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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7월31일 수요일 7 (제151호) 기 획 한국의서원9곳이지난7월6일세계유산목록 에 등재하기로 최종 결정됐다.이번 등재된 한국 의서원은풍기군수주세붕이중종38년(1543)에 ‘백운동서원’이라는 명칭으로 건립된 조선 첫 서 원인 영주 소수서원을 비롯해 ▲도산서원(경북 안동), ▲병산서원(경북 안동), ▲옥산서원(경 북 경주), ▲도동서원(대구 달성), ▲남계서원 (경남 함양), ▲필암서원(전남 장성), ▲무성서 원(전북 정읍), ▲돈암서원(충남 논산)으로 200 9년 이전에 모두 국가 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 정되었으며,훼철되지 않아 원형이 비교적 잘 보 전됐다는평가를받는다. 유교가 발달된 나라인 조선의 건축물로서 성 리학의 사회적 전파를 이끌고 정형성을 갖춘 건 축문화를 이룩했다는 점이 세계유산 필수 조건 인‘탁월한보편적가치’로제시됐다. 한편 이번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박근혜 정부 국정과제(113-1) 븮문화유산 관리체계 개선븯의 주요단위과제 중 하나로 추진된 사업으로 등재 된서원을소개해본다. 세종대에설립되었다는기록도있으나확실하 지 않고 최초로 국학의 제도를 본떠 선현을 제사 지내고 유생들을 교육한 서원으로 알려져 있다.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풍기지방의 교화를 위해 이곳 출신의 유학자인 안향(安珦)을 배향 하는 사묘를 설립했다가 1543년(중종 38)에 유 생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을 설립한 것이 시 초이다.1544년에는 안축(安軸)과 안보(安補)를 추가배향했다. 주세붕은 서원에 자주 와 유생과 더불어 토론 을 벌이는 등 정성을 기울였고, 그 결과 서원의 유생들이 4~5년 만에 과거에 급제하여 사람들이 븮입원자편급제븯(入院者便及第)라고 부를 정도 였다.이후 1546년(명종 1)경상도관찰사로부임 한 안현(安玹)은 유생의 정원(10명), 공양절차 (供養節次), 서원재정, 경리관계를 규정한 븮사문 입의븯(斯文立義)를 만들어 서원의 경제적 기반 을 확충하고 운영방책을 보완하는 데 주력했다. 백 운 동 서 원 은 약 3 0 결 의 토 지 및 1 8 명 의 노 비 , 4 명의 원직(院直) 등을 소유함으로써 경제적 기 반을 마련했다.이 시기에는 서원이 사묘의 부속 적인 존재로서 유생의 독서를 위한 건물로 생각 되었으며, 과거공부 위주의 학교로 인식되고 있 었다. 그후 이황(李滉)에 의해 과거를 위한 독서 보다는 수기(修己)·강명도학(講明道學) 위주로 변했다. 특히 그는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뒤 을사사화로 고초를 겪은 다음 관료로서 군주를 보필하고 경륜을 펴기보다는 학문의 연구와 교 화,특히 후진의 양성을 통해 학파를 형성함으로 써 향촌사회를 교화하고 나아가 장래의 정치를 지치(至治)로이끌인재를확보하겠다는생각에 서 지방유생의 강학과 교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 었다.그리고 당시의 붕괴된 교학을 진흥하고 사 풍(士風)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서원의 보급이 시급하다고 주장하면서 백운동서원에 대해서 송나라의 예에 따라 사액(賜額)과 국가의 지원 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1550년에 븮소수서원븯(紹 修書院)이라는 현판과 사서오경과 븮성리대전 븯(性理大全) 등의 서적을 하사받았다. 이는 서원 이 국가의 공인하에 발전하고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소수서원이 사액을 받고 국가에서 인정 한 사학으로서의 위치가 확고해지면서 풍기지 역 사림의 집결소이자 향촌의 중심기구로 위치 를 굳혔다. 1633년(인조 11)에 주세붕을 추가 배 향했으며, 1868년(고종 5) 대원군이 서원을 철 폐할 때에도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였다. 서원 내에는 보물 제59호인 숙수사지당간지주 (宿水寺址幢竿支柱), 국보 제111호인 회헌영정 (晦軒影幀), 보물 제485호인 대성지성문선왕전 좌도(大成至聖文宣王殿座圖), 보물 제717호인 주세붕영정(周世鵬影幀)이 있으며 서장각에는 141종 563책의 장서가 있다.(자료출처 다음백 과) 이황(李滉)이 별세한 지 4년 뒤인 1574년(선 조 7)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도산서당(陶山書堂)의 뒤편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575년 선조로부터 한 석봉(韓石峰)이 쓴 ‘陶山븯(도산)이라는 편액(扁 額)을받았다.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는 동 시에 영남유림의 정신적 중추 구실을 하였다.19 69년과 1970년에 정부의 고적 보존정책에 따라 성역화 대상으로 지정되어 대대적인 보수를 하 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상덕사(尙德祠)·전교당 (典敎堂)·전사청(典祠廳)·한존재(閑存齋)·동 재(東齋)븡서재(西齋)·광명실(光明室)·장판각 (藏板閣)·도산서당·역락서재(亦樂書齋)·농운 정사·유물전시관등이있다. 정면 3칸,측면 2칸의 단층 기와집으로 된 상덕 사에는 이황과 제자 조목(趙穆)의 위패가 봉안 되어 있다. 전교당은 서원의 강당으로 원내의 여 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정 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굴도리집으로 되어 있 다.전사청은 상덕사에 붙어 있는 건물로서 향례 (享禮) 때 제수(祭需:제사 음식)를 마련하여 두는 곳이며, 한존재는 원장의 거실(居室)로 사 용하였다. 각각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 배집으로 된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전교당 앞의 동서편에 있다. 광명실은 장서고(藏書庫)로서 동서 광명실로 되어 있는 데, 1930년에 지은 동광명실에는 이황의 문도를 비롯한 여러 유학자들의 문집을 모아두었으며, 현재 약 1,300여 종 5,000여 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다. 장판각에는 이황의 문집, 유묵(遺墨)과 븮주서 절요븯(朱書節要)·븮이학통론븯(理學通論)·븮계몽 전의븯(啓蒙傳疑) 등 여러 판본이 소장되어 있으 며, 도산서당은 이황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 다. 역락서재는 제자 정사성(鄭士誠)이 처음 학 문을 배우러 왔을 때 그의 아버지가 지어준 집이 며, 농운정사는 도산서당과 함께 지은 집으로, 당시에 제자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던 집이다. 유물전시관은 1970년에 보수를 할 때 지은 건물 로서이황의유품인자리·베개등의실내비품과, 매화연(梅花硯)·옥서진(玉書鎭) 등의 문방구, 청려장(靑藜杖)·매화등·투호(投壺)·혼천의(渾 天儀)등이소장되어있다. 이 서원은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도산서원 전교당은 보물 제210호, 도산서원 상 덕사 및 정문은 보물 제2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자료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안동 병산서원(安東 屛山書院)은 서애 류성룡 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경상북도 안 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건립한 서원이다. 1978년 3월 31일 사적 제260호에 지정되었다. 고려시대부터사림의교육기관이었던풍산현 에 있던 풍악서당(豊岳書堂)을 1572년(선조 5) 에 서애 류성룡이 안동으로 옮겨오면서부터 병 산 서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1607년 서애가 타 계하자 정경세(鄭經世) 등 지방 유림의 공의로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613년 광해군 5년에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고 위패 를 봉안하였다. 1614년 병산서원으로 개칭하였 다. 1620년(광해군 12) 유림의 공론에 따라 퇴계 선생을 모시는 여강서원(廬江書院)으로 위패를 옮기게 되었다. 그 뒤 1629년(인조 9) 별도의 위 패를 마련하여 존덕사에 모셨으며,그의 셋째 아 들 수암(修巖) 류진(柳袗)을 추가로 배향하였 다. 1863년(철종 14) 사액(賜額)이 내려졌으며, 유림 선현을 모시고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 여많은학자를배출하였다. 일제강점기에대대적인보수가행해졌으며강 당은 1921년에, 사당은 1937년 각각 다시 지어졌 다. 매년 3월 중정과 9월 중정에 향사례를 지내 고 있다.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애 선생의 문집을 비롯하여 각종 문헌 1,000여 종 3 ,000여 책이 소장되어 있다.(자료출처 위키백과) 경주 옥산서원(慶州 玉山書院)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 립된 서원이다. 1967년 3월 8일 사적 제154호에 지정되고,2010년 8월 1일 양동마을의 일부로 유 네스코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으며, 2019년 7 월 6일 븮한국의 서원븯의 일부로 유네스코세계유 산에재차등재되어2관왕이되었다. 조선시대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 선생의 학덕 을 기리기 위해 1572년(선조 5)경주부윤 이제민 이 경상북도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처음 세웠 고, 그 다음해 1573년에 선조로부터 ‘옥산’이라 사액이내려졌다. 공부하는 장소인 구인당이 앞에 있고, 제사를 지내는 체인묘가 뒤에 위치한 전학후묘의 형식 이다. 체인묘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지붕 옆 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하고 있는 맞배집이 다.안에는이언적의위패를모셔놓았다. 구인당은 앞면 5칸·옆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 로 1839년(헌종 5)에 화재로 사라졌다가다시지 어진 건물이다.그 외에도 정문인 역락문,2층 건 물인 무변루, 유생들이 공부하며 거처하던 동재 민구재,서재암수재등여러건물이있다. 회재 이언적은 관직을 그만두고 자신의 종가 가 있는 경주양동마을무첨당의 근처 경주시 안 강읍 옥산의 한 시냇가에 거주처로 안채를 짓고 사랑채 독락당(獨樂堂)과 정자 계정(溪亭)을 경 영하고 약 6년간 성리학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그런 연유로 회재가 세상을 떠난 후 독락당에서 가까운곳에옥산서원을세웠다. 옥산서원은 회재가 독락당 주변 청절(淸絶)한 냇 물 을 끼 고 있 는 바 위 다 섯 곳 에 각 각 관 어 대 (觀魚臺)·탁영대(濯纓臺)·세심대(洗心臺)·징심 대(澄心臺)·영귀대(詠歸臺)라 이름한 오대(五 臺) 중 세심대에 있으며, 세심대에 흐르는 계곡 물은 상중하 폭포로 용추를 이루며 서원 오른쪽 인 북쪽에서 남쪽으로 감돌아 흘러나간다. 세심 대는 용추에서 떨어지는 물로 마음을 씻고 자연 을벗삼아학문을구하는곳이라는뜻이있다. 이언적의 학문은 퇴계 이황에게 이어져 영남 학파 성리학의 선구가 되었다. 영남학파의 선구 자인 이언적을 모신 서원인 만큼 안동의 도산서 원과 함께 영남남인의 양대(兩大) 서원 역할을 했고, 나아가 한국 성리학의 연총으로 자리매김 하였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장서를 보유하 고 있는 서원 중 하나로 한석봉, 김정희, 이산해 등 당대 명인의 친필 현판이 남아있다. 서원 동 남쪽에 1972년 후손들이 세운 청분각이 있는데, 이언적의 븮수필고본븯(보물 제586호)과 김부식의 븮삼국사기븯완본 9권 등 많은 서적이 보관되어 있 다.(자료출처위키백과) 달성 도동서원(達城道東書院)은 조선 오현의 한 사람인 한훤당 김굉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 하기 위하여 1568년(선조 1)지방 유림들의 공의 로 현풍현 비슬산 기슭에 세우고 쌍계서원이라 했다. 임진왜란때소실되었으나,그후1605년(선조 38) 지금의 자리로 이건하여 사우를 중건하고 당시의 동명이 보로동 이었으므로 보로동서원 이라 불렀다. 그 후 2년 뒤인 1607년 사액서원으 로 승격되면서 공자의 도가 동래하였다는 의미 로 도동서원이라고 하였다. 이때 동(洞) 이름도 도동리로 개칭되었다. 1678년(숙종 4) 정구(鄭 逑)를추가배향하였다 행사와 교육이 이루어지는 중정당·사당·담장 (達城 道東書院 中正堂·祠堂·담장)은 1963년 1 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었 다. 담장은 자연석 등을 정렬시킨 지대석 위에 자연막돌을 쌓고 그 위에 암키와를 5단으로 줄 바르게 놓아 그 사이에 진흙층을 쌓아 올렸다. 또한 기와담장 사이에 100㎝ 정도의 간격으로 수막새를 엇갈리게 끼워 넣었다. 담장에 암악새 와 수막새를 사용한 것은 음양의 조화를 통해 생 명력을 불어 넣고 장식효과를 최대한 살린 것으 로 담장의 모습이 매우 아름다워 전국에서 토담 이보물로지정된유일한곳이다.(자료출처위키 백과) 1552년(명종 7)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정여창 (鄭汝昌)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 하여 위패를 모셨다. 1566년(명종 21)에 ‘남계 (藍溪)’라고 사액되었으나, 1597년(선조 30) 정 유재란(丁酉再亂)으로 소실되었다.1603년에 나 촌(羅村: 현재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구라마을) 으로 옮겨 복원하였다가 1612년 옛 터인 현재의 위치에중건하였다. 1634년(인조 12)별사(別祠)를 건립하여 강익 (姜翼)을 제향하고 1642년(인조 20) 유호인(兪 好仁)과 정온(鄭蘊)을 병향하였다.그 뒤1677년 (숙종 3)에 정온을, 1689년(숙종 15)에 강익을 본사(本祠) 올려 배향하고, 1820년(순조 20) 정 홍서(鄭弘緖)를 별사에 모셨다. 이후 1868년 별 사는 훼철(毁撤)되었다. 이 서원은 소수서원(紹 修書院)에 이어 두 번째로 창건되었으며, 흥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 한47개서원중하나이다. 경내 건물로는 사우(祠宇)·전사청(典祀廳)· 명성당(明誠堂)·양정재(養正齋)·보인재(輔仁 齋)·애련헌(愛蓮軒)·영매헌(詠梅軒)·풍영루· 묘정비각(廟庭碑閣)·고직사(庫直舍) 등이 있 다. 사우에는 정여창을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 우에 정온과 강익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명성 당은 강당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왼쪽 협실은 거경재(居敬齋),오른쪽 협 실은 집의재(集義齋)라 하며,유림의 회합 및 학 문의 강론 장소 등으로 사용되었다. 동재(東齋) 인 양정재와 서재(西齋)인 보인재에는 각각 연 못과애련헌·영매헌이있다. 이 서원은 1974년 2월 16일 경남 유형문화재 제91호로 지정된 후, 2009년 5월 26일 사적 제49 9호로지정되었다.매년2월과8월중정(中丁)에 향사(享祀)를 지내고 있다. 소장 전적은 븮어정오 경백편븯(御定五經百編)·븮고려사븯 등 59종 317책 이있다.(자료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전남 장성군 황룡면에 있는 필암서원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인 하서김인후(金麟 厚)의학덕을기리기위해건립된서원이다. 필암서원은호남에서유일하게문묘에종사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으로 호남 지방의 유종 (儒宗)으로 추앙받는 하서 김인후의 학덕을 기 리기 위해, 1590년(선조 23) 그의 문인들인 변성 온(卞成溫)·기효간(奇孝諫)·변이중( 以 中 ) 등 호남선비들이장성읍기산리(岐山里)에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에 소실되어 1624년 복원하였 으며, 1662년(현종3) 지방 유림들의 청액소(請 額疎)에 의해 ‘필암(筆巖)’이라고 사액되었다. 1 672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1786년 양자징 (梁子퓬)을추배(追配)하였다. 이 름 을 필 암 (筆 巖 )이 라 지 은 것 은 그 의 고 향 맥동 마을 입구에 븮붓처럼 생긴 바위븯가 있기 때 문이라 하며, 이 바위의 기운을 받아 하서 김인 후가 태어났다고 한다. 바위에는 병계 윤봉구의 글씨인븮筆巖븯이각자되어있다. 장성필암서원은조선시대서원의기본구조를 모두 갖추고 있는 전형적인 서원으로,그리 높지 않은 유민산(流민山)이 뒤를 감싸고 있는 가운 데 앞에는 문필천(文筆川)이 흐르고 있다. 평지 에 자리 잡은 서원은 교육과 학문 수련의 공간을 앞쪽에, 제사 지내는 공간을 뒤쪽에 배치한 븮전 학후묘븯(前學後廟)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이는 학문을 중시했던 하서 김인후의 뜻을 기리기 위 함으로알려지고있다. 1796년(정조 20) 하서 김인후를 문묘에 종사 (從祀)하였다.서원에는보물제587호로지정된 필암서원 문적 일괄(筆巖書院 文蹟 一括. 노비 보, 원장선생안, 집강안, 원적, 봉심록, 서원성책 등) 및 인종(仁宗)이 하서 김인후에게 하사한 븮묵죽도븯(墨竹圖)와 븮하서유묵븯(河西遺墨)등 60 여건의자료가여전히남아있다.(자료출처위키 백과) 정읍 무성서원(井邑 武城書院)은 고려시대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신라 후기의 학자이자 문장 가였던 고운 최치원(崔致遠)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하여 유상대(流觴臺) 위에 사당(祠 堂)을 건립하여 태산사(泰山祠)라 하였다. 1484 년(성종 15) 정극인(丁克仁)이 세운 향학당(鄕 學堂)이 있던 지금의 자리인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무성리로 이전하였다.1549년(명종 4)영 천자 신잠(申潛)의 생사당(生祠堂)을 짓고 배향 하였다. 1615년(광해군 7)에 븮태산사븯(泰山祠) 자리에 현지 선비들이 븮태산서원븯(泰山書院)을 지었으 며, 1696년(숙종 22) 최치원과 신잠의 두 사당을 합치고 무성서원(武城書院)이라 사액(賜額)을 받았다. 이후 1630년(인조 8) 정극인(丁克仁)· 송세림(宋世琳)·정언충(鄭彦忠)·김약묵(金若 默)과 1675년(숙종 1) 김관(金灌)을 추가 배향 하였다. 서원의 배치는 약간 경사진 땅 위에 강당과 사 당을 잇는 직선축을 중심으로 정문인 누각 현가 루와 내삼문을 배치하고, 주변에 전사청과 교직 사, 비각 등을 세웠다. 사당은 정면 3칸, 강당은 정면 5칸이고, 강당과 재실은 모두 마루와 온돌 이 결합된 양식이다. 무성서원의 구조적 특징은 다른 서원과는 달리 재실이 담 밖에 세워졌다는 점이다. 무성서원의 교육 목표와 내용 및 방법 등 일체 의 교육과정을 상세하게 제시하고 있는 븮원규 븯(일종의 학칙)에 따르면 서원에서는 유학 가운 데서도 특히 성리학을 공부하는데 힘썼는데,븮격 몽요결븯, 븮소학븯에서부터 시작해서 븮대학븯, 븮논어 븯 , 븮맹자븯, 븮중용븯, 븮시경븯, 븮서경븯, 븮주역븯, 븮예기븯, 븮춘추븯를 읽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입학 기준에 있어 나이나 신분에 상관없이 독서에 뜻이 있고 배우고자 하는 자는 모두 허락하였지만 일단 입 학하게 되면 반드시 용모를 단정히 하고 오로지 정신을 통일하여 의리를 깨우침에 힘쓰며 서로 돌아보고 잡담하지 말 것을 엄격히 강조하였다. 1486년(성종 17) 이후의 봉심안(奉審案), 강안 (講案), 심원록(尋院錄), 븮원규븯 등의 귀중한 자 료 들 이 많 이 남 아 있 으 며 , 조 선 후 기 대 원 군 의 서원철폐령에도 남아있던 47개 서원 중 하나이 다. 조선 시대 수많은 선비를 길러낸 서원으로 당시 교육활동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 기도하다. 1968년 12월 19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66호 무 성서원으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7월 28일 정 읍 무성서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자료출처 위키백과) 논산 돈암서원은 1634년(조선 인조 12) 지방 유림의 공의로 사계 김장생(金長生)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 리에 건립하였다. 1659년(효종 10) 및 1660년 (현종1)에두번의사액을받았다. 1658년(효종 9)에 김집(金集), 1688년(숙종 1 4)에 송준길(宋浚吉), 1695년(숙종 21) 송시열 (宋時烈)을각각 추배하였다. 1871년(대한제국 고종 8년)의 전국적 서원철 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보존된 유서 깊은 전국 의 47개 서원 중 하나이며, 충청 지역의 대표적 인서원이다. 1881년(고종 18년)에 이르러 숲 말의 서원이 지대가 낮아 홍수 때에는 뜰 앞까지 물이 차므 로 조금 높은 지대인현재의위치로 이건하였다. 1993년 10월 18일 사적 제383호에 지정되고, 경 내의 응도당(凝道堂) 보물 제1569호, 유경사 (惟敬祠)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55호, 원정 비(院庭碑)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66호, 양 성당제영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1호, 대전 역사박물관 소장, 돈암서원 책판이 논산시 향토 문화유적 제9호로 각각 지정되었다.(자료출처 위키백과) 유네스코등재서원은븣 박근혜정부국정과제(113-1)븮문화유산관리체계개선븯의주요단위과제중하나로추진 뱚소수서원(紹修書院) 소수서원(紹修書院):경북 영주시순흥면소백로 2740. 사 적제55호. 뱚도산서원(陶山書院) 도산서원(陶山書院):경북 안동시도산면도산서원길154 뱚병산서원(屛山書院) 병산서원:경북 안동시풍천면병산길386 뱚옥산서원(玉山書院) 옥산서원(경북 경주시양동마을) 뱚도동서원(道東書院) 도동서원:대구달성군구지면구지서로 726. 지난 2015년 은행산종친회에서 도동서원을 찾아 기념촬 영을하고있다. 뱚남계서원(藍溪書院) 남계서원(藍溪書院):경남함양군수동면남계서원길8-11 뱚필암서원(筆巖書院) 필암서원:전남장성군황룡면필암서원로 184. 지난달 28일 은행산종친회 하계연수가 필암서원에서 있 어참석한 종원들이 함께하고있다. 뱚무성서원(武城書院) 무성서원(武城書院):전북 정읍시칠보면원촌1길44-12 뱚돈암서원(遯巖書院) 돈암서원(遯巖書院):충남논산시연산면임3길24-4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