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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 만세를 주동하였다. 왜경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2일 광주법원전주지청에서 "내 나라를 찾겠다는 것이 죄가 되느냐"며 항거 1년 징역을 선고받고 동년 4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 항고하여 조금도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주상하여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출옥한 해 1922년 청웅면 고리에서 새 시대에는 새 교육이 필요함을 역설하여 청웅의숙(현 청웅초등학교)을 설립 후학을 양성하는데 전력하고 일제의 내선일체를 결사반대하다 지리산에 은거하며 조국광복운동을 하였다. 1957년에 고인이 쓴 한시를 보면 열정적인 교육열을 볼 수 있다. "70노년에 깊이 깨달았노라 나라의 은택이 내 집에 임하여 좋은 붓과 향기로운 먹이 집안에 이르니 아들을 가르치고 후손들 가르침에 전력하노라" 현당 박준창 선생은 1962년 7월 1일 향년 72세 바가 오던날 세상을 떠나셨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높이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고 현당 박준창 선생과 전의이씨 이동녕 여사의 묘를 청웅 옥석리에서 덕치면 사곡리 산140번지로 이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