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page

2019년5월31일 금요일 7 (제149호) 기획 - 인암선생문집 고찰 밀성박씨밀성부원군행산공파대동보편수위원장박수옥 밀성박씨 밀성부원군행산공파 (杏山公派) 신간대동보 편찬안 내 밀성박씨밀성부원군행산공파대종회는1997년정축보수보이후20여년이경과함 에따라최근새롭게개발된전자보서시스템을활용하여신간대동보를발간하기로 하 고2018년11월부터인터넷및우편등으로수단접수를진행중에있습니다.정해진 수보기간동안에가능한많은현종님들이동참하여소중한우리의혈통에대한근본 을 올바르게하고가보(家寶)로자손만대보전될수있도록적극적인협조를당부드립 니다. ◆수단접수기한:2019년4월 30일 ◆수단접수처: 인터넷:홈페이지www.hengsan.co.kr 포털사이트(네이버,다음)“행산원”검색 우편:경남거제시아주동해와루106동606호,박행산 문의:010-9689-2525, 사무실 055-731-1206,팩스055-731-1214,행산대동정보원 ※ 수 단 이 접 수 되 지 않은 종 원 은 전 자대 동 보에 등재되 지 않으 며 , 추 후 등 재 시 수 단 비 용 이 점 차 증 액될 예정이오니가급적정하여진기한내에완료될수있도록협조바랍니다. ※수단유사명단:◆편수위원장 박수옥(010-7402-6572) ◆ 찬성사지파 박수경(010-7918-7567),박규석 (0 10-9370-2358), 박진흠 (010-3541-2344), 박정현 (010-4331-9093) ◆ 광산지파 박정웅(010-8561-2747), 박 을수 (010-3572-3335) ◆ 풍산지파 박재화(010-2557-9317), 박인천 (010-3808-1909) ◆ 전주지파 박찬우( 0 10-8642-7276),박철균 (010-3251-7489)◆소윤공지파 박봉호(010-4655-1956),박광희 (010-4420-6822) ◆ 진사공지파 박경무(010-4952-1153),박종대 (010-7276-0607)◆대구광역시 및 경상북도 일원 박규석(010- 9 370-2358),박준석(010-3829-9809) ※ 각 소문중 별 수단유사가 정해지지 않은 종중은 빠른 기간 내에 유사를 추대하여 수보/발간에 도움이 되도록 협조하여 주시 면 감사하겠습니다.아울러,주변에계시는행산공파일가분들에게신간대동보발간소식을널리알려주시기바랍니다. 인암 박효수(忍庵 朴孝秀, 1906-19 96) 선생은 경상북도 청도 출신의 학 자이다.선생을위한학계(學契)는양 정계(養正楔)인데, 선생 생전인 1960 년에 계가 창설되었으니, 해수로 60 년전의일이다. 븮양정계첩帖븯은 추연 권용현(秋淵 權龍鉉)의 서문을 받아서 학음정(鶴 陰亭)에서 작은 책자로 간행하였다. 간행 당시의 계원은 87인이었는데, 그 후 추가로 입계하여 현재 195인이 되었으니,선생을추숭한사람들이많이늘어나서다행이다. 박효수 선생의 븮인암선생문집(忍庵先生文集븯은 선생의 조 카인 오왕 박희명(吾 素 朴熙明)의 헌신적인 노력과 편집으로 2002년에 선장본(線裝本)으로 간행하였다. 분량은 42권 22책 이다. 문집의 규모를 살펴보면 23개의 문체에 1,550편이 되는데, 문체별로 편수는 시(詩) 528, 서(書) 261, 잡저(雜著) 24, 서 (序) 99, 기(記) 99, 발(跋) 17, 명(銘) 43, 잠(箴) 2, 찬(贊) 3, 자사(字辭)4,상량문(上樑文)15,축문(祝文)17,제문(祭文) 70, 비병(碑銘) 35, 묘지명(墓誌銘) 4, 묘표(墓表) 20, 묘갈명 (墓碣銘) 280, 가장(家狀) 4, 유사(遺事) 2, 행장(行狀) 15, 전 (傳)6,송서(送序)1,가례초(家禮抄)1등이다. 또 1,550편의 구성 비율을 살펴보면 시(詩) 34.1%(528), 장 갈문(狀碣文) 23.2%(360), 서(書) 16.8%(261), 서발(序跋) 7 .5%(116), 기(記) 6.4%(99), 제문(祭文) 4.5%(70), 잠명찬(箴 銘贊) 3.1%(48), 잡저·자사·송서·가례초(雜著·字辭·送序·家 禮抄) 1.9%(30), 축문(祝文) 1.1%(17), 상량문(上樑文) 1.0% (15),전(傳)0.4%(6)의순이다. 필자는 이번에 인암 선생의 주요 행적과 문집의 내용을 간 략하게검토해보고,교훈이될만한몇편을살펴보기로한다. 박효수 선생은 밀성인(密城人)으로 자(字)는 원재(源哉), 호(號)는 인암(忍庵)이다. 두촌 박양무(杜村 朴揚茂)의 후손 이고, 경양재 박태고(景陽齋 朴太古:우암 송시열 문인)의 8세 손이다. 기호 학맥을 계승한 집안으로 아버지는 자초 박정곤 (紫樵朴珽坤)이고 어머니는 의흥 예씨(義興芮氏)로의재 예 대주(毅齋芮大周)의 따님이다. 1906년에 청도군 이서면 신촌리에서 출생하여 10세에 족숙 인 성암 박수곤(省庵 朴守坤)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20 세 때에 덕천 성기운(悳泉 成璣運, 1877-1956)의 문인이 되었 다. 덕천은 당시 지조 있는 선비였다. 그는 일제 때 호적을 반 대하여4차례구속된바있는항일의사(義士)였다. 이후 기호 학맥을 이은 극재 송병관(克齋宋炳瓘)에게 수학 하였다. 또 같은 고을의 복암 장화식(復庵 蔣華植, 1871-194 7)을 어른으로 존경하였다.복암은 면우곽종석( 뮐宇 郭鍾錫) 의문인으로학덕이있었다. 선생은 “일찍이 집안이 가난하여 전라도 보성(寶城)에 있 던 회봉 안규용(晦峯 安圭容)의 죽곡정사(竹谷精舍)에 우거 (寓居)하였는데, 낮에는 족형 박민수(朴敏秀)와 더불어 선현 (先賢)문집의 판각(板刻)일을 하였고,밤에는 고서(古書)를 읽었다고하였다.” 선생은 평생 ‘소학(小學)을 학문하는 근본[根基]’으로 삼 았고, 효행이 지극하였다. 학문과 덕행이 깊고 문장이 뛰어나 서 많은 명사들과 교유하였으며, 청도군 이서면에 학음서사 (鶴陰書社)라는서당을열어서많은 후학을 양성하였다. 61세회갑때‘효제돈목승선유후(孝悌敦睦承先裕後:효도 우애하고 일가친척 간에 화목하며, 선조를 잇고 후손을 넉넉 하게할것)’라는8자를가훈(家訓)으로삼았다. 선생은평소몸가짐과법도에맞는행동을하였다. 【規度甚嚴(규도심엄)법도를매우엄격히하고/古道而絶 流俗(고도이절류속)옛도로써세속을끊으며/必以靜掃一室 (필이 정소일실) 반드시 한 방을 고요히 쓸어내고 / 終日端坐 (종일단좌)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서/ 衣帶必飾(의대필식) 옷 과 띠는반드시매무새를가다듬고/手不釋卷(수불석권)손에 서책을놓지않았다.】 그리고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는 반드시 ‘주경 이립기본(主 敬以立其本:敬을위주로해그근본을세움)’을강조하였다. 1996년 12월에 졸하게 되니 향년 91세이다.장례는 이듬해 1 월에 유림장(儒林葬)으로 거행되었는데, 이를 보기 위해 전 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며 신문, 방송사 등에서 크게홍보를한바있다. 문집의 42권 22책에 대하여 내용 구성을 간략하게 살펴본 다. 권1-3에는 시(詩) 528편인데 차운(次韻), 공음(共吟), 감 음(感吟), 수운(壽韻), 만사(輓詞,) 증시(贈詩), 술회(述懷), 회고시(懷古詩) 등이 있다. 그 가운데 죽은 이를 슬퍼하여 지 은 만사(輓詞)가 214편으로 41%나 된다. 권4-12와권13의앞부분에는서찰261편이들어있다. 첫 권인 권4에 상서(上書), 답서(答書), 여서(與書)가 있다. 상서(上書)한서찰가운데선생으로칭한사람은성기운(成璣 運),송병관(宋炳瓘,克齋),박수곤(朴守坤,省庵)등3인이다. 어른[丈]으로 칭한 사람은 송철헌(宋哲憲), 송노헌(宋魯 憲), 송병기(宋秉夔), 김해수(金海洙), 안규용(安圭容), 예대 주(芮大周, 外祖), 장화식(蔣華植), 이임호(李林浩), 오진영 (吳震泳),전기진(田璣鎭),박계성(朴桂晟),유영선(柳永善), 서주현(徐周鉉), 김달(金達, 外舅), 한동유(韓東愈), 예종목 (芮鍾穆), 박순열(朴淳烈), 장병기(蔣炳璣), 남병우(南秉祐) 등이다.주로 기호학파의 사람들이다.이어서 정기연(鄭璣淵) 등에게보낸답서,박종섭(朴鍾燮)등에게보낸 여서(與書)가 있다.권4에는총40편이확인된다. 권5-12에는 김정곤(金定坤)에게 보낸 답서를 비롯하여 박 원규(朴元圭), 권용현(權龍鉉), 김희연(金熙淵), 이병하(李 秉河), 반재현(潘在鉉), 이수락(李壽洛), 최설영(崔卨永), 변 시연(邊時淵), 박순직(朴淳稷) 등에게 보낸 서찰 217편이 있 다.권13의앞부분에는자손에게권계(勸戒)하는편지이다. 권13의 뒷부분과 권14는 잡저(雜著)이다. 내용은 경서(經 書)의 요점과 상례, 제례 등 중요한 일들을 정리한 「간서잡록 (看書雜錄)」 상·하를 포함하여 「덕천선생어록(悳泉先生語 錄)」,「인암설(忍庵說)」,「가규(家規)」,「학음서사규약(鶴陰 書社規約)」 등 24편이 들어 있다. 이 가운데 「인암설(忍庵 說)」은 선생이 스스로 호를 취하게 된 내력을 기록하였다. 요 약해본다. 명(名 : 諱)과 자(字)는 ‘효수 원재(孝秀 源哉)’이니, 스승 성암(省庵)이 명한 바였다.극재 송병관(宋炳瓘)이 말하기를, “대저 효(孝)라는것은 모든 행실의 근원이 된다(孝者百行之 源).성암이 후학들에게 정진하도록 권한 것이 참으로 거룩하 도다.”라고 하면서 ‘백당(百堂)’을 별호로 삼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그러나부모께효양(孝養)하지못했다는 부끄러운 마 음이 생겨서 사용하지 않았다. 갑신년(1944)에 『맹자(孟子)』 의 ‘동심인성훈(動心忍性訓)’을 취하여 ‘忍庵’이라고 스스로 호를삼았다. 동심인성(動心忍性)은 『맹자』, 븮고자하(告子下)븯에, “하늘 이 장 차 어 떤 사 람 에 게 큰 임 무 를 내 리 려 할 때 는 , 반 드 시 먼 저 그의 마음과 뜻을 괴롭히고, 그의 힘줄과 뼈를 힘들게 하 며, 그의 육체를 굶주리게 하고, 그의 몸을 궁핍하게 하여 그 가 행하는 일마다 어긋나서 이루지 못하게 하나니,이것은 ‘그 의 마음을 격동시키고 성질을 참게’[動心忍性] 하여 그가 능 하지못한바를더잘할수있게해주려함이다(天將降大任於 斯人也 必先勞其心志 苦其筋骨 餓其體膚 窮乏其身 行拂亂其 所爲是故動心忍性增益其所不能.)”라는 말을 취한 것이다. 권15-16은 「도주향규계안서(道州鄕規契案序)」를 포함하 여 계안, 문집, 실기, 시고, 세고 등의 서문 99편이다. 권17-19 는 「숭성재중건기(崇聖齋重建記)」, 「영동향교중수기(永同 鄕校重修記)」를포함한정자,재실등의기문99편이다. 권20에는문집,계첩,족보 등의발문(跋文)17편이있다.그 리고 명·잠·찬·자사(銘·箴·贊·字辭)는 52편이 들어 있는데, 몇편을살펴본다. 「송담명(松潭銘)」은공자가말씀한“날씨가추워진다음에 야 송백이 뒤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歲寒然後 知松 柏之後凋也).”의 뜻을취하였다. 「오왕명」은 『논어』, 「자한(子罕)」 편에서 “비유하자면, 산 을 만들 적에 마지막 한 삼태기의 흙을 붓지 않아 산을 못 이루 고서 중지하는 것도 내 자신이 중지하는 것과 같으며, 평지에 흙 한 삼태기를 부어 산을 만들기 시작해서 점점 만들어 나가 는 것도 내가 해 나가는 것과 같다(譬如爲山未成一 雷 止 吾 止 也譬如平地雖覆一雷 進 吾 素也).”라는말을취한것이다. 「낙와명(樂窩銘)」은 안자(顔子)의 ‘안빈낙도(安貧樂道)’ 의뜻을취한것이다. 자사(字辭)는 박순옥(朴淳玉 : 敬執), 이정욱(李政煜 : 孝 汝), 윤상목(尹相木 : 仁汝), 조해식(曺海植 : 學哉) 등에게 준 글인데이름이헛되지않게생활하기를권면할글이다. 권21에는 ; 「차산서원상량문(車山書院上樑文)」 등 상량문 15편과 「계동사봉안문(啓東祠奉安文)」, 「백원서원복설봉안 문(百源書院復設奉安文)」등축문17편이다. 권22와 권23의 앞부분은 제문인데 덕천선생 제문, 복암(장 화식)제문,술당(述堂:李匡基)제문,자은(紫隱:金容洙)제 문 등 70편이 들어있다. 권23의 뒷부분과 권24는 븮신라일성왕릉비(新羅逸聖王陵 碑)븯,최경산(崔耕山)의 븮충효각비(忠孝閣碑)븯를 포함하여 묘 정비(廟庭碑),제단비(祭壇碑),유적비(遺蹟碑)등 비문 35편 이다. 권25는 묘지명(墓誌銘) 4편과 묘표(墓表) 20편이다. 권26 으로부터 권36의 앞부분까지는 묘갈명(墓碣銘)인데 「일봉예 공[예시구]묘갈명(一峯芮公[芮時龜]墓碣銘)」을 포함하여 2 80편이다. 그 중에는 율암(栗庵 : 芮周伯), 야우(野迂 : 徐周 鉉), 추연(秋淵 : 權龍鉉) 등의 묘갈명이 있다. 권36의 뒷부분 에는 가장(家狀) 4편이 있다. 이러한 장갈문(狀碣文)은 주로 영남지역사람들이청탁한것이다. 권37은 선생 선대의 유사(遺事) 2편, 선대의 행장(行狀) 및 지인들이 청한 행장 15편이다.권38에는 전(傳)6편,「송 질자 [박희명] 출군서(送姪子[朴熙明]出軍序)」 1편, 부편(附篇) 된선생의가장(家狀),묘갈명등이있다. 권39-40에는 「가례증해간초록(家禮增解簡抄錄)」과 발문 (跋文)2편(朴熙明,張仁鎭)이 있고,권41-42는 부록(附錄)으 로 만(輓)115편,제문 52편이 실려 있다. 선생은늘그막에그형제자질들과함께도산서원에알묘하 고시를남겼다.「알도산서원(謁陶山書院)」시를 본다.(1982 년,77세) 『兄弟幷行子姪携(형제병행자질휴) 형제와 자질(子姪)을 대동하고/ 陶山院下走臨同(도산원하주임동) 도산서원으로 빠르게 갔네./豆 븅百世齊明地(두변백세제명지)제향 받들고 백대토록 정성을 다하며/ 江漢千秋曝濯中(강한천추폭탁중) 높은 도덕 천추토록 추모한 곳이었네./ 滿室圖書留手澤(만실 도서유수택)광명실 가득한 도서는수택(手澤:선생손때)남 아 있고/一庭和氣帶春風(일정화기대춘풍)뜨락의 온화한 기 운은 춘풍을 띠고 있네./ 景慕平生今謁廟(경모평생금알묘) 평생토록 경모하여 이제 알묘(謁廟)를 하며/微軀敢曰盡丹衷 (미구감왈진단충)미천한몸으로감히단심을다하였네.』 이처럼인암선생은평생토록숭모해온퇴계 선생을알묘하 여 대동한 형제 자질들에게 퇴계 선생의 경(敬) 정신을 본받 도록체험교육을한것이라고하겠다. 자손에게훈계한글1편을요약해본다. 의절(儀節)은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에 의하고, 서책 을 소중히 하며, 상례는 3년상으로 하고 제례는 엄숙히 하며, 묘제는 10월에 행하고 산신제는 3헌(獻)을 하도록 하였다. 자 제가 부모를 뵙게 되면 반드시 절을 하며,자제가 형편에 구애 되어 신학(新學)을 하더라도 때때로 효제충신(孝悌忠信), 예 의염치(禮義廉恥)등을가르치라고하였다.교육에있어서맏 아들은 신학(新學) 졸업 후에 취직하지 말고 집에 있으면서 옛 책을읽고 경전(耕田)을 겸하면서가업(家業)을 지키게 하 였고, 중자(衆子)는 취직하더라도 5-60세 이후에는 반드시 귀가하여 서·농(書·農)을 겸하게 하였다.여자는 신학문을 하 는 것이 부당하지만 세속으로 인해 불가피하다면 중학교 졸 업 후에 집에 있으면서 여행(女行 : 여자의 행실)을 배우라고 하였다. 부자, 형제, 부부 간에는 순후하고 경근함을 갖도록 힘쓰되 만약 의리를 범하고 강상(綱常)을 무너뜨리거나 사당 (邪黨:예수,부처,잡교)에들어가면반드시종회(宗會)로벌 을 주는데, 만약 고쳐지지 않고 2차, 3차 벌을 주어도 잘못을 뉘우치거나 고치지 않으면 사당(祠堂)에 고한 후에 족보에서 이름을 지워서 친족 관계를 끊도록[割譜] 하였다. 남들과 사 귐에있어서는언어를신중히하여화(禍)를일으키는근본에 이르지 말도록 하였고, 무당[巫人]의 말은 믿을 수가 없으니 마땅히정의로지킬것을당부하였다. 학문을 이루는데 어려운 장애물로는 객기(客氣 : 血氣가 넘 쳐서 나타나는 용기), 사의(私意 : 사사로운 개인의 의견), 속 습(俗習:속된습속)등3가지를지적하였다. 「잡저(雜著)」를 보면 대개 제자들에게 권면한 글인데, 몇 편에서그요점을살펴본다. 나이가 들어서 뒤늦게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순경(荀卿)과 주운(朱雲)이 만학(晩學)을 했음에도 큰 유학자가 된 사례를 들고, 비록 뒤늦게 배우지만 대학,중용,논어,맹자 등의 사자 서(四子書)를 열심히 읽으면서 “사물을 궁구하고 실천[窮格 踐履]하는데힘쓰라.”고하였다. 「면학설(勉學說)」에서는 “어진이(賢人)를 보면 그와 같이 되기를 생각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보면 안으로 자신을 살 펴보아야 한다(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라는 븮논어 븯의내용을들어서배움에힘쓰라고당부하였다. 또 송 나 라 주 희 (朱 熹 )가 븮논 어 븯를 평 생 토 록 읽 은 것 은 대 개 ‘효제충신(孝悌忠信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에게 공손하고 임 금에게 충성을 다하고 친구에게 신의를 지키다.)’을 주장한 것이므로, 그대는 이 책을 열심히 읽어서 효제(孝悌)의 도리 를다하라고하였다. 「인 설 (仁 說 ) 」을 보 면 인 도 ( 仁 道 )는 지 극 히 큰 것 이 므 로 배 우는 사람들이 진실로 인(仁)을 구할 요체[求仁之要]는 본심 을 잃지 않는데 있다고 전제하고,학문의 도(道)는 다른 데 있 지 않고 그 방심(放心)을 구할 뿐이니, 부디 힘쓰고 힘쓰라고 하였다.끝으로 조카(朴熙明)에게 보인 것으로,조선(朝鮮)에 서유교가부진한원인이되었다고한글을살펴본다. “유교의 진리는 ‘천명을 성(性)이라 하고, 성(性)의 따름을 도(道)라 하고, 도(道)의 닦음을 교(敎)라 한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라는 데 있다.도를 닦고자 하는데도 앞장서서 이끌어가는 자가 없으면 행하지 못하는 까닭이므 로 , 그 성 ( 性 )을 다 할 수 있 게 하 늘 이 반 드 시 군 주 [君 師 ]를 위 해 명을 내는 것이다. 이로써 살펴보면 임금은 정·교(政·敎) 의겸권(兼權)이있는데,이는곧덕있는사람이그자리에처 하면서 인도하고 가르쳐서 백성으로 하여금 요순·우탕(堯舜· 禹湯)의 시대와 같이 교화되게 하는 것이다. 정·교(政·敎)의 겸권(兼權)이 있는 것이 중엽 이래에는 패왕이 전제(專制)를 하여 말끝마다 반드시 정·교(政·敎)로 자처하며 도덕을 숭상 하고 절의를 주창하는 등의 일로써 농간을 부려서 몸과 자리 를 보호하는 술책이 되었다. 이에 유교가 도리어 정치의 이용 물이되었을뿐이다. 우리나라또한중국의제도를모방하여이로써그것을행하 였다. 이른 바 유교인(儒敎人)이라 하는 자는 유교의 진리를 믿지 않고 한갓 ‘임금의 도덕 숭상과 절의 주창’을 문벌(門閥) 의 과장(誇張)의 자료로 삼으며, 성인(聖人)의 책을 읽는 것 이 과거(科擧)를 거쳐 발신(拔身)을 소망하는데 있었다.이른 바 유가의 류는 한갓 정부를 믿고서 거짓으로 유교인이라 일 컬었으니, 급기야 정부가 도괴(倒壞)되니 유교 또한 정부와 더불어서 함께 도괴된 것이다.비유를 하면 ‘노인이 벽에 의지 하여 앉았다가 벽이 무너지니 사람도 함께 넘어지는 것’과 같 은 것이다. 소망하던 과거제도가 이미 폐지되었으니, 이른 바 유자(儒者)라고 이름만 빌린(假名) 사람들의 독서 소리 또한 귀를 씻어도 들리지 않는다.성현(聖賢)의 경전(經傳)에 좀벌 레가 갉아먹음이 이와 같으니, 어찌 [儒敎]가 진작되기를 바 라겠는가. 500년래에 독신(篤信)한 군자가 배출되지 않은 것 은 아니지만, 나라가 망한 후에는 유교의 닦음도 따라서 망한 것이다. 믿는 바가 과거(科擧)에 있었지, 교리(敎理)에 있지 않았던까닭이다.”이글을보면학문을함에있어서는위인지 학(爲人之學)이 아닌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해야 한다는 것 을 강조한 것이다. 오늘날 윤리 도덕성의 회복과 실천 유학의 필요성이제기된다. 인암 선생의 문집은 42권 22책이나 되는 방대한 저술로서 가치가 있다. 이번에 필자는 권별로 편성되어 있는 주요 현황 과일부의내용을살펴보는데그쳤다. 선생이 훈계 권면한 글의 경우는 시대 변화로 인하여 수용 할 수 없는 내용이 많다.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취사선택할 점 이있을것이니,취하여본받아야할것이다. 선생은 기본 서적으로 논어를 강조하기도,또는 대학,중용, 논어, 맹자 등 사자서(四子書) 읽기를 권장하였고, 효제충신 (孝悌忠信)과 궁리실천(窮理實踐)을 제시하였으며, 학문은 위기지학(爲己之學)을강조하였다. 선생의 글 중에 만사(輓詞)가 214편이다. 만사는 망인이 살 았을 때의 공덕을 기려 좋은 곳으로 갈 것을 인도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선생은 평소 당색 불문하고 교유하던 사람들을 예 로써 대하면서 품성을 파악해 두었기에, 사후에도 그들을 칭 송하며 명복을 빈 것이니, 선생의 애인정신(愛人精神)이 드 러난다고 하겠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 지인, 후학들이 지어 올린 만사 115편, 제문 52편 또한 의미가 있는 표상이니, 사표 (師表)가된다고할것이다. 우리 양정계 계원들은 선생을 추모하고 계원 간에 정의를 나누면서 특히 븮주역븯의 「몽괘(蒙卦)단(彖)」에 “어렸을 때에 바르게 교양됨이 성인의 공부이다(蒙以養正 聖功也).”라는 말 을 잘 새 겨 서 이 정 신 을 자 손 들 에 게 잘 전 하 도 록 노 력 해 야 할 것이다.끝으로 양정계 계원의 현황을 살펴보니 195인이었 다. 성씨와 본관(本貫)은 29개 성씨에 41개 본관으로 파악되 었다. 인암박효수선생의문집내용과가치 장인진교수 뱚1.서언 뱚2.인암선생의행적 뱚3.문집의주요내용 뱚4.자손훈계와후학권면 뱚5.결어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