공적을 기술하기에 앞서 먼 저 밝혀둘 것은 장군의 본명(本名)은 영희(寧熙) 이나본명외에두개의 별명(別名)이있었다.하나 는두희(斗熙)이고또하나는장섭(章燮)이다. 여러 독립운동사기(獨立運動事記)에 「寧熙」「斗 熙」「章燮」으로 되어 있음은 별개(別個)의 인물이 아니고이명동인(異名同人)임을확실히밝혀둔다. 현재 인터넷상에서 박영희 장군의 독립운동자 료를 찾기 위해서는 이름과 별명을 검색해야 모 두 찾아 볼 수 있다. 이렇게 이름과 별명을 함께 쓰게 된 것은 장군이 독립운동 전선 상에 위치가 정립(定立)되면서 왜적에게 단서(端緖)를 인멸 (湮滅)하고 고향의 부모처자에게 누(累)가 미칠 것을 미연의 방지하기 위하여 사용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장섭」이라 한 것은 평소에 이장영씨 (李章寧:북료군정서와 상해임시정부의 간부)와 윤기섭씨 (尹琦燮:신흥무관학교 교관과 대한민 국초대 국회부의장)를 존경해 왔기에 그 두 분의 「章」자와「燮」자를따서「장섭」이라하였다. 독립전쟁(獨立戰爭)은 을미(乙未)의병(義兵) 의 항일전(抗日戰)에서 시작되어 1905년의 을사 조약과 1907년의 군대해산을 계기로 전국적인 항 일전으로 확대되어 1908년, 1909년에 이르러서는 민족적인 무력전(武力戰)의 성격을 띠었다. 의병 의 항전은 조국독립을 위한 전쟁이며 독립전쟁을 수행하는민족의군대로서인식되고있었다. 경술국치(庚戌國恥 : 1910년을 전후로 만주와 연해주-러시아로 이동한 의병장과 의병들은 군 대훈련과 항일교육을 계속하게 되며, 만주와 연 해주에는 경술국치이전에 이미 많은 동포(同胞) 들이 이주(移住)하여 살았기 때문에 각종 항일운 동의 뒷받침이 되었다. 3.1 운동은 애국동포들의 독립열(獨立熱)을 더욱 자극하고 3.1 운동 후 많 은 애국지사(愛國志士)의 해외망명(海外亡命) 은독립운동에새로운활력소(活力素)가되었다. △신흥무관학교에서장군의역할 장군은 1915년 19세의 약관(弱冠)으로 조국이 일제의 침략(侵略)에 짓밟혀 신음(呻吟)하고 있 음을 통탄(痛噴)하고 조국을 구(救)하는 길은 오 로지 무력(武方)에 의한 일제의 말살(株殺)이라 판단(判斷)하고 투쟁(斗爭)의 장소(場所)로서 만주를 선택(選擇)하고 은사(思師) 이세영(李世 永)선생과 같이 장도(壯途)에 올랐다. 만주에는 일찍이 이회영(李會榮) 이시영(季始榮 : 전 초대 부통령) 형제(兄弟)분들이 독립운동의 터전을 마련하고 있었고 장군의 만주 도만(渡滿)을 크게 환영(歡迎)하면서 그분들 댁 (宅)에 기숙(寄宿) 할것을요청받아그곳에여장(旅裝)을풀었다. 장군은 먼저 신홍학교(新興學校 :후에 新興武 官學校 로 개칭)에 입학(入學)하여 수학(修學) 에 전심(專心)한 보람이 있어 동교(同校) 제3기 (期)를 우등(優等)으로 졸업후 학교의 교관(敎 官)으로봉직(奉職)투사(斗士)들을양성(養成)하 였다. 본교(本校)와 분교(分校)를 졸업한 학생 수 (數)는 3,500명에 달(達)했으며 이들은 후일 청산 리대첩(靑山里大捷)에서 크게 공(功)을 세운바 있 고 구국운동대열(求國運動隊列)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신흥학교(新興學校)는 3.1 운동 후인 1919 년 4월 교명(校名)을 신홍무관학교(新興武官學 校)로 개명(改名) 하였으며 교직원은 교장(校長) 이천민(李天民, 본명은 李世永), 교감(校監) 윤기 섭(尹綺燮), 교관(敎官) 박영희(朴寧熙) 이청천 (李靑天) 이범석(李範奭) 성준용(成駿用) 원병상 (元秉常)김성로(金成魯)계룡보(佳龍輔)등이다. △북로군정서에서장군의역할 북로군정서(北露軍政署)는 1922년에 조직된 중광단(重光團)이 발전(發展)한 것이라 볼 수 있 다. 민족종교(民族宗敎)인 대종교(大倧敎)의 영 도자(領導者)였던 서일(徐一) 등은 1911 년 일제 (日帝)와의오랜항전(抗戰)끝에두만강(豆滿江) 을 건너 북간도(北間島)일대에 재항전(再抗戰)을 노리는 의병을 규합(糾合)하여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였다. 본영(本營)을 왕청현(狂淸縣)에 두 고 우선 민족교육(民族敎育)에 중점(重點)을 두 었고활동하던중3.1운동이발발(勃發)하였다. 이에 중광단(重光團)은 일제와의 재항전(再抗 戰)의 적절(適切)한 시기임을 느끼고 서북간도(西 北間島)를 비롯한 만주일대의 대종교도(大倧敎徒) 와 한말의병(韓未義兵) 및 공교회원(孔敎會員)들 을 추가로 포함시켜 정의단(正義團)으로 확장하였 다. 그들은 긴급히 독립군을 편성(編成)하고 훈련 (訓諫)하는 한편 일민보(一民報)와 한국보(韓國 報)를 발간( 發刊)하여 일제와 항쟁(抗爭)은 혈전 (血戰)을 벌리는독립전쟁의 수행(逐行)만이 있을 뿐이라고주장(主張)하였다. 이와같이항전군단(抗戰軍團)으로자리잡힌정 의단(正義團)을 그해 8월에는 군정회(軍政會)로 명칭(名稱)을 변경하고 본영(本營)을 왕청현서대 파(狂淸縣西大波)에 두고 그 밑에 5분단(分團) 70 여지단(支團)을설치하여군자금(軍資金)군량(軍 糧)등의수집(蒐集)과무기(武器)구입에주력하여 북간도(北間島)에서 유력한 항일 독립군단(軍團) 으로 발전을 도모하였다.그 후 동년 10월에는 군정 부(軍政府)라 칭(稱)하여 일제와의 혈전(血戰)을 기도(企圖)하는 한민족(韓民族)의 독립군사정부 (獨立軍事政府)임을자부하였다.그러나같은해12 월 상해 임시정부의 명령(命令)에 복종(服從)키로 하고 군정서(軍政署)를 개칭(改稱)하여 임정산하 (臨政傘下)의 주요(主要) 전투군단화(戰聞軍團 化) 하였다. 이와 같이 발전하는 동안 군정서(軍政 署)에는 김좌진(金位鎭)과 같은 군사령관(軍司令 官)을 맞이하고 또한 훈련된 독립군 수천명(數千 名)을 편성하여 군사력(軍事方 )이 일로(一路) 향 상되어 갔다. 북로군정서(北露軍政署)의 중진인물 (重鎭人物)로는 총재에 서일(徐一),부총재에 현천 묵(玄天默)사령관 김좌진(金佐鎭),참모장 이장영 (李章寧), 조성환(曹成換), 부사령관 박영희 (朴寧 熙),재무부장 계화(佳和),이범석(李範奭),박성태 (朴性泰),정신(鄭信),이홍래(李鴻來),비서윤창현 (尹昌鉉),참모부장 나중소(羅仲昭),총재부비서장 김성(金星)등여러간부들이있었다. 한편왕청현십리평(汪淸縣十里坪)에는사관연성소 (士官鍊成所)를설치하고사관생도(士官生徒)들을모 집하여단기교육을실시하였다.소장은사령관김좌진 (金佐鎭)장군이고 학도단장은 사령부부관(司令部副 官)인박영희(朴寧熙)장군이겸임(兼任)하였다. △청산리대첩에서장군의역할 청산리 전역(戰役)은 우리 독립군이 일본군의 만 주출병 후 그들과 대전하던 전투 중 가장 큰 격전이 요.또한 우리 독립군이 그들에게 대승한 곳이다.북 간도지방의독립군은일본군의만주출병전에이미 종래의 근거지를 떠나 장백산(長白山)에 새로운 근 거지를 마련하고 이동 중에 있었는데 이는 중국 동 부삼성(東部三省)당국의권유에의한것이었다.일 제는 각지의 독립군편성이후 한 결 같이 중국관헌 (中國官憲)에 의한 독립군의 초멸(剿滅) 혹은 일군 경(日軍警)에 의해 그것을 강박(强迫)하고 있었다. 따라서 중국 측은 항상 중일외교상(中日外交上)일 제에게 몰리어 본의 아니게 독립군을 간섭(干涉)하 는 일이 허다(許多)하였다. 심지어는 서간도(西間 島) 지방에서는 사까모도(板本)와 우에다(上田)등 이 거느리는 일군경수색대 (日軍警搜索隊)에 의한 독립군제거수색전이전개된바있었던것이다. 그때 길림성장(吉林省長) 만은 일본 측 요구를 물리치고 그들 자체로 독립군을 수색 하겠다는 구실(口實)로 북간도 지방에는 일군경의 수색대가 출동하지못하게하였던것이다.그대신길림성(吉林 省 )당국은 중국 군영장(軍營長) 맹덕부(孟德富)등 에게 각 독립군부대 및 항일단체의 근거지를 국도변 에서 멀리 옮기라고 요구함에 따라 독립군 측에서는 곤란한문제가있지만중국측의고충을짐작하고그 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일본군이 출병하기 전에 새로 운근거지를찾아이동중이었던것이다.따라서청산 리전역(戰役)의주요부대인북로군정서군(北露軍政 署軍)도 8월 10일에 중국 군영장(軍營長) 맹덕부(孟 德富)가 거느리는 150명의 중국군대가 본영(本營)인 왕청현서대파(汪淸縣西大波)로 찾아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줄 것을 교섭함에 서로 타협(妥協)하여 앞 으로국내진입전(國內進入戰)전개에편리한장백산 산록(山麓)으로 이동키로 하고 3개 연대(聯隊)의 중 앙부(中央部)를 맡기로 한 북로군정서는 다음과 같 이임전(臨戰)편성을하였다.총사령관김좌진(金佐 鎭), 참모장 나중소(羅仲昭), 부사령관 박영희(朴寧 熙), 연성대장 이범석(李範奭), 보병대대장 김규식 (金奎植)등 이하 중,소대장을 편성하였다.10월 19일 북로군정서군은 1만 명이 넘는 우세한 적군을 맞아 싸우는 데는 심산유곡으로 적을 유도하여 공격함이 유리하다고판단하에백운평산곡중양쪽이깎아지 르고 중앙에는 공지(空地)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서 공지를 내려다보는 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임전태세 를 정비하였다.10월 21일 일본군의 선봉부대는 우리 독립군이 행군해온 그 길을 따라 독립군이 매복하여 기다리고 있는 그 앞으로 다가오고있었다.독립군은 이를예측하고나무숲의낙엽속에몸을파묻고각자 실탄 200발씩을 옆에 놓고 기다리고 있었기에 600여 독립군의 총구에서는 불이 붙기 시작하였다. 기관총 도 박격포도 포문을 열었다. 야스가와(安川) 소좌가 이끌던적군은예상밖의독립군공격에당황하며대 열을 흩트리고 30분도 채 못 되는 시간에 200여명의 전사자를내고말았다.통쾌한승리였다. 한 시간 뒤에 뒤따르던 동지대(東支隊)의 주력이 모두 백운평으로 운집하였다. 전투는 다시 시작되 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독립군을 당해낼 도리가 없 었다.정신적인무장은더할나위도 없지만위장과 엄폐물을이용하고경사도70도(度)이상의절벽위 에서 정확한 조준에 의한 사격은 백발백중이었다. 삽시간에 절벽 아래 공지는 일본군의 시체로 메워 지고 피로 물들었다. 머지않아 봉미구방면(鳳尾構 方面)으로 돌아오는 적군이 도달하게 되면 수적 열 세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고 판단한 김좌진 총사 령관은 예하부대를 철수시켜 갑산촌(甲山村)에 집 결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독립군이 철수 한 백 운평(白雲坪)에서는또한차례의싸움이벌어졌으 니 그것은 일본군 서로 간에 자상잔멸전(自相殘滅 戰)이었다.즉독립군이교묘하게철수한것을모르 는 일본군은 독 립군과 같은 색(色)의 자군(自軍)을 공격하여 수백명(數百名)의 사상자(死傷者)를 더 늘린것이다.백운평(白雲坪)전투에서적군의전사 자(戰死者)는 1,000여 명인데 비하여 독립군은 전 사 20명,중상 3명,경상 수십명에 불과한 대승을 이 룬 것이다. 백운평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독립군이 갑산 촌에 도착하여 그곳 거주동포들의 환대를 받으며 쉬는동안동포들로부터‘어제적기병1개중대가 30리가량 떨어져 있는 천수평에 들어 가 머물고 있다’는 말을 듣고 총사령관 김좌진 장군을 위시 하여 부사령관 박영희 장군, 참모장 나중소, 제 2 지대장 이범석 등의 여러 장군들은 잠을 청할 겨 를도 없이 작전계획을 세워 또 한 번 전과를 올리 는 등 곳곳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처럼 대승을 함으로써 백운평(白雲奸), 천수평(泉水奸), 어랑 촌(漁郞村)의 전투을 일컬어 청산리대첩(靑山里 大捷)이라 하며 이 대전투에서 북로군정서는 2,00 0여명의적을도살(屠殺)하는큰전과를올렸다. 청산리대첩에서 큰 전과를 올린 장군은 구(舊) 태극단(太極團)의 잔여부대를 거느리고 사관(士 官)양성에주력하기도 하였다.한편 1920년 청산리 승전을주도한북로군정서는내외의신임과기대를 모은중진급들이일찍부터북만주로복귀하여동포 들과 유대를 가졌기 때문에 어느 단체보다도 탄탄 하였고 흩어져 있던 장병들도 다시 집결하여 군세 를 수습 정비하여 어느 정도의 병력도 양성하였다. 1920년일본의간도침략이후많은동포들이북만 (北滿)으로 이주하였으며 청산리 전투와 기타 전투 를 치른 독립군부대들도 밀산(密山)을 경유하여 노 령(露領)에 들어갔다가 다시 러시아에서 만주국경 (國境)을 넘었다. 1921년 자유시(自由市)에서의 참 변을 겪은 많은 독립군들이 북만지방으로 이동하였 다. 그리하여 목단강(牧丹江) 유역과 중동선(中東 線) 연변에 동포사회가 형성되었으므로 독립군의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25년 3월15일 길림 성 목능현(穆陵縣)에서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의 김 혁(金 赫), 조성환(曺成換), 정 신(鄭 信)과 대한 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의 김좌진(金佐鎭) ,박영희 (朴寧熙), 남성극(南星極), 최 호(崔灝),유 현(劉 賢)등 각 단체 대표자와 재만(在滿) 각지 민선대표 (民選代表)18명,국내의 단체대표 9명이 모여 신민 부(新民府)라는 새로운 항일운동단체(抗日運動團 體)를 결성(結成), 보안사령관을 맡았다. 주로 남한 지방(南韓地方) 인사(人士)들에 의하여 조직된 신 민부는 주로 북만 일대를 근거로 하였으며 본부를 석도하자(石道河子:흑룡강 상지시)에 두고 오참(五 站)에서 합시(哈市)까지의 철도연변 (鐵道沿邊)및 북간도 일대에 지부를 설치하여 60만명의 한인교포 를토대로활동을전개하였다.공화제(共和制)와독 립민족주의(獨立民族主義)를 기본사상으로 하여 중앙위원제(中央委員制)를채택하고중앙집행위원 회(中央執行委員會:행정기관), 참의원(參議院:입법 기관),검사원(檢査院:사법기관)의 근대적(近代的) 삼권분립제도(三權分立制度)로 중앙기관(中央機 關)을 두었고, 세부부서는 위원장과 민사, 군사, 차 모,외교,법무,경리,교육,선거,연락,실업 등의 부 위원장, 심판원장, 총사령관(김좌진), 보안사령관 (박영희),제1~5대대장을두었다. 만주의 독립운동단체의 제1차적 목표는 독립 전쟁이었기 때문에 신민부(新民府)도 목릉현소 추풍(穆陵縣少秋風)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 學校)를 설립하여 장군은 교관으로 연(年) 2기 (期)의 속성교육을 실시하였으며 여기서 배출한 졸업생 500여 명은 독립군 간부로 활동하게된다. 신민부의 지방조직도 독립운동을 위하여 동포 사회의 조직적 통할이라는 대 전제하에 이루어졌 으며 그의 목적도 동포사회에 독립운동 혹은 혁명 적 풍토를 보전 고취하는데 있었으며, 일제(日帝) 또는 지방토호 등 지주들의 각종 횡포로부터 동포 들을 보호하며 치안과 복지에 노력하고 독립군 활 동의 인적, 경제적 기반도 확보 하였었다. 박영희 장군은 신민부를 대표하여 소련의 공산당 극동본 부가 있는 불라디보스톡에 파견되어 교섭 한바 있 다.1927년 신민부 본부가 중일경찰대의 습격을 받 아 김 혁 (金 赫) 위 원 장 등 주 요 인 사 들 이 잡 혀 가 는 등 큰 타격을 입었고, 군사부와 민사부간의 알력 이 심 해 지 고 김 좌 진 장 군 이 방 편 상 (方 便上 ) 무 정 부주의자를 포용하게 됨으로써 신민부는 해산의 위기에 직면, 1928년 12월 군정부에서 혁신의회를 결성하는선언과더불어신민부는해산되었다. 신민부는 창립 초기에 소련(蘇聯)에도 교섭사절을 파견하였다.그것은공산주의자도항일(抗日)운동을 전개하고있으니민족적차원에서포용하려는뜻에서 였다. 이에 1926년 보안사령관인 장군과 최학산(崔學 山)을신민부의대표로선정하여개별적으로파견하 였다. 최학산은 모스크바에 장군은 공산당 극동본부 가있던불라디보스토크에 2차에걸쳐파견된바있었 으나그후연락이두절(杜絶)되고말았다.고등경찰요 사(高等管察要史)에 의하면 1930년 소련(蘇聯) 비밀 경찰(秘密警察:게빠우)에 의하여 처단(處斷)되어 35 세나이로순국하였다고한다.또한오광선(吳光鮮:광 복군 부사령관)에 의하면 소련고루지게에서 공산청 년에 의해 피격 순국하였다고도 한다.순국한 시간과 장소 및 상황(狀況)등에 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장군은 일찍이 조국 독립의 상실(喪失)은 힘의 부족에기인한것이라자각(自覺)하고독립은민족적 생존의 본질적인 과제로 힘에 의한 투쟁으로만 쟁취 할수있다고갈파(喝破)한것이다.그리하여그와같 은 신념을 토대 로 19세의 약관(弱冠)에서부터 30대 중반까지의 청장년(靑壯年)시절을 오로지 독립군의 기지였던동북만주에서혈루(血淚)를머금고 죽음과 대결(對決)한충절(忠節)의의사(義士)였다. 조상(組上)님께 부끄럼이 되지 않고 후대 (後 代)의 백세광영(百世光榮)을 위한 고난의 험로 였다. 그렇게도 염원하던 조국의 광복에 보지 못 하고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외로운 넋이 되어 일 생을 마쳤음이 비통(悲痛)하고 한(恨)스러울 따 름이다. 정부는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장군 의 부관(부사령관)이면서 청산리전투에 참여 해 공을 세우고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무술교 관으로 활동하였으며 신민부(新民府) 보안사령 관을 역임(歷任)하는 등 조국광복을 위해 피살당 하던 날까지 몸 바쳐 일하던 박영희 장군의 공훈 (功勳)을 기리기 위해 1968년에는 대통령 표창이 수여되었고 1977년에는 정부로부터 건국훈장(建 國勳章)독립장(獨立章)이추서되었다. /박성호명예기자(함양박씨구소명종친회) 박영희장군의항일투쟁 선조 유지를찾아븣 장군의출생과가계(家系) 지난4월30일오전11시박정현부여군수를비롯한기관단체장과지역주민,후손등200여명이참여한가운데박영희장군공적비 가장군이자란부여군은산면가곡리함양박씨집성 촌에서거행되었다.공적비건립은부여군과박영희장군선양위원회에서심혈을기울였으며,보훈시설로장군의높은구국의정신 과독립정신을기리게 될 것이다. 고(故)박영희장군 조국광복을위해만주로가다 장군의독립운동과시대적배경 장군의독립전쟁과공적에대하여 신민부(新民府)와장군의역할 장군의순국(殉國)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