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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6월30일 일요일 7 (제150호) 특 집 밀성박씨행산공파대종회는1997년정축보수보이후20여년이경과함에따라최근새롭게 개발된전자보서시스템을활용하여신간대동보를발간하기로하고2018년11월부터인터넷 및우편등으로수단접 수를진행중에있습니다.정해진수보기간동안에가능한많은현종님들이동참하여소중한 우리의혈통에대한근본을올바르게하고가보(家寶)로자손만대보전될수있도록적극적인 협조를당부드립니다. - 아 래 - ○수단접수기한:2019년7월30일 ○수단접수처: ▲인터넷:홈페이지www.hengsan.co.kr 포털사이트(네이버,다음)“행산원”검색 ▲우편:경남거제시아주동해와루106동606호,박행산 ▲문의:010-9689-2525, 사무실055-731-1206,팩스055-731-1214,행산대동정보원 ※수단이접수되지않은종원은전자대동보에등재되지않으며,추후등재시수단비용이점차증액될예정이오니가급적정하 여진기한내에완료될수있도록협조바랍니다. 봠수단유사명단:◆편수위원장박수옥(010-7402-6572) ◆찬성사지파박수경(010-7918-7567),박규 석(010-9370-2358),박진흠(010-3541-2344),박정현(010-4331-9093) ◆광산지파박정웅(010-8561-27 47),박을수(010-3572-333 5) ◆풍산지파박재화(010-2557-9317),박인천(010-3808-1909) ◆전주지파박찬우(010-8642-7276), 박철균(010-3251-7489)◆소윤공지파박봉호(010-4655-1956),박광희 (010-4420-6822)◆진사공지파 박경무(010-4952-1153),박 종대(010-7276-0607)◆대구광역시및경상북도일원박경무(010-3829-9809) ※각 소문중 별수단유사가정해지지않은종중은빠른 기간내에유사를추대하여수보/발간에도움이되도록 협조하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아울러,주변에 계시는 행산공파 일가분들에게 신간대동보발간 소식을널리알려 주시기바랍니다. 밀성박씨 충정공밀성부원군행산공파대동보 편수위원장박 수 옥 밀성박씨 행산공파(杏山公派) 신간대동보 편찬안내 ▶ 충 현 공 신 도 비 송충현공 박문수 선생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은 면암(勉 菴) 최익현(崔益鉉)의 현손(玄孫) 국립 서울대학교 교수, 국 회의원, 독립기념관 관장, 성균관장, 문학박사 최창규(崔昌 圭)가 짓고 옥천(玉川人)중광(重光)조광만(趙光萬)이 음기 (陰記) 썼으며 전자(篆字) 및 전면대자(全面大字)는 십구세 손 윤식(允植)이써서전북남원시 수지면 호곡리(好谷里)59 3번지에세웠다. △충효정려각 ○열녀창녕조씨 열녀 창녕조씨는 정유재란 때 전사한 행 한성판윤(漢城判 尹)증통정대부(通政大夫)이조참의(吏曹參議)인 초곡공(草 谷公)휘계성(繼成)부인이다. 휘 계성(繼成)의 자(字) 而述(이술) 호(號) 草谷(초곡)으 로 명종(明宗) 계축(癸丑) 1553年 남원 수지면(水旨面) 남창 리(南倉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큰 뜻을 품고 발분(發 憤)하셨으며 성품이 명민(明敏)하고 일처리를 과단성(果斷 性) 있게 하였다. 성리학(性理學)에 마음을 쓰고 예(禮)로써 몸을 검속(檢束)하셨는데 전 참봉(前핫奉)으로 임진왜란(壬 辰倭亂)이 일어나 왜적(倭賊)들이 날뛴다는 소식을 듣고는 집안재산을팔아병기(兵器)를장만해곧장서울로올라갔는 데 친환(親患) 소식을 듣고 돌아와 병구완을 하면서 동생 승 성(承成)을 시켜 의병장(義兵將) 고득뢰(高得賚)의 막하로 군량을 실어가 그 지휘(指揮)를 받도록 하였다. 아버지가 돌 아가시자 3년 동안 시묘(侍墓)살이를 하여 향리에서 효자(孝 子)라는 칭찬을 받았다. 충장공(忠莊公) 권율(權慄)과 인척 (姻戚) 관계여서 사생(死生)을 함께하자는 결의(結義)를 맺 었는데 권율의 행주대첩(幸州大捷) 시(時) 그 이면(裏面)에 는 공의 도움이 많았다. 이런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자 특별히 한성판관(漢城判官)을 제수하였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는 집안 하인과 이웃 장정(壯丁)3천여 명을 이끌고 싸움터로 가니 군성(軍聲)이 크게 떨치게 되었다. 구례(求禮) 석주(石 柱)와 남원(南原)산동(山洞)등지에서 연달아 승리하였는데 남원성이 왜적에게 포위되어 위급해지자 남원부사(南原府 使) 임현(任鉉)이 공에게 와서 구원(救援)해 주기를 청하였 다. 그래서 공은 군사를 이동시키다가 율치(栗峙)에서 크게 싸워 무수한 왜적을 베었다. 그러나 화살이 다하고 외부(外 部)의 원조도 끊어져 고전하다가 적탄에 맞아 순절(殉節)하 니 이 날은 진주성(晋州城)이 적에게 함락되던 날이다. 공의 생졸월일(生卒月日)은 자세하지 않으며 실제의 사적은 븮해동 충의록븯(海東忠義錄)·븮호남절의록븯(湖南節義錄)븡븮용성지 븯(龍城誌) 등에 실려 있다. 정조(正祖) 을묘(乙卯) 서기(西 紀) 1795年에 사당(祠堂)을 짓고 익종(翼宗) 임진(壬辰) 서 기(西紀) 1832年 나주(羅州) 충장사(忠莊祠)에 배향(配享) 되었다. 고종(高宗) 신묘(辛卯) 서기(西紀) 1891年에 통정대 부(通政大夫)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으며 갑 진(甲辰) 서기(西紀) 1904年에 금산(錦山) 금곡단(金谷壇) 에배향되었으며후에남원충렬사(忠烈祠)에배향되었다. 배(配) 숙부인(淑夫人) 창녕조씨(昌寧曺氏)는 공께서 돌 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따라서 자결(自決)하였다. 면암(勉 菴)참판(參判)최익현(崔益鉉)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2007年 남원시 수지면 산정리 산1번지 석치 제각 서쪽 해좌 (亥坐)로 이장.제각(祭閣)오른쪽에 신도비(神道碑)가 서 있 으며 묘전에는 상석과 비석, 장군석(將軍石), 사자석, 석등, 동자석,둘레석,배숙부인창녕조씨열녀비가설치되어있다 ○ 효 자 박 동 형 휘 원유의 장자 子 동형(東 刺)의 자(字)는 태언(台彦) 호 (號)는 불변당(不變堂)으로 영조(英祖) 기사(己巳) 서기(西 紀) 1749年 남원시 수지면 호곡리(好谷里) 274번지에서 태어 났다.자질(資質)이 아름답고 성품이 관대(寬大)하였다.힘써 학문(學問)을 하시고 집안을 잘 다스렸으며 어버이를 섬기는 데는 뜻을 받들고 음식 봉양에 힘쓰셨다. 선조(先祖)의 숨은 덕(德)을 천양(闡揚)하기에 힘쓰시고 부모의 상(喪)에는 3년 동안 시묘(侍墓)를 하는 등 효성(孝誠)을 다하였다. 삼산재 (三山齋) 김이안(金履安) 선생이 석실서원(石室書院)에서 학문을 강의한다는 소식을 듣고 천리길을 달려가 배우면서 여러 차례 스승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다. 스승의 상을 당해서 도1년동안여묘(廬墓)살이를하는등여러차례조정에천거 (薦擧)되셨으나 그럴수록 더욱 자취를 감추었다. 사후(死後) 헌종(憲宗)己酉(1849)에 사림(士林)의 건의에 따라 도신(道 臣)이 조정에특별히천거하여 조봉대부(朝奉大夫)동몽교관 (童蒙敎官)에 추증(追贈)되고, 철종(哲宗) 辛亥(1851)에 또 정려(旌閭)를내렸다. ○열녀휘태현(泰鉉)의부인능성구씨 휘 태현(泰鉉)의 자(字) 덕삼 (德三) 순조(純祖) 1814年 갑술 (甲戌)生이다. 헌종(憲宗) 1849 年 기유(己酉) 4月16日卒 하였 다.부인 능성구씨(綾城具氏)의 택호(宅號) 김제(金堤), 아버지 는 구홍(具洪)으로 팔곡(八谷) 구사맹(具思孟)의 후손이다. 순 조(純祖) 1821年 신사(辛巳)生 어머님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규 범(閨範)을 잘 갖추셨다. 효도로 써 시부모를 모시고 남편을 잘 받들었으며 남편의 오랜 병환 에 허벅지 살을 베어 약을 달이기고 산신기도(山神祈禱)하기 를 4년이나 하셨다. 마침내 돌아가시니 섭섭함이 없도록 예 (禮)를 다하고 장사 전날 따라 자결하셨다. 1849年 기유(己 酉)5月17日卒享年28歲이다. 고종(高宗) 1891年 신묘(辛卯) 효열(孝烈)과 절의(節義) 로나라에보고하니정려(旌閭)를특별히내렸다. △남원죽산박씨종가 호곡리의 내호곡 홈실마을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전통가옥 으로, 2000년 6월 23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80호로 지정 되었다. 고려말의 충신으로 두문동(杜門洞) 72현의 영수인 충현공 (忠顯公) 박문수(朴門壽) 선생을 배향하는 부조묘(不 튐廟) 와 이 웃 하 여 있 다 . 이 가옥은 죽산박씨의 종가로 건립된 건물로, 안채는 1841 년(헌종 7)에 건립되었으며, 사랑채는 이웃한 남원몽심재(南 原蒙心齋븡중요민속자료 제149호)의 건축연대와 비슷한 1758 년(영조34)경으로추정된다. 홈실마을은 죽산박씨 종가 등 고가(古家)가 산의 지세를 따 라 자연스럽게 선형으로 배치되어 있는 죽산박씨 집성촌이다. 종가는 안채 1동,사랑채 1동으로 되어 있는데,안채는 븮ㄷ자븯형 팔작지붕이고,사랑채는 정면 4칸,측면 1칸 규모이다.종가 일 원의 전체 면적은 2,872㎡로, 몽심재와 담장을 사이에 두고 죽 산박씨종가와충현공을배향하는부조묘가자리하고있다. 근래에 몇 채의 가옥들이 새롭게 신축 또는 개조되어 마을 의 분위기를 해치고 있지만, 그래도 전통마을의 옛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다. 종가는 20대 종손인 상진 현종이 거주하며 관 리하고 있으며, 조선시대의 전통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는 목 조 가옥으로, 가옥의 역사와 공간의 구성, 구조 법식 등으로 보아당시양반가옥의면목을살필수있는중요한자료이다. △ 몽 심 재 남원 몽심재 고택은 연당(蓮堂)박동식(東植)이 1753~1830 년사이지어선대(先代)를정성껏받들고어버이를효성으로 모셨다.전라북도상류층살림집의전형을보여주는호화로운 건축물로서 문화재적인 가치가 높다.1984년 1월 10일 국가민 속문화재제149호로지정되었다. 집 은 전 체 로 보 아 트 인 븮ㅁ자 븯형 이 다 . 급 한 산 록 (山 麓 ) 의 경 사를 감안하여 안채와 사랑, 중문채를 따로 설치하여서 높이 가 서로 다르게 되었다.대문채가 따로 있다.대문을 들어서면 상당히넓은마당이다. 사랑채와중문이높은축대위에자리잡고있다. 축대는 무사석형(武砂石形)과 산석(山石)을 적절히 혼합 사용하여서그모양이의젓하고흥미롭다.중문으로올라가는 석계(石階)는 제법 장엄한데 높은 축대에 쉽게 올라갈 수 있 도록각도를조정하였다.중문은내외벽이있고2칸이다.중문 왼쪽에 당호(堂號)가 몽심재(夢心齋)인 팔작기와 지붕의 사 랑채가 있다. 장대석을 다듬어 높직하게 댓돌을 구성하고 집 을 앉혔다. 기둥은 팔각형으로 다듬었다. 앞퇴의 툇마루는 기 둥에서 귀틀을 두어 마감하는 것이나 이집에서는 특이하게 서쪽끝1칸의전퇴마루를한단높여난간을둘렀다. 안채는 고졸(古拙)한 기법을 보이며 븮ㅁ자븯형 중에서 좌우 날개는 앞쪽 끝부분을 내루(內樓)처럼 높여 그 아래 공간을 외양간으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높직하게 하였다. 안채의 중 심간은 우물마루인 대청이다.앞퇴가 열린 집이어서 고주간 (高柱間)에 전벽(前壁)을 들였는데 대청 앞쪽에는 분합문을 설치하였다. 대청 앞쪽을 폐쇄하는 유형이 이 지역에도 분포 되고 있는 사례를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다. 븮ㅁ자븯형 왼쪽 날 개끝에가적지붕을한부설건물이있고또별채가더있다.대 부분원형을잘보존하고있으며현재후손인박인기(朴仁基) 가 살고 있다. 고방채 3칸, 서쪽광 3칸, [정면 3칸, 측면 2칸], 중대문 4칸, 행랑채 4칸, 마판채 3칸, 문간채 5칸이다. 문간채 는 원래 7칸이었으나 현재는 5칸만 남아 있고, 동쪽광 3칸은 최근에철거되었다. 조선시대전라북도지역상류층인사들의살림집으로전형 적인 예이다. 평면 배치상 특이한 점은 안채 서쪽에 마루와 방 을 두어 가정주부의 생활이 편리하도록 배려하였고 대청 동쪽 에도 도장을 설치하고 건넌방을 아래쪽 공간을 보다 확대하는 등 치밀한 배려를 볼 수 있다.사랑채는 매우 호화롭게 지어져 방이 일곱 개에 모두 팔각기둥을 사용한 희귀한 예를 볼 수 있 다. 아랫사람이 거주하는 문간채 동쪽에 대청 한 칸을 들인 것 은 다 른 상 류 층 가 옥 에 서 는 볼 수 없 는 하 층 민 에 대 한 배 려 라 고 볼 수 있다.이러한 의미에서 조선시대 주거 건축물 연구 자 료로서의 가치가 있고, 건축물 또한 주변 경관과 자연스럽게 잘어우러져고풍스러운맛과그윽한정취를느낄수있다. △몽심재후예 몽심재의 1대 주인은 연당 박동식으로 송암 박문수 선생의 14대손이다. 그리고 2대주인은 승지를 지낸 휘 주현(周鉉)으 로경술(庚戌)명현(明賢)이자지사(志士)이다. 경술년 일본의 국권 침탈 직전 일제는 정지 작업의 일환으 로조선각지에민회(民會)를만들고남원의유력인사인박주 현을 회장으로 추대했다.그러나 그는 불응했고,그 이유로 심 한고문을당하고후유증으로몇달있다가죽는다. 박주현이죽은후얼마있다가한일합방이되었는데이번에 는 박주현의 사돈으로 곡성에 살고 있던 소송 정재건(1843~1 910)이 자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몽심재의 3대 주인은 박주현의 장남인 박해창(1876~1933) 이다. 박해창은 순절한 정재건의 사위이기도 하다. 품계가 높 지는 않지만 학문에 자질이 있는 선비들이 맡는 직책인 비서 감랑홍문관시강을지냈다.호음실에서는그를보통비랑공이 라고 부른다.고조,증조 때부터 근검절약하여 모은 재산이 비 랑공 때에 이르러 드디어 만석이 되어 남원의 3대 만석꾼에 들어간다.이때가몽심재인심의절정기였다. 만석꾼박해창은2남2녀를두었는데장남은일제때동경대 학을 나왔으며, 차남이 바로 원불교 원로인 상산 박장식 교무 이다. 상산은 경성법학전문학교(현 서울법대 전신)를 나와서 개인사업을 하다가 일생의 스승인 소태산(원불교 창시자)을 만난다. 상산은 소태산의 인품과 경륜에 깊은 감명을 받고 31 세때 원불교 출가를 결심한다. 당대의 재벌인 만석꾼의 아들 이다 경성법전을 나온 인재가 도를 닦겠다고 출가를 감행하 면서많은사람들이놀라지않을수없었다. 법학을 전공한 상산은 원불교에 들어가서 원불교의 헌법이 라 할 수 있는 교헌(敎憲)을 제정하는데 주력하였고, 상식에 바탕한원칙을지키는삶을살았다. 몽심재의 둘째 아들 상산의 원불교 출가는 호음실의 젊은 사람들에게는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 뒤를 이어 죽산박씨 가 운데 40여 명이 원불교 교무를 지원한 것이다. 상산은 유산으 로 받 은 자 기 집 (몽 심 재 옆 건 물 )을 원 불 교 교 당 으 로 개 조 했 고, 이 교당에서 교무들이 줄줄이 배출되었다. 현재 대표적인 교무는한국의마더테레사로일컫는박청수이다. ▶관련기사10면 죽산박씨호음실문중은양반가로서사회적책임을다한문 중으로 현대판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Oblige)대표적 이라할수있다. 1400년 남원이 입향하여 수지면 초리에서 300여년을 살다 가 옆 동네인 호곡리로 집단 이주는 1700년대 초반으로 호음 실에 이사 온 뒤에 집안을 비약적으로 일으키는 사건이 일어 나는데,그것은명당에얽힌이야기다. 박원유라는 인물이 있다. 호음실에 처음 들어온 박시채의 당질이자 종손이다. 집안의 문질로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박 시채의 집에서 살았다. 박원유는 해마다 찾아오는 탁발승을 절대 빈손으로 보내지 않고 하다못해 냉수 한 그릇이라도 공 양했다. 그러다 영조14년(1738) 그가 열두 살 되던 해 가을에 이 스님이 또 찾아왔다.스님은 “그대의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묘 자리는 염려말라”며 돌아갔는데, 그해 12월 2일 아침에 또 찾아와“간밤에 어머니가 별세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그리 고 지금 건넛산 어떤 곳에 가면 그곳만 눈이 녹아 있을터이니 그곳에 장사하면 후일 홍삼백팔(紅三白八)이 나고 자손이 흥 성하며부자로살리라예언하고홀연히떠났다. 박원유는 어려운 가운데 간신히 그곳에 어머니 묘를 썼는 데, 스님의 예언대로 증손·현손대에 벼슬이 났다. 문과(대과 라고도 하고 붉은 패를 주어 홍패라고 한다.) 급제 3명, 소과 (진사이니 백패를 준다) 8명을 배출하여 문중에 벼슬이 끊이 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만석을 누린 거부(몽심재)가 나왔고, 사촌·육촌 간같은항렬이 82명이나번창하였다.이를보고 세 상사람들은 죽산박씨 집안에 명당바람이 났다고 탄복했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다르게 해석하고 싶다. 적선지가 필유여경 (積善之家必有餘慶)즉 선을쌓은 집안에는반드시남는경사 가있다라고말할수있겠다. 호음실 문중에서는 파조 충현공(휘 문수)은 불사이군의 충 절을 지켰고, 정유재란에 초곡공의 살신성인의 정신, 뒤이어 효자효부를 배출하는 등 충절과 청백으로 빛나는 삼강문의 대표적인가문이라할수있다. 뱚▶6면에서이어짐 몽심재(지난 달 26일 밀성박씨전국청년회원들이 찾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뱚맺음말 종택과 몽심재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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