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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애국지사의 아느님 박남규 선생의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출처 : 민플러서 신기철 소장의 민간인 희생자로 보는 한국전쟁 전후사(5) 1948년 박세열은 3학년이 된 딸 박씨를 임실에서 전주국민학교로 전학시키고 전주에 살던 동생 박해옥의 집에서 다니게 했다. 딸 박씨는 주말마다 임실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어린 나이 유학 생활이 익숙해진 가을 어느 날 박세열은 또 임실경찰서로 잡혀 갔다. 여순 14연대의 반란이 있고 난 다음날이었다. 만삭 임산부였던 구복순이 면회를 갔지만 임실경찰서는 면회를 허용하지 않았다. 첫 면회는 딸 박씨가 했다. 남동생이 생겼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세 살된 동생을 업고 경찰서 유치장을 찾았던 때는 1948년 10월26일(음력 9월24일)이었다. 딸 박씨에게는 하얀 옷을 입고 유치장에 앉아 아들을 얻었다는 소식에 무릎을 치며 기뻐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낡은 필름 영상처럼 기억에 남아 있다. 함께 유치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열대여섯 명은 되어보였는데 그 중에는 “남규 아저씨”라고 불렀던 사람도 있었다. 박남규는 박훈(1919년생)의 다른 이름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박준창의 아들이었다. 청웅면 출신인 박준창은 청웅면에 야학을 설립하고 직접 교육활동을 한 사실이 1925년 10월15일자 동아일보를 통해 확인된다. 임실경찰서는 1948년 12월1일 새벽 4시 유치장에 갇혀 있던 박세열, 박훈 등 20여 명의 주민들을 머리에 용수를 씌운 채 줄줄이 묶어 트럭에 싣고 나갔다. 트럭은 남원 가는 길목인 오수면 말티재에 멈추었고 주민들 모두 내려 처형장인 생암 골짜기까지 걸어갔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