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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7월31일 수요일 2 (제151호) 기 획 -난신적자를 차례로 불러들여 한바탕 울음 잔치라도 벌이려 는 것인가.그들은 울기 위해 살고 있는가.살기 위해 울고 있는 것인가. 울고 있는, 울음을 머금고 있는 신라의 왕과 신라의 신하들 이었다. 그들의 속내는 충의가 아닌 쟁권(爭權)과 보신(保身) 의계산이도사리고있음을왕건은직감적으로느꼈다. 울음 뒤에 도사린 김부의 속내는 어려운 처지를 만회하고 타 개하려는, 특유의 승부수일 것이 틀림없었다. 경애왕 피살 직 후 민원(民怨)이 쏟아지려는 순간,경애왕 주검 앞에 천연스레 눈물을흘렸던자가그였다. 경순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부이고, 문성대왕의 후손이며, 이찬 효종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계아 태후이다. 부는견훤의추대로 왕위 에 올랐다. 왕은 전 왕의 시체를 서쪽 대청에 모시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하였다. (븮삼국사기븯권12신라본기12경순왕즉위년조) 임해전(臨海殿)에서잔치를하였는데술이 한참돌 무렵에신라왕이 말 하기를, “소국(小國)이 하늘의 버림을 받아 견훤의 유린된 바가 되니 통분 하기 끝이 없나이다.”고 하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좌우의 신하들도 목메 어 울 지 않 는 사람이 없었다. 왕건도 눈물 을 흘리며 그 를 위로 하 였다. (븮 고 려사븯세가2태조14년2월) 지금 김부가 흘리는 눈물은 견훤과 내응해 왕건을 공산 동수 (公山 桐藪)에서 왕건을 궁지로 몰아넣은 전죄前罪의 참회이 자 , 또 고 창 전 투 이 후 견 훤 의 우 위 가 사 라 진 마 당 에 더 이 상 견 훤에연연하지않겠다는의지의표명이었다. 견훤을 아비라 불렀던 김부는 지금 왕건의 앞에서 눈물을 흘 리고 있었다. 경애왕의 주검 앞에서 흘렸던 눈물과 같은 눈물 을, 김부는 흘리고 있었다. 견훤을 향한 배신의 눈물이기도 했 고, 왕건의 용서를 구하는 눈물이기도 했다. 또 난처한 상황에 만직면하면항상얼버무리는수단의눈물이었다. 그 모든 눈물의 궁극적 목적은 또한 자신의 보신과 영화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왕건은 김부를 질책하는 대신 그의 손을 마주잡은 채 눈물을 흘렸다. 왕건은 원래 울기보다 웃기를 잘 하는 위인이었다.경명왕 때 김율이 천사옥대의 행방을 모른다 고 했을 때도,견훤이 총마를 돌려 달라 했을 때도 웃었던 자였 다.그런왕건이김부의울음에맞춰울고있었다. 발해 인민의 귀부처럼, 왕건의 철칙은 싸우지 않고 잇속을 차지하는 거였다. 왕건은 김부의 속내를 꿰뚫은 이상, 항전의 정신조차 잃은 인간을 상대로 새삼 적의를 품을 까닭은 없다고 여겼다. 왕건의 눈물은 지난 일을 잊고 빨리 귀부하라는, 김부 의 귀부를 재촉하는 것이었다. 임해전의 무리들은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진 채, 다른 목적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쌀쌀한 늦겨 울 바람이 그 위선의 눈물을 빨리 거둬 달라 재촉하며 쉼 없이 불었다. 왕건이 군영에 돌아온 때는 3월 초였다. 군문에 들어서자마 자 왕건은 뚜렷한 까닭도 밝히지 않은 채 유금필을 곡도(鵠島) 로압송토록명했다. 태조14년에(유금필이) 참언(讒言)을입고곡도(鵠島)로 귀양갔다. (븮고 려사븯92열전5유금필) 3월에 유금필이 참소를 입어 곡도(鵠島)로 귀양갔다. (븮고려사절요븯 권1 태조신성대왕14년3월조) 유금필은 고려 제일의 무장이었다. 925년 10월 정서대장군 (征西大將軍)이 되어 연산진(燕山鎭)에서 적장 길환(吉奐)을 단칼에 죽였고, 또한 임존군(任存郡)을 공격해 후백제 군사 3 천여 명을 베며 백제 서역을 칼로 물고기를 썰듯 경략했다. 고 창(古昌) 전투에서도 혼자 분기하여 진공을 주장한 것은 물론 저수봉(猪首峰)에서 돌격해 포위된 3천을 구하는데 공을 세웠 었다. 무엇보다 그는 왕건의 목숨을 수차례나 구한 생명의 은 인이었다. 조물군(曹物郡)에서 불리했던 왕건을 위해 단숨에 달려왔던 것도, 동수 전투에서 일패도지한 왕건을 구한 것도, 이듬해 청주에서 사지에 처한 왕건을 탕정군(湯井郡)에서 달 려와구한것도모두그였다. 그런 그가 죄도 없이 참소를 입어 곡도(鵠島)로 귀양을 갔다. 생명의 은인이자 군국(君國)에의 충성을 목숨처럼 지녀온 장 수를,왕건은일변하여토사구팽의 처지로 몰고 간것이었다. 그리고 5월 20일 왕도를 다시 방문한 왕건은 김부와 태후(太 后) 죽방 부인(竹房夫人), 상국(相國) 김유렴(金裕廉), 잡간 (匣干)예문(禮文)과 파진찬(波珍粲)책궁(策宮),윤유(尹儒) 와 한찬(韓粲) 책직(策直), 흔직(昕直), 의경(義卿), 양여(讓 餘), 관봉(寬封), 함의(含宜), 희길(熙吉) 등에게 물품(物品) 을차등있게선사했다. 한 차례 선물을 행한 왕건은 5월 26일 귀로에 올랐다.김부는 포석정 사건의 책임을 모면했다. 왕건은 대신 유렴(裕廉)에게 책임을물어볼모로압송했다. 5월26일(계미)에고려왕이 돌아가니,왕이 혈성(穴城)까지전송하고유 렴(裕廉)을 볼모로 삼았다. 고려왕은 군사가 엄정(嚴正)하여 추호도 침해 하지 않으니, 도성 사람과 사녀(士女)들이 감동하여 울면서 서로 치하하 기를, “옛날 진씨가왔을때에는시호(豺虎)를만난 것같더니,지금왕공이 오니부모를뵙는것같다.”하였다.(븮동사강목븯권3 김부 5년5월조) 태조가 수십 일 체류하다가 돌아가려 하므로 왕이 혈성까지 나가서 송 별하고, 종제유렴을볼모로 삼아 태조를 따라가게 하였다. 태조의 군사들 의규율이 엄정하여, 조금도규율을위반하는일이 없었으니, 서울에사는 남녀가서로 기뻐하면서“이전에견훤이 왔을때는마치범이나이리떼를 만난 것같았는데, 오늘왕공이 왔을때는부모를만난 것같았다”라고말 하였다.(븮삼국사기븯권12신라본기12경순왕5년조) 계미(癸未)에 왕이 돌아오매 산라왕이 혈성(穴城 대성군(大城郡))까지 배웅하고 김유렴(金裕廉)을 인질로 삼아 딸려 보냈다. 도성(都城) 사람과 궁녀들은 감격하여 울며 서로 치하하여 말하기를, “옛적에 견씨(甄氏)가 왔을때에는늑대나호랑이를만난 것같더니지금왕공(王公)이 오고보니 부모를뵌것같다.”고하였다.(븮고려사븯세가2태조14년5월) 유렴은 견훤과 김부의 전모를 일선에서 행하고 알선한 자로, 언변과 기모(奇謀)에 능하였다. 김부의 종제라고도 하고 혹 당 제라고도 하는 등 세간의 말이 일치하지 않았다. 일찍이 박씨 왕권에협조해경명왕치세에시중이되는등의 총애를 입었다. 그의 활동은 경애왕 치세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 점에서 경 애왕과는 대립했던 인물이라 여겨진다. 경애왕이 죽고 김부가 왕이 되자 상국(相國)에 올라 국정을 총괄했었다.배신과 모략 으로 점철된 그의 파란의 정치 역정도 이로써 종지부를 끊었 다.김부및백관이혈성(穴城)까지전송했다. 견훤이 경애왕의 아우 효렴과 영경을 잡아갈 때도 멀찍이 지 켜봤던 김부는 이제 왕건이 유렴을 잡아가는 데도 쓰다달다 말 한마디 없었다. 그저 화(禍)의 불똥이 자신을 피해가는 것만 다행이라여길뿐이었다. 송별에 참석한 김부의 무리는 입을 모아 왕건을 칭찬했다. 다시 그들은 임해전 잔치에서처럼 또 울기 시작했다.핍박받을 위기에 처해도 울고, 난신적자의 앞에서도 체통 없이 울었다. 보신에성공한그들은다시긴울음을섞어왕건을찬양했다. - 군사가 엄정(嚴正)하여 추호도 침해함이 없으니 옛날 견훤이 왔을 때 에는 시호(豺虎)를 만난 것 같더니, 지금 왕공이 오니 부모를 뵙는 것 같습 니다.(븮삼국사기븯권12신라본기12경순왕5년조) 그러나 그들이 지금 부모라 칭하는 왕건은 멀리는 왕실에 반 기를 든 난신적자이며,가까이는 귀부의 명목으로 신라의 지경 地境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존재였다.견훤이 눈앞의 진보와 미 녀와 기술자를 낚아채간 투박한 약탈자라면,왕건은 수없이 넓 은 벌판과 기름진 땅을 교묘히 귀부의 명목으로 삼켜 온,또 다 른 약탈자, 한 마리의 굶주린 늑대였다. 견훤과는 길이 다른 약 탈이었으나 흡수력이나 위해(危害)의 정도는 버금갔다. 왕건 은또하나의견훤일따름이었다. 송악으로 돌아 온 왕건은 8월 한가위를 앞두고, 다시 폐백을 왕도로 보내 환심을 샀다. 이는 왕건이 흔히 귀부를 재촉할 때 사용하던 일상적 수법이었다.보윤(甫尹),선규(善規)등을 보 내,김부에게 안마(鞍馬)와 능채(綾綵)를 주고,백관에게는 채 백(綵帛)을, 군민(軍民)들에게는 다(茶)와 복두( 빱頭)를, 승 니(僧尼)에게는차(茶)와향(香)을차등있게주었다. 11월 28일 찬바람이 불자 왕건은 서경에 행차했다. 친히 재 제(齋祭)를 행하고 주진(州鎭)을 두루 둘러봤다. 북쪽 경계의 주진(州鎭)으로 하여금 성 밖 번관(蕃館븡번국의 내왕하는 사 람이 숙식하는 객관)을 건축하게 했다. 통덕(通德), 통해(通 海), 안수(安水), 강덕(剛德), 흥덕(興德) 등에 다시 진(鎭)을 설치해 진두(鎭頭)를 두어 주둔하게 했다. 이어 유사(有司)에 게다음과같이일렀다. -북번(北蕃)은 인면수심(人面獸心)이어서 주리면 왔다가 배가 부르면 가고, 이로움을 보면 부끄러움도 모른다. 지금은 비록 복사(服事 복종하 여섬기는것)하지만 향배(向背)가무상하니, 마땅히통과하는주진(州鎭) 으로 하여금성밖에번관을지어서이들을대접하라.(븮고려사븯세가2태조 14년11월조) 유항산(有恒産)이라야 유항심(有恒心)이란 맹자의 말을 왕 건은 신념처럼 실천해 왔다.그러나 왕건의 노력에도 서경에는 이변이 끊이지 않았다. 민가에서 암탉이 화하여 수탉이 되었 다.또 때 아닌 태풍이 불어 집집마다 지붕과 기와가 모두 날아 갔다.군신들을모두초집한왕건은자신의소회를밝혔다. -옛적에진(晋)에간사한 신하가있어몰래딴 생각을품자그 집암탉이 화하여 수탉이 되었음에도 그 잘못을 고치지 않다가 마침내 주멸(誅滅)을 당하였다.오왕(吳王)유비도태풍이 불어문이 부서지고나무가뽑혀도근 신할줄을모르다가패망하여족멸의비운을당하였다.마땅히각자마음을 고쳐재앙이 미치지않도록하라.(븮고려사븯세가2태조15년5월조) 유비는 한 고조 유방의 형 중(仲)의 아들로 오왕(吳王)에 봉 해졌으나 후에 교서(膠西)븡교동(膠東) 등 7국과 함께 모반하 다 주아보(周亞父)에게 격파당해 족멸된 인물이었다. 그렇다 면 왕건이 지금 지칭하는 간사한 신하와, 공명을 얻고도 더 강 한 권력을 추구하다 비명횡사한 유비는 누구인가.정확치 않았 다.혹여유금필을지칭한것일지도모를일이었다. 마치 궁예가 살아 있다면 했을 법한 어투로 왕건은 신하들을 질책했다. 수탉과 기왓장의 이변으로 다그치는 것은, 마음을 읽는다며 독심술로 다그친 궁예의 겁박과 진배없었다. 유금필 이 숙청된 마당에 고려 신하들은 이제 화(禍)가 자신에게 미치 지않도록처신해야할판이었다. 마침 연산을 장악하고 있던 백제의 장군 공직이 아들 영서 (英舒)와 더불어 왕건에게 투항했다. 그리고 청주 일모산성 (一牟山城)공격을제청하자왕건은크게기뻐하며응락했다. 이듬해인 932년 7월 11일, 공직을 앞세우고 왕건은 남정(南 征)의 길에 올랐다. 그러나 한편으로 북변의 일이 근심되어 태 자(太子, 正胤) 무(武)를 보내 북쪽 변방을 순수하게 했다. 견 훤은 공직이 왕건에게 투항하자 곧 인질로 두었던 공직의 맏이 직달과 딸을 낙형烙刑으로 다리 힘줄을 끊어 죽이고 전군에 비 상령을발동했으나즉시움직이지는않았다. 견훤의 침묵은 항상 의외의 결과를 불러왔다. 5년 전 견훤은 아홉 달이나 침묵하다 근품성을 거쳐 포석정으로 침입,경애왕 을 죽였었다. 까닭에 견훤이 분노를 머금은 채 유지하는 지금 의 침묵은 묘한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공직의 자식 들이 낙형으로 죽은 것처럼 이내 견훤의 복수는 불같이 재연될 게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두 달 만인 9월 견훤은 일길찬(一吉飡) 상귀 (相貴)를 보내어 수군을 동원, 예성강(禮成江)을 낀 염주(鹽 州)븡백주(白州)븡정주(貞州)에 정박해 있던 전함 1백 척을 불 사르고, 저산도(猪山島)의 목마 3백 필을 취하여 돌아갔다. 송 악에서 서쪽으로 30리에 불과한 그곳들의 소각은 송악 도성을 공포로 몰고 갔다.견훤의 전격전은 다시 10월, 해군 장군 상애 (尙哀)등의대우도(大牛島)공략으로이어졌다. 송악의 주변조차 위협당한 판이니 왕건이 통일을 운운하며 고창을 안동으로,대목은 천안으로 운위한 것 자체가 민망해졌 다.형세가 순식간에 불리해졌는데도 견훤의 예봉을 막을 방법 을 찾지 못해 왕건은 근심만 더했다. 그러자 유금필이 곡도(鵠 島)에서글을올려참전을청했다. -신이 비록 귀양중에 있사오나 후백제가 우리의 해변 고을을 침공했다 는말을들으매신이 가만히앉아있을수없어이미 장정(壯丁)을뽑고전 함(戰艦)을수리하여이를막고자준비했나이다. 하오니임금께서는근심 을덜고옥체를강녕하게하소서.(븮고려사븯92열전5유금필) 자신을 살렸었던 충신이 다시 자신을 살리려 글을 썼다. 왕 건은 단번에 글을 다 읽어 내려갈 수 없었다. 자신을 깊이 자책 한왕건은구슬프게말했다. -참소를 믿고 어진 사람을 쫓았다. 이는 내가 어질지 못하며 밝지 못한 탓이다. 나의 죄가 실로 크지 않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하고 사신을 보 내어소환하고위로했다. 또“경은실로 허물없이 귀양갔는데도불구하고 한 번도 원분 하 게 생각하 지 않 고 오직 나라를 도울 것만 생각하 니 내 심히 부끄럽고후회된다.장차대대로 은상(恩賞)을미치게하여경의충절에보 답코자하노라.”라고하였다. (븮고려사븯92열전5유금필) 왕건은, 죄가 없는 유금필을 귀양 보낸 것에 눈물을 흘리며 사과했다.오직 나라만 생각하는 유금필의 충정이 왕건의 마음 을 울렸다.부끄러운 마음을 지울 수 없어 왕건은 그 모든 전죄 를 크게 뉘우쳤다.후사(後嗣)에까지 상(賞)을 미치게 하며 경 의충성과절의에보답하겠다며왕건은굳게다짐했다. 이듬해 5월, 견훤이 아들 신검(神劒)을 보냈다. 신검의 군사 는 의성을 향해 밀물처럼 올라왔다. 그 선봉이 의성 경계에 침 구했다. 왕건이 유금필을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삼고 막게 했다. 고려 주장이 유금필임을 듣자 신검은 의성을 공략하는 대신 급거 혜산성븡아불진(阿弗鎭) 등을 거쳐 왕도를 겁략(劫掠)하 는 것으로 전략을 수정했다.6년 전 아비 견훤이 삽시에 문경에 서 영천으로 남하한 전략을 아들 신검은 그대로 재현하려 했던 것이다. 아비 견훤이 경애왕을 죽인 것처럼, 이번에는 자신이 아비와의 믿음을 헌신짝처럼 저버린 김부를 주살하리라 결심 했다. 그러자 김부는 경애왕처럼 백제군에게 주살될까 염려하 여,왕건에게줄줄이사신을보내위급함을알리며읍소했다. 김부의 재촉이 하도 빗발치자 왕건은 의성에 전령을 보내 왕 도 구원을 명했다. 유금필이 즉시 장사 80인을 뽑아 말을 타고 선두에서 달렸다. 마침 산에서 녹은 물이 거센 물살을 이뤄 사 탄의 여울은 깊고 빨랐다. 유금필은 사졸들을 앞에 두고 비장 하게말했다. -만약 적을 여기서 만나면, 나는 죽기로 싸울 것이다. 그런즉 너희들은 각각살계책을세워두라. -우리들모두자청하여죽을길을택할지언정,어찌장군만 홀로 죽게하 겠습니까.(븮고려사븯92열전5유금필) 여울을 건널 무렵, 과연 신검의 군사와 조우했다. 유금필의 부오(部伍)가 정예함에 백제군이 겁을 먹고 싸우지도 않고 저 절로 흩어졌다. 백제의 포위를 뚫고 왕도에 이르니, 노유(老 幼)가하나가되어맞이하며절하고울면서말했다. -오늘대광(大匡)을뵐줄은생각하지못하였습니다.대광이 아니었더라 면우리는어육(魚肉)이 되었을것입니다.(븮고려사븯92열전5유금필) 정해년 포석정 사건이 일어나던 당시 상황을 다시 한 번 유 금필과 관련하여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에 이르렀 다. 구원군의 주장은 유금필 같은 존재여야 했다. 80인의 장사 만으로 선봉을 삼아 적진을 꿰뚫은 유금필에 비할수록, 6년 전 1만의 군사로 문경의 언저리만 맴돈 공훤의 무능과 그를 주장 으로임명한왕건의당시처사는더욱이해하기힘들었다. 유금필만 내려 왔던들 경애왕은 그처럼 처참하고 억울하게 죽지 않았을 것이었다. 경애왕이 숱하게 파발을 띄워 급보를 전하고 도움을 외쳤건만,발해의 멸망을 방관했던 왕건은 철저 히 신라의 위기를 방관했을 뿐이었다. 경애왕의 온갖 노력은 왕건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주변의 철저한 방관과 배신 속에 경애왕의노력은그저신라안에서의작은울부짖음에그쳤다. 그렇다면 왕건이 왜 경애왕의 죽음은 은근히 방관했으면서 김부의목숨은급히구하게했는지에세간의의문이쏠렸다. 왕건의 속내는 경애왕이 있는 한 오히려 신라 병합은 요원해 질 것이고, 그럴 바에야 차라리 견훤에 의해 제거되길 바란 얄 팍한 희망일 것이라는 게 뜻있는 백성의 짐작이며 중론이었다. 견훤이 경애왕을 죽이고 나면 자신이 처리할 대상은 견훤 하나 로 압축될뿐더러 민심이 견훤보다 자신에게 쏠릴 것이라 예상 한 까닭도 작용했다. 그리고 그 짐작은 고창의 승리와 김부의 행위에서고스란히입증됐다. 잇속에 따라 움직이는 김부는 그 점에서 경애왕보다는 훨씬 다루기 수월했다.그는 적당한 잇속만 제시하면 언제든 왕건의 발아래 무릎을 꿇을 위인이었다. 견훤의 꼭두각시였던 김부는 이제 왕건의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다. 결과적으로만 보면 견훤 이 왕건을 위해 어줍잖은 꼭두각시를 세워 준 셈이 되고 말았 다.7일 동안 머물다 돌아가는 귀로에 유금필은 다시 신검과 조 우했다. 싸워 크게 이기고, 적장 일곱을 사로잡았다. 유금필은 승첩의포상을사례하며다음과같이주변에말할뿐이었다. -신하의직분은의당이런것이다.(븮고려사븯92열전5유금필) 죽음에 뛰어들어 피와 살을 잃는 것이 신하의 도리임을 유금 필은 천명한 것이었다.신검이 80인을 이끈 유금필에게 철저히 패했다. 견훤은 분기탱천하여 친정에 올랐다. 934년 5월 왕건 이 군사를 거병, 예산을 거쳐 9월 운주에 이르자 견훤이 직접 갑사 5천을 이끌고 나아왔다. 양군이 서로 대치한 벌판에는 창 검들이 오월의 햇빛으로 반짝였다. 견훤이 전령을 보내 ‘양군 이 함께 싸우면 사세가 함께 보전되지 못할 것이니, 마땅히 화 친을맺고각기봉경(封境)을보전하자.’고제안했다. 그러자 왕건은 우물쭈물했다. 9년 전 조물군 전투의 재현이 었다. 왕건은 그때 경애왕과 유금필의 정면 대결 요청을 물리 치며 화의를 맺었었다.왕건의 천성은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왕건은 확전을 원치 않고 있었으나 장차 (將次)의 격돌은 불가피했다.그 때와 마찬가지로 유금필이 나 서다시격전을제안했다. -오늘의 형세가 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컨대, 상께서도 신등이 적 을깨뜨리는것을보고근심하지마십시오.(븮고려사븯92열전5유금필) 드디어 말에 올라 날쌘 기병 수천으로 견훤의 진영을 뚫고 돌격했다. 진영을 채 정돈하지 못한 적은 혼란에 빠졌다. 그 틈 을 타 적군 3천여 수급을 참획했다.이에 백제군이 크게 패하였 고 견훤은 낭패하여 위기를 벗어나 달아났다. 웅진 이북 30여 성이 소문을 듣고 비로소 모두 항복했다. 한번 북을 울리면 하 늘의 도움이 있을 거라는 경애왕의 얘기는 이로써 다시 한 번 현실로입증되었다. 935년 3월 백제에서 내란이 일어나 견훤은 축출되고 신검이 권력을 잡았다. 이 첩보는 즉시 송악에 전해졌다. 왕건은 혼란 을 이용해 나주를 되찾기로 결심했다. 나주는 왕건이 궁예의 부장 시절 예하 수군을 거느리고 점령한 이래 20여 년간 고려 영토였었다. 그러나 포석정 사건 이후 판도가 백제로 급격히 기울면서 나주는 견훤에게 떨어졌고 6년에 이르도록 되찾지 못했다. 그 곳의 탈환을 왕건은 지금 계획했다. 무엇보다 견훤 이 유폐된 금산사가 나주에서 30 리 떨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 지역의 민심이 부자간의 다툼으로 인해 어수선할 공 산이컸다.4월,왕건은제장을둘러보며이일을의논했다. 홍유(洪儒)와박술희(朴述熙)등이자청했으나왕건은자질 과 무용이 부족하다 여겨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대광 공훤 (公萱)과제궁(帝弓)등이나서유금필을일제히추천했다. 1만의 군사로 신라 위기를 방관했던 공훤이 유금필을 추천 했다. 이것은 80인人 만으로 서라벌 왕도의 위기를 구한 유금 필의 전공과, 동시에 927년 당시 경애왕을 구원치 못하고 죽게 한공훤자신의과오를함께인정한것이었다. 왕건은 드디어 유금필을 도통대장군(都統大將軍)을 삼아 어선(御船)을 내리고 한편 예성강(禮成江)까지 전송했다. 유 금필의 나주 경략은 왕건의 그것보다 더욱 성공적이었다.원정 을 마치고 유금필이 개선하자, 왕건은 또 예성강까지 행행(行 幸)하여맞이했다. 한편 견훤은 맏이 신검에 의해 권좌에서 축출되고 금산사에 서 유폐되자 아들에 대한 미움이 하늘에 닿았다. 유폐된 지 석 달에 이르자 견훤은 자신이 세운 왕국을 떠나 왕건에게 귀부하 는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여겼다. 그런 마당에 인근의 나주 가다시왕건의수중에떨어졌다. 견훤은 몰래 금산사를 탈출해 그곳을 거쳐 왕건에게 의탁하 기로 결심했다. 나주는 예전 견훤이 직접 토벌에 나서기도 했 던곳이라,칠흑같은밤에도달려갈자신이있었다. 그토록 눈엣가시였던 나주는 이제 견훤에게 구원의 복음을 던진 탈출로가 되었다. 이윽고 막내아들 능예(能乂), 딸 애복 (哀福), 폐첩(嬖妾) 고비(姑比) 및 그 신하 오염(吳琰)ㆍ충질 (忠質) 등과 더불어 30 리를 말로 달려 나주로 피신했다. 견훤 의망명은나주에서왕건에게신속히전해졌다. 견훤은 금산에서 석 달 동안 있었다. 6월에 이르러 그는 막내아들 능예, 딸 애복,첩고비등과 함께 금성으로 도망하여사람을태조에게보내만나 주기를 요청하였다. 태조가 기뻐하며 장군 유금필, 만세 등을 파견하여 뱃 길로 가서그를위로하고데려오게하였다. 견훤이 오자태조는후한 예로 그를 대접하고, 견훤의 나이가태조보다 10년 위라 하여그를 높여 상보라 고불렀으며, 남궁을숙소로 주었으니직위가백관 보다상위에있었다. 또 한 양주를식읍으로 주고, 동시에금,비단, 병풍,금침과 남녀 종 각 40여 명 씩과 궁중의말 10필을주었다.(븮삼국사기븯권50열전10견훤) 왕건은 급히 나주의 물길에 밝은 유금필 등을 보내 군선 40 척을 거느리고 해로를 거쳐 맞이하게 했다. 망명한 견훤을 후 한 예로 대우하되, 10세 연장의 견훤을 상보(尙父)라 다시 부 르고 남궁(南宮)에 관사를 주었으며,지위는 백료의 위에 두고 양주(楊州)를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으며, 금백(金帛)과 노비각40인과구마(廐馬)각10필을내렸다. 935년 6월,견훤이 왕건에게 투항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김부 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경애왕 시해와 관련해 자신이 벌인 모 든음모는왕건의귀에들어갈것이틀림없어보였다. (931년2월) 임해전(臨海殿)에서잔치를하였는데술이 한참돌 무렵에 신라왕이 말하기를, “소국(小國)이 하늘의 버림을 받아 견훤의 유린된 바 가 되니 통분하기 끝이 없나이다.”고 하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븮고려사 븯 세가 2 태조 14년 2월) 931년 2월 자신이 임해전에서 견훤을 비난한 것처럼, 이제 견훤은 왕건에게 전죄를 참회하고 경애왕 시해의 책임을 김부 자신에게 떠넘기려 할 것이 틀림없었다. 왕건과 견훤이 함께 조소하는소리가귀를간질였다. 경애왕(신라55대왕.재위924~927 ) 뱚역사비정(31) 뱛Ⅰ.울음과생존 박 순 교 뱛Ⅱ.유금필 뱛Ⅲ.난신적자 뱛Ⅳ.견훤의반격 뱛Ⅴ.왕건의속내 뱛Ⅵ.매국의길 목 차 Ⅰ.울음과생존 Ⅱ.유금필 Ⅲ.난신적자 Ⅳ.견훤의반격 Ⅴ.왕건의속내 Ⅵ.매국의길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