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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6월30일 일요일 8 (제150호) 기 획 상암공파는 총랑공(휘 전)의 아들 문로(文老)의 차남 휘 안의(安義)를 파조로 하고 상암(商巖)은 공(公)의 아호(雅 號)이다. 상암공은 고려조 문과에 급제하여 판전농시사(判 典農寺事)를 역임하였고, 조선조에 이르러 태조 7년(1398) 사헌부감찰, 정종 원년(1401) 형조좌랑, 그 후 단양군사, 태 종17년(1417)에는 의금부부진무(義禁府副鎭撫, 종3품), 세 종 조에 이르러 전농판사(典農判事,정3품)을 지냈다.엄격한 절제(節制)의 인품에 글을 좋아하여 많은 사람과 사귀고 시 조(時調)읊기를좋아했다. 슬하에 삼남을 두었는데 각기 계파를 이룬다.장자 휘 미창 (美昌)은 통훈대부(通訓大夫) 진용교위(進勇校尉) 좌군사 정(左軍司正)으로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되고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 휘 사영(士英)은 통정대부 행 장흥고 령 (長興庫 令), 보은현감, 제주목사에 오르고 이조참판에 증직 되어 참판공파( 핫判公派)로 그의 아들 세준(世俊)과 세건 (世健)에 이르러 라계파(羅系派)와 보은파(報恩派)로 세계 를 이룬다. 차남 사화(士華)는 통훈대부 군자감부정으로 증 자헌대부 이조참판, 호조참판, 호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판 서공파(判書公派) 또는 남양파(南陽派)로 불린다. 상암공의 차남 윤창(允昌)은 식년시에 등과하여 거창현감, 사간원 수 석(守石) 헌납(獻納), 해평군사, 승문원지사, 보문각 직제학 (寶文閣 直提學)으로 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 또는 상주파 (尙州派)이고, 삼남 문창(文昌)은 학생(學生)으로 함경도 서흥으로이주서흥파(瑞興派)로각각분파되었다. 참판공파는 상암공의 아들 휘 미창(美昌)의 장자 휘 사영 (士英)을 파조로 한다. 참판공은 1430년(庚戌)에 태어나 통 정대부 행 장흥고 령(行 長興庫 令), 보은현감, 제주목사를 지내고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公은 총명한 자질로 학문을 겸하여 집에서는 수신제가(修身齊家)하는 공부를 하고 향리 (鄕里)에서는 충신(忠信)의 행실을 하였다. 나이 팔순에 가 까워서도 기력이 강건(康健)하였기 때문에 사림(士林)의 중 망(重望)을받았다. 장자 세준(世俊)은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府使)와 이조참 판을 지냈으며 후손들은 라계파로 세계를 이룬다. 차자 세건 (世健)은 훈련원부정 통훈대부 어모장군 행 울산부사를 지 내고보은파(報恩派)이다. 라계파 세준의 아들 휘 충배(忠陪)는 진사(進士)로 영릉 (英陵,세종과 소헌왕후의 능) 참봉을 지냈으며, 딸은 중종의 비(妃)경빈박씨이다. 경빈 박씨의 모함이 드러난 이후 인종과 명종은 경빈박씨 와복성군을복권하였다. 보은파(報恩派, 휘 세건)은 충관(忠寬)·충홍(忠弘) 형제 를 두었는데 장자 충관((忠寬)은 학생이고,차자 충홍(忠弘) 은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오위도총부관이고, 그의 아들 현능 (賢能)은 통례원 인의(引儀)인데 후사가 없어 판서공(휘 사 화, 남양파)의 증손 치경(致敬)의 삼남 휘 정진(廷璡)을 후 사로 이었다. 휘 정진(廷璡)은 무과에 급제하여 行 통훈대부 금정도찰방을 지내고 통정대부 사헌부집의에 증직되었다. 어려서부터 부모를 여의고 출계하여 보은의 고봉(孤峰)에서 살았기 때문에 인의공(引儀公, 휘 현능)께서 또한 지거(贄 居,움직이지 않고 오래 거주)하였다. 집이 심히 부유(富裕) 하니 공(公)이 그 자산을 의지하고 희시(喜施,베풀기를 좋아 함)하여 사친(私親)인 형제매질(兄弟妹姪)에게 함께하여 생업을 돕는데 성의를 다하였다. 후부모(后父母·繼父)께서 돌아가심에 복을 마치고 형제가 멀리 떨어져 삶으로 마음이 심히 즐겁지 않아 드디어 보은에서 남양으로 이거하여 조석 으로즐겁게지냈다. 만년에 아들을 두었는데 이분이 신창현감 휘 찬선(纘先) 으로 호는 경은당(慶恩堂)이다.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증직되었다. 우암 송시열 선생과는 내외종 형 제로 우암문하에서 배웠다.그의 아들 휘 상호(商皓)또한 우 암선생문하이고대사헌이다. 판서공은 세종조(世宗朝)에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을 지낸 휘 사화(士華)이다. 권람의 사위이기도 한 부정공은 의 영고 직장, 공조정랑, 안산군수, 풍덕군수, 평산부사 등으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등 애민정신으로 가득했다. 자헌 대부 이조참판, 호조판서 겸 지의금부수에 증직되어 후손들 은 판서공파하고 하고 한편으로는 세거지 남양을 따 남양파 라 고 도 한 다 . 아 들 4 형 제 중 첫 째 인 세 훈 (世 勳 ) 의 호 는 송 촌 (松村)으로 중종(中宗)때 현량과(賢良科)에 천거되었으나 벼슬에 뜻을 버리고, 향리 남양(南陽)으로 돌아가 후진양성 에 진력하였으며, 기묘사화 후 복관되어 통훈대부 제용감 첨 정이고, 인종 때 통정대부 이조참의로 증직되었다. 8살에 서 울에서 살고 있는 주자동의 효자로 일찍 소문나서 아름답고 감동적인 행실이 전 해진다.국조인물지에 기록되고 기묘 삭관 전 관직은 상주판관 으로 상주읍지에 나 타난다. 중씨 문간공 (휘 세후)와 함께 남 양의 안곡서원에 배 향되었으며 후손들은 公의 호를 따 송촌파 (松村派)라 한다. 송촌공은 아들 칠형 제를 두었는데 장남 충좌(忠左)의 손자 정진(廷璡,찰방)이 보은파 부정공(휘 현 능)의 뒤를 이었고, 셋째 휘 충보(忠輔)는 종조 휘 윤창(允 昌)의 손자 휘 세언(世彦)의 뒤를 이었고, 다섯째 충익(忠 翼 )은 중 씨 문 간 공 (휘 세 희 )의 뒤 를 잇 는 등 현 재 상 암 공 의 주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송촌공의 장자 휘 충좌(忠左) 는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로 해평파, 차남 휘 충우(忠佑)는 일찍이 진사가 되었는데 조졸하여 증 통정대부승정원 좌승 지에 증직되고 비전파라 한다. 여섯째 휘 충인(忠隣)은 가선 대부 오위도총부도총관으로 도총공파, 일곱째 휘 충경(忠 卿)은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가선대부 호조참판 동지의 금부사에증직되어참판공파로세계를이어온다. 참판공은 아들 삼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휘 치운(致澐)은 1 573년(癸酉) 4월 18일 가선대부 형조참판 의금부사에 증직 되고 송전파,차남 휘 치문(致雯)은 가선대부 어모장군 행 오 위도총부 경력에 증직되고 판문파, 삼남 휘 치림(致霖)은 통 정대부 장례원판결사에 증직되고 양근파로 각각 세계를 이 룬다. 판서공(남양파, 휘 사화)의 차남 휘 세도(世燾)는 무과에 올라 습독(習讀)을 지내 습독공파라 한다. 습독공의 아들 휘 충정(忠貞)은 장사랑, 손자 휘 치서(致瑞)는 무과에 급제하 여훈련원첨정을지냈다. 판서공의 삼남 휘 세희(世熹)의 號는 도원재(道源齋),151 0년(庚午)에 진사시 1등 5인에 합격하고 1514년(甲戌)에 문 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홍문관 전한으로 호당(湖堂)에 뽑 혔고,홍문관수찬,교리,이조좌랑,충청도도사,사헌부지평븡 직강·헌납, 병조정랑·검상·사인·응교·지제교·사간, 성균관 사성·전학, 승정원좌승지 재임중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 루되어 강계(江界)로 유배되었다가 배소에서 생을 마쳤다. 인조조에 복권되고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 겸 동지경연춘 추관,성균관사,홍문관 대제학에 증직되었다.현종 무신년(1 668)에 청원건의에 의하여 기묘명현으로 학문 명절이 특별 한 10인에 들어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 성균관 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오위도총부도총관 좌빈객 으로 추증되고 시호 문강(文剛)이 내려졌다. 백씨 송촌공과 같이안곡서원에 배향되었고,운곡공,남포공과함께전남순 천의이천사에배향되었다. 기묘사화는 1519년(중종 14) 11월 남곤·심정·홍경주 등의 재상들에 의해 조광조·김정·김식 등 사림이 화를 입은 사건 으로 중종 즉위 이후 정국을 주 도한 훈구파에 대해 신진 사림 파들이 정계에 진출해 세력을 늘려가면서 갈등을 일으켰다. 특히 사림파들은 중종반정의 공 신 중 공이 없음에도 공신이 된 자 들 을 속 아 내 야 한 다 고 주 장 하고 이를 일부 관철시켰다. 그 러자 훈구파들은 사림파들이 붕 당을 지어 왕권을 위협하고 국 정을 어지럽힌다고 고해 중종은 이를 수용해 사림파들을 숙청했 다. 이후 훈구파가 다시 정계의 중 심 이 되 었 으 나 사 림 의 대 세 는 막을 수 없었다. 조광조는 능주 (綾州)로 귀양가서 사사(賜死) 되었고, 김정·기준(奇遵)·한충 (韓 忠 )·김 식 등 은 귀 양 가 서 사 형당하거나 자결했다. 이밖에 김구(金絿)·박세희(朴世熹)븡박 훈(朴薰)·홍언필(洪彦弼)·이자 (李)·유인숙(柳仁淑) 등 수십 명이 유배·파직을 당해 이들을 기묘명현이라한다. 한편 도원재공(문강공, 휘 세 희)의 후손들은 공(公)의 호를 따 도원재공파 또는 시호를 따 문강공파라고도 하며, 그의 아 들 충익(忠翼, 생부 송촌공 휘 세훈)은 어모장군 광양진 수군절제사이고, 손자 휘 치관(致 寬)은 승의랑 도원찰방으로 순충보조공신에 올라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증직되고 낙평군(洛平君)에 봉해졌으며, 증손 휘 유명(惟明)은 무과급제하여 통정대부 덕원도호부사 오위 장을 지냈다. 公의 영정이 보물 제1489호 지정되고, 2009년 경기도문화재자료 142호로 지정되었다. 인조때 분충정사공 신에 올라 자헌대부공조판서에 증직되고 상원군(商原君)에 봉해졌다. 현손 휘 장원(長源)은 무과에 급제하여 영흥대도호부사로 인조때 정사원종공신으로 가선대부병조참판에 증직되고 상 능군(商陵君), 상능군의 아들 휘 홍보(弘輔)는 자헌대부 호 조판서에 증직되고 상천군(商川君)에 봉해지는 등 일문에서 5대에걸쳐공신과봉군(封君)을받았다. 판서공의 사남 휘 세후(世煦)의 호는 인재(認齋),정암(靜 庵) 조광조(趙光祖)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고 중종(中 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1527년 홍문관 박사, 성균 관 전적, 사헌부 감찰 등을 거쳐 1528년(중종28) 광양현감으 로 부임하여 학문을 장려하고 사마소(司馬所)를 설치하여 유학의 진흥에 진력하였으며, 성 밖에 유당공원(柳塘公園) 을 조성하여 주민들에게 안락한 휴식과 사유의 공간을 제공 하고, 왜적과 해풍의 피해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하여 숲 거리에 수림을 조상하는 등 선정을 베푸신 청백리(淸白吏) 로훗날까지향민들의칭송이자자하였다. 1540년 밀양부사에 부임하여서는 영남루와 동쪽 전각인 능파각을 중수하는데 치적을 세웠으며, 이후 동부승지가 되 어 이듬해 하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56세에 강원도 감 찰사 및 병마수군절도사가 되어 관동지방에 선정을 베풀었 고, 사후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낙성부원군(洛 城府院君)으로 추증되었으며,광양 봉양사에 신재 최산두 선 생과 함께 배향되었다. 후손들은 공(公)의 호를 따 인재공파 (認齋公派)라 한다. 인재공의 장남 휘 충은(忠誾)은 감찰(監察)을 지냈고, 차 남 휘 충 간 (忠 侃 )의 호 (號 ) 는 남 애 (南 崖 ) , 진 사 시 에 올 라 군 수를 지냈다. 기축년 정여립 사건 때 추충분의 병기협책공신 에올라호조판서상산군(商山君)에봉해졌다. 상주파는 상암공의 차남 휘 윤창(允昌)을 파조로 한다. 공 (公)은 세종 11년(1429) 문과에 급제하여 보문각대제학에 올랐으며 지명을 따 상주파로 세계를 이어온다.아들 둘을 두 었는데 장남 휘 성지(成枝)는 병절교위로 상주파를 잇고 있 으며,차남 휘 승수(承壽)는 학생으로 충북 옥천 청산면 세거 지를따청산백운파라한다. 서흥파는 상암공의 셋째 아들로 휘는 문창(文昌)으로 황 해도 서흥으로 이주하면서 서흥파라 한다. 그리고 아들 대충 (大 忠 )의 장 자 휘 성 의 ( 誠 義 )는 서 흥 검 박 동 , 차 남 성 민 (成 敏)은 서흥 원동파라 한다. 그러나 남북으로 나누어진 상황 에교류가끊겼다. 상주박씨는 경명왕의 아들 휘 언창(彦昌)이 사벌대군(沙 伐大君)에 봉해지고, 사벌주(沙伐州 : 지금의 상주)를 식읍 (食邑)으로하사(下賜)받아문호(門戶)가열리게되었다. 그리고 상암공의 묘소가 경북 상주군 공성면 오광리 산 13 번지에 소재하고 재사(齋舍) 영모재(永慕齋) 또한 오광리 3 83-1번지에 있으며, 손자 휘 사영(士英)과 증손 휘 세준(世 俊)·세건(世健)의 묘는 상주시 모서면 석산리에 있어 상주 지역이 세거지 임을 알 수 있다. 이후 후손들은 사벌주 지금 의 상 주 를 거 점 으 로 세 거 한 후 고 려 가 개국되자 관직을 따라 이동하게된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지은 찰방공(휘 정진)의 묘표를 보면 보은으로부터 태어난 남양으로 이거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 다. 이는 참판공파(라계파·보은파)와 남양파 인재공파 등이 관직을따라이거하였음을알수있는대목이다. 상 암 공 후 예 의 주 요 집 성 촌 을 보 면 참 판 공 后 라 계 파 (휘 세준)는 상주시 모서면, 보은파는 충북 보은군 보은읍, 판서 공파(남양파) 후(后) 송촌공파(휘 세훈)은 경기도 남양지역 현 서신면 상안리에 큰 집성촌을 이룬다. 송촌공 후 해평파 (휘 충좌),비전파(휘 충우),도촌공파(휘 충인)후손들은 상 안리 비우물 마을과 상안1리에 세거하고,참판공파(휘 충경) 의 후예 송정파(휘 치운)는 상안1리, 판문파(휘 치문)는 화 성시 비봉면 양노리, 양근파(휘 치림)은 경기도 양평군 양근 리로이거하였다. 습독공파(휘 세도)는 서신면 송교리, 도원재공파(휘 세 희)는 서신면 용두리 목안마을, 인재공(휘 세후) 장남 휘 충 은의 후손들은 경기 화성, 차남 휘 충간의 후손들은 경남 양 산에 거주한다.상주파(휘 윤창)의 장남 휘 성지의 후손은 상 주시 서문동, 차남 휘 승수의 후손은 충북 옥천군 청산면 백 운마을, 서흥파(휘 문창)의 후손들은 황해도 서흥 검박동과 원동으로이주각각집성촌을이룬다. 상암공(휘 안의)은 엄격한 절제(節 制)의 소유자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후손들은 선조의 유지를 받들 듯 공명 (功名)과 영진(榮進)을 멀리하고 애민 정신이 가득한 삶으로 대변한다. 불의 와 타협하지 않아 기묘사화를 피해가 지 못해 많은 화를 입기도 하였다.특히 송촌공(휘 세훈), 도원재공(휘 세희), 인재공(휘 세후)을 비롯한 형제분의 높은학덕과청백리정신은돋보인다. 상주(상산)박씨 대종회와 사벌국왕 제향, 방계조인 전남 순천의 판서공 종중행사 등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상암공 종 중의 공순 회장(상암공 17대손)은 시대의 변화 속에 위선 사 업에도 많은 변화가 오는 것 같다며 종원들이 관심을 갖고 적 극적으로 참여해 주기를 당부한다. 이어 젊은 청소년들이 스 스로 종중에 찾아 올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서원 을개방하여강학의공간으로활용할방침이라고밝혔다. 뱚파조별약사 상주(상산)박씨상암공파 뱚상암공파약사 상암공묘(墓):경북 상주시공성면오광리산13 뱚▶참판공파(參判公派) 뱚▶판서공파(判書公派·南陽派) 안곡서원(화성시향토문화재1호):화성시 서신면상안리585 박유명존영(수원박물관 소장) 박세후존영(광양봉양사배향) 뱚▶상주파(尙州派) 뱚▶서흥파(瑞興派) 뱚집성촌 경기도화성시서신면상안리전경. 뱚맺음말 박공순회장 상주(상산)박씨는 신라(新羅)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아들인 언창(彦昌)이 사벌대군(沙伐大君)에 봉해지고, 사벌주(沙伐州 : 지금의 상주)를 식읍(食邑)으로 하사 (下賜)받아 문호(門戶)가 열리게 되었다. 아들 욱(昱)이 고려조에서 개국공신(開國功臣)에 책록되고 예부 상서 (禮部尙書)와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낸 것을 시작으 로 후손들이 벼슬길에 나가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졌 으며. 사벌대군의10世에 이르러 휘 원정(元挺)은 첨의 정승(僉議政丞)아들3형제를두었는데장남전은봉상 대부전법총랑(奉常大夫典法摠郞)차남여는삼중대광 보국숭록대부첨의찬성사(三重大匡 輔國崇祿大夫僉議 贊成事)에 상산부원군(商山府院君)에 봉해지고, 삼남 영(瑛)은 고려부정(高麗 副正)을 역임하면서 크게 번성 하 기 에 이 르 러 장 남 휘 전 은 총 랑 공파 차 남 휘 여는 찬 성공파로 분파된다. 이어 총랑공의 아들 휘 문로(文老) 는판사재시사(判事宰寺事)에올라의정부우참찬에증 직되고 아들 오형제를 두었는데 안충(安忠), 안의(安 義), 안례(安禮), 안지(安智), 안신(安信)으로 이중 장남 안충(安忠)은 실전(失傳)이고, 차남 안의(安義)는 상암 공파(商巖公派), 삼남 안례(安禮)는 판서공파(判書公 派), 사남 안지(安智)는 예판공파(禮判公派), 오남 안신 (安信)은 정숙공파(貞肅公派)로 분파되어 이번호에서 는 경기 화성지역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상암공파(商 巖公派)를소개해본다. 한편 총랑공(휘 전)의차남 문유(文有)는 판원사공파(判 院事公派)로세계를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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