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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상 100여명이 신앙 공동체 생활을 했다. 생계는 경춘철도 임업회사에서 침목 만드는 작업을 하청받아 벌목함으로써 양식의 일부를 조달했다. 작업명단에 올라간 14명은 현미쌀(일당 어른은 700g, 어린이는 300g)과 소금 약간을 배급받았다. 이로써는 100여명의 식생활을 하기에는 항상 태부족("간에 기별도 가지 않은" -- 당시 지도자 한 분의 증언)이었지만, 부족한 식량이라도 항상 같이 나누어 먹고 살았다. 일제 탄압을 피해 뜻을 같이 하는 신앙인들, 특히 강제징집을 피해서 이곳에 피한 청년들은 배급은 받을 수 없었지만, 숫자가 늘어나서 모두가 늘 배고픔에 시달렸다. 독이 없는 모든 풀을 뜯어 먹었다. 특히 겨울에는 음식을 구할 수 없는 어려운 형편이 되어 풀부리와 나무껍질을 벗겨 먹으며 연명했다. 그리하여 주변 소나무 껍질들이 벗겨져 하얀 부분이 흉하게 보였다. 소나무 껍질과 밀가루로 만든 송기떡으로 배고픔을 달래었고, 이것을 먹어 소화시키는 것과 용변을 보는데 어려움이 대단히 많았다. 특히 아이들은 화장실 가기가 매우 힘들었고, 어른들의 도움이 있어야 했다. 식수는 개울물을 사용했고, 교회 주변의 작은 공간들을 텃밭으로 사용하여 배추, 무 등을 심어 재배했다. 초대 교회처럼(사도행전 1:42-47) 유무상통의 생활을 했다. 모두가 오직 믿음으라 만난(萬難)을 극복했고, 작업, 예배 및 성경연구를 했다. 일부 지도자들은 그들의 활발한 전도활동을 통해 수많은 교회를 세우며 지도자를 양성했다. 그들은 전국을 순회하며 민족혼을 일깨우고 신앙심을 고취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