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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6월30일 일요일 4 (제150호) 특 집 존경하옵는 대한민국 국민 여러 분. 저는 중국 대련에서 온 조선족 박 남권입니다. 저에게 이런 보귀한 시 간과 자리를 마련해 주신 여러분께 충심으로감사를드립니다. 금년은 우리 겨레들이 일제침략자 에 반항하여 일으킨 ‘3븡1만세운동 및 상해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해 입니다. 이로 만민이 일어나 온 민족 이 반일투쟁사를 되새기고 있는 뜻 깊은 나날에 중국 조선족 항일투쟁사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 는 한국 고다출판사 발행인 신완섭 선생의 다함 없는 노력과 경기문화재단, 군포문화재단의지지 성원으로 저의 가족 중 국이주 가족사인 <두만강은 말한다-밀양 박씨 일가의 중국 이주 백년사>가 박남권 원저, 신완섭 편저로 한국에서 출간 된 데 대해 저는 가족을 대표하여 신완섭 선생께 깊은 경의와 감사를드립니다. 이는 제 가족의 영광일 뿐만 아니라 중국에 살고 있는 약 2 백만 우리 겨레들의 큰 자랑이라 간주하고 있습니다.일제 침 략 속 에 서 원 한 을 품 고 고 국 땅 을 떠 난 우 리 겨 레 들 은 그 어 디에살았든지원수와의투쟁을그치지않았습니다. 역사를 회고해 보면 저의 중국이주 1세인 증조부 박의 도 옹과 그의 자손들은 일찍이 110년 전인 1909년 봄에 살 길 을 찾아 고향이었던 함경북도 경흥군을 등지고 두만강을 건 너 조선과 러시아 두 나라 접경 중간지대인 중국 훈춘 경신 땅에이주하였습니다. 그때의 중국 경신 땅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중 국 하얼빈 역에서 조선침략의 일본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전 그와그의동료들,또 많은항일지사들이 조선과 러시아 양국 땅을 넘나들던 길목으로, 그곳은 이미 지사들이 뿌려놓은 항일의 불씨가 곳곳에서 온양되고 있던 곳이었습 니다. 제 로(=증조)할아버지의 장손 박관영은 조선에서 중국으 로 이주할 때 이미 세상물정을 알게 된 소년이었습니다.중국 땅에까지 기어들어와 우리 민족을 못살게 구는 일제 놈들의 만행에 분개하면서 원한을 품은 그는 1920년대부터 항일대 열 조직에 가담했습니다. 민족과 나라를 사랑했던 그의 정의 롭고 용감한 행동은 가족이 많은 집안의 친형제 사촌형제 삼 촌 어머니까지 항일투쟁에참가하게하면서주변조,한여러 사람들에게 항일의 투지와 신심을 북돋워 주었습니다. 항일 대오에 가세한 박관영은 고향 경신 땅을 떠나 흑룡강 힝일련 군1로군목단강연락처처장으로왜놈과싸우셨습니다. 변절자의 밀고로 놈들에게 붙잡힌 박관영은 목단강으로부 터 가목사 일본군 감옥으로 이송되어 갖은 위협, 공갈, 혹형 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놈들의 온갖 수단은 그의 굳은 항일 신념을 꺾지 못했습니다.분이 상투 끝까지 오른 놈들은 항일 지도자박관영을일본군감옥에서비참하게학살했습니다. 항렬로 둘째이신 저의 할아버지 박창일의 큰아들 박지영 은 1920년대에 용정 은진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인 경신에 서 교사로 있으면서 젊은 학생들에게 지식과 항일의 도리를 가르치다가 교편을 총창으로 바꿔 쥐고 항일구국의 길로 뛰 어들었습니다. 1932년 2월 하순 그가 훈춘현의 무장부장 직으로 훈춘시내 에서 비밀 활동하던 중 변절자의 밀고로 놈들에게 붙잡혀 당 시 흑정자 옥천동 일본경찰서 감옥에 감금되었습니다. 투옥 7일 만인 3월 2일 그는 옥중의 항일투사들을 인솔하여 일본 경찰을 죽이고 탈옥에 성공했습니다.그때 그의 나이 갓 30세 였습니다. 같은 해 3월 1일 갓 성립된 위만주국에 치명적인 타격을 준 ‘옥천동 파옥사건’은 항일대오에 일파만파로 소문 이퍼지면서전우들에게승리의신심을북돋워주었습니다. 그는 소련으로 망명하신 후 계속 항일투쟁에 헌신했습니 다. 1944년 여름 소련으로부터 조선으로 나가 왜놈들의 군사 역량 탐정 사업을 완수하고 소련으로 들어가던 길에 고향인 회룡봉촌 산 속에서 당신의 넷째동생인 저의 부친 박우영을 만난 일이 있다 합니다. 그 후 박지영은 1945년 초 독소전쟁 에서 독일 파쇼군과 싸우다가 시베리아 황야에서 혹독한 추 위와 극심한 식량난을 견디지 못하고 영용히 희생되셨습니 다. 훈춘시 인민정부는 옥천동 파옥지 원 자리에 비석을 세우 고 박지영이 항일투사들을 통솔하여 승리적으로 일제 감옥 을 탈출한 업적을 기재하여 영원한 애국주의 교육기지로 만 들었습니다. 지금 옥천동 파옥지 자리에는 놈들이 만들어 놓 은콘크리트무기창고가온전하게보존되어있습니다. 저의 둘째백부 박근영은 훈춘현 항일유격대의 한 성원이 었습니다. 1933년 가을 흑룡강성 동녕현성 전투에서 일군과 싸워 크게 승리한 훈춘현 항일유격대가 훈춘현 대황구 지역 의 비어있는 지주집에서하룻밤을묵게되었는데,그 사실이 변절자에게 탄로나 10월 7일 밤중에 일군과 그 앞잡이들이 들이닥쳐 급작스런 습격을 가한 바람에 13명의 희생자가 발 생했습니다. 바로 그 전투에서 잠에서 깨어난 박근영은 총탄 4발을 맞았음에도 용감하게 적의 총창을 빼앗아 몇 놈을 쓰 러뜨려눕힌뒤달아났습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35년 가을 외몸으로 적진에 들어가 탐지활동을 끝내고 부대로 돌아가던 그가 훈춘현 하다문향 에서놈들에게붙잡히게됩니다. 한 번 먹은 마음을 굽힐 줄 모르는 항일투사 박근영은 사형 장에서 변절자인 훈춘현 항일유격대원 박두남과 눈길이 마 주쳤다 합니다.놈들이 미리 파놓은 무덤 위에 꿇어앉은 박근 영은 적에 대한 적개심과 변절자에 대한 원한으로 목숨이 끝 나는 순간까지 적들과 끝까지 싸울 굳은 결심으로 기회를 노 리고있었습니다. 총을 잡은 놈의 지시로 두 졸개 놈이 근영의 좌우로 와 포 승줄을 풀려는 순간 근영이 “와악~”벽력같이 고함을 지르며 두 팔 에 묶 였 던 포 승 줄 을 끊 자 , 그 힘 의 여 파 로 두 졸 개 놈 이 땅에 쓰러졌다 합니다. 근영의 단호하고 완강한 저항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사형장이 아수라장으로 변했습니다. 눈앞의 돌변으로 놈은 총을 쏘려다 자기 부하가 맞을 것같아 당황해 망설이는 순간,근영은 자기 무덤을 뛰어넘어 갈 지(之)자 형 으로 앞을 향해 달렸다고 합니다.근영이 얼마간 달아난 뒤에 야 정 신 차 린 놈 들 이 쏜 눈 먼 탄 알 은 그 의 등 뒤 에 와 힘 없 이 떨어졌다합니다. 늦가을 추운 날씨에 아래 속옷만 몸에 걸친 그가 기진맥진 해 땅에 주저앉게 된 그는 가을나무 긁거리(=그루터기)가 발 밑으로부터 발등 위로 솟아오른 것을 알았다 합니다. 추위, 굶주림, 상처의 통증은 그를 괴롭혔지만 완강한 체력과 굳은 정신은 그를 삶으로 나아가게 했습니다.그때 그의 나이 28세 였습니다. 어둠 속에서 그가 찾게 된 곳은 불빛이 보이는 외호집(=외 딴집)이었습니다.주인 아낙네는 웬 남자가 알몸으로 피투성 이가 되어 밤중에 왔느냐고 겁을 먹더랍니다.사실을 알게 된 주인은 먹고 남은 감자와 호박을 주더랍니다. 상처를 치료하 기 위 해 걷 고 기 면 서 찾 아 간 소 련 국 경 에 서 그 는 더 없 는 억 울 함과 모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일제 놈의 사형장에서 구사 일생으로 목숨을 구하고 삶의 희망을 품고 찾아간 소련 땅에 서박근영은특무혐의로감옥에갇히게된것이었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옥살이를 며칠 하 던 중 그 는 문 득 함 께 항 일 했 던 고 향 사 람 박 일 순 을 만 나 게 되 었습니다. 로어를 잘 하는 박일순은 바로 그곳에서 조선인 간첩을 찾 아내는통역으로있었는데,근영의 사람됨을 잘알고있던 그 가소련측에담보하여근영을석방시켰다합니다. 근영이 사형장을 뒤엎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사실은 바 로 변절자인 박두남의 입으로부터 훈춘 전역에 소문이 퍼졌 다 합니다.박두남은 해방 후 목숨을 살리려 조선에 도망했다 가 정부에 의해 사형 당했다고 합니다.저의 호랑이백부 박근 영은 그 뒤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해 1984년 11월 78세를 일기로 우즈베키스탄 쁘라우다에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치 셨습니다. 저의 할머니 박송녀는 두 아들의 뒤를 이어 1930년 초 단호 히 집을 떠나 150리 떨어진 훈춘현 항일유격근거지 연통라자 에서 반일회 회원으로 유격대의 후근사업을 하셨습니다. 바 로 그곳에서 일제와 몇 년동안 싸우시던 저희 할머니가 1934 년 5월 20일 놈들에게 희생되었습니다. 희생될 때 4남 2녀의 어머니로, 다섯 손자 손녀의 할머니로서 민족과 나라를 위해 52세를일기로항일전선에서자신의목숨을바쳤습니다. 왜적이 침입한 이상 자유가 있을 수 없고 전쟁이 있는 한 평화와 행복을 바랄 수 없다고 각오한 할머니는 가족보다 민 족과 나라를 선두에 두셨습니다. 경신진 항일열사 명단을 살 펴보면 저의 할머니는 연세가 가장 많은 분인가 하면 단 한 분뿐인항일여열사입니다.박송녀열사여,영생불멸하시라! 저의 할아버지 박창일은 마누라와 두 아들을 항일전선에 보낸 ‘반일가족 주인’이라는 죄명을 쓰고 놈들이 사전에 꾸 며놓은 일명 ‘백마사건’에 말려들면서 옥천동 일본경찰서에 서 10년 동안 고문과 악형에 시달리시다 1944년 1월에 항일 에 참가한 자식들의 생사여부도 모른 채 59세를 일기로 한 많 은일생을마쳤습니다. 난세 속에서 부모님의 취향도 모르고 있던 저의 큰사촌 남 표 형님은 고향을 떠나지 말라는 할아버지 만류도 마다하고 배움의 욕망을 품고 고향을 떠나 조선 회령, 청진과 일본 도 쿄 등지에서고등학교,대학교를졸업한후 해방 후에는한국 육군사관학교2기생으로6븡25동란에뛰어들었습니다. 동족 간의 싸움터에서 그는 중국인민공화국의 지원군으로 참전한 고모부와 훗날 조신인민군에 편입된 후 소장으로 승 진한 6촌 동생 박남룡과 판가리싸움(=교전)을 벌인 비극도 있습니다. 이후 육군논산훈련소 소장을 끝으로 소장으로 예 편하신 남표 형님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워싱턴주 타코마 시한인회초대회장등을역임했습니다. 그는 중·미수교 이후 기적적으로 1988년 가을 고향인 회룡 봉촌을 찾으셨습니다. 1992년 그는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 로 가셔서 일제의 토벌로 피난길에 올랐던 항일유격구 연통 라자 산속에서 9살 때 헤어진 후 60년 만에 오매불망 잊지 못 했던 어머님을 묘소에서 만나는 비참하고도 원통한 일도 겪 으셨습니다. 이는 일제침략의 수난으로 두만강변에서 벌어졌던 제 가 족의 가슴 쓰린 생이별이 고향과 천만리 떨어진 중앙아시아 에서 다시 벌어진 비통한 장면이었습니다. 어머님의 묘소를 찾아 발을 구르며통곡하고 있는 남표형님의 사진을 보고 우 리 온 가족도 흐느껴 울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그는 난생 처음으로 자기의 친동생들과 4촌, 6촌 동생들을 만나게 되었 습니다. 1994년 11월 그는 자신의 저서 븮국경의 벽 넘고 넘어(한국 미리내출판사)븯에서 한국근대수난에서 민족의 아픔을 몸소 체험한 살아있는 역사의 증인으로 자기의 고난과 역경과 가 족,고향에대한많은이야기를발표했습니다. 회고록 표지 제목 아래에 ‘내 어린 시절은 두만강가에서 보 내게 되었고, 나의 추억 속에는 그것이 살아있다. 지금도 두 만강의 은물결이 일렁거리고 있다.’라고 적었습니다.지금 96 세 고령에도 남표 형님은 혈육과 고향을 그리는 마음으로 종 종저와전화통화를가지고있습니다. 1945년 광복이 나던 해,20대 중반이셨던 저의 부친은 가족 의 우수한 전통과 정신을 계승하시면서 고향인 회룡봉촌에 서 농회 주석,촌장,당지부 서기 등 직책을 맡아 중병으로 누 워계시던 저의 어머니 병시중을 들면서도 일심으로 농촌사 업에일생을기여하셨습니다. 가족사와 족보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제가 정작 필 을 들 고 쓰 다 보 니 아 주 중 요 한 부 분 을 아 직 잘 모 르 고 있 음 을깨닫게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몇 통의 편지로만 알고 있는 옛 소련 친척들의 세밀한 자료였습니다. 1993년 초 저희 내외는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에 계시는 일면식도 없는 사촌 누님 그론냐의 초청 으로옛소련친척방문길에올랐습니다. 그런데이방문길은애초부터순탄치않았습니다. 몇 달에 걸쳐 수속을 끝내고 흥분과 기대 속에서 종소 변경 도시인 만주리역을 지나 소련 경내의 큰 도시 츠타시에 도착 한 직후였습니다. 우즈베키스탄으로 가는 열차표를 사러가 던 길에 돌연 차 사고를 당한 것이었습니다. 왼쪽 팔 아래 뼈 가 부러졌고 무릎과 머리에 심한 타박상을 입어 흐르는 피가 영하40도의강추위에옷에더덕더덕붙어있었습니다. 로어 한 마디 모르는 타관에서 여관 복무원의 관심과 수고 로 한밤중에 구급차에 누운 나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있 는가 하면 병자만 갈 수 있다는 손시늉으로 따라나설 엄두를 못낸제아내는눈앞이캄캄해졌습니다. 초조함과 고통 속에서 3일만에 병원에서 만난 우리 내외는 마치 각자가 캄캄 철야 가시밭 속에서 온갖 마귀들과 싸우며 수십 일을 악몽으로 지내다 불시에 광명을 찾은 기분이었습 니다. 약 2주간 치료를 받은 후에야 붕대를 감은 왼팔을 목에 걸 고 다리는 절뚝 걸음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 리 내외는 몇 천리도 더 되는 타쉬켄트와 모스크바로 가 친척 을 방문하느냐 아니면 집으로 되돌아가느냐는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갓 무너진 옛 소련은 사회질서가 문란한데다가 로어가 불 통인 우리로서는 열차표 사는 일이 마치 하늘의 별따기였습 니다. 나는 아내에게 이런 모습으로라도 꼭 친척을 찾아가겠 다고호소했습니다. 결국 우리가 누님 집에 들어섰을 때 그녀의 첫 말씀이 자기 는 병원의사 전화를 받고 내가 죽었는가 했다는 것이었습니 다.혈연이란 마치 각자의 몸속에서 공동한 그 무엇이 흐르고 있는 것처럼 한 할아버지의 손자, 손녀들인 우리들은 초면이 었건만그렇게도아주빨리익숙해지는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나는 곳곳을 다니면서 친척 방문을 했고 항일에 참가한 후 만리타향에 와서 세상 뜨신 친인척들 묘소를 일일 이 찾아 참배를 올리며 많은 사연과 사진자료들을 수집했습 니다. 80여 세에도 창작하고 계시는 저의 선배님으로부터 창작 감을 나누자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만약 내가 쓴 가 족사도 범주에 속한다면 전설로 되어있는 가족의 지난날 역 사를 밝히기 위해, 그 문제의 실체를 캐기 위해 고생을 마다 않고 두 발로 이곳저곳의 자료를 찾고 가족과 고향 친인척들 을 방문하면서 자신이 마치 그 사실을 목격하고 있거나 그 과 정을 겪고 있다는 심정으로 묻고 기록해야 만이 비로소 자기 가 쓰고 싶고 표현하려는 내용을 비교적 완벽하게 그려낼 수 있다고봅니다. 이렇게 애써 모은 자료를 2년 동안 피땀을 흘리며 쓴 가족 사가 마침내 2013년 4월에 중국 중앙민족출판사를 통해 조선 말로 된 븮두만강에 서린 애환-한 박씨 일가의 백년이민사븯책 으로출간되었습니다. 1년 후인 2014년 7월부터는 저의 가족사가 중앙인민방송 국 조선어방송 절목자료로 선정되면서 저와 리국호 아나운 서가 번갈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무려 열한 달 동안 국내외로 방송을 진행했습니다.방송이 끝난 후 감명 깊게 들었던 연길 시 애청자협회에서는 저를 초청하여 다시한번 저의 이야기 를듣기도하였습니다. 2015년 항일전쟁승리 70주년을 맞으면서 저는 내용 일부 를 수개 보충한 후 가족사 개정판을 내놓았습니다.또 약 1년 남짓한 저의 노력으로 금년 1월에는 중문으로 된 가족사까지 출간하는데성공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중국으로 이주한 저의 로할아버지의 4촌, 6촌 형제분들과 그 후손들의 호적관계를 일일이 조사 기록한 다 음 , 작성한 중국 경내 밀양 박씨 족보를 수차례 한국의 국립 도서관 족보관을 찾아가 조선에서 중국으로 이주하기 전의 세대와 연계해 놓는데 성공하면서 븮밀양 박씨 만령공파 파보 (중국편)븯을 2018년 4월에 펴냈습니다. 2013년 중국 전국 정협에서 븮중국소수민족문사자료총서 븯에 착수하라는 지령에 따라 중국조선족문사 자료편집을 책 임진 정협 연변주 책임자들이 몇 년간의 노력 끝에 2016년 8 월 븮중국조선족백년실록(중문판)븯이 출간되었습니다. 그 가 운데는 제가 제공한 나의 가족사 중 세 편 문장과 일찍기 192 0 년 대 말 제 고 향 회 룡 봉 촌 에 서 발 생 한 항 일 애국지사 7명이 놈들에게 붙잡혀 금당촌 숭신학교에서 비참하게 불타죽은 ‘회룡봉 7인 참안(=참사)’ 사건까지 모두 네 편의 문장이 실 렸습니다. 회룡봉 7인 참안 희생자 김홍석, 한규량, 박인권, 김승세, 김룡연, 김세길, 박현규 등 7명은 이미 한국보훈처에서 그들 에게 애국장을 추서했고, 븮동포신문븯은 2014년 9월 16-30일 제30호를 통해 ‘독립유공자 후손찾기 캠페인’에까지 등재되 었지만 애석하게도 두 나라 제도와 호적관리 차이로 지금까 지 그 후손들이 자기 할아버지 항일투사 영예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희망컨대 한국정부 주무부처에서 실제로부터 출발하여 중 국 경내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도 다른 나라 항일유공자 후 손들과동등한영예와대우를해주었으면합니다. 이번 선완섭 선생의 끈질긴 노력으로 한국에서 출간된 저 의 가족사는 중국 조선족 한 개인의 업적을 소개한 것과는 달 리 한 가 족 이 1 0 0 여 년 전 중 국 이 주 후 1 세 , 2 세 , 3 세 들 이 대 를 이어가며 10여 년간 일제와 싸운 감격적인 사실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내용을 살펴보면,총을 들고 전선에서 일제와 맞서 싸운 분 들이 있는가 하면, 후방에서 백방으로 전선을 지원한 부모, 형제와 가족이 있고, 감옥에서 놈들에게 영용히 희생된 분이 있는가 하면, 투사들을 인솔하여 일제 놈들의 철통같은 감옥 을 부수고탈옥에성공한분도있으며,전쟁처에서놈들의총 에 영용히 희생된 분이 있는가 하면, 한 판 난리를 치고 사형 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면서 자기 목숨을 구한 불굴의 용사 도 있으며, 구라파 전역 독·소전에서 파쇼 독일군과 싸우다 장렬하게희생된분도찾아볼수있습니다. 수천 수만 조선민족의 우수한 아들딸들과 어깨를 걸고 십 여년 항일투쟁에 기여했던 저의 친인척들의 역사는 우리 겨 레의기쁨이고자랑이라해야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옛날 살 길을 찾아 중국 땅으로 이주해왔던 조선족이 중화의 많은 민족 아들딸들과 함께 이 땅의 떳떳한 주인이 되기에 손색이 없는 노력, 분투, 희생 과정이 아니겠 습니까! 바로 이런 의미에서 저는 중국 조선족의 이주사와 항일투 쟁사에 관심을 가지고 한국 국민들에게 저의 가족사를 알리 려고 애써주신 신완섭 선생과 이를 지지하고 성원을 아끼지 않으신 한국의 경기도, 경기문화재단, 군포시, 군포문화재단 및 한국의 고다출판사 여러분께 재차로 진심어린 감사를 드 립니다.여러분,대단히감사합니다. 3븡1운동및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두만강은말한다’ 뱚원저자박남권강연문 저자박남권 뱚▶원저자박남권은븣 1942년중국훈춘시경신진회룡봉촌生/길림사범학원졸업/김림성교 하시 조선족중학교 교사/ 길림성 교하시 민정국 근무/ 현 대련시 여순 구 거주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이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 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민간공모한 문화콘텐 츠선정작품인븮두만강은말한다-밀양박씨일가의중국 이주 백년사븯(고다출판사 간행)의출간을 기념하는 행사 에,특별히원저자인박남권선생(중국대련거주)을초빙 하여생생한증언으로지난100여년중벌어졌던한일가 의처절했던항일투쟁사와 조선족 디아스포라의비사를 들어보는 귀중한 자리를 마련하였다. 이번행사는 이를 통해 민족애와 조국애를 느껴보는 뜻 깊은 시간이 되기 도해원문을옮겨본다. 밀양박씨 일가의 중국이주는 밀성대군 후(后) 사문진 사공파휘만령公의12대손휘지신의후손이야기다. 중국으로의이주전세거지인함경북도영흥군과경흥 군은 고려조 조정에서 대대로 관직에 오른 사문진사공 후예의집성촌이다. 사문진사공후(后)6세(世)에 이르러 휘 화(華)는 1252 년에 출생 통헌대부 밀직부사 상호군에 이르고 삼중대 광 우정승판전리사에 추증되었다. 충효로서 세인의 칭 예를 입었다. 인간(仁幹), 인지(仁祉), 인기(仁杞), 인익 (仁翊),인우(仁宇)등5형제를 둠으로서 가문이 크게 번 성하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셋째 휘 인기(仁杞)는 고려 때 판도총랑(版圖摠郞)과 용궁현감(龍宮縣監), 좌우위 산원(左右衛散員)을역임하였으나고려말어지러운정 치를 피하여차자(휘 길,태종때 참봉)와 함께관북(함경 북도 일대) 영흥에 들어가 유유자적하였다는 기록이 전 해진다. 세거지는 영흥군 고녕면 우포리이다. 참봉공의 아들 일경(日慶)은 다시 영흥군 억기면 오포리로 이주하여아 들 득문(得文), 예문(禮文), 자문(自文), 동문(同文) 등넷 을 두었는데 이중 자문(自文)이 거상(居喪)에 시묘(侍墓) 하며 3년을 읍혈(泣血)하는 등극진한 효를 다해 세 칭효 자로 일컬었다. 아들 백령(百齡)·천령(千齡)·만령(萬齡) ·억령(億齡)·의령(宜齡) 등5형제를 두었는데 이중 넷째 휘억령(億齡)의12대손휘지신(1790년생)의후손이다. 박남권의 중국 이주 1대 조상은 박익관(1842년생)의 세 아들 중 막내였던박의도이다. 불행이도 큰형 박선도 와 둘째형 박운도에겐 자식이 없어 그들 가문의가족사 는 막내였던그의증조할아버지 박의도와 그의후손들에 게내려오게되어지금까지그맥을이어오고있다. 중국으로 이주해 온 박의도와 그의자식들은 40리(약1 5.5㎞)를사이에두고가까운곳에살면서난세를겪어왔 고,나중에는삼형제가한곳에모여살다가일부는러시 아, 중앙아시아 등지로 흩어지고 모였다가도 다시 흩어 지는 역사의격랑 속에서 한 세기의가족사를 엮어 족보 를만들어오면서지금에이른다. 중국정착지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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