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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북한의 남침 이후, 낙동강방어선까지 수세에 몰린 국군과 유엔군에 역전의 발판이 되 어주었다. 이후 수도 서울을 탈환하고, 38선을 넘어 북진하게 되면서 전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6·25전쟁사뿐만 아니라 전 세계 전쟁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작전으로 평가받는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알아보자. 승부수를 던진 맥아더 장군 현대사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남침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 켜낸 ‘호국의 과정’을 기억해야 한다. 그 호국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은 바로 인천상륙작전이다. 소련 군사 고문단이 작성한 남침작전계획은 3단 계로 구성된 ‘선제타격계획’으로 한 달 만에 부산을 포함한 남한 전역을 점령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소련 군과 북한군의 남침계획은 국군의 저 항과 유엔군의 개입으로 계획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오히려 인천상륙작 전의 대성공으로 인민군은 38선 이북 으로 패퇴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맥아더 장군은 그의 회고록에서 6·25 전쟁 발발 후 초기 10일이 가장 중요 한 시기라고 말한 바 있는데, 실제로 1950년 7월 7일 美 합참에 보낸 극비 전문에서 그는 인천상륙작전 계획을 제시했다. 이 계획은 적군을 일정한 전 선에 묶어두고, 공군력과 해군력의 우 위를 이용하여 적을 파괴하며, 적의 후 방을 공격하기 위해 상륙작전을 감행 한다는 것이었다. 이 세 단계의 작전 계획 중 처음 두 단계는 부산방어선 구 축과 방어선 주변 적에 대한 무차별 폭 격에 의해 이미 실현되었고, 남은 것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전쟁의 결정 적인 승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美 합참은 교두보 확보를 위한 낙동강 방어선으로 소백산맥 - 태백산맥을 잇는 선, 부산외곽방어선, 부산내곽방 어선 세 곳을 검토했다. 7월말 그 모 습이 구체적으로 드러났는데 이 작전 에 주도적 역할을 한 워커 장군의 이 름을 따서 ‘워커라인’이라고도 부른다. 남북으로 약 160km, 동서로 약 80km 인 낙동강방어선 구축은 6·25전쟁에 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이곳을 둘 러싸고 일종의 진지전이 전개됨으로 써 유엔군의 대포와 공군력이 더욱더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전선에 묶 인 인민군은 유엔군의 무차별 공중 폭 격으로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병참과 물자 수송에 있어서 많은 어려움을 겪 었던 유엔군은 부산방어선 내에 있는 철도와 도로망을 이용하여 전선으로 물자를 원활하게 수송할 수 있게 되었 다. 이를 통해 미군과 국군은 교두보를 확보한 후 상륙작전을 통해 비로소 반 격할 기회를 확보했다. 1. 레드 비치 북쪽 방벽 위를 오르는 美 해병대 (1950년 9월 15일) 2.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2 04 05 Vol.164 2019 Septemb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