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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6월30일 일요일 6 (제150호) 특집 죽산박씨(竹山朴氏)는 경명왕(景明王)의 아들(王子)인 죽 성대군(竹城大君) 휘 언립(彦立)으로부터 문호(門戶)가 열 리게 되었다.죽성대군의 아들 기오(奇悟)가 왕건(王建)을 도 와 고려창업(高麗創業)에 공(功)을 세우고 태조(太祖)때 삼 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태보(三重大匡太 保)에 올라 죽주백(竹州伯)에 봉해지고 식읍(食邑)으로 죽산 (竹山)을 하사(下賜)받아 후손들이 죽산을 본관(本貫)으로 삼게되었다. 죽주백(竹州伯)의 5세 영후(永侯)의 장남 정유와 차남 정 혁에 이르러 각각 장남은 충질공파(忠質公派 諱 挺 찮), 차남 은소경공파(少卿公派諱挺奕)로 분파되었다. 소경공의 현손에 이르러 다시 판서공파(휘 暉)와 찬성공파 (훤 暄)로 판서공파에서는 문광공파, 태복경공파로 문광공파 아들인 문강공파에서는 별장공파, 제학공파, 충현공파로, 태 복경공파에서는 목사공파, 총제공파, 문강공파에서는 직제학 공파, 연흥군파 좌랑공파, 전서공파 대사헌공파로 분파되었 다.연흥군파에서문헌공파,문정공파가분파되었다. 충현공파는 문강공의 여섯째 아들인 휘 문수(門壽)公을 파 조로 한다. 1342년에 태어난 선생의 호는 송암(松菴), 고려 수 성보조공신(輸誠輔祚功臣)가정대부(嘉靖大夫)중추원사 도 평의사 찬성사 우정승(中樞院事 都評議使 贊成事 右政丞), 초휘(初諱)는 문주(文柱)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키기 위하여 두문동으로 들어간 두문동 현인의 영수(領首) 이다. 뷺만수산 배록동에서 고사리를 캐고 캐네 아침에도 캐고 저 녁에도 캐지만 그 누구와 함께 먹을까? 아 고죽군의 두 아들 아뷻이 시(詩)는 선생께서 만수산에 들어가 문을 닫고 절의를 지키다가 포은 정몽주 선생이 선죽교(善竹橋)에서 흉변(凶 變)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평일의 큰 감회(感懷)를 금치 못 하여 지은 것으로 대개 조석(朝夕)으로 고사리를 캐 함께 먹 을사람이없게된심정을나타낸것이다. 헌종 1년 을미(1835년)에 불사이군충(不事二君忠)이요 행 견중외왈현(行見中外曰顯)이라 하여 충현(忠顯)이라는 시호 교지가하사되어공(公)의시호를따충현공파고세계를이루 었으며, 현종2년 병신(1836)에 고려충신 교지와 부조묘(不튐 廟)를 내려 만세까지 대대로 선생의 향화가 끊어지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죽산박씨 남원 입향은 1400년도 지금으로부터 619년 전으 로입향조는충현공의손자휘자량(子良)이다. 충현공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첫째는 휘 총(叢)이고, 둘째 는 휘 포(苞)이다.장남 총(叢)은 정순대부(正順大夫)밀직사 지신사 겸 판전의시사(密直司知申事兼判典儀寺事)를 지냈 다.학문(學問)과 덕망(德望),충절심(忠節心)이 뛰어나 세상 사람들이 모두 흠앙(欽仰)하여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학 문을 좋아하고 지조(志操)를 숭상한다고 허여(許與)하였다. 태조(太祖)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할 때 계책을 도와 위왕(僞王) 신우(辛禑:고려(高麗) 우왕(禑王)를 폐위 (廢位)시키고 공양왕(恭讓王)을 세웠기 때문에 그 훈로(勳 勞)와 충렬(忠烈)이 븮고려사븯(高麗史)에 보인다. 조선 태조 (太祖)의 건국이 실로 이 회군에서 말미암은 것인데 태조가 즉위(卽位)하였을 때는 공께서 이미돌아가신후였다.태조께 서 공의 충의심을 생각하여 일등공신(一等功臣)으로 특별히 공신도감(功臣都監)에기록하였다. 차남 포(苞)는 고려(高麗)때 진사(進士)로 전의녹사(典儀 錄事)를 지내고 조선(朝鮮) 정종(定宗) 때 보국숭록대부(輔 國崇祿大夫)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대장군(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知經 筵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大將軍) 죽성군(竹城君) 개국 이등공신(開國二等功臣) 정사공신이등(靖社功臣二等)에 봉 해졌다. 공께서는 회안대군(懷安大君, 방간 芳幹)에게 뷺사람 들과 교제(交際)를 끊어 죄(罪)를 피해야 합니다뷻라고 경계 하는 말을 하였으나 회안대군이 그 말을 듣지 않았는데 정종 (定宗) 경진(庚辰) 서기(西紀) 1400年에 도리어 제2차 왕자 란(王子亂)때연루되었다. 충현공의 장손자 휘 자량(子良, 휘 총의 子)의 호(號)는 杏 村(행촌),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행 한성판윤(行 漢城判 尹)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지내셨다.덕행(德行)과 문장(文章)에 뛰어나시고 명리(名利)를 마음에 두지 않고 후 진(後進)을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숙부(叔父) 찬성공(贊成公, 휘 苞)께서 화(禍)를 당하던 날 회맹연(會盟 宴,임금이 공신에게 내리는 잔치)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라도 관찰사로 좌천(左遷)되어 부임 3일 만에 벼슬에서 물 러나 처가 인근인 남원(南原) 수지(水旨) 현재의 남창리(南 倉里) 마을 앞 행정들에 은거(隱居)하시어 명륜당(明倫堂) 과화락당(和樂堂)이란집을지어매월초하루면남쪽의선비 들과 함께 경서(經書)의 뜻을 연구하고 인륜(人倫)을 밝히는 데 힘씀으로서 남원일대 죽산박씨의 정착조가 된 것이다. 그 집의남쪽에다손수은행나무를심어단행(壇杏)의뜻을취함 으로 인하여 호(號)로 사용한 것이다.신도비(神道碑)가 있는 데 참판(參判) 여흥(驪興) 민병승(閔丙承)이 명(銘)을 짓고 외손(外孫) 홍문관 시강(弘文館侍講) 정승현(鄭承鉉)이 비 문(碑文)을 쓰고 16세손 홍문관 시강(弘文館侍講) 해창(海 昌)이 전자(篆字)를 썼다. 남원 석봉서원(石峯書院)에 배향 (配享)되었다. 입향조 행촌공은 흠(欽,平山府使),균, 갱, 감 4형제를 두었 는데삼남갱의아들숙분(叔芬)이주손(胄孫)이다. 이후 가족끼리 전염되는 문병(門病)이 돌아 행촌공의 증손 숭조(崇祖)의 장남 세훈(世勳)의 손자 휘 호(虎)는 곡성 고달 면하백곡고새기재로피접하고차남세형(世亨)은인근서당 동으로피접하여살아남았다. 휘 세형의 6세손에 이르러 휘 정광(廷光)은 서당파(書堂 派), 휘 정하(廷夏)는 보은파(報恩派), 휘 정상(廷相)은 쌍산 파(雙山派), 휘 정채(廷采)는 삼척파(三陟派), 휘 정주(廷 柱)는 유암파(柳岩派),휘 정수(廷秀)는 동교동파(銅橋洞派) 로 나뉘어 각자 세거지를 정했으며 다시 휘 정수의 넷째아들 휘 尙倫(상륜)은 순창군 적성종중(淳昌郡 赤城宗中)으로 적 성파(赤城派), 휘 세형의 다섯째 아들 휘 언정(彦貞)의 손자 휘 덕남(德男)은 서봉파(棲鳳派), 둘째손자 이정(以挺)은 장 수파(長水派), 휘 정주(廷柱)의 5세손 휘 경근(景根)은 인근 의 곡성읍 대평리로 이주 곡성파(谷城派), 휘 순근(淳根)은 정읍파(井邑派)로각각나뉘어졌다. 행촌공의 셋째 현손 휘 세영(世榮)은 함양군 백전면 풍천노 씨 고모가(姑母家)로 피접하여 휴천면 목현리로 정착하여 함 양파(咸陽派)를 이루었다. 행촌공의 세 번째 손자 휘 계분(季 芬)은 손자 승평(承評)대(代)에 이르러 전남 광주 흑석면(현 광주광역시 광산구)으로 이주하여 광주파(光州派)가 되고, 휘 호 (虎 )의 또 다 른 현 손 휘 시 우 ( 時 佑 )는 신 정 리 파 (新 亭 里 派), 휘 시좌(時佐) 곡성군 염곡리로 이주 염곡파(念谷派)를 이루었다. 앞서 곡성 고달면 하백곡 고새기재로 피접한 휘 호(虎)의 후손들은 현손대에 이르러 삼형제가 모두 병졸하고 휘 시희 (時熙)의주자(胄子)원유만 8세 때모부인과함께 남원 대산 면 신계리의 외가로 이거하고 당숙(堂叔) 지은공(智隱公) 휘 시채께서는 수지면 호곡리 안홈실로 피접함으로서 홈실 정착 조가 된다.지은공은 숙종(肅宗)계해(癸亥)서기(西紀)1638 年 수지면 남창리에서 태어나 영조(英祖) 무신(戊申) 서기 (西紀) 1728年 이인좌(李麟佐)의 난(亂) 때 의병(義兵)을 일 으킨사실이븮호남절의록븯(湖南節義錄)에 실려있다. 지은공(智隱公, 휘 시채)의 장남 천유는 백부 휘 시웅(時 雄)에 출계하여 두거파(杜巨派), 차남 경유는 삼남 청유 사남 홍유와더불어율전파(栗田派)를이루었다. 한편 외가로 이거한 휘 원유는 16세에 당숙 지은공이 계시 는홈실로와성혼후현종택에서종손으로자리를잡았다. 휘 원유의 장자 子 동형(東 刺)의 자(字)는 태언(台彦) 호 (號)는 불변당(不變堂)으로 영조(英祖) 기사(己巳) 서기(西 紀) 1749年 남원시 수지면 호곡리(好谷里) 274번지에서 태어 났다.자질(資質)이 아름답고 성품이 관대(寬大)하였다.힘써 학문(學問)을 하시고 집안을 잘 다스렸으며 어버이를 섬기는 데는 뜻을 받들고 음식 봉양에 힘쓰셨다. 선조(先祖)의 숨은 덕(德)을 천양(闡揚)하기에 힘쓰시고 부모의 상(喪)에는 3년 동안 시묘(侍墓)를 하는 등 효성(孝誠)을 다하였다. 삼산재 (三山齋) 김이안(金履安) 선생이 석실서원(石室書院)에서 학문을 강의한다는 소식을 듣고 천리길을 달려가 배우면서 여러 차례 스승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다. 스승의 상을 당해서 도1년동안여묘(廬墓)살이를하는등여러차례조정에천거 (薦擧)되셨으나 그럴수록 더욱 자취를 감추었다. 사후(死後) 헌종(憲宗)己酉(1849)에 사림(士林)의 건의에 따라 도신(道 臣)이조정에 특별히 천거하여조봉대부(朝奉大夫)동몽교관 (童蒙敎官)에 추증(追贈)되고, 철종(哲宗) 辛亥(1851)에 또 정려(旌閭)를내렸다. 차자 동식(東植)은 초휘(初諱) 동립(東立), 자(字) 내병 (乃柄) 호(號) 연당(蓮堂)으로 천품(天稟)이 순수하고 학문 에 부지런하였다.몽심재를지어 선대(先代)를 정성껏 받들고 어버이를효성으로모셨다.백형(伯兄)과함께 여묘(廬墓)살 이 3년을 마쳐 세상에서 쌍효(雙孝)라고 일컬었다.삼산재(三 山齋) 김이안(金履安)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성리학 (性理學)을 강론하였는데여러차례 선생의 칭찬을 받으셨다. 자질(子侄)을 모아 초하룻날이면 모여 학문을 강론하니 사우 (士友)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집안에다 못을 파서 연(蓮)을 심어 염계주돈이선생의취미와강절(康節)소옹(邵雍)선생 의 사물을 관찰하는 이치를 즐기시며 연당(蓮堂)이라 호(號) 하였다. 효도와 학문을 겸하여 선비들이 여러 차례 천거하여 가상(嘉尙)하다는 장려를 받았으며, 고종(高宗) 己卯(1879) 에 도신(道臣)이 조정에 보고하여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 부 감찰(司憲府監察)을추증(追贈)하였다. 삼자는 동윤인데 집안에서는 효도(孝道)와 우애(友愛)를 실천하고자질(子侄)을바른 도리로 가르쳤다.이들 삼형제는 각기 종파(宗派)중파(中派)계파(季派)를 이루어 두거파,율 전파와 함께 홈실 죽산박씨 집성촌을 이룬다. 홈실 자손들은 이후 지금까지 600여년 동안 가성(家聲)을 이어오면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으니 정유재란 때 전사한 행 한성판윤(漢城 判尹) 증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참의(吏曹參議)인 초곡공 (草谷公)휘 계성(繼成)은 아우 승성(承成)및 종제(從弟)휘 언정(彦貞)과 함께 삼충(三忠)으로 일컬어져 나주 충장사와 금산금곡단(金谷壇),남원충렬사와만인의총에배향되었다. 배위는 열녀 창녕조씨이다. 이어 효자 조봉대부 동몽교관 휘 동형과 열녀 휘 태현(泰鉉)의 부인 능성구씨께서 정표(旌表) 되어 두 정려각이 건립되어 있으며, 과관(科官)도 혁혁하여 조선시대에만 문과 휘 용호(龍祜)는 문천군수 휘 규서(奎瑞) 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좌승지 좌부승지(承政院左承 旨左副承旨) 장단도호부사(長湍都護府使)를 휘 주현(周鉉) 은 홍문관 시강(弘文館侍講) 휘 해창(海昌)은 비서감랑(秘 書監郞)홍문관(弘文館)시강(侍講)을역임하며명성을떨쳤 으며,다수의생원진사와실증직(實贈職)을배출하였다. 대한민국 수립 후에는 국회의원을 비롯하여 정계 학계 군· 관 계 법 조 계 종 교 계 등 각 분 야 에 서 헌 신 봉공함으로써 명실 공이南鄕의명문이란가성(家聲)을이어오고있다. ▶충현공부조묘 두문동 영수 충현공 박문수 선생의 불천지위 사당이다. 선 생의 초휘(初諱) 文柱(문주) 호(號) 松菴(송암)으로 수성보 조공신(輸誠輔祚功臣)가정대부(嘉靖大夫)중추원사 도평의 사 찬성사 우정승(中樞院事都評議使贊成事右政丞)을 지냈 다.충혜왕(忠惠王) 임오(壬午) 서기(西紀) 1342年에 유복자 (遺腹子)로 출생하였는데 남달리 총명(聰明)하고 문장과 덕 행(德行)이 남의 표준(標準)이 되었다. 벼슬을 하면서는 충 (忠)으로써 임금을 섬기고 도(道)를 좋아하며 의(義)를 행하 였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과 도의(道義)의 교제 를 하였는데 고려(高麗)의 국운(國運)이 다하자 문생(門生) 과 나라의 선비들을 이끌고 만수산(萬壽山)으로 들어가 숨어 살면서 이름을 문수(門壽)로 고쳤는데 이는 만수산 두문동 (杜門洞)에 숨어 살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븮언지록븯(言志 錄)에 영회시(詠懷詩)와 치주가(恥周歌)가 실려 있다. 태조 (太祖) 때 여러 차례 좌의정으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븣 . 2月2日졸(卒) 공의 충절(忠節)에 대해서는 븮송도지븯松都 誌)·븮고려명신록븯(高麗名臣錄)·븮해동충의록븯(海東忠義錄) 및 븮오충전븯(五忠傳)에 실려 있다. 순조(純祖) 辛未(1811) 개 성(開城) 표절사(表節祠)에 주벽(主壁)으로 모시기를 명 (命)하고 또 남원(南原) 석봉서원(石峯書院)에도 모셔졌다. 헌종(憲宗) 병신(丙申)년에 대신(大臣)이 경연(經筵)에서 아룀을 인하여 충현(忠顯)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는데 두 임 금을섬기지않은 것을 충(忠)이라하고행실이 중외(中外)에 드러난 것을 현(顯)이라 한다. 판서(判書) 김이양(金履陽)이 시장(諡狀:시호를 내리는 글)을 짓고 판서(判書) 이조원(李 肇源)이 행장(行狀)을 지었으며 실기(實記)가 세상에 전해오 고 있는데 제주(祭主) 송내희(宋來熙)가 서문(序文)을 짓고 제주 오희상(吳熙常)이 발문(跋文)을 지었다. 갑술(甲戌)년 에 유림(儒林)의 논의에 따라 개성(開城)의 두문동서원(杜門 洞書院)과 장성(長城)의 경현사(景賢祠)에 주벽(主壁)으로 배향(配享)되었다. 배(配) 정경부인(貞敬夫人) 光山金氏(광 산김씨)로 아버지는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문간공 (文簡公) 송당(松堂) 김광재(金光載)이고 조부는 시중(侍 中) 문정공(文正公) 김태현(金台鉉) 증조(曾祖)는 감찰어사 (監察御史) 김수(金須) 외조(外祖)는 평장사(平章事) 안동 (安東) 김승택(金承澤)으로 5月 24日졸(卒)하니 두 분의 묘 소는 모두 실전(失傳)하여 남원시(南原市) 수지면(水旨面) 호곡리(好谷里)593번지에 설단(設壇)하였고,수지면호곡리 271번지에 부조묘(不조廟)를 세워 매년 음력 2月初2日에 치 제(致祭)하고있다. 뱚밀성청년회와 함께한 유적탐방 전북남원시수지면호곡리죽산 박씨충현공파종중 남원시 수지면 호곡리는 원래 남원군(南原郡) 수지면(水旨面) 호음실(虎音室)이었는데, 호음 실(虎音室)이라는 명칭은 마을 지형이 누워 있 는 범 형국이고,호두산(虎頭山)→지금의견두 산(犬頭山)에 범이 많아 범의 울음소리가 들린 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호음실(虎音室)이라 정하였으며, 일명 홈실 이라고도 불렀다. 그 후 남원에서는 자주 큰불이 나고, 개가 짖지 못하 며닭이울지를못하는등호환이끊기지않으매 전라감사였던이서구가 남원을 방문해 내린처 방은 남원 남쪽의호두산에 어려있는 호랑이의 정기가 너무 강하니 이를 눌러야 한다는 것이 다. 그 방법으로 호두산(虎頭山)을 견두산(犬頭 山)으로 개명하고, 호두산의 맥이 내려와서 뭉 친 지역인 호음실(虎音室)을 호음실(好音室)로 바꾸는 것이었다. 그리고 남원 광한루 옆에 돌 로 만든 호랑이 상을 세우로록 했다.또한 이 호 석상(虎石像)은 견두산(犬頭山)을 바라보게 했 다. 1914년 부군면통폐합 때 호두산 전설로 범 호(虎)자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좋을호(好)자로 바꿔 호음실(虎音室)을 호음실(好音室)로 바꾸 었다가 호곡리(虎谷里)가 호곡리(好谷里)로 개 명 되었다.그 후 행정구역 개편 때 내호곡(內好 谷):일명안홈실.외호곡(外好谷):일명바(밖) 홈실 으로 나뉘어 개편되었다. 이 마을은 죽산 박씨(竹山朴氏)의집성촌이다. 뱚죽산박씨분파와충현공파 뱚입촌약사 죽산박씨충현공파낙남정착조전라도관찰사휘자량사적비(호음실마을 입구) 뱚주요유적 충현공부조묘. 부조묘三門. 뱚▶7면으로계속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