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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7월31일 수요일 12 (제151호) 기획 병산정은고려문하시중병산군(휘우)과조선세종때문신으로청백리에녹선되고,조선최초의조선통신사 정사로일본에다녀온율정박서생선생을 추모하는공간이다.율정선생을논하면먼저떠오르는수식어가있다.조선최초의통신사,실학의대가,농업 기술보급,화폐사용을통한시장개혁, 청 백 리,애민사상등이다.그만큼선생의업적이탁월하다는것이다.율정선생은야은길재선생의수제자이기도 하다.선생은사행록이나문집을남기지않 았기에사행문학을논하기에는현실적으로어려움이있으나서거정이편찬한‘東文選’에3편의시가수록된 것은선생의문학적능력또한우수함을드 러내는것이기도하다.이에본보에서는지난2009년10월호12면에선조유지를찾아서‘조선외교관,농정개 혁가청백리율정박서생선생편’을 게재한 바있다.무본후생(務本厚生)·애민중농(愛民重農)의정치이념으로살아온선생께서조선최초의통신사로일 본에다녀온것은조선역사상가장빛나는 일로기억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선생의 청백사상은 물질에 휩쓸려돌아가는 현실에 비추어 보면 오늘날의 정신문화에 가장 귀감이 되 고,병산정을중심으로한후손들의숭조정신과위선정신또한길이빛나고있어소개해본다. 병산정은 경북 의성군 비안면 동부안길 76(장춘 리 1046-5)에 소재하고 있고, 관향조 문하시중공 (휘 우)와 율정 선생을 비롯한 선조의 추모공간이 다. 병산(屛山)이라는 별호가 있는 것은 ‘병산정’ 이 있 는 강 (江) 위 에 병 풍 같 은 언 덕 에 있 음 이 다 . 병산정의 시원(始原)은 병산박씨 관조 휘 우 (瑀) 공을 병산원에서 향사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망북정(屛山祠)으로 있다가 퇴락하고, 1936년 중 건하였다. 정면 3칸, 측면 1.5칸 규모에 구조는 3 량가 팔작 기와집이다. 평면은 가운데 대청을 두 고 그 양 측 칸 으 로 온 돌 방 을 1 칸 씩 을 대 칭 되 게 배 열한 전형적인 3칸 중당협실형이다. 대청을 비롯 해 온돌방 전면 전체로는 퇴를 두어 툇마루를 깔 았고, 대청 좌측면 온돌방의 특면으로는 툇마루 와연결되는쪽마루가시설되어있다. 의 성 군 문 화 유 산 제 21호 에 지 정 된 병 산 정 은 위 천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절벽위에 위치하고 있 으며 건물 뒤편에 1988년 관조 휘 우(瑀)의 제단을 모시고 매년 5월 5일 어린이날을 제일(祭日)로 정 하여제(祭)를올리고.후손간친목을도모한다. 2013년12월16일조선최초통신사율정박선생기 념비(朝鮮最初通信使朴先生記念碑)와선무원종공 신 박충인 장군 시비(宣武原從功臣朴忠仁將軍詩 碑),북촌박효순창의비(北村朴孝純倡義碑)를 건립 선조의 청백함과 높은 애민사상 그리고 충의정신을 기리고 있다. 2015년 5월 5일에는 동문선에 전해진 3 편과 야은집에서 발췌한 2편 등 5편의 시를 돌에 새 기는 율정선생시비(栗亭先生詩碑)를 세웠다. 또한 병산원에는 전임 정수(汀洙)·태영(台寧) 회장의 헌 신적인 공로를 기리기 위한 공적비가 있다. 정자를 병산이라고 이름 한 것은 근본(根本)을 잊지 않으려 함이다. 고려 문하시중 병산군(屛山 君, 휘 우)이 처음으로 비안현에 봉군되었다. 병 산은 비안의 옛 이름이다. 태조께서 등극하자 길 야 은 선 생 은 두 임 금 을 섬 기 는 것 을 부 끄 럽 게 여 기고 선산에 은거함에, 박씨의 선조 참판공(율정 박서생)께서 야은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야은처 럼 율수(栗樹) 아래서 강도(講道)하니 세칭 율정 선생이 이분이시다. 율정께서 비안의 병산에 만 복(晩卜)하신 것은 선대가 봉훈(封勳)된 곳이며, 산수(山水)가 이 같이 아름답기 때문이었다. 후 인들이 공(公)의 현명함을 숭모하여 구천서원을 세워 향사(享祀)하였으나 불행이도 나라에서 철 거한바, 글소리 들리던 곳에는 잡초만 우거지고 고향에는 묘소조차 없어 지금 이 고을에 사는 공 의 본손들이 세월이 오래되면 선조의 자취가 더 욱 인몰(湮沒)될 것이 매우 두려워 마침내 정자 하나를 지으니 새가 나래를 펴고 산 듯이 날아 앉 은 듯하다. 현판을 병산(屛山)이라고 한 것은 시 중공이 봉군된 곳이요, 율정공이 계셨던 곳이기 때문이다. 금성산(金城山)과 목단봉(牧丹峰)이 동서로 우뚝 솟고 옥녀봉(玉女峰)과 해망산(海 望山)이 남북으로 환옹(環擁)하였으며, 삼봉(三 峰)이 대치(對峙)하고 이수(二水)가 분류(分流) 하여 평천(平泉)의 화석(花石)이라 옛 사람의 자 취가 더욱 새로워 선세(先世)가 끼친 향기(香氣) 를 여기에서 가히 아침저녁으로 만나겠도다. 지 역을 물으면 병산현이라 하고 그 적(籍)을 물으 면 병산인(屛山人)이라 하고 그 주인(主人)을 물 으면 병산박씨(屛山朴氏)라 한다. 땅과 사람이 같고 이름과 실상(實像)이 부합(附合)하니 오늘 날 박씨가 정자를 병산에 지은 것이 무엇을 취 (取)함이겠는가? 정자가 지어 졌으니 선조의 미 덕(美德)을이어 가기에족(足)하다.시(詩)에이 르기를 구장(舊章)은 어기자 말고 잊지 말라하였 다. 구장(舊章)은 무엇을 일컬음인가? 선대 문장 사업(文章事業)이다. 나 들으니 율정공의 후손은 충효대절(忠孝大節)과 문무 고관이 대대로 그 선 대의 미덕을 따라 나와서 우뚝하게 뛰어나 서로 우러르고 당대에 입신양명하여 선조를 욕(辱)되 게 함이 없으니 이것은 곧 선조의 뜻을 잇고 선조 의 아름다움을 드러냄이라. 정자를 지은 모든 이 에게 바라노니 먼저 정자를 지으려던 그 마음으 로 정자를 세운 뜻을 잊지 말고, 계단(階段)을 오 르듯이 단계적(段階的)으로 학문에 나아가고 방 실(房室)에 들어가듯이 강도(講道)의 깊은 경지 (境 地 ) 에 들 어 가 참 되 게 서 로 탐 구 (探 究 )하 면 마 치 구래공(寇萊公)이 실체 없는 도체(道體)의 누 대(樓臺)를 동찰(洞察)하듯 함이 있을 것이며, 주선생(周先生)의 종변(從便) 개합(開闔)의 이 치 (理 致 ) 를 따 라 모 든 군 자 (君 子 ) 가 각 기 마 음 의 정자 하나를 갖게 되어 이것이 율정을 탐구하여 회통(會通)함에 이르는 근본이 될 것이다. 어찌 거룩하고 아름답지 않은가? 옛 사람의 말에 창업 (創業)하기는 쉬우나 지키기는 어럽다 하니 병산 의 후손된 자는 어찌 그 창업(創業)한 어려움을 생각하여 정성껏 그 이룬 것을 지키지 않을 수 있 겠는가?어느 날 박주봉 君이 나에게 기문을 부탁 하기에 감히 불망본(不忘本) 세 字로서 병산정 낙성을축하하는바이다. 1935년 늦가을 진양인 정동철 記 2015년 초여름 박병훈 譯 선생의 자(字)는 여상(汝祥)호(號)는 율정(栗 亭), 고려조 문하시중 병산군(휘 우)의 10세손으 로 비안의 옛 고을 안정(安貞)에서 태어나고 자 랐다. 선산 해평의 야은 길재 선생 문하에서 수학 하여 1401년 문과에 급제하고, 1407년 성균학정 으로 중시(重試)에 1등으로 급제하여 우정언 지 제교에 제수되었다. 이어 병조좌랑, 사헌부집의, 우군첨총제, 집현전부제학, 공조참의. 병조좌참 의,이조참의,판안동도호부사를역임하였다. 무본후생(務本厚生)·애민중농(愛民重農)의 정치이념으로 삼은 선생은 1428년 성균관 대사성 때 첫 조선통신사 정사로 일본을 다녀와서 관개 (灌漑)를 위한 무인력 수차제작과 경제 작물(作 物) 수입 재배(栽培), 그리고 화폐경제, 시장경 제, 전납세제(錢納稅制)와 통행세(通行稅)를 주 창하였고, 원활한 물류를 위한 교량 건설과 여관 목욕탕 설치 등 후생(厚生)을 위한 방안을 상주 (上奏)하였다. 이 모든 제안은 근대에 이르러 거 의가 실현되었으니 탁견(卓見)이 아닐 수 없다. 흥학교(興學校)·양인재(養人才)를 위해 살던 집 을 기증하여 그 자리에 1735년 비안향교가 중건 되어오늘에이르고있다. 청백리에 녹선 된 선생은 야은 선생의 행장을 지어 조정에 올리므로 “고려의 충신은 재(再, 야 은 길재)다”라는 세종의 평을 받아 스승을 숭앙 받는 절사(節士)로 드높였다. 노년에 야은선생의 마을 밤실에서 사시다가 졸하시니 스승께서 사제 간의 영원한 정의(情誼)를 위해 절반(折半)을 나 누어주신산의길지(吉地)에묻히셨다. 선생께서는 이조참판 대사헌으로 증직되고 17 14년비안구천서원에주벽으로배향되었다. 조선전기 양국에 파견된 국왕사(國王使)는 각각 60여회에 달한다. 그 가운데 일본에 파견된 조선전 기의 국왕사 가운데 ‘통신사’란 명칭은 태종14년(14 14)의갑오통신사(甲午通信使)와 세종2년(1420)송 희경(宋希璟)이 정사로 수행한 경자사행(庚子使 行)에보인다.하지만갑오통신사는정사박분(를정 벌한진의를파악하기위해막부장군이파견한일본 국왕사에 대한 회례사(回禮使)밀성인, 충헌공 후) 이 경상도에서 병을 얻어 사행이 중지되었고, 또한 송희경은 태종이 대마도인 데다 심지어 여러 날 구 류(拘留)되기도하여통신사로간주하기어렵다. 한편 1428년에 파견된 무신통신사(戊申通信 使)는 6대 쇼군(왕)인 아시카가 요시노리(足利 義敎)의 습직(襲職)축하하는 사절로 삼사(三使) 가 모두 중앙관리였고, 국왕의 서계(書契)와 안 자(鞍子, 말의 등에 얹는 도구)·마포(麻布)·저포 (苧布, 모시) 등의 예물까지 지참하여 조선후기 통신사와 같은 형식을 띠고 있다. 따라서 무신통 신사야말로 조선시대 최초의 통신사라 할 수 있 는데 정사(正使)는 율정 박서생 선생으로 1428년 12월7일한양을출발했다. 선생은 통신사로 일본으로 건너가 맡은바 임무 는 물론 일본정세의 정확한 탐지와 외교정책안을 제시하고 일본의 농업정책 등을 소상히 알아보는 등 국내에 들어와 수차개발을 통한 관개(灌漑)정 비, 화폐경제 등 실용주의 정책을 펴오는 등 우리 나라역사상 전무후무한일들을전개해 나가 율정 선생 기념사업회 박병훈 이사장(병산박씨대종회 장)이 지은 ‘朝鮮最初通信使朴先生記念碑’ 비문 (병산정원건립)일부를인용정리해본다. 「-율정 박서생이 세종으로부터 일본의 신왕(新 王)을축하하고전왕(前王)을조문하는국서전달의 명을받고통신사로건너간것이1428년성균대사성 때이다.상대국주권자의경조사와관련한외교사절 로는이것이처음이다.율정은이사행(使行)에서일 왕의전례없이공손한답서를받아오는외교적성과 를거두고,해적의근거지와동선을파악하여왜구의 근절책을 제시하는 한편, 사행 중의 견문에서 공의 실용적가치관과부합하는몇몇제도를선별하여조 선 개혁의 타산지석(他山之石)을 삼았다.그것은 물 자를직접교환하는조선시장을화폐를매개로하는 간접교환시장으로 선진화하고자 교량의 통행세를 비롯한모든조세를돈으로징수하는전납세제(錢納 稅制)를 시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상품진열대 설 치,간판표방,목욕탕,음식점및여관등의개설로귀 천의구별없이돈이면누구나이용케하자고제의하 였다.이는서민을위하여한글을창제한세종과함께 평등사회의지평을열었다고할것이다.‘조선화폐고 (朝鮮貨幣考)’에서는“박서생의제의가조선이돈을 사용하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또한 광 업권 설정,다수확경제작물 수입재배,화공약품제조 법등을주청하고,공조참의때는수차(水車)를제작 하여농사의관개를혁신하였다.---이하생략」 조선후기에조선통신사를통해다양하게펼쳐진 한일 양국 문화교류의 바탕에는 처음으로 일본에 문화교류의 물꼬를 튼 무신(戊申, 1428)통신사가 있었고그중심에율정박서생선생이있었다.특히 율정선생은시장개혁,화폐제도도입,등우리역사 상많은업적을남긴분으로높은혜안과미래를바 라보는안목을가진개혁정치가이기도하다. 1392년 성립된 조선왕조는 유례없이 계획된 국 가였다. 조선왕조를 개창한 세력들은 조선을 유 교적 관료국가로 설정하였고, 성리학을 무기로 그들이 추구했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 결과 조선왕조의 기틀을 다지게 되는 15세기는 최근 ‘때 이른 결정’이라고 표현될 정도로 융성을 누렸다. 태종·세종대 활약했던 율 정 박서생 선생은 이러한 신왕조 건설에 있어서 매우중요한역할을담당하였다. 상주 비안현(현 의성군 비안) 출신의 율정공은 야은길재의문하로서중국및일본의선진적농업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안민(安民)을 위한 각종 모색에 적극적인 유학자였다. 율정공이 우리 역 사 에 중 요 한 역 할 을 한 것 은 일 본 통 신 사 에 서 돌 아온 세종 11년부터였다. 율정공은 농업기술 특히 수차의이용에적극적인관심을보였다. 당시 조선은 조선 최초의 농업기술서인 ‘농사 직설(農事直說), 세종11년 1429’을 편찬하여 경 상도 지역의 선진농법을 농업 후진지역에 보급하 고자 하였으나 이 책은 당시 경상도 지역에서 광 범하게 발달하고 있던 수전(水田) 농업에 대한 방안은거의제시하지못하고있었다. 그러므로 율정공은 당시 자신이 일본에서 보았던 수차를 보급할 것을 제안하였다. 제안한 수차 제작 법은 매우 구체적인 것이었다. 상류에서 내려오는 물의 속도를 빠르게 하여 물이 속도를 이용하여 수 통(水筒)을돌리는방식과함께사람이발로밟아물 을 올리는 형태의 수차 두 가지 방식을 제안하였다. 자신의 수차제작 방식이 공인의 부주의로 올바르게 제작이되지않아직접공조참의로재직하면서학생 김신(金信)과 더불어 정교한 제작을 주도하기도 하 였다. 이러한 율정공의 수차도입론은 안민(安民)의 방법이기도하였다.농업생산력을올려농민의생산 력을올려농민의생계를안정시키고자한것이다. 男兒生亂世/ 忠孝兩難僉/ 殲盡南夷後/ 當辭北 闕前 절충장군 박충인 장군은 율정공의 8세손으로 문무를 겸전(兼全)하여 문 (文)으로 정치를 돕고 무(武) 로써 국난을 방어하였다.1592 년 임진(壬辰)에 왜적이 침략 하자 붓을 던지고 칼을 잡으며 분영히일어나‘남아가난세를 만났으니 충·효를 함께 할 수 없습니다.남녁 왜적을 모조리 섬멸한 뒤에 북궐의 임금께 사 지가고 오겠습니다.’라는 사친 시를 노부께 드리고 전장에 나 아가 전투마다 승리하니 고억 백과 김응서가 연명으로 “박충인은 충의가 남다 르고지략이 출중하여 변방의 읍들을 탈환하고 백 성을구했습니다.”라고보고하였다. 1600년 절충장군 충무위 호분당상관이 되었으 며,1605년 선무원종공신에 오르고,1607년 청성진 (淸城鎭) 첨절제사(僉節制使)에 제수되어, 백성 을인혜(仁惠)로대하고청백리‘율정’의후예답게 청렵한 공무를 수행하였다. 1608년 선조께서 “어 사 목장흠(睦長欽)의 보고를 보니, 그대는 부하를 사랑하고 지극한 성심으로 공무를 수행하며 심지 어 몸소 돌과 나무를 지고 나르면서 성첩(城堞)을 수리하였다니 극히 칭찬할만하다.이에 상을 내리 노니그대는받을지어다.”라고하였다. 임기가 다하여 돌아올 때 지역민들이 비(碑)를 새워 장군의 덕을 칭송하였다. 1729년 후촌(後村) 에 세운 ‘병호충렬사(屛湖忠烈祠)’에 배향될 때 김 재항(金載恒)은 ‘시(詩)로 어버이와 결별하고 적 을 베어 임금께 바쳤으니, 신하와 함께 큰 공훈 길 이 빛나리(詩訣于親낙獻于君 山下影裡 有炳巍勳/ 시결우친괵헌우군 산하영리 유병외훈)’라고 축문 을 올렸다.장군은 1565년 7월 8일 비안에서 출생하 여 1612년 3월 7일 서울에서 운명하였다.이날 새벽 뇌성이울리고큰바람불더니바람그치자숨을거 두어 기이한 일로 인구에 회자되었다.충효의 정수 (精粹) ‘병애공(屛崖公, 박충인 장호 號)’ 산 같이 우뚝한장군의기백영원히기릴충효의표상이다. 병산정은 선조의 음덕을 잊지 않고 후손들이 수시로 찾아 발자취를 더듬는 성역의 공간으로 승화되었다. 그리고 율정공의 높은 애민정신과 실용주의 사상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표상이아닐수없다. 그동안 두 번의 학술발표회를 통해 선생의 생 애와 사상을 고찰한바 있으며 율정기념사업회 (이사장 박병훈)를 중심으로 율정 선생에 대한 많은 사업을 전개하고 있어 다행스러운 일이 아 니다. 율정 선생은 사행록이나 문집을 남기지 않았기 에 그의 사행문학을 논하기엔 현실적으로 무리가 따른다 하지만 서거정이 편찬한 동문선(東文選) 에 3편의 시가 수록되었다. ‘동문선’은 4,260편의 작품이 수록되고 수록 작가가 500명 정도나 되지 만 그 가운데 수록작품이 단 한편인 작가가 무려 220명이나 된다. 이를 고려하면 3편의 사행시가 수록된 것은 율정 선생의 문학적 능력이 우수함 을드러내는표장이다. 선생의 시는 야은집에도 2편의 시가 전해진다. 뛰어난 문학가이자 높은 애민정신으로 점철된 선 생의 삶과 철학이 우리에게 영원히 전해지길 기 대해 보면서 부산에서 출발한 무신통신사가 대마 도와 이키시마(壹岐島)를 거쳐 다음 사행 노정 이 하카타(博多)로 향하다가 목적지를 눈앞에 두 고 태풍 때문에 예기치 않게 남을노포(藍乙老浦) 에 머물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그린 시로서 통 신사의 길이 험난함을 잘 표현하고 있어 소개하 면서마무리하고자한다. 【바다로 나가다가 큰 바람을 만나 배가 더 가지 못하고 돌아와 남을로포에 대다[放洋遭大風舟回 不行還泊于藍乙老浦]】 靡깝惟王事(미고유왕사, 王命은 소홀이 할 수 없는 것이라)/ 懸帆向日東(현범향일동, 돛을 올 려 일본 동쪽으로 향하는데)/ 風撞巨鼇窟(풍당 거오굴,바람이큰자라굴을두드리고)/舟 老蛟 宮(주탕로교궁, 배는 늙은 이무기 궁에서 흔들거 리네)/ 人物扶搖裏 (인물부요리, 사람 과 물건들은 폭풍 속에 있고)/ 形骸 惚 中 ( 형 해 황 홀 중,육신은 멍하기 만하니)/艱危何足 說(간위하족설, 어 렵 고 위 태 로 움 이 어이 다 말하랴)/ 頭 上 有 蒼 穹 ( 두 상 유창궁, 머리위에 아 득 히 푸 른 하 늘 만 있네) -동문선 권10「五言律詩」 병산정과조선최초통신사율정 박서 생선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병산원전경. 병산정(屛山亭) 병산정기(屛山亭記) 율정박서생선생의생애 율정선생묘소-경북구미시밤골. 묘비뒷면-최초화폐경제주창을형상화했다. 비문은김관 용경북지사기지었다. 조선초대 통신사 율정 박선생 조선통신사율정선생기념비. 율정 선생의 수차(水車)도입과제작 선무원종공신박충인장군시비(詩碑) 맺음말 율정선생시비. 율정사업회 박병훈 이사장이 병 산원을안내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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