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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6월30일 일요일 2 (제150호) 기 획 삼국의 판도에 영향을 미쳤던 경애왕은 죽었다.그의 죽음은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왔다. 힘이 없어 참았던 자들은 이제 화 산이 분출하듯 반 견훤의 기치를 노골화했다. 이는 급기야 후 삼국간새로운판도의변화를가져왔다. 영안(永安븡永川), 하곡(河谷븡河陽), 직명(直明븡一直), 송생 (松生븡靑松) 등 30여 군현이 차례로 중립의 입장을 버리고 견 훤에게 칼을 겨눴다. 이어 그 속도는 급속히 빨라졌다. 동쪽 연 해 명주(溟州)로부터 흥례부(興禮府)에 이르는 110여 성이 왕 건에게항복했다. 영안븡하곡븡 직명븡송생 등 30여 군현이 차례로 태조에게 투항하였다. (븮삼국사기븯권12신라본기12경순왕4년정월조) 이때신라의동쪽연해주군(沿海州郡)부락(部落)이다와서항복하니 명주(溟州)로부터 흥례부(興禮府 안동(安東))에 이르기까지 모두 1백 10 여성(城)이 되었다.(븮高麗史븯권1세가1태조13년2월조) 영안(永安 영천(永川))븡하곡(河曲 하양(河陽))븡직명(直明 안동)븡송생 (松生청송군(靑松郡))등30여군(郡)븡현(縣)이 차례로 와서항복하였다.2 월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고창 싸움의이긴 것을 알리니, 신라왕이 사신 을 보내어 답례하고, 글을 보내어 서로 만나기를 청하였다. 이 때 신라의 동쪽주(州)븡군(郡)부락(部落)이 다와서항복하니명주(溟州)로부터흥 례부(興禮府 안동)에 이르기까지 모두 1백 십여 성(城)이었다. 일어진(영 일군(迎日郡)븡신광면(神光面))에 행차하여 이름을 븮신광진븯(神光鎭)이라 고치고백성을옮겨서이곳에채웠다. 남미질부(南彌秩夫)와북미질부(北 彌秩夫 영일군 의창면(義昌面)) 두 성이 모두 항복하였다. (븮고려사절요븯 권1태조신성대왕13년2월조) 통일 신라는 전국을 9주로 나눴는데 예하에 434개의 군ㆍ현 이 있었다.이 중 상주에는 41개,삭주에는 38개,명주에는 34개 의 군과 현이 있었다. 위의 성城이 뜻하는 바가 확실치는 않으 나 대 략 군 과 현 의 군 사 거 점 이 라 본 다 면 , 고 구 려 땅 이 었 던 삭 주, 명주는 물론이고 상주를 포함한 지역 거개, 요즘 강원도와 경상북도 동해 연안 대부분이 이즈음 왕건에게 투항했다고 봐 야할것이다. 삼국의 형세는 왕건에게, 좀 더 정확히는 반(反) 견훤의 기 치로 굳어졌다. 전세는 왕건에게 완전히 역전되었다. 견훤은 우울하고심란했다. 왕건은 동쪽 일대의 평화가 고창에서 말미암았다 하여 안동 (安東)이라 이름 짓고, 결사대를 이끈 선평(金宣平)을 대광 (大匡)으로, 김행(金幸)븡장길(張吉)을 대상(大相)으로 삼았 다.또김,장의사성(賜姓)을그들에게내렸다. 안동 김씨와 안동 장씨의 출발이 되는 사성을 이들이 받아들 였다는 것은 신라 조정안에서 왕이라 칭하고 있는 김부와의 결 별을의미했다. 경애왕의 죽음에 강렬한 복수를 불태울수록, 견훤과 작당한 김부는 더욱 용납되기 어려웠다.경애왕에 대한 충군애국이 뜨 거우면 뜨거울수록 지금 신라 왕좌를 차지하고 있는 김부에 대 한적의는더욱뚜렷해져만갔다. 견훤과 김부가 왕을 핍살로 몬 주범임이 분명해진 이상, 그 들은김부를신라왕으로인정할수없었다. 경애왕을 이을 후계자로는 왕의 아우 효렴도 있었고, 전왕 경명왕의 아들들도 건재해 있었다.그럼에도 김부가 견훤의 후 광을등에업고왕이되었다.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주장할 근거도, 아무런 명분도 없는 김부였다. 모든 상황을 고려한다면 김부가 왕위를 계승한 까닭의 이면 에는오직견훤의불법한무력이작용했던결과였다. 왕건, 견훤, 김부가 모두 경애왕 죽음에 연루된 공범이었으 되 , 선 택 할 대 상 이 없 어 진 민 심 은 결 국 그 정 도 가 가 장 약 한 왕 건에게 쏠렸다.이들의 행위에는 왕건에 대한 애정보다 견훤에 대한반감이어김없이작용했다. 견훤도, 김부도 싫은 자들은 이제 왕건을 택해 경애왕의 분 을 풀 려 했 다 . 고창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9일 뒤,왕건은 신라에 사신을 보 내승첩을알렸다. 2월 태조가 사신을 보내 승리를 알리니 왕이 답례(答禮)로 사람을 보내 방문하고 아울러 서로 만나기를 청하였다. (븮삼국사기븯 권12 신라본기12 경순왕4년2월조) 을미(乙未)에신라에사신을보내어고창(古昌)의승전소식을고하니신 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답례하고 글월을 전하여 서로 만나기를 청하였다. (븮고려사븯(高麗史)권1세가1태조13년2월조) 고창에서의 승리 이후 왕건의 승세로 기울면서 주변 지역은 대거 왕건에게 귀부할 움직임을 보였고 그로 말미암아 불붙은 왕건의승세는더욱강화됐다. 한편 왕건에게 급속히 돌아선 주변의 동향에 김부는 깊은 충 격을 받았다.김부는 왕건이 후삼국 쟁패의 주도권을 잡았음을 직감적으로 파악했다.항상 강자의 편에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 했었고, 덕분에 신라왕의 자리까지 꿰찬 김부였다. 김부는 의 리상 견훤과 생사를 같이 할 것인가. 왕건의 편에 붙어 귀부할 것인가를조심스레저울질했다. 자신을 신라왕으로 즉위시켜 준 견훤과의 의리를 생각하면, 끝까지 견훤과 정치적 부침과 운명을 같이할 법도 했다. 그러 련만 일신의 안위만을 챙기는데 능수능란한 김부에게 배신을 둘러싼고뇌는그다지의미가없는것이었다. 오래지 않아 김부는 견훤을 버리고 어떤 시점에, 어떻게 왕 건에게 귀부할 것인가를 두고 다시 골몰하기 시작했다.경애왕 과 견훤을 차례로 배신한 김부는 지금 왕건에게로의 귀부를 남 은 중차대한 과제로 여겼다. 그럴 즈음 왕건의 사신이 왕도를 찾았다. 그러자 견훤의 사신에게 했던 모양으로 김부는 자리에서 일 어나 고려 사신을 맞아들여 치하했다. 또 그 편에 사신을 함께 딸려 답례하고 알현을 청하는 글월을 전했다. 사신은 또 철저 히 왕건에게 돌아서겠다는 김부의 다짐과,심지어 귀부까지 고 려하고있음을은연중내비쳤다. 14년 봄 2월 정유(丁酉)에 신라왕이 태수(太守) 겸용(謙用)을 보내어 귀 순(歸順)할뜻을알려왔다.(븮고려사절요븯권1태조신성대왕13년2월조) 그러나 왕건은 묵묵부답으로 왕도(王都) 대신 동쪽으로 내 려가며영역확대에만나섰다. 견훤이 멋대로 세운 왕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고, 견훤을 도와 공산에서 자신의 군 사를 괴멸시킨 김부의 전죄(前罪)를 도무지 용납할수없었다. 930년2월6일,영일에이르자영일북쪽을 지배하던 훤달(萱達)과 남쪽을 지배하던 성 주(城主)가 군문에 도착해 왕건에게 항복했 다. 견훤과 결탁하여 경애왕을 거세하고 왕위 를 이었던 김부는 하루아침에 고립무원의 처지로 떨어졌다. 그를 왕으로 여기는 자들 이라 해봤자 그가 등용한 무리뿐이었다. 그 들은 하나같이 탐욕스럽고 비루하고 아첨하 고간사했다. 그 임금이 이와같으므로 그 등용된자모두탐욕 스럽고비루하고아첨하고간사한 무리였다.오직나 라를 팔아넘기는 것이 능사인 줄로 알 뿐이었으니, 어찌 나라를 위하여 순절하는 것이 의리가 됨을 알 았겠는가? 이는 족히 괴이쩍게 생각할 것이 없다. (븮동사강목븯5하 김부 9년10월조,사론) 김부의 간청을 뒤로 하고 왕건은 영역을 넓혀가며 귀로에 올랐다. 송악에 도착한 왕 건은 다시 5월 29일 서경에 행차했다가 8일 간머물다돌아왔다. 안화선원(安和禪院)을 창건하여 견훤의 인질로 갔다가 비명횡사한 대광(大匡) 왕신 (王信)의 원당(願堂)을 삼고 명복을 빌게 했 다. 930년 8월 8일 왕건은 군사를 거느리고 충청의 민심을 위무 하러 다시 남하했다. 한가위를 앞두고 있어 들녘은 온통 누렇 게물들어있었다. 전쟁이 종식된다면 이보다 더한 평화는 천지에 없을 듯, 하 였다. 왕건의 남진 행렬이 대목군(大木郡)에 행행했을 때,술사 예 방(倪方)이찾아와천하를경영할비책을제안했다. 태조13년에동·서두솔(東西兜率)을합하여천안부(天安府)로 하고도 독(都督)을두었다. 【속담에전하기를술사(術師) 예방(藝方)이란사람이 태조(太祖)에게 말하기를 “삼국의 중심이며 오룡(五龍)이 여의주를 다투 는형세이니만약대관(大官)을두면백제가스스로 항복할것이다.” 라고 하였으므로 태조(太祖)가 이에 산을 올라가 두루 살펴보고 비로소 부(府) 를두었다고한다.(븮고려사高麗史븯권56지10양광도천안부) 동서 도솔(東西兜率)은 삼국의 중심으로, 다섯 용(龍)이 구슬을 다투는 땅입니다. 만약 성루(城壘)를 쌓고 관병(觀兵)하면 삼국을 통일하여 왕이 될것입니다.(븮동사강목븯5下김부 4년8월조) 내밀히 감춰두었던 삼국 통합의 논의가 고려 진영에선 이제 공공연히 토로되기 시작했다. 왕건은 그들의 논의를 제어하지 않았다. 신라와 백제를 한 손에 거머쥘 복안이 토의되기 시작 한 것이었다. 승세가 한풀 꺾인 견훤과 마찬가지로, 허깨비나 다름없는김부역시고려에겐타도와병합의대상일뿐이었다. 왕건은 크게 기뻐하며 이곳이 남도의 요회(要會)이므로, 탕 정(湯井)븡대목븡사산(蛇山)으로 나눠 천안부를 삼는다는 칙명 을 내려 도독을 두고, 대승(大丞) 제궁(帝弓)을 사(使)로, 원 보엄식(嚴式)을부사(副使)로삼았다. 가을 8월에 대목군(大木郡)에 행차하여 동서 두솔(東西兜率)을 합쳐서 븮천안부븯(天安府)라하고도독(都督)을두었으며, 대승(大丞) 제궁(弟弓)으 로 사(使)를 삼고, 원보(元甫) 엄식(嚴式)으로 부사(副使)를삼았다. (븮고려 사절요븯권1태조신성대왕13년8월조) 또 왕건은 대상 염상(廉相)을 보내 마산(馬山)에 성을 쌓아 안수진(安水鎭)이라 부르고, 정조(正朝) 흔행(昕幸)을 진두 (鎭頭)로 삼았다. 우릉도(芋陵島) 도주(島主)가 백길(白吉)븡토두(土豆)를 보 내왕건에복속을청하며방물을바쳤다. 청주까지 이르렀던 왕건의 발걸음은 다시 김부의 간절한 요 청에도 불응한 채 송악으로 선회했다. 12월 1일 왕건은 서경에 학교를창건했다. 그러자 김부는 이듬해 931년 2월 9일 태수 겸용(兼用)을 보 내다시알현을청했다.글월이사뭇절박하고애통했다. 왕건은 5천여의 정기(精騎) 및 그 밖의 대군을 거느리고 송 악을 출발하여, 2주 만인 2월 23일, 천 백리 길을 행군해 왕도 언저리에 도착했다. 한겨울 바람을 등에 업고서 대략 하루에 팔십리를달린셈이었다. 봄 2월 정유(丁酉, 19일)에 신라왕이 태수(太守) 겸용(兼用)을 보내어 다 시 만나 보기를청하였다. (2월) 신해(辛亥, 23일)에왕이 신라에 행차할제 50여 기(騎)를 거느리고 기내(畿內)에 이르렀다. (븮高麗史븯 권1 세가1 태조 신성대왕14년2월조.) 춘2월고려임금왕건이 와서조회하였다.왕이 태수(太守)겸용(謙用)을 고려에 보내어 서로 만나 보기를 청하니, 고려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5천 여 기를 거느리고 서울 경내에 이 르러 먼저 장군 선필(善 弼 )을 보내어 기거 (起居)를물었다.(븮동사강목븯권3 김부 5년2월조) 먼 송악에서 2주 만에 왕도에 도착한 것은, 4년 전 경애왕의 간절한 요청에도 문경에서 두 달이 넘도록 왕건이 움직이지 않 은 것이나, 문경을 출발한 1만의 구원 군대가 한 달이 넘도록 잠적한것과더욱비교되기마련이었다. 왕건은 김부의 항복을 접수받기 위해 사실상 한달음에 달려 왔다. 이 모든 사실들은 생각할수록 의문을 더하는 법이었다. 그럴수록 더더욱 4년 전 포석정의 불행한 사단의 의문은 뇌리 에서쉽게지워질수없다. 4년 전 그처럼 경애왕이 요청해도 문경에서 도움을 주지 않 던 왕건이,지난해 고창 전투에선 퇴로(退路)나 걱정하며 잔뜩 움츠리며 내려왔던 왕건이, 이제 의기양양하게 신라의 왕도를 목표로내려오고있었다. 겉으로는 예방이었으되, 승세를 탄 왕건의 행렬은 개선행렬 이나 다름없었다. 느리게 행군했는데도 2주 만에 왕건은 왕도 언저리에다다랐다. 지난해 고창 싸움을 승리로 이끈 선필 등도 왕건의 남행을 보좌하기위해,안동에서군사를이끌고합세했다. 왕도(王都) 경계에 진영을 정돈한 왕건은 야밤에 간첩을 미 리풀어왕경의동태를살폈다. 한편 고창의 장군 선필(善弼)을 김부에게 보내 기거(起居) 를물었다. 서라벌 왕궁의 김부는 황망하여 버선발로 뛰어 나와 선필을 맞으며왕건의정황을물었다. 아직 추위가 완전히 풀리지 않은 벌판에는 고려 군기가 펄럭 이며하늘을가렸다. 어 떤 곳 은 섣 부 른 꽃 이 피 어 있 기 도 했 고 어 떤 곳 은 채 녹 지 않은 눈이 하얗게 쌓여 있기도 했다.봄과 겨울이 공존한, 약간 은어수선한왕도의풍경이었다. 왕건의 진영에선 때때로 장수의 령에 따라 일제히 창칼을 방 패에두들기고북과징을한꺼번에두들겼다. 그 소리가 왕도를 울려 길 가던 여인이 놀라 자빠지고 잠자 던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솔잎에 얹혀 있던 눈들이 삽시에 후두둑땅으로떨어지기도했다. 왕건은 견훤이 왕도를 약탈한 전례를 염두에 두고 전군을 왕 도경계에그대로숙영하게했다. 도성 민심을 자극하지 않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다만 힘센 용 사50기와신하들을대동하고왕도로들어섰다. 스스로 견훤과 다르다는 면모를 심어주려 한 고도의 심리전 이었으나 그 언저리는 고려 군사가 진치고 있은 까닭에 흡사 무력으로왕도를포위한형국이나다름없었다. 한편 왕건은 아직 견훤의 끄나풀들이 성민으로 위장해 있을 위험이 있다 여겨,간첩들을 풀어 요로에 미리 숨겨 두는 것 또 한잊지않았다. 의복을 갖춘 신라 백관이 모두 교외에서 왕건을 맞아 예를 갖췄으며, 당제(堂弟)인 상국(相國) 김유렴(金裕廉) 등은 성 문에서왕건을맞이했다. 김부는 응문(應門븡궁궐의 정문)밖에 나와있다왕건을 보자 마자먼저절했다. 정유(丁酉)에 신라왕이 태수(太守) 겸용(兼用)을 보내어 다시 만나 보기 를 청하였다. 신해(辛亥)에 왕이 신라에 행차할 제 50여 기(騎)를 거느리고 기내(畿內)에 이르러 먼저 장군(將軍) 선필(善弼)을 보내어 문안드리니 신 라왕이 백관(百官)에게 명하여 경주 근교에서 맞이하게 하고 당제(堂弟) 인 상국(相國) 김유렴(金裕廉) 등은 성문 밖에서 맞이하게 하였으며 신라 왕은응문(應門)밖에나와서영접하고절하니왕건이 답례했다. 신라왕은 왼편으로 왕은 바른편으로 읍양(揖讓)하면서 전상(殿上)에 올 라왕을모시고온 여러신하들에게명하여신라왕에게절하게하니정성된 예가모두극진하였다.임해전(臨海殿)에서잔치를하였는데술이 한참돌 무렵에 신라왕이 말하기를, “소국(小國)이 하늘의 버림을 받아 견훤의 유 린된 바가 되니 통분하기 끝이 없나이다.”고 하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좌 우의신하들도목메어울지않는사람이 없었다. 왕건도눈물을흘리며그 를위로하였다.(븮고려사븯세가2태조14년2월) 난신적자인 왕건을 향해 김부가 먼저 절했다. 이것은 그가 얼마나힘의향배에민감했던것인지짐작할대목이다. 이로써 김부가 앞서 견훤에게도 어떻게 접근했을지 충분히 추론할 수 있다. 왕건이 황망하여 답배했다. 김부는 왼쪽을, 왕 건은 오른쪽을 거쳐 읍하고 사양하며 전(殿)에 올랐다.왕건이 호종(扈從)한여러신하들에게명해김부에게절하게했다. 밤이 되자 임해전(臨海殿)에서 왕건을 위한 잔치가 열렸다. 신라의 진보는 모두 견훤이 빼앗아 갔다고 들었는데도 술상 위 에는여전히금은이나옥으로된그릇이즐비했다. 전란 중임에도 살찐 소와 돼지와 닭과 개를 잡아 마련한 왕 실의 잔치는 융숭함을 넘어섰다. 또 그 상 앞에 자리한 자들의 얼굴엔 상 위의 소와 닭과 돼지와 개의 육신을 빼닮은 기름이 흘렀다. 4년 전 자신을 왕도로 초치한 경애왕의 요청을 외면한 자책 감이 왠지 들어 왕건은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밖에는 삭풍이 줄기차게울부짖고있었다. 김부는 왕건의 술이 어느 정도 거나해졌다고 판단되자,갑자 기 북받치는 슬픔을 참기 힘들다는 듯,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 더니눈을아래로향한채말을이어갔다. -하늘의 도움을 얻지 못해 점점 환란이 닥쳐오는 듯합니다. 견훤이 불 의의행동을자행해나라를망치고있으니, 어찌통분이 이 같을것입니까. (븮삼국사기븯권12신라본기12경순왕5년2월조) 김부의 말은 반은 눈물이고 반은 독백이었다.김부는 하늘의 도움이 없어 환란이 겹친다고 말하고 있다. 도움 없는 하늘을 김부는원망하고있는게분명했다. 죽은 경애왕도,지금의 김부처럼 하늘의 도움을 똑같이 말한 적이있었다. 3년여름4월, 진호가갑자기죽었다. 견훤은고려사람들이 고의로 죽였 다고 생각하고 분개하여 군사를 동원하여 웅진까지 진군하였다. 태조가 모든성에명령하여방비를굳게하고나가지않도록하였다. 경애왕은 사신을 보내 “견훤은 약속을 위반하고 군사를 일으켰으므로 하늘이 반드시 돕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대왕이 한 번 북을 울려 진격해 위풍을 보인다면 견훤은 반드시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태 조는 사신에게“내가 견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죄악이 넘쳐서 자멸하기를 기다릴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븮삼국사기븯권12 신라본기12 경애왕3년) 왕건은 흐릿해진 의식 속에 김부를 앞에 두고 경애왕을 떠올 렸다. 경애왕은 왕건 자신이 견훤을 공격하면 하늘의 도움이 있을 거라 말했었다. 똑같은 하늘을 두고 신라의 편이라 생각 한 경애왕과, 도움이 없다며 원망하는 김부는 도대체 같은 인 물일수없었다. 역사와 전통을 지닌 신라의 군왕은 너무나도 다른, 엇 방향 이었다.한 명은 신라의 부흥을 위해 울었고 한 명은 일신의 영 달을 위해 울고 있다. 생각할수록 신기하기도 했고 한편으로 처량하기도했다. 김부의격렬한울음이있자좌우도함께오열했다. 그들은 말하지 않고 울었다.그들은 울음으로 외교를 펼치고 있었다.퍼뜩정신이든왕건은주위를둘러봤다. 견훤을 불러들여 경애왕을 죽이고선 그 주검 앞에서 통곡했 다는 이자들이, 지금은 자신을 다시 불러들여 그 때의 일을 회 상하며울고있었다. 경애왕(신라55대왕.재위924~927 ) 뱚역사비정(30) 뱛Ⅰ.반견휜의움직임 박 순 교 뱛Ⅱ.김부의고뇌 뱛Ⅲ.왕건의서라벌입성 뱛 Ⅳ.김부의눈물 뱚▶다음호에계속 목 차 Ⅰ.반견훤의움직임 Ⅱ.김부의고뇌 Ⅲ.왕건의서라벌입성 Ⅳ.김부의눈물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