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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선우요 호는 호남이니 경주이씨 국당 문효공 蒨(천)의 후예이며 16대손 통덕랑 춘신의 장남으로서 서기 1899년 을해 6월 26일 여수시 문수동 허문에서 출생하셨다. 어려서부터 슬기와 총명이 뛰어나고 효성이 지극하여 동리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선생께서는 1914년 3월 이천서씨 성록공의 장녀 본덕과 결혼 2남 상모와 상조를 두셨다. 그러나 때는 국운이 쇠진하여 일제침략이 노골화됨에 선생께서는 새로운 문명을 탐구하여 국민계도만이 순국지도라고 자각하시고 1919년 여수보통학교를 거쳐 여수간이수산학교에 수학 중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됨에 국권이 강탈당한지라. 선생께서는 우국충정으로 분연히 일어나 동지 유봉목 선생과 학생 30여 명을 규합하여 거사를 도모하고 총검 앞에 독립만세를 외치시다가 불행이도 일경에 체포되어 대구복심법원에서 6개월형의 선고로 옥고를 치르시고 해방한 후부터는 요시찰인으로 감시를 받아왔으나 거기에 굴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애국애족의 일념으로 민족정신을 환기시켜 국권회복을 이룩하기 위하여 적수공권으로 1922년 소라면 현천에 현천학원을 1926년 쌍봉면 학룡에 쌍봉학원을 1931년 미평동에 보성학원을 설립하여 20개 성상에 걸쳐 농촌자녀교육에 심혈을 다하여 왔으며 많은 인재를 양성하는데 공헌하신 바 크다. 광복 후 1946년 소라국민학교 설립과 동시에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여 초대교장으로 추대되셨고 1947년 여수수산고등학교로부터 독립유공자로 명예 졸업장을 받으셨다. 그러나 인생은 유한하여 1961년 5월 정년 퇴임 후 숙환으로 신음하시다가 애석하게도 62세를 일기로 많은 정을 남기신 채 홀연히 떠나셨다. 또한 1969년 5월 5일 여산시로부터 제1회 시민의 상을 수상하니 사은의 정이 더욱 일깨워지는지라. 선생님의 공적을 현양코자 숙의 끝에 송재구 여수시장께 그 뜻을 전한 즉 쾌히 승낙하고 문수동 철거지에서 국군묘지로 1987년 8월 22일 이장케하여 주었으며 이선행 대한노인회 여수지부장의 협찬과 주선으로 선생님의 위대한 업적을 천추에 전하여 이 고장의 후세에게 사표가 되게 하고자 우리 문하생의 정성을 모아 여기에 송덕비를 세우나이다. 문하생 곽사훈 찬 여산후인 송전석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