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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우리 주권을 강탈하고 민족을 억압하는 사태에 직면해서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완인으로 생을 마친 분이 있으니 여기서 태어나 일제의 횡포가 극에 달한 1942년 돌아가신 날까지 올곧게 살았다. 오직 학문에 힘써 당대의 거유인 겸산 이병수 선생의 고제로 송산사에 배향되었다. 시대현실에 노괴하며 개달은 바 "불심사"라 세 글자다. 나의 참마음을 잃지 않겠다 함이니 호를 심사라 한 ㄲ뜻이다. 선생은 실로 선비정신을 온몸으로 실천한 인물이다. 일제는 을사늑약을 강요해서 통감부를 설치하고 군대를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난 바 호남에서는 김태원 심남일 전수용 같은 초야의 영걹들이 앞장섰다. 선생은 이들과 지기상합하여 의논하고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아 살림이 거의 탕진되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김공은 전사하고 심공과 전공은 붙잡혀 처형을 당했으며 나라 또한 망했다. 이듬해 1911년 정초에 왜병이 들이닥쳐서 선생과 함께 아우 신동화를 끌어가 장성 헌병대에 구금하였다. 이 형제를 제거하지 않으면 호남의병은 평정될 날이 없다하여 혹독한 형벌을 가해 3개월 갇힌 동안에 기절했다 살아나기 네 차례였다. 5월에는 이른바 은사금 사건이 일어났다. 명망 있는 인사들을 돈으로 회유하는 돈을 단호히 거부해서 구속되어 쿠한한 고초를 겪었다. 이 삼부자의 사적은 동일궤적이라 하겠다. 선생은 항시 일제관헌의 감시망을 벗어나지 못했다. 대붐에 요시찰함 을 설치하여 외출하려면 신고서를 함에 넣도록 했다. 나의 자유를 어찌 남에게 맡기랴 하며 선생은 결고 이행하지 않았다. 저들은 감시의 문을 거두지 않고 간혹 생트집을 잡아서 독한 체벌을 가하기도 했다. 앞서 고문의 후유증으로 육신이 망지는 지경에 이르렀거니와 마침내 정강이가 뒤틀려 안짱다리가 되고 말았다. 나의 일생은 끓는 물 타는 불을 통과한 듯 싶다.로 술회하기도 했다. 해외의 독립운동에 자금지원을 위해 도내의 부호들에게 밀서를 보내면 대개 선생을 신뢰하여 호응했다. 선생이 돌아가신 그 해 추석날 임방울 명창이 찾아와서 이 어른은 훌륭한 분이다. 지금 이처럼 몸져 누워 계시니 소리로나마 위로해 드리리다 하고 판소리를 날이 중천에 뜨도록 불렀다. 선생의 흐트러짐 없이 올곧은 자세가 명창을 감동시킨 것이다. 이 해 11월 숨을 거두며 마지막 하신 말씀은 창씨개명을 말라였다. 2016년 3.1절을 기해 선생은 독립유공자로 국가포상을 받게되었다. 선생의 마음에 비추어 보면 필시 당연한 도리를 한 한 것이라고 사양하셨을 테지만 그렇기에 더욱 만시지탄이 있다. 일제하의 일상을 떠지나 않으면서 견결히 나의 주체를 지킨 그 자세야말로 고귀하다. 여기 공원에 심사 선생을 기리는 돌을 세우니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