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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6월30일 일요일 12 (제150호) 기획 고려공민왕23년해군창설·양성에진력하여전라·경상·강릉등에서왜적을격퇴시킨경렬공정지장군의호 국충절의숭고한뜻을기리기위한사 당이있는광주북구경렬사에추모의행렬이줄을잇는다.문인으로무를겸비한 장군이고려벽상공신으로 좌시중에추증된박춘선생의사위가 된인연또한기이하고인재를알아보는혜안또한높다고할것같다.그리고남편의급제를위해과거예상문 안을놓고토론을벌인밀성박씨부인 의학식또한가름해볼만하다. 대대로공경(公卿)을배출한 문인의집안에서태어나학문을익힌밀성박씨 부인과정지장군의만남은훗날 박춘선생의후예가연고가없는호남 지역에정착하여600여년이지난지금에토호세족으로지역의문풍과유풍을일으킬수있었던것또한경열 공에의한것이기에공의행적을더듬 어본다. 1363년(癸卯年)3월 윤달 준제(鄭地)의 장인 응 양상호군 박춘(朴椿)은 경성(京城)을 수복한공 으로 공신당의 벽 위에 초상을 그리고 부모, 처에 게 3등을 뛰어 봉작하며 그의 아들 한 사람은 7품 벼슬을 주되 만약 아들이 없으면 조카나 생질 또 는 사 위 중 한 사 람 을 8 품 구 사 (驅 史 )로 임 명 하 여 파령(把領)의 실질적인 직책을 주고 7명에게 초 입사를 허락하고 자손을 음관(蔭官)으로 채용토 록 하였으며 토지1백결과 노비10명을 주는 1등 공신이되었다. 원나라의 기황후(기철의여동생)는 공민왕이 기철일파를 죽인 것에 원한을 품고 언제든지 공 민왕(恭愍王)을 없애려고 복수의 칼을 갈고 있을 때 반역자 최유가 원나라에 들어가 기후왕후를 충동질하여 충선왕(忠宣王)의 아들인 덕흥군(德 興君)을 고려의왕으로 세우고 원나라 군을 이끌 고 고려로 향했다. 공민왕은 안절부절 이에 대비 책으로 안우경을 도지휘사로 임명하여 의주(義 州)에, 이구수를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인주에, 이순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이성에,홍선을 도 병마사(都兵馬使)로 정주에.우 제. 박춘 등을 도 병마사로 임명하여 강계 독로강 등지에 배치하는 한편 전공판서 지용수를 모두 도원수(都元帥)의 명령에 따르게 하는 등 일단의 조치를 마무리하 였 다 . 조 신 들 중 에 덕 흥 군 과 내 통 한 혐 의 가 드 러 난 자는 모두사형에 처하거나 파면시켰다. 그리 고 원나라 중서성에 글을 보내어 덕흥군과 최유 를인도할것을요구하기도했다. 그러나 덕흥군은 그해 12월 1363년 요동에 진 을 치고 부하들을 압록강까지 보내왔으므로 조야 (朝野)가놀라고두려워하였다. 이듬해인 갑신년 공민왕(恭愍王)13년(1364년) 1월1일 덕흥군을 받든 최유는 마침내 원나라 군 사 1만 명을 이끌고 압록강 건너 의주를 포위하였 다. 도지휘사 안우경은 여덟 번의 전투에서 패하 고 오히려 도마병사 홍선(洪瑄)이 사로잡혀 패주 하여 안주로 물러섰다.더욱 최유가 이끄는 부대 가 남하하자 공민왕(恭愍王)은 최영을 도순위사 (都巡衛士)에 임명 안주(安州)의 관군을 총지휘 하게 하였다. 또한 이성계(李成桂)를 동북면에 정예기마병 1천명을이끌고 최영(崔瑩)을 돕게 하고 도체찰사(都體察使)이순과 우제.박춘 등도 일단 모이게 되자 관군의 사기는 다시 높아저 힘 을 얻었다. 그중 도지휘사 안우경이 이끄는 군사 가 정주에서 최유(催乳)의 군사를 격파하여 적장 (敵將)송신길을 잡아 죽이니 최유(催乳)는 결국 힘을 잃고 그달 18일에 관군이 여세를 몰아 추격 하여 최유(催乳)의 군사는 수주에 달천에 집결하 여 진을 치고 저항하였다. 이때 박춘의 군사일행 이선제공격(先制攻擊)으로 이를격파했다. 김용과 최유(催乳)의 음모는 실패하고 경천홍 과 최영(崔瑩).박춘 등은 전승군(戰勝軍)을 이끌 고 돌아왔다. 그들의 행렬은 너무나 힘찼다. 공민 왕은 관리들에게 명하여 교(郊)에 나가서 맞이하 되 왕의 행차를 맞이하는 것과 같이 하라하였다. 관원들이 국청사(國淸寺) 남쪽 들판에서 연회 (宴會)를 차렸다. 그리고는 역적(逆賊)들의 토지 와 가옥 및 기타재산을 여러 장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박춘은 자신이 직접전투에 나가 승리한 기쁨에 조금은 들떠있었다. 박춘은 갑신년(1364 년)정초 羅州牧使때 인연이 되어 준제(鄭地)와 맺어준 딸의 혼례식(婚禮式)을 지켜본 뒤 얼마 되지 않아 전투(戰鬪)에 나섰던 박춘은 전쟁터에 머물면서도 사위와 딸의 소식이 궁금했다. 또한 그들도 자신을 염려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였던 것이다.박춘은 사람을 시켜 사위 준제(鄭 地) 앞으로 간찰을 적어 보냈다.『“덕흥군을 왕으 로 옹립하려던 간악한 최유(催乳)의 일파를 무찌 르고 원나라 군사를 압록강 건너로 몰아냈다”는 내용과 신혼살림을 곁에서 지켜봐야 할 것이나 이렇게 먼 곳에 떠나있어 염려가 되지만 사위가 듬직하니 모든 일을 잘해 줄 것이라 믿는다』는 칭 찬의내용도곁들었던것이다. 편지를 받은 준제(鄭地)는『장인(丈人)이 생각 하시는 일과 연일 거두고 계시는 승전소식에 기 분이 무척 들떠 있었다. 자신도 언젠가는 장인과 같은 문무겸전(文武兼全)의 훌륭한 장군이 되어 왜적을 물리치는데 한목숨 바치겠노라고 다짐했 다. 그러나 관직에 오르기 위해서는 일단 과거시 험을 거쳐야함으로 준제(鄭地)는 이를 위해 “장 인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으 며 부디 무사히 선전하시여 대대적인 승리를 거 두고 돌아오시기만을 천지신명(天地神明)께 기 도하겠다”』는 답신을 정중하고도 간절하게 보냈 다. 그리고 그해10월중순경 최유(催乳)는 원나라 군사에 잡혀 압송되어 11월에 처단되고 이와 함 께 덕흥군은 영평부(府)로 귀양보내버렸다. 이렇 게 해서 공민왕을 없애려던 김용. 최유의 음모계 획은완전히제거되었다. 한편 찬성사(贊成使) 이구수가 갑진년(甲辰 年) 공민왕13년(1364년) 12월 관직을 버리고 서 원(瑞原), 고령사(高嶺寺:경기도 파주에 있는 普 光寺의 옛 이름)에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려하였 다. 공민왕이 그를 만류하여 관직을 회복시켰는 데 불과 5개월뒤에 다른 대신들의 모함으로 박춘 도 함께 모함되어 이구수는 회원(會原)으로 서원 (瑞原)고령사(高嶺寺)에서출가하지 못한 것이 오히려 화가되었으며 준제(鄭地)의 장인 박춘도 함께광양으로보내졌으며 가산까지 몰수(沒收) 당하는 참혹함에 처하게 되었다. 준제(鄭地)는 장인이 귀양 가는 모습을 보고 관직에 대해 말 할 수 없는 환멸(還滅)과 혐오감(嫌惡感)을느꼈다. 서책도 내려놓고 무술 연습도 손 놓은채 몇일이 고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서책도 무술 연습도 도 통 손에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대대로 벼슬살이를 해 온 양 반 집 안 처지로서는 어떻게 든 사마시(司馬試)를 통과해야 만 자신의 뜻을 펼수있을것이라는아내의조언도있었다. 준제(鄭地)는 장인 박춘이 귀양간 광양으로 찾 아갔다. 많은 생각과 장인의 의견을 들을 요량으 로 찾아간 광양길은 참으로험난했다. 다행이 나 주목 거평현에서 멀지않은 곳이어서 큰 고생은 하지 않았다. 유배지(流配地)로 찾아온 사위 준 제(鄭地)를 만나니 장인 박춘은 가슴이 뭉클했 다. 딸의 소식을 묻는 박춘에게 준제(鄭地)는 집 안대소사를 잘 꾸려가고 있다고 말했다. 박춘은 준제(鄭地)의 말을 듣고 안심하는 듯 한 표정을 지었다. “이지경이 된 내 꼴을 보면서 자네가 어 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내 짐작하네 그러나 내가 비록 조정의 오해를 사서 이 궁벽한 곳까지 귀양 은 왔지만 크게 불편 한 점은 없으니까 안심하게 그러나 구만리같은 자네의앞날을 위해서라도 열 심히 공부해서 관직으로 길을 나가야 할 것이야” 어려운 때 일수록 자신을 지키는 길은 실력을 길 러서 조정에서 인정을 받고 나라에 진출하여 충 성하는일 이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준제는 장 인의 이같은 당부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장인 박춘은 다시금 당부하는 말을 계속하였다.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은 새옹지마(塞翁之馬)일 세. 그래 우리인생에는 어려운일이 있으면 반듯 이 좋은 일도 있는 법이지. 내가 언제까지 여기에 만 이렇게 있지는 않을게야. 내가 이 어려움을 벗 고 복직된다고 했을 때 자네를 관직에 세우려면 반드시 과거를 통과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 이지.”그때서야 준제(鄭地)는 장인의 뜻을 알아 차렸다. 더구나 자신이 왜놈들을 물리치겠다는 어린 시절의 다짐이나 금성산에 올라가 호연지기 (浩然之氣)를 키우던 때를 떠올리며 장인에게 다 짐의 의미로 이 같이 말했다.“네! 제가 생각이 얕 아 일시라도 잘못 생각 한 것이 많습니다. 반듯이 관직에 나설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그것만이 최선의 길이라 생각하고서 책에서 손을 놓지 않겠습니다.”준제(鄭地)의 마음은 이제야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해졌다. 장인을 면회하고 나주로 돌아온 준제(鄭地)는 그해 있을 司馬試(사마시)에 우선 대비하여 처음 결심처럼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아내와 예상문제를 만들어 서답을 서지에 적어보는 연습도 게을리 하지 않 았다.나이어린 아내지만 장인으로부터 일찍부터 훈육을 받아 문장 실력이 높은 그런 아내가 준제 (鄭地)의 공부에 큰 도움이 되었다. 장인 박춘의 행 마 가 좋 지 않 은 모 양 이 지 만 장 인 의 뜻 에 따 라 1 9세 때인 을사년(乙巳年) 공민왕14년 1365년에 司馬試(사마시:고려시대 생원과 진사를 선발하 는 시험)에 장원급제하였고 이어 다음해인 20세 때인 공민왕 15년 1366년에 문과에 급제함으로서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자신이 계획한 관직의 길을걷게된다. 공의 휘(諱)는 지(地)요, 초명(初名)은 준제 (準提)였다. 호(號)는 퇴암(退菴)이시며, 밀직공 (國龍,국룡)후금성군(盛-,성)의손자이시다. 공은 1347년(고려 충목왕 3년. 丁亥)에 지금의 나주(羅州) 문평에서 태어나셔서, 광주(光州) 평 방(平坊) 죽곡(竹谷)에서 살으셨다. 공은 인물이 걸출(傑出)하고 성품이 관후(寬厚)하여 어려서 부터 뜻이 크고 힘이 남달리 세었으며, 대의(大 義)를 통하여 사람들과 더불어 해설(解說)함이 활달하였으며, 독서 또한 좋아하셔서 출입할 때 도항상책을가지고다니셨다. 공이 어느 날 성(城)안에서 놀고 있을 때, 소를 몰고 가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소가 갑자기 주인 을 들이받으므로, 공이 그것을 보고 재빨리 달려 가 몸 을 날 려 그 소 의 두 뿔 을 잡 고 들 이 치 니 소 는 즉사하고, 주인은 구사일생 살아났는데, 그 때 그 광경을 고을 사또 박춘(朴椿)이 성루 위에서 달 려와 보시고는, 장하게 여겨 공을 사위로 삼으셨 다. 공의 나이 열아홉살에 사마시(司馬試)에 장 원급제(壯元及第)하시고 다음해 1366년(공민왕 15년. 丙午)에, 또 전시대책(殿試對策)에도 장원 급제하셨다. 1374년(공민왕 23년)에 중랑장(中郞將)을 제 배 받았는데, 그때 왜구가 남해 연안 고을을 침범 하여 우리나라 백성들을 괴롭혔으므로, 공의 활 약이 두드러져 왕의 신임을 받아, 곧 전라도 안무 사(按撫使)로 특명되고, 이희(李禧)도 양광도 (楊廣道-경기도)안무사가 되었으며, 또 두분 다 왜인추포만호(倭人追捕萬戶)을 겸하게 되면서 공은 수군을 쇄신 향상시켰으며, 1376년(우왕2 년)에 왜구가 광주(光州)와 능성(綾城) 화순(和 順)등지에 침입하니, 원수(元帥)이신 공이 전라 도에서 방어하였다. 그리고 1377년(우왕3년) 여 름에 왜구가 순천(順天), 낙안(樂安)등지에 침입 하여,당시 예의판서(禮儀判書)인 공은 순천도병 마사(順天都兵馬使)가 되어, 순천·낙안 등지에 침입한왜구를연파하고,이듬해다시영광·광주· 담양·화순 등지의 왜구를 격파함으로써 전라도 순문사가되었다. 1381년 밀직(密直)으로 해도원수(海島元帥)가 되어 서남해에서 수차에 걸쳐 왜구를 소탕하여 많은 전공을 세우고, 이듬해 지문하부사(知門下 府事)로서 해도도원수·양광전라경상강릉도도지 휘처치사(楊廣全羅慶尙江陵道都指揮處置使)가 되었다. 정지는 1383년 5월 왜선 120척이 침입해 온다는 급보를 받고 경상도로 가서 합포의 군사 를 모아 정비하였다. 이때 왜구는 이미 관음포에 도달하였고 정지가 이끄는 군사와 박두양(朴頭 洋)에서 대치하였다. 정지는 관음포전투에서 선 봉대선17척을완파하고적을크게무찔렀다. 1384년(우왕 10년)에는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제수되었다. 이때 이성계가 판삼사사(判三司事) 심덕부(沈德符)와, 판개성부사 배극렴(判開城府 事 裴克廉)과, 문하평리(門下評理)인 공으로 더 불어, 우왕을 황이부(黃 府)에서 향연(饗宴) 하였다. 1387년(우왕13년. 丁卯) 8월에는 글을 올려 왜 구(倭寇)의 소굴인 대마도(對馬島)와 일기(壹 岐) 두 섬을 정벌(征伐)할 것을 왕에게 청하기를 『근자에 중국(中國)이 왜(倭)를 정벌한다고 떠 들고 있으니, 만약 우리 국경에까지도 전함을 나 누어 정박시킨다면, 다만 그 지대(支待)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허실(虛實)을 엿 볼까 두려워하나이다. 왜는 온 나라가 다 도적질 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일본 정부를 배반한 백성 들이 대마도와 일기의 두 섬에 응거하여, 이 섬 들이 우리나라와 가까움으로 무시로 침구하여 옴이니, 만약 그 죄를 들어 밝혀 먼저 이 섬들을 쳐서, 그 소굴을 전복하고, 또 일본에 글을 보내 도망한 적을 본국으로 귀순케 한다면, 왜의 근심 도 덜고 중국의 군사 또한 오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수군은 잘 훈련되어 있으니 때를 순응하고 바람을 기다려 움직인다면 성공하기가 쉬울 것 입니다. 다만 배는 오래되면 썩고 군사는 늙으면 피로 하는 것이며, 또한 지금 수군이 요역( 지役)에 피 곤하여 날로 도망하고 흩어지려고 하니, 마땅히 이 기회를 타서 모책을 결단하여 소탕할 것이요, 가히늦추지못할것입니다』라고하셨다. 우왕 14년, 경상도 해도원수 박위(朴 쭈)의 대 마도 정벌 개선도,모두 공의 전략에 의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공은 당시 약세에 몰려 있던, 고려의 해군을 중흥시켜 화포로 중무장(重武裝)한 근대 적 해군 함대를 출범시킨 선구적(先驅的)인 장군 이었다. 1388년(우왕 14년)5월, 우왕이 이성계를 보내 요(遼)를 치게 한지라,공은 안주 도원수(安 州 都元帥)로서 종군하셨다가 회군(回軍)하니, 이때에 왜구가 3도(三道-전라. 경상. 충청)에 침 입하여 여름부터 가을까지 주군(州郡)을 무찌르 고 불태워도, 우리나라 장수와 수령이 방어하는 자 없으니, 공의 위명(威名)을 왜구가 겁내는 고 로, 나라에서 공을 양광. 전라. 경상도, 도지휘사 (道指揮使)를 삼아, 제장들과 같이 가서 치라는 명을 내려 공이 명을 받고,도순문사 최운해(都巡 問使 崔雲海),부원수 김종연(副元帥 金宗衍),조 전원수 김백흥(助戰元帥 金伯興), 진원서(陳元 瑞) 전주목사 김용균(全州牧使 金用鈞), 양광도 상원수 도흥(揚廣道 上元帥 都興), 부원수 이승 원(副元帥 李承源)등을 거느리고 출진하니, 왜구 가 함양(咸陽), 운봉(雲峯)을 넘어 남원(南原)으 로 쳐들어옴으로, 군사를 독려하여 달려가 무릇 7,8회를 접전하였으나, 싸울 때마다 승전하여 왜 구 58급을 베고, 말64필을 얻으니 남은 적은 밤에 어둠을 타서 도망하였다. 이때 사람들이 말하기 를 “이번 싸움이 아니었다면 3도 백성이 거의 다 죽었을 것이라”고 하였으며, 또 이 첩보를 들은 우왕은술과고기를하사하셨다. 1389년(공양왕 1년)에 양광, 전라, 경상도, 절 제 체찰사(楊廣 全羅 慶尙道 節制 體察使)가되 어, 초토영전선성사(招討營田繕城事)를 겸총(兼 總)하니, 구신(舊臣) 김저(金佇)가 변안렬(邊安 烈)등과 더불어, 이미 쫓겨난 우왕(禑王)을 복위 (復位)시키려고 일을 도모하다가 발각되매, 공이 제일 끝에 연좌되어 당시 문하평리(門下評理)이 신 공 과 이 거 인 (李 居 仁 )등 2 7 인 은 외 방 (外 方 )으 로 유배되었는데, 공양왕 2년 좌헌납(左獻納) 함 부림(咸傅霖)을 보내 경주에서 국문 하니, 대간 (臺諫)이 소를 올려 법으로써 논하기를 청하므 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이 공을 잘 알기 때문에, 지(地)는 죄가 없으며 무함(誣陷) 이다고 변론해 주셨으나 구제되지 못하고, 횡천 (橫川)으로유배지를옮기게되었다. 또 윤이(尹彛), 이초(李初)가 김저(金佇)등과 같이 이성계 축출 모의를 명나라에 호소한 사건 으로 모두들 원방(遠方)으로 유배되었는데, 왕이 또 공을 의심하여 계속 계림(鷄林-경주)옥에 둘 려다, 청주(淸州)옥으로 옮겨, 국문을 받을 때 공 은 고문을 당하여도 자복하지 않고 말하기를 “내 나라의 국통지장(國統之將)으로써,그 절의가 민 망스럽지만 이시중(李侍中-이성계)이 장의(仗 義)하여 회군하매 내가 이곽(伊 꿀)의 고사(故 事)로써 시중(侍中-이성계)에게 풍유(諷諭)함 은 깊 은 뜻 이 있 음 인 데 , 다 시 어 찌 이 (彛 )와 초 (初)의 편당이 되리오”하고 말마다 반드시 하늘 에 맹세하니, 언사의 뜻이 감개하여 족히 사람을 감동함이 있었으나, 옥관(獄官)이 그 말을 취하 지않았다. 그래서 공이 물러나와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 를 “인생(人生)이 필경 한번 죽음은 있는 것이라. 생(生)을 어찌 족히 아끼리요, 다만 왕씨(王氏) 가 나라를 회복하였는데 죄가 없이 죽으니 이것 이 가히 애통하다”고 하셨다.이튿날 장차 엄중한 형으로 국문하려 하는데, 수재(水災)로 옥문이 무너져 형을 면하게 되었다.공양왕 3년에 위화도 회군의 공(功)을 책록할때, 45인중에 공은 여섯 째로 책록되어 2등 녹권과 밭 50결(약83정보)을 하사 받았다. 그 뒤 사헌부와 형조에서 아뢰기를 정지(鄭地)를 윤이, 이초의 무리에 연좌시켜 죽 임은 너무 원통한 일이며, 변안렬과 편당하였다 하여 죄에 연좌됨은 실로 무함(誣陷)됨이라 하 고, 드디어 석방하는지라. 우인렬(寓仁烈)등과 같이외방으로풀려났다. 그래서 광주(光州) 별저에 물러가 살으시다가, 이성계(李成桂)를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심 덕부(沈德符)를 문하시중(門下侍中) 공은 판개 성부사(判開城府事)로 불렸으나, 병(病)으로 부 임치 못하고 1391년 10월 15일 향년 45세로 별세 하셨다. 이에 이르러 공과 권중화(權仲化)는 모든 관직 이 복직되었으며, 조선 태종이 공의 공적을 협찬 하여,시호(詩號)를경열(景烈)이라내렸는데, 포의행강왈경(布義行剛曰景)이요. 취덕진업왈렬(就德進業曰烈)이라하셨다. 그리고 공의 묘소(墓所) 주위의 두루 15리의 땅과,제전(祭典)1결(結-5000坪)을 하사하셨다. 공의 업적은 역사에 남아, 인조 22년 공의 유지 인 광 주 시 동 명 동 (그 당 시 平 坊 ) 에 경 렬 사 (景 烈 祠)를 짓고, 고아주시와 유림(儒林)들이 봄가을 로 제향(祭享)을 올리며, 공의 묘비명(墓碑銘)은 소재(疏齋) 이이명(李 視命)이 쓰고, 황승원(黃 昇源)이지었다. /글정리븡사진=박상섭편집국장(parkss1012@ hanmail.net) 고려벽상공신박춘선생의사위 경렬 공정지장군 선조 유지를찾아븣 정지(鄭地)의결혼과사마시합격그리 고장인박춘(朴椿) 정지장군의사당경열사전경.광주광역시북구망월동산176(우측상단○정지장군과밀양박씨부인묘소). 정지장군존영 정지장군의생애 정지장군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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