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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7월31일 수요일 4 (제151호) 관향조 종친회 관조(貫祖)의 휘는 화규(華奎)이다. 고려조에 문과에 급제 하여 진주목사, 전법판서, 예문관제학 춘추관사를 지내고 진 주군(晋州君)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그러나 이를 고증할 만한 자료가 없어 안타깝다. 당시 시대상황을 보 면 문치주의에 입각한 고려의 귀족정치는 무신의 사회적 몰 락을 초래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열세에 놓여 있던 무 신들에대한천대는의종때극에달했다.그때문에일찍이최 질(崔質)·김훈(金訓) 등의 무신이 주동이 되어 쿠데타를 일 으킨 일까지 있었다. 무신의 난은 1170년 의종 24년에 정중부, 이의방, 이고, 채원, 이의민 등에 의하여 일어났다. 이 반란의 성공으로 무신들은 의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을 옹립하였으며, 많은 문신을 살육했다. 이후 의종 옹립을 빌미로 많은 문신들 이 처형당하는 등 무신정권은 100년을 이어가면서 문신들의 박해가 이어졌고 문신으로 문벌(門閥)이 높았던 진주군 문간 공의집안도영양을받았을것으로추정해본다. 문간공의 학문과 문벌(門閥)은 그의 아들(휘 漢周)이 문충 공(文忠公) 익재 이제현 선생의 사위로 혼인관계를 맺었다는 점에서엿볼수있을것같다. 진주시는 경남 남부지역의 중심지이다. 예로부터 민족문화 정신의 진원지라 할 만큼 천 년 고도의 역사를 간직한 충절과 교육·문화·예술의 고장으로 이름나 있다. 가야시대에 고령가 야의 고도로,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거열성으로, 통일신라시 대에는 거열주,청주,강주로 개칭되었고,고려 태조 23년(940 년)에 처음으로 진주로 개칭되었으며 성종 2년(983년)에 전 국12목중의하나인진주목이되었다. 조선 고종 33년(1896년)에 전국을 13도로 개편함에 따라 진 주는 경상남도에 속해지고 도청소재지가 되어 관찰사가 진주 에상주하였으며,경남행정의중심지가되었다. 1925년 4월 1일 경상남도의도청이부산으로이전되었으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 함께 지방자치제가 시행되면서 진주부는 진주시로 승격되어 시장(市長)을 두게 되었으며, 1995년 1월 1일 도농복합형태의 시설치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진주시와 진양군을 각각 폐지하고 통합진주시를 설치하여오늘에이르고있다. 진주박씨는 신라경명왕의 장자 밀성대군의 후예이다. 밀성 대군(휘언침)의아들삼한벽공도대장군휘 욱(三韓壁控都大 將軍 諱 郁)은 신라말(羅末) 고려초(麗初)에 군도(群盜)를 토벌하여 태조(太祖)의 건국사업에 공(功 )이 많았으며 손자 휘난(諱瀾)은 요동독포사(遼東督捕使)이다. 요동독포사 휘 란은 아들 오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휘 영정 (永禎)은 후에 태사공파로 세계를 잇고, 차남 영희(永禧)의 후손은 밀직부사공파와 영동정공파, 삼남 영기(永基)의 후손 은 판도판각공파, 사남 영후의 후손들은 삼사좌윤공파, 오남 영지(永址)는진주박씨문간공의11대조가된다. 휘 영지(永址)는 아들 휘 순(珣) 손자 휘 지병(之柄), 증손 휘 성룡(成龍), 현손 휘 병국(秉國) 두었는데 현손 병국에 이 르러 삼형제를 두었으나 장남(휘 정호)은 7世에 이르러 휘 종 지(從智)는 운봉박씨, 차남은 6대에 이르러 휘(諱, 죽은사람 의 이름)가 전해지지 않고 다만 진주군 문간공의 휘 화규(華 奎)에이르러기일세하고있다. 문간공(휘 화규, 1世)의 아들 諱 한주(漢周)는 직장(直長), 동정(同正), 우사간(右司諫)으로 익재 이제현(1287~1367)의 사위이다. 익재선생은백이정의문인으로과거에급제한후연경궁녹 사, 예문춘추관, 사헌부규정을 거쳐 1319년 충선왕의 초빙으 로 원나라로 건너가 만권당에서 연구하였으며, 충선왕이 모 함을 받고 유배되자 그 부당함을 원나라에 간하여 1323년 석 방되게 했다. 1320년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에 책록 되 었고, 그 뒤 밀직사, 정당문학, 삼사사 등을 거쳐 계림부원군 (鷄林府院君)에 봉작되었고, 1357년 문하시중에 올랐으나 기 철 등 친원파 암살 사건을 중재하려다가 실패하였다. 이후 사 직하고은퇴,학문연구와후진양성,저술에몰두하였다. 고려말의유학자이자성리학자이며,공민왕의후궁인혜비 이씨의 친정아버지였다. 고려 말 신진사대부와 조선 시대 사 림파의 학문적 선조로서, 성리학을 들여와 발전시켰으며, 그 의 문하생 목은 이색은 후일 정도전, 조준, 남은, 정몽주,길재 로 학파가 나뉘게 된다. 그림과 서예에도 능하여 그림과 서예 작도 남겼고, 평론서인 역옹패설 등과 많은 산문, 시문 등을 남기는등대학자로명성을떨쳤다. 문간공(휘 화규)이 경주이씨 문충공 이제현 선생과 혼인을 맺음으로서당시의문벌(門閥)을짐작케한다. 휘 한주(直長公)은 아들 운건(雲蹇), 운령(雲翎), 운상(雲 翔)을 두었는데 장자(휘 운건)은 후사가 전해지지 아니하고, 차자(휘 운령)은 무후(无后)이고 삼남(휘 운상)은 병마절도 사로아들춘수(春樹)는대제학을지냈다.손자무동(武東,가 선대부)에 이르러 6형제(震衡, 震壁, 震祐, 進和, 莫山를, 益 山)를 두었으나 후에 절손(絶孫)이 됨으로서 크게 번성하지 못하고차남휘진벽(震壁)의후손이주류를이룬다. 장남 휘 진형(震衡)은 무후(无后)이고, 차남 진벽(震壁)은 통정대부병조판서이고,아들둘을두었다. 판서공(휘 진벽)의 장남 우검(又儉)은 1620년 태어났는데 학문이 뛰어나 한림학사가 되었으며 슬하에 세영(世英), 관 웅(寬雄), 세린(世璘), 세업(世業)을 두었다. 휘 세영(世英) 은 증(贈) 이조판서이고 그의 아들 문현(文賢)은 경주부윤을 지냈으며 현손 휘 래효(來孝)는 타고난 효자로 그 효성은 고 을의 민초들에게까지 순화하게 하여 1897년(고종34)년에 정 려가 내려지고 경상북도 관찰사 엄세영과 홍문관대제학사겸 시강원일강관 김영수의 기문이 전해진다.차남 휘관웅(寬雄) 의 호는 충암(忠岩)으로 주부(主簿)이고, 아들 문성(文晟)은 참봉이다.삼남 휘 세린(世璘)의 호(號)는 서암(栖巖)으로 문 과 급제하여 군수(郡守)를 지냈으며, 사남 휘 세업(世業)은 학생으로증손자달원(達元)에이르러무후이다. 판서공(휘 진벽)의 차남 시검(時儉)은 사간으로 통정대부 에 가좌되었고, 삼남 이검(以儉)은 통정대부, 사남 원검(元 儉),오남신검(信儉),육남성검(聖儉)은학생이다. 아래 세계도에서도 나타나듯 절손(无后)과 족보 수단 미단 (未單)으로 후손들의 행방을 찾을 수 없다. 조선시대 국조방 목을 보면 무과 5명 음양과 1명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실제 족 보상에이들이름을찾을수없음도안타깝다. 조선시대국조방목에의하면무과5명음양과1명으로이는 실제와다를수있다.급제자를보면다음과같다. △ 박계인(朴繼仁, 1601 辛丑生) 武科 인조 2년(1624년) 증 광시 丙科 △ 박형겸(朴亨謙, 1651 辛卯生) 무과(武科) 숙종4 년(1678) 증광시 병과 △ 박경춘(朴景春, 1534 甲午生) 武科 선조16년(1583) 별시 병과(丙科) △ 박예춘(朴禮春, 1596 丙 申生) 무과 인조15년(1637) 무과 병과 △ 박인종(朴仁宗, 159 8 戊戌生)무과 인조15년(1637)무과 병과 △박성지(朴成枝) 陰陽科중종35년(1540)식년시. 진주박씨의 세거지 변천을 보면 관향지인 진주에는 지난 20 00년 인구조사에서 12가구 57명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진주를 비롯한 경상남도에 53가구 208명, 부산에 103가구 323명이 거 주 하 고 있 어 이 들 이 진 주 에 서 옮 겨 간 것 으 로 추 정 해 볼 수 있 다. 진 주 군 (晋州君) 문 간공(휘 화 규)의 아들 휘 한주(漢 州)를 비롯 한 증손(휘 춘 수 ) 까 지 묘소가 경북 군위군 의흥 구룡동에 있 는 것 으 로 족보에 전해 지 고 있 고 실제로 그곳 에 봉 분 이 큰 묘소가 여러 기 있고,구전에 의하면 진주박씨 선산인데 일 제 강점기 세금체납으로 공매에 넘어갔다고 전해져 개경에서 무인들의 억압에 군위 의흥으로 세거지를 옮긴 것으로 보아 야 할 것 같 다 . 이후 현손 무동(武東, 가선대부)은 임진왜란에 영천 신녕 완전동으로 이거하였고, 통정대부 병조판서공(휘 진벽)의 손 자 휘 관웅(호 충암,主簿)의 손자 휘 효팽(孝彭)의 호는 운암 추(雲菴墜)로 통정대부에 가좌되었는데 신녕에서 영덕군으 로 이거하면서 달산면에 많은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최초 이거는영덕군남전면다사리이다. 진주박씨는 관향조 문간공의 7대 조에 이르기까지 실휘(失諱)가 되었 고 , 고 려 말 에 서 7 백 여 년 이 지 난 지 금에 인구가 2500여명에 이른다는 것 은 조선시대 병란과 사화를 겪고 근 세에 이르러 일제강점기와 동란, 보 릿고개 등을 지나오면서 구심점이 없 었던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짐작해 본다. 일제강점기이후영덕과부산대구 에 거주하는 종인들이 수보(修譜)하 기에 이르렀지만 참여한 종원이 소수에 불과하다. 1980년 경 신년에 신녕과 영덕의 종인 집에 보관중인 필사보를 근간으 로 족보를 하고 2011년 발간한 신묘보(辛卯譜)에도많은종원 들이누보되었다. 이에 현 박재로 회장은 이번 호 진주박씨 소개를 계기로 많 은 후손들을 찾았으면 한다며 간절한 소망을 전하고 있어 전 국의 성손들이 관심을 갖고 주변 진주박씨 후손에게 많은 홍 보를기대해본다. /글·사진박상섭 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뱚관향조 약사 진주박씨(晋州朴氏) 진주박씨선영(先塋)-경북 영천시신녕면완전리산202번지 관향조의휘화규(化奎)의현손휘무동(武東, 가선대부) 公이 임진왜란에군위군의흥면에서이거하면서새로운집성촌을이루 었다. 입향조(휘무동)의 어머니숙인달성서씨를비롯 7代까지의묘소가있다. 진주박씨는 밀성대군의 손자 요동독포사의 아 들 5형제 중 다섯째 휘 영지(永址)의현손 휘 병 국(炳國)이 아들 삼형제를 두었는데 차남(失諱) 의 7세에 이르러 휘 화규(華奎) 공(公)을 기(起) 일세(一世)하여세계를이룬다.전국에800여가 구 2500여명이 거주한 것으로 2015년 인구조사 에서나타났다. 그러나 관향조의 출생과 활동시기가 무인시대 (1170~1270)인지라 시대적배경속에 상계를 실 휘(失諱, 이름을 잃어버림)하고 후손들마저 흩 어져 아쉬움을 준다. 이에 금번 진주박씨를 소 개하면서 후손들이 결집하는 계기가 되길 소망 해 본 다 . 뱚본관의유래 뱚관향지진주의연혁 뱚진주박씨선원세계 영천시신녕면완전리선영의문인석이 당시문벌과 지위를엿보게한다. 뱚조선시대과거급제자 뱚집성촌 ▶2015년진주박씨광역시도인구분포현황 뱚맺음말 박재로 회장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