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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6월30일 일요일 10 (제150호) 종합 한국의 마더 테레사라 불리는 원불 교박청수원정사가지난8일죽산박씨 충현공파 대종회에서 문중을 빛낸 유 공자로 공로패를 수상했다. 어린나이 에 원불교에 귀의하여 강남교당 등에 봉직하면서 교세확장은 물론 세계 55 개국을 활동무대로 삼아 빈곤층 구호 와 보건위생 환경개선, 지뢰제거 등 인 류의 복지향상을 위해 이타봉공(利他 奉公)의 정신으로 열거할 수 없을 정도 로 많은 봉사활동을 하였으며, 특히 불 우 청소년과 탈북청소년을 위한 대안 학 교 와 한 글 학 교 불 교 학 교 등 9 개 교 를 설립하여 인재교육에 힘쓰는 한편, 저 소득층 및 장애인을 위한 병원을 설립 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펼쳐 국민훈장 목련장, 호암상, 캄보디아 왕실훈장 외 다수의 상을 수상하고 노벨평화상 10 등 이내의 후보군에 올라 문중의 명성 을크게떨쳐소개해본다. 하늘살림한하늘사람박청수 본관은 죽산(竹山), 법호는 서타원 (誓陀圓),본명은 희숙(姬淑)이다.193 7년 11월 23일 전북 남원시 수지면 죽 산박씨 집성촌인 호음실 마을에서 아 버지 휘 정기(正基),어머니 김영순(金 永順)의 장녀로 태어났다.(충현공의 2 2世) 1945년 3월 27일 8세의 나이에 남 원원불교 수지교당에 입교하여 ‘淸秀’ 라는 법명을 받았다. 남원 수지초등학 교와 전북여자중학교, 전주여자고등 학교를 졸업했고, 원광대학교 원불교 학과에서 수학했으며, 홍익대학교에 서명예철학박사학위를받았다. 1956년 원불교 교무가 되기 위해 출 가하여 이후 사직교당, 원평교당, 우이 동수도원교당,강남교당에서교무로봉 직하고2007년강남교당에서퇴임했다. 원 불 교 에 발 을 들 인 6 0 여 년 동 안 북 인도 히말라야 라다크, 캄보디아. 스리 랑카, 아프가니스탄, 에티오피아를 비 롯한 세계55개국에서 무지·빈곤·질병 퇴치에 힘써왔고 북한동포, 조선족, 고 려인 등 해외 우리 민족들뿐 아니라 나 라 안에서는 시각장애인, 저소득층 어 린이, 한센병 환자, 새터민 등 국내 소 외계층을대상으로 지속적인 후원활동 을펼쳤다. 원불교 수위단원, 평양교구장, 우리 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 공동대표, 학 교법인 영산성지학원 이사장, 학교법 인 전인학원 이사장, 농어촌 청소년 육 성재단 이사장을 역임했고, 2000년 김 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때 초청 손님으로 노르웨이에 동행했 으며, 2010년 노벨평화상 최종후보 10 인에성정되기도했다. 55개국을돌며나눔을실천하다 1990년 상가세나 스님과 인연을 맺 고 인도 히말라야 해발 3,600m의 설산 라다크(Ladakh)에 1992년 마하보디 불교기숙학교를 개교했다. 시베리아 다음으로 추운 설산 사람들을 위해 우 리나라 따뜻한 겨울옷과 담요 및 솜이 불 등을 보냈고, 50개 병상의 종합병원 을개원했다. 학생들의 영구 장학금을 위해 30개 의 게스트 룸을 마련했고, 3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강당도 세웠다. 그리 고 3 0 여 년 간 돕 기 를 계 속 하 고 있 는 캄 보디아 바탐방에 2003년 무료 구제병 원을세웠고,전국토에묻혀있는지뢰 제거를 위해 영국 할로재단에 성금을 보내 스레암필 지역 33,012㎡(약1만 평)의 땅에서 지뢰를 제거하여 약 100 명의 인명피해를 막고 내전으로 고아 가 된 아이들을 위해 고아원을 세우고 5년간 식비를 지원했다. 또한 승려 장 학금, 단기 교사 양성기금을 지원했고, 시엠레아프·바탐방 지역 74개 마을에 식수해결을위해공동우물을팠다. 스리랑카에서는 1,000여 년 된 와타 라마 옛 사원을 중창 불사했고, 어린이 집을 설립했으며, 난민들에게 슬리퍼 3,000켤레,의류한컨테이너를보냈다. 베트남에서는 월남전 참전용사들과 월남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라이따이 한들의 결혼 비용을 지원하고 직장 출 퇴근용 자전거를 지원했으며, 그들이 가술을 습득할 수 있는 투덕직업훈련 원신축을위해후원금을지원했다. 아프리카 12개국에 한국국제협력단 을 통해 원주민을 위한 의약품을 지원 했으며,현지4개국을방문하여의약품 을직접전달하기도했다. 중국에서는 훈춘특수학교 장애인을 위한 교육시설을 세웠고, 연변대학교 에서는각종전집류,사전류등한글도 서 8,000여권을 보냈고, 경신희망소학 기숙학교에 침대 200개, 책걸상 200개 를 지원했다. 경신진중심소학교와 경 신중학교에 장학금을 지원하고 훈춘시 에대중문화발전기금을후원했다. 러시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했던 고려인들이 60년 만 에 다시 우르리스크로 돌아올 때 한인 촌 건설을 위해 3천만 원의 정착금을 지원했다. 우즈베키스탄의 아랄해 호숫물이 말 라 더는 농사지으며 살 수 없 는 고 려 인 들을 물이 많은 남부 러시아 볼고그라 드에 27채 농가주택을 매입하여 이주 시키는 등 많은 일들을 해와 지난해 ‘세상 받든 이야기 마더 박청수’ 다큐 멘터리 영화가 6월1일 오후3시 서울극 장에서 첫 상영을 시작으로 6월1일~5 일 서울 종로 서울극장, 9일 광주 아시 아문화의 전당, 10일~11일 전북 익산 시 원광대학교, 14일 전북 전주시 전북 대학교, 7월1일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상영되었다. 수상내역및저서 현대수필문학상,대한적집자사 박애 장(博愛章) 금장, 자랑스런 신한국인 상, 효령상(孝寧賞), 일가상(一家賞), 용신봉사상(容信奉仕賞),평화여성상, 국민훈장목련장, 호암상, 캄보디아 사 하메트레이 왕실훈장, 인도 암베드카 르국제상,만해평화상등을수상했다. 저서로는 ‘가다렸던 사람들처럼’ 19 89,‘마음으로 만난 사람들’1993,‘나를 사로잡은 지구촌 사람들’ 1998, ‘하늘 사람’ 2006, ‘마음눈이 밝아야 인생을 잘 살 수 있다.’ 2007, ‘더 마더 박청수’ 2007, ‘어머니가 가르쳐 준 길’ 2011, ‘박청수 - 원불교 박청수 교무의 세상 받든 이야기’ 2015, ‘박청수 세상 나든 이야기’2016등이 있다. 마더 박청수 원정사(圓正師) ■종친탐방 지난4월8일죽산박씨충현공대종회에서는박 청수 원정사(左)에게 문중을 빛낸 공로자로 선 정공로패를전달했다. 캄보디아 바탐 방에 구제병원을 세우고, 전 국토에 묻혀 있는 지 뢰제거를위해영국할로재단에 성금을보내스레암필지역에서 지뢰를 제거하여 약 100명의 인 명피해를막은박청수원정사께 서 지뢰사고로 다리를 잃은 캄보 디아인을위로하고있다. 사가에서 행하는 제사문화도 근본적인 형식 과절차는 유지하면서현실에맞게변화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성인종시속(聖人 從時俗)이란 옛말이 있는데 이를테면 성인도 그 시대의 풍속을 쫓 아 행하라는 의미다.즉,시대의 흐름에 순응하여 바람직한 풍속문 화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제사는 조상신으로 승화 한 선조의 혼령과 체백을 모시고 서로 교감하며 성심을 다하여 추 모하는 엄숙한 보본의례이다.제사의 기본정신은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조상을 받들어 모시는 것이다. 그래서 자손은 종신토록 대대로 제사를 통하여 선조에게 효도를 다하고 못 다한 봉양과 효 도를길이이어가는것이라했다. 우리 민족은 관혼상제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전승하여 고유의 전통의례로 발전시켜왔다. 이것이 바로 우리 민족만이 보존하고 있는 정신문화유산이다.그래서 우리는 동방예의지국 이라고 하였 다. 전통관혼상제는 구시대의 낡은 유물로 취급되고 사라져 가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그래도 제사는 일부분이나마 계승유지 되고 있어다행한일이다. 요즘 일부 가정에서 간혹 제사를 지내지 않는 사례가 있어 친족 간의 불협화음이 생기고 조상을 숭배하는 전통사상이 허물어지고 있다고 한다. 또한 제수비용부담 등으로 제사를 기피하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러나 제사는 반드시 지내야 하며 고인의 유덕 을 기리고 일가친척간의 돈독한 정을 나눌 수 있는 가족성전의 장 으로만들어야할것이다.그러나보통일반가정에서는직장,시간, 경제적 여건 등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로 제수준비에 애로사항 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그래서 제수는 정성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 므로 화려하거나 많은 수량보다는 간소화 하되 성의 정심이 중요 하다. 제수는 고인이 평소에 즐겨 드시던 음식으로 마련하고 현시 대의 새로운 음식으로도 바꿀 필요가 있고 또한 제수비용도 형제, 자매들이 공동 분담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어 젊은 신세대 들이 제사를 기피하지 않고 친근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 다. 또한 기제축문도 한글을 병기하여 젊은이들이 접근하기 쉽도 록배려해야할것이다. 젊은 자손과 부녀자들의 참례를 당연시 하고 조선중기 이후 성 리학의 정착으로 남존여비 사상과 가부장제의 영향으로 부녀자의 제사참례가사실상드물어졌다.이제는 시대가 변한만큼이것 또 한 부부공제와 남녀공제로의 전환과 함께 고쳐 나가야 만이 가장 한국적인 것이세계적인 것이라고 했듯이 우리만의 전통제사의의 의를 살리며 현실에 적합한 더욱 발전된 바람직한 제사문화를 조 성해 나가지 않을까 생각하며 본 종중회도 매년 부녀자들이 모여 제수장만 및 음식을 직접 만들던 것을 시대흐름에 따라 작년부터 는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인해 간소화하게 변화를 주었더니 종친 회원님들의 호응이 좋아서 앞으로 계속 변화와 개선을 함께 추구 해나갈것이다. 밀성박씨 충헌공파 경기도 고양시 원당종중회 -바람직한 제사문화로의 전환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박봉준명예기자 경기고양시지부 박두원 대위는 1926년 7월 5일 경상 북도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에서 출생했 다.1950년 9월 학도의용군으로 입대 인 천상륙작전 참전하여 1951년 공군소위 에 임관했다. 1952년 8월 2일 내금강지 역구 적 집결지 공격 중 지상포화에 의 해 피격 전사하여 국립서울현충원 안장 (17-8-066) 안장되고 을지무공훈장 추 서와함께공군대위특진했다. “내 조국은 내가 지키겠다” 박두원 대위는 전쟁이 한창인 시기에 F-51전투기 조종사가 되었다. 그리고 강릉기지로 배속 받았고 북한 일대의 비행장과 보급품 집적소 등에 수많은 폭격을 성공시켰다. 박두원 대위는 최 후의 공중작전으로 간성 북쪽에 위치한 보급품 집적소 폭파에 참가했다. 박두 원의 편대가 적군의 상공에 이르렀을 때 심한 비바람으로 시야가 흐렸고, 편 대는 일제히 목표물 부근에 폭탄과 기 총사격을 퍼부은 뒤 신속히 빠져 나왔 고, 적진은 화염에 휩싸였다. 그러나 적 의 목표를 찾기 위해 고도를 낮추었던 박두원 대위는 적의 대공포에 맞아 몰 던 전 투 기 는 검 은 연 기 를 세 차 게 내 뿜 으며 기체마저 심하게 휘청거렸다. “3 번기 신속하게 탈출하라!” 전봉희 편대 장은 기체에서 탈출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박두원 대위는 동해 상공까지 비행을 계속하였고 결국 비행기 전체가 불길에휩싸인채폭발하고말았다. 박두원의 어린시절과 비행교육 박두원 대위는 1926년 7월 5일 경상 북도 경주시외동읍 모화리에서 태어났 다. 그는 7세 때 동생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초등학교부터 그곳에서 공부를 시작하여 1943년 3월 일본 열도 남쪽 규 슈 사가현에위치한 사가중학교를 졸업 했다. 박두원 대위는 비행기 조종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 1943 년 4월 소년비행학교에 지원하였고, 당 시 대부분 어려운 집안형편 탓으로 한 국 학생들에게는 배움의 기회가 적었 다. 따라서 한국 한생들에게 있어서 비 행병이란 고등교육과 출세를 동시에 이 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인식되었고, 인기가 치솟아 조선인 청소년들사이에 서 경쟁도 매우 심했다. 어려운 관문을 거친 끝에 규슈에 위치한 비행학교에 입교한 박두원 대위는 지상교육을 마치 고 1943년 10월에 단독비행훈련에 성공 한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한 후에도 박두원 대위는 일본에 남아있었다. 어린 시절 일본으로 건너가 영주권을 보유하고 있 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일 본으로 건너갔기 때문에 모국어도, 문 화도일본쪽이더익숙하였던그였다. 학도의용군으로 6·25전쟁 참전 박두원 대위는 일본에서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하며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그런데 1950년 6월 25일 조국에 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접한 박 두원 대위는 주저 없이 조국을 위하여 학도의용군으로 지원했다.그러나 일본 과 유엔군의 사정에 의해 그의 참전은 계속 지연되어 박두원을 비롯한애국청 년들은 계속하여 일본과 유엔군에게 참 전을 하게 해달라고 호소하였고, 맥아 더사령부는 재일학도의용군을 인천상 륙작전에참전시키기로결정한다. 박두원 대위는 학도의용군으로 인천 상륙작전에 참전하여 북진작전에 투입 되었다.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전쟁 이 곧 끝나는 것 같았으나 중국군의 참 전으로 전쟁에서 조국은 또 다시 위기 에 처하게 되었다. 박두원 대위는 육군 헌병대에서 근무하던 중 소속 부대장인 헌병대장에게 그의 경력을 보여주며 공 군에서 조종사로 활약하겠다고 간청하 여 그는1951년 4월 1일 사관후보생 제1 6기로 입교해 1개월 간 교육훈련을 마 치고 군번 50945를 부여받아 공군소위 로 임관, 마침내 조국인 한국 공군의 전 투조종사가된것이었다. 당시 공군 소위 박두원이 배속된 비 행전대는 당시 한국 최초의 전투비행단 이었다. 그는 F-51전투기로 첫 출격을 시작했다. 이후 1952년 8월까지 5개월 동안 원산, 고성, 간성, 신안주 등지에 총89회출격했다. 1951년 7월 10일 휴전회담이 시작된 뒤, 적은 다시 공세를 강화하기 위해 대 규모 병력과 보급물자를 만주로부터 전 선으로 수송했다. 박두원 대위와 제10 전투비행전대 조종사들은 이를 놓치지 않고 북한 일대의 비행장과 보급품 집 적소, 보급로 등에 폭격을 대폭 늘려나 갔다. 6·25전쟁참전과최후의공군작전 당시 박두원 소위는 중위로 진급했 다. 그동안 전투 기량도 크게 향상되어 서 1급 조종사로 인정을 받았다. 그는 1 952년 8월 2일 동료 조종사들과 함께 적 이 대규모로 집결하여 있는 내금강지역 에 대한대대적인 공격작전에 투입되었 다. 8월 2일 이른 아침부터 비바람이 불 어오는 등 기상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8시 30분 예정대로 전봉희 소령이 지휘 하는 F-51전투기 4대는 적의 보급품 집적소를 폭파하기 위해 강릉기지를 이륙하였고, 이 때 박두원 중위는 제3 번기를 조종하며 간성 북쪽에 위치한 보급품 집적소 폭파에 참가했다. 적군 의 상공에 이르렀을 때 아침부터 불어 오던 비바람은 더욱 심해졌고 시야가 흐렸으나 전투기 편대는 악천후를 뚫 고 목표상공에 이르렀고 편대장기를 선 두 로 모 든 전 투 기 가 일 제 히 고 도 를 낮추었다. 순간 전투비행전대를 기다 리고 있던 적의 대공포탄이 편대기를 스치고 지나갔다. 박두원 대위의 전사와 추모 박두원 대위는 적의 목표를 찾기 위 해 고도를 낮추었고 그 순간 적의 대공 포를 직격으로 맞고 말았다. 박두원의 전투기는 흰 연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편대는 작전을 성공시키는 것이 우선이 었기 때문에 일제히 목표물 일대에 폭 탄과 기총 세례를 퍼부은 뒤 신속하게 빠져 나왔고, 작전대로 적진은 화염에 휩싸이게되었다. 박두원 대위가 몰던 전투기는 검은 연기를 심하게 내뿜고 기체마저 휘청거 렸다.“3번기 신속하게 탈출하라!”전봉 희 편대장은 박두원 대위에게 기체에서 탈출할 것을 명령했으나박두원 대위의 기체는 통신이 두절된 상태였고 홀로 동해 상공까지 비행을 계속하다 결국 비행기 전체가 불길에 휩싸인 채 폭발 하였다. 자신의 몸처럼 아끼던 비행기와 함께 마지막 순간까지 화염으로 휘감긴 채 추락한 박두원 대위를 구하려고 근처를 항해하고 있던 민간선박이 재빠르게 접 근했다. 박두원 대위는 구조되었지만 폭발로 인한 화상과 파편에 의한 상처 로 이미 숨을 거두었다. 내 조국의 위기 를 그냥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일 본에서 달려와 학도의용군으로 자원입 대했던 박두원 대위는 6·25전쟁의 소용 돌이 속에서 육군에 이어 공군 조종사 로 용맹을 떨치다가 26세 청춘을 조국 에바치고영원한보라매가되었다. 박두원 대위는 2002년 7월의 호국인 물로선정되기도했다. [양자 입적한 사후양자 유공자 지위 잃어, 1992.1.1. ‘국가유공자 등 예우에 관한 법률 개정으로 사후양자 제외, 형 평성어긋나] 박두원 대위의 양자 박성술 현종에게 뜻하지 않은 우편물이 도착했다. 1992 년 11월 1일부터 국가유공자의 유족이 될 수 없다며 국가유공자 유족 자격을 박탈하고 출가외인이 되어 버린 고인 딸 박봉연을 예우법 적용대상 유족으로 변경하여 등록하고 유자녀 수당을 지급 하고있다는내용이다. 박두원 대위는 슬하에 딸 하나 밖에 없어 조카인 박성술을 집안의 결정에 따라 대를 이을 양자로 입적하였고 호 적에도 올랐다. 그리고 유공자 유족으 로 등록되어 넉넉하지는 않지만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유공자 지위 박탈로 관계기관 에 수차에 걸쳐 탄원서를 제출하였으나 회신은 1990년 민법 개정(제4199호)으 로 사후 양자제도가 폐지되었고, ‘국가 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4457호)를 개정하여 1992년 1월 1일 부터 사후양자를 국가유공자 유가족의 범위에서제외하였다는것이다. 이는 형편상에도 어긋난 것으로 실제 양자가 제사를 모시고 있음에도 출가한 딸에게 지원한다는 것은 현실을 무시한 처사로 형평에 맞도록 개정하여 지원하 여 주 길 기 대 해 본 다 . ■6븡25특집 공군대위 박두원조종사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