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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8월31일 토요일 10 (제152호) 종합 중장년층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서 커스는 팍팍한 서민의 애환을 달래주었 던 최고의 예술 공연이었다. 추억 속으 로 사라질 위기를 극복하고 공연기획에 서 전문적인 무대연출까지 1인 다역으 로 동춘서커스를 지키고 있는 박세환 단장, 동춘서커스에는 어린 시절 향수 를 안 고 있 는 중 장 년 과 동 춘 이 라 는 이 름마저 생소하게 느껴진 어린이까지기 대감을 안고 찾아온다. 여느 공연 못지 않게 현란한 조명과 무대연출로 관객들 은 단원들의 곡예에 빠져든다. 기존 전 통적인 곡예와 묘기위주의 서커스에예 술성을 더한 현대적인 서커스로 기계체 조 곡예 마술 음악이 결합된 새로운 장 르의 공연은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다. 특히 생사륜(생과 사의 바퀴 공연) 공연에는 가슴 졸이며 손에 땀을 쥐며 집중한다.그러다 보니어느덧1시간30 분의 공연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언젠 가는 동춘이 세계적인 서커스단이 될 거라는 꿈이 있어 전혀 고생스럽지 않 다는 박 단장은 “정말 보고 재미있었다. 감동적이다.역시 동춘이다.”는 말을 들 었을 때 기분 좋고 자부심을 갖는단다. 그리고 꿈이 있다면 전용 공연장, 후진 양성을 위한 아카데미 신설과 서커스박 물관 개관이라고 전한다. 박세환 단장 은 밀성(밀양)박씨 극성공(동은공) 후 (后)통덕랑 휘 광락(光洛,호 필유당)공 (公)의 5대 장손으로 1944년 경북 경주 시 서면 천촌에서 엄격한 유학자 가문 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박씨종친회 창 립을 주도하고 회장을 역임한 박화준 숭덕전참봉이다. 당대의 석학 육당 최 남선, 위당 정인보 등과 교류하며 유풍 을 이끌었다. 당시 유명한 일화가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최고회의의장 시절경 주에 와 숭덕전을 찾은 적이 있다.숭덕 전 알묘을 위해 비서진이 박화준 참봉 을 찾아 영접에 만전을 기하도록 당부 하는데 박 참봉은 일언지하에 박의장이 차에서 내려 걸어와서 먼저 인사하라고 한 것이다.이에 비서진이 박 참봉을 꺾 을 수 없었는데 박 의장은 스스로 입구 에서부터 도보로 숭덕전을 찾아 알묘 후 비서진의 행위를 알고 크게 혼냈다 며 박 참봉에게 사과했다고 한다. 이렇 듯 완강한 유학자 집안의 장손으로 태 어나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광대가 된 박세환 단장의 파란만장한 서커스단 생활과그간의정황을들어본다. ▲서커스를처음본게언제였나. “1959년 동춘서커스가 경주에 왔다. 내가 경주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마침 나는 학교 악대부에 가입해 트럼펫을 배우고 있었다. 그때 사회자는 까만색 양복에 하얀 마후라(머플러)를 걸치고 있었다. 잘생긴 이 사회자는 관객들을 들었다 놓았다 할 정도로 말을 잘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할아버지가 세상에서 말을 가장 잘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그사람이너무멋있어보였다.” ▲동춘서커단과의입단은 경주고등학교 1학년 때 동춘서커스 를 처음 보고 븮이거다븯 싶었다. 악대부 에서 트럼펫을 배워 연주를 곧잘 했고 노래도 잘해서 대회에 나가 상도 좀 타 봤다. 매끈하게 잘 생긴 얼굴까지 받쳐 주니 가수나 배우를 꿈꿀 만했다. 그런 데 마땅히 배울 데가 없었다. 1963년 고 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한마디 말도없 이 집을 나와 동춘서커스단을 찾아갔 다. 할아버지(諱 화준)는 한학자이며 숭덕전 참봉, 박씨종친회 회장에 성균 관대, 대구대 등 이사를 역임했고 육당 최남선, 위당 정인보 등 당대의 석학들 과 절친한 관계였다. 뼛속 깊은 유학자, 양반 중에 양반이었다.뷺내가 우리 집안 돌연변이였어요. 할아버지는 시인이든 화가든 다 븮쟁이븯 취급 했으니 애초에 말도 못 꺼내고 그냥 가출해버렸지.뷻노 래, 악기 연주, 연기 좀 한다 하면 다 동 춘서커스단으로 몰렸다. 1925년 전남 목포에서 창설한 동춘서커스단은 일본 고사쿠라 서커스단 단원으로 활동하던 박동수가 조선인 30여명을 모아 꾸린 동춘연예단이 시작이었다.최근 들어서 븮아트 서커스븯를 지향하며 서커스를 전 문화했지만 당시 공연은 신파연극, 노 래, 만담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성 돼 있었다. 뷺서커스단이 15개쯤 됐는데 동춘이 최고였어요.당시에는 연극영화 과도 많지 않아서 나 같은 심산으로 찾 아오는 젊은 애들이 바글바글했어.뷻 없 는 사람처럼보름을 지내다가 오디션을 봤지만 별다른 얘기가 없었다. 석 달 동 안 무대 청소를 하며 동춘의 일류배우 였던 남철의 심부름을 했다. 보통 한 곳 에 서 한 달 공 연 을 하 면 2 0 일 이 지 나 면 서 부 터 관 객 이 확 준 다 . 그 틈 을 타 신 인 들의 데뷔 무대가 열렸다.1년쯤 지났을 까. 그에게도 기회가 왔다. 본격적인 광 대 인생의 시작이었다. △ 처음 무대에 서노래를불렀을때어땠나. “경주 콩쿠르대회에 나가면 1등을 했 는데 유료관중이 있는 무대에 서니까 전 혀 달랐다. 그때 내가 부른 노래가 ‘청춘 의 꿈’이었다. 너무 떨려서 박자가 엉망 이되었다.폴카곡이트로트곡이되어버 렸다. 첫 무대는 실패였다. 한동안 무대 에 서지 못하다가 손님이 없는 공연에만 무대에 섰다.그렇게 연습을 한 끝에 1년 만에 앙코르를 받는 가수로 인정받았다. 예명도 박원영(朴元永)이라고 지었다. 스타로영원하고싶다는뜻을담았다.” ▲당시 서커스 연예인은 사회도 보고 배우도하지않았나. “얼마쯤 지났을 때 쇼 사회자가 나가 버려 자리가비었다.사회자는귀공자타 입이마이크를잡는게관행이었다.나는 사회를 공부했다. 아는 게 많아야 하니 소설책도 많이 읽었다. 사회는 윤일경 (훗날 남철)에게서 배웠다. 사회자는 펑 크가나면원맨쇼도해야했고배우도해 야 했다. 내가 연극 주연을 할 때 장항선 이 형사 역할을 맡았다. ‘물레방아 도는 내력’에서는 남철이 마당쇠를 맡았다. ‘원한 맺힌 두 남매’ ‘어머니 울지 마세 요’ ‘홍도야 울지 마라’ ‘안개 낀 목포항’ 등에출연했다.” ▲동춘서커스단은 전성기 때 단원이 어느정도됐나. “내가 입단했을 때는 150명이 넘었다. 무용수만 7~8명이 되었다. 무용수들은 오프닝과 피날레 때 춤을 췄고 중간중간 에 캉캉춤이나 차차차를 췄다. 가수도 6 ~7명이 되었다. 여기에 10인조 악단이 있었다. 곡예팀, 연극팀, 국악팀도 있었 다. 여기에 설비·시설팀도 있었다.” 가 수, 코미디, 배우 등 예능에 재질이 있는 청춘들은 모두 서커스단으로 몰려들었 다. 광복 이후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 다. 서커스 열풍을 선도하고 있던 공연 단이 동춘서커스였다.그가 동춘에 입단 했을 때 이미 허장강,서영춘,배삼룡,이 주 일 , 이 봉 조 등 이 동 춘 을 거 쳐 간 뒤 였 다. 당시 동춘서커스단에는 코끼리, 사 자, 호랑이 등 동물이 창경원 다음으로 많았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 왜 방송국으로옮길생각을하지않았나. “당시는 한번 주연배우는 줄곧 주연 배우 대접을 받았다. 이쪽 바닥은 주연 빼놓고는 다 대우가 형편없다. 나도 M BC 2기 탤런트 오디션에 합격했지만 가지 않았다. 나는 이미 그때 동춘에서 주연배우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나가서 주연이 못될 바에야 동춘에 있는 게 훨 씬 낫다고 생각했다. 또 동춘이 마음도 편했고, 내가 빠지면 동춘서커스가 지 장을 받는다고 생각했다.(웃음) 그때 날보러오는여성팬들도있었다.” ▲서커스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한 결 정적계기는언제였다고보나. “1972년 4월 12일부터 TBC에서 드 라마 ‘여로’가 시작되었다. 태현실과 장 욱제가 나오는 드라마였는데 이드라마 가 인기가 있으니까 저녁에 식사하고 서커스구경 오던 사람들이 TV 있는 집 으로 몰려갔다. 그때부터 공연예술 극 단이 TV에 밀리기 시작했다고 생각한 다. 인기를 끌었던 국극단도 이때를 전 후해사라졌다.” ▲1975년서커스를떠났는데,왜동춘 을그만두었나. “경주에 계신 할아버지께서 내가 서 커스단을 따라다니는 것을 용납하지 않 으셨다.‘호적파낸다’‘쥐약먹고같이죽 자’ 등의 얘기를 하셨다. 나도 돈을 벌어 야겠다는 생각으로 동춘을 나왔다. 마침 부산 국제시장 안에 있는 부산극장의 선 전부장 자리가 나서 그쪽으로 옮겼다. 3 년간 선전부장으로 일하면서 인정을 받 아 돈을 많이 모았다. 사장님이 영화가 시작된 뒤에 들어오는 관객의 현금 입장 료 수입은 전부 내가 갖게 했다. 그때 번 돈으로 부산극장 옆에 생필품 중간도매 상을차렸다.내가말을잘하니까손님이 몰려와장사가잘됐다.부자가이렇게되 는구나하는생각이들정도였다.” 동춘서커스단 인수는 1978년 9월, 인천 간석동에서공연중이던동춘서커스빅탑 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동춘 서커스단은창단주박동수의아들박영조 씨가맡고있었다.동춘서커스단이매물로 나왔다는 얘기가 들렸다. 정신이 퍼뜩했 다.“연극,국악,코미디등모든분야의공 연예술이동춘에뿌리를두었는데우리나 라에 그런 서커스단은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춘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면 안 된다는 마음에 박영조 단장 을 만나러 인천으로 갔다. 그곳에는 서커 스단을 사러 온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당 시 돈으로 1800만원이었다. 나는 500만원 을 선금으로 주고 나머지는 벌어서 갚기 로 하고 약 80명의 동춘단원을 인수했다.” (당시 강남 아파트 5채 값이라 한다) ▲서커스단을 맡은 이후 최고의 순간 은언제였나. “1980년 8월 KBS 월요기획 다큐멘 터리에 동춘서커스 얘기가 방영되었다. 그 직후에 서산에서 공연을 했는데 40 일 동안 완전 매진을 기록했다. 아마도 서해안 쪽 사람들은 다 오지 않았나 싶 다. 그때 단원들에게 오땅(일당의 5배) 도 줘봤다. 빚도 다 갚고 완전히 일어섰 다.남은돈으로동물도샀다.” ▲서커스단의마스코트제니의죽음 세 상 에 둘 도 없 는 친 구 였 던 코 끼 리 제니가 1981년 겨울, 광주에서 영하 20 도의 날씨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2개월 동안 같이 먹고 자며 링 거와 항생제를 보통 사람의 30배 이상 놓아줬지만 결국 살리지 못했습니다. 제니를 차디찬 땅에 두고 발길을 옮길 수가 없었다, 결국 외국의 저명한 전문 가를 불러 박제를 해 훗날 서커스박물 관을 개관하면 함께 전시할 계획이다. 그리고 이제는 동물보호법 때문에 다시 구입하지도못해더욱아쉽다.” ▲서커스단장으로서 가장 절망적인 순간과기뻤던때는 “2003년 9월 12일 전남 광양 구시청 마당에서 공연할 때였다. 그날이 추석 이었는데 태풍 매미가 상륙하고 있다는 기상예보가있었다.천막을뜯어내면철 골구조물은 버틸 수 있다고 봤다. 문제 는 그렇게 하면 추석날 공연을 할 수가 없어 그냥 강행했다. 그날 아침 바람이 심상치 않아 손님을 다 내보냈다. 11시 반부터 2시간30분 동안 태풍 매미는 빅 탑,조명,음향기기 등을 다 쓸어가 버렸 다.그러더니 2시부터 날씨가 개기 시작 했다. 태풍에 날아가 버린 20억 재산 중 조금이라도 건져보려고 재해대책본부 에 알아보니 가설물이라 대상이 아니라 고했다.그때정말눈앞이캄캄했다.” “장소를 진주로 옮겨 포장마차용 천 막을 구해 임시 공연장을 만들어 공연 을 하는데 시민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동춘을살려야한다며후원하여주었다. ▲서커스 단장으로서 가장 잘못한 것 은무엇이라고생각하나. “마케팅 분야를 소홀히 한 것이다. 그 게 흥행실패로 이어졌다. 동춘에서 시작 한모든예술이발전해나갔는데,동춘만 제자리걸음을걸었다.그결과전국에문 예예술회관이 160개가 들어섰는데 서커 스만상설극장을마련하지못했다.” ▲2009년해체선언은충격적이었다.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는데 그해 신종 플루가 최후의 한 방이었다. 7월부터 5 개월째 관객이 없었다. 그해 11월 15일, 동춘서커스단 홈페이지에 문 닫는다고 글을 올렸다. 그러자 온 국민이 야단이 났다. 인터넷 토론방에 '4대 강 하지 말 고 전통 살려라' 등 비판 글부터 '동춘 문 닫으면 유인촌을 무인촌으로 만들겠 다'는 당시 문화부 장관을 향한 애교 있 는 협박까지 여론이 거셌다. 다음 아고 라에선 모금운동까지 벌이고 있던 차였 다. 다시 한 번 힘을 내보기로 했다. 담 보 잡 힌 집 을 짊 어 지 고 김 포 실 내 체 육 관 을 한 달 통 크 게 빌 렸 다 . '마 지 막 파 티'라는 생각으로 조명, 음향, 프로그램 모두 최고로 준비했다. 눈이 무릎까지 쌓이던 12월 20일 오후 2시 첫 공연이 시작하기 20분 전, 관객들이 끝을 모르 고 줄을 섰다. 그해 동춘서커스단은 예 비 사회적기업으로도 선정돼 인건비와 사업개발비를 지원받았고 2013년에 사 회적 기업으로 정식 인증을 받았다. △ 그때 기분이 어땠나. 눈물이 났다. 기사 회생이었다. 그 공연으로 8억 빚을 다 갚았다. 우리나라 국민들 정말 대단하 고 또 고맙다. 그때부터 동춘서커스단 은 내 개인사업체가 아니라 범국민적 단체가 됐다. 공연 오프닝 멘트 할 때도 말한다. 여러분이 낸 티켓 값은 동춘서 커스단이 90년을 넘어 100년 역사를 이 어가는후원금이될것이라고 ▲각국 서커스의 특장을 소개해줄 수 있나. “공중곡예 분야는 평양교예단이 세 계 1위다. 공중곡예를 잘하려면 몸무게 60㎏ 정도가 알맞다. 결국 공중곡예는 한국인에게 맞는 서커스분야라는 뜻이 다. 러시아는 피에로 분야로 서커스의 중심이 옮겨가고 있다.베이징교예단이 나 평양교예단의 역사는불과 58년밖에 안 됐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국내 서 커스 수준이 세계 최고였다는 사실을 알필요가있다.” ▲공연예술의 한 장르인 서커스가 지 속·발전하려면무엇이필요한가. “먼저 서커스 상설극장이 세워져야 한 다. 서울을 포함해 대도시에 3~4개는 있 어야 한다. 그래야 계절을 타지 않고 공연 할 수 있고 관광객을 불러 모을 수 있다. 그리고서커스아카데미가설립되어야한 다. 그래야만 서커스 분야에 뛰어들려는 사람들을꾸준히키워낼수가있다.” △왜서커스에지원해야하나. 가장 대중적인 예술이다. 남녀노소, 외국인까지 모두 즐길 수 있는 콘텐츠 다. 세계 공연예술 시장의 62%를 차지 하는 게서커스다.미국,독일 등선진국 에서 관광산업에 가장 활발히 활용하고 있다. 중국, 일본, 북한에도 전용극장이 있다. 동춘서커스가 잘 살려고 지원하 라는 게 아니다. 서커스의 명맥을 이어 가야 할 것 아닌가.△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서커스 상설극장과 아 카데미다. 이미 머릿속에 계획이 다 세 워져 있다. 내가 가진 서커스 관련 소장 품을 전시해 박물관도 꾸밀 것이다. 외 국에서는 전문 체조선수들이 선망하는 직장이 서커스단이다. 연봉도 아주 많 이 받는다. 우리나라도 그런 분위기가 되도록 만들고 싶다. 그러려면 국가적 인 지원이 절실하다. 지원 못 받아도 어 떻게든 만드는 게 꿈이다. 열심히 자금 을마련해나가고있다. 박 단장은 이미 1995년부터 서커스 활성화 제안서를 들고 지자체와 정부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혼자서는 역부 족이었다.서민예술을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이 통하는 것 같다가도 정작 아카 데미 계획서, 관광 프로그램을 제출하 면 감감무소식이었다. 박 단장은 총알 같이 빠른 세월을 안타까워했다. 동춘 과함께한인생이어땠냐는물음에는대 답도 않고 뷺할 일이 굉장히 많다뷻며 븮미 래븯로 화제를 돌렸다.하고 싶은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뷺내가 가진 노하우로 오십살만 됐어도 훨훨 날아다녔을 텐 데. 세계서커스엑스포도 제대로 한번 해보고 싶고. 근데 늦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여전히 뛰고 있고, 후계자를 뽑 을 계획도 세워놨고. 시간이 자꾸 가니 까 마 음 이 조 급 해 서 그 렇지 . 뷻 박단장은100년역사를이어가는것은 관객 동원의차원을 넘어선다고 말했다. 서커스전문인력,이들을양성할기관,자 금이 마련돼야 하는데 개인으로서 감당 하기엔버거운일이기때문이다.뷺캐나다 븮태양의서커스븯는1985년국가지원으로 100억원을받아1년에1조원매출을올리 고있습니다.그돈이면동춘서커스는세 계최고가되고도남죠.뷺 박 단 장 의 염원 은 여러 번 실 행 직 전 까 지 갔었다.서울시는 부지를 제공하고 문 화관광부가 경비를 지원해 상설극장을 세우는안(案)이만들어져실행되는듯하 다가 1998년 서울시장이 바뀌면서 없던 일이됐다.그에앞서1995년8월당시강 봉균 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장이 행정 쇄신위원장이 되어 ‘동춘서커스활성화 방안10개년계획’을만들었다.서커스엑 스포를 개최하고, 곡예사를 인간문화재 로 지정하고, 상설극장을 건설한다는 내 용이었다.그러나기쁨도잠시DJ정부로 바뀐1999년유야무야가됐다.모든것이 다시원점으로돌아간것이다. 동춘서커스는 현재 2011년 6월부터 안산시 대부도 관광지에서 현재까지 9 년간 매일 2회, 연12~15만명의관객을 동원하면서 국내무대예술 누적 관객 1 위,인기도1위를차지하고있다. 365일 연중무휴 공연을 함으로써 현 재 약 72,000여회의 공연 횟수와 연극, 쇼, 국악노래등대중 예술의중추적 역 을해왔으며,테마서커스‘광대의깃발’, 동방의신기‘비천,글럽모베론,곡예사 의첫사랑등수많은창작작품을보유하 고 있다. 총단원 50명으로 그동안 박세 환대표의45년경력의공연노하우가함 께어우러져동춘서커스단이한국의대 표공연예술단체로 박 단장이 소망하는 아카데미 신설 및서커스박물관이 개관 되기를기대해본다. △박세환단장프로필 경북 경주 생(生)/ 경주고졸업/서울예 술대학 겸임교수(전 통연희, 2003~2009)/ ㈜ 동 춘 서 커 스 진 흥 원 대표이사(1978~ 현재)/ 사)한국곡예 (서커스)협회 이사장(1985~현재)/평양 교예단 초청 잠실실내체육관 공연(2000 년)/ 창작 비천, 광대의 깃발, 곡예사의 첫사랑,클럽오베론,테마서커스‘뉴홍길 동’, 초인의 비상(2008~2018)/ 경남고성 세계공룡엑스포 유료관 운영기획(2012) 등/상훈대한민국문화관광사업대상(조 선일보, 2015년)/ 무대공연최우수상-그 외(한국일보)/ 이노베이션 기업상(일간 스포츠,2016)/ 세상을 밝게 만드는 사람 들(환경재단) ◆공연문의:02-452-3112/단체문의: 010-5442-2315 출장공연 문의 :010-52 64-1327 홈페이지 : www.circusdc.com / 이메일:circus77@hanmail.net 상설공연장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대부북동1849-31 ‘우리서커스지키기’동춘이없어 지면안된다는생각으로 반세기 홀로 버텨 븮영원한 광대븯 ■종친탐방븣 박세환동춘서커스단장 동춘서커스는현재2011년6월부터안산시대부도관광지에서현재까지9년간매일2회,연12~15만명의관객을동원하면서국내 무대예술누적관객1위,인기도1위를차지하는등365일연중무휴공연을함으로써현재약72,000여회의공연횟수와연극, 쇼,국악노래등대중예술의중추적역을해왔으며,테마서커스‘광대의깃발’,동방의신기‘비천,글럽모베론,곡예사의첫사랑등 수많은창작작품을보유하고있다. 뷺서커스상설극장과아카데미·박물관 개관 소원뷻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