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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5월31일 금요일 4 (제149호) 관향조 종친회 경북 군위군 부계면 가호2리는 본래 의흥현 현내면 지역으 로 고종 32년(1895년)의흥현이 군으로 승격하면서의흥군현 내면에 속하게 되었으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 라 의 흥 군 이 의 흥 면 으 로 개 편 되 어 군 위 군 에 속 하 게 될 때 가 호동(佳湖洞)에 속하게 하여 부계면에 편입되었으며, 동림 (桐林)은 동쪽에숲이우거진곳이라해서 동림(東林)이라 했 다 하기도 하고, 고려시대에 동림사(桐林寺)가 있었기 때문 에붙여진이름이라하기도한다. 구산박씨는구산군의묘소와재사무검재가있는군위군의 흥면 수북리를 중심으로 읍내리,우보면 이화리,미성리,군위 읍 서부1리, 부계면 가호리 동림마을 등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동림마을 입향은 구산군(龜山君)의 11세손 휘 금화(琴華) 공께서 어지러운 난세를 피해 의흥면 수북리에서 1670년 경 입향 350년 세거이후 14世에 전해지고 전국 400여가구로 번 성하였다. 입향조의 휘는 금화(琴華)자(字)는 성조(聖調),본관은 구 산(龜山)으로직(職)은증(贈)통정대부군자감정이다. 구산군(초휘 석보, 개휘 횡)은 고려말에 형 정국군(휘 위) 과 함께 대마도의 적을 토벌하는데 큰 공훈을 세워 구산군(龜 山君)에 봉해져 후손들은 관향을 밀성에서 구산(龜山)으로 삼게 되었으며 사림의 공의(公儀)로 구음서원, 구암사, 충북 옥천원덕사, 밀양고법 경현사, 무검단에 배향되었으니 입향 조의12대조이다. 고조부 휘 전(諱 詮, 호 明溪)은 명종7년(1552년) 사마시 (司馬試)에 등과(登科)한 생원(生員)으로 입신양명을 멀리 하고 은거임천(隱居林泉)하여 정자(亭子, 水閣)를 건립하고 후진양성에전념하였다. 증조 휘 문연(文淵), 조부 휘 경우(慶祐) 公은 효행과 학문 을 겸비했으나 역시 은거하여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으며, 아 버지는휘훈(燻)이고어머니는하양허씨이다. 입향조인 휘 금화(琴華) 공은 인조25년(1647년) 의흥 수북 리 본재에서 태어나 7세에 동몽선습을 수학함에 수주(數週) 만에 전편을 풀어 익히고 이어 소학을 학습함에 소리 내어 읽 음(讀誦)에 부모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는 법도(事親敬長) 의 도리를 실천하고 그 내용을 필사하여 서법의 기초까지 체 득함에모두가소학동자라하였다. 1672년(壬子)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생원으로 장래가 촉망되었음에도 입신양명의 길을 저버리고 은거함에 고조부 의영향인듯하다. 당시 광해군의 폭정으로 인조반정이 일어났고 효종과 현종 숙종에 이르기까지 안으로는 사색당파로 온 나라가 어지러웠 고, 밖으로는 청(후금)이 정묘년(1627년) 병자년(1636년) 2 번에 걸쳐 침공하여 삼천리강산이 피로 물들었으며, 청의 수 탈 이 말 로 다 할 수 없 고 각 문 중 의 귀 중 한 자 원 인 인 재 를 징 집하고 처녀를 공출하는 등 그 피해가 날이 갈수록 심화되었 던 격동기에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대대로 공명을 멀리하고 오로지 후학양성에 매진하는 웃어른의 행의를 지켜보며 성장 하였을 것이기에 어느때 어떤 변을 당할지 몰라 집안 어른들 의권유로고향을등지고그나마안전한임천(林泉)의동림으 로이주하게되었다. 동림으로 이주 후에도 비록 거처가 궁벽(窮僻)하고 가산이 청한(淸寒,매우가난함)하나양친시봉(侍奉)에정성을하였 으며, 사상장제(事喪葬祭)를 시종 주자가례에 따라 봉행하였 으며, 예전에 살던 집(故居)이 멀어도 숭조 애종의 행사에 소 홀하거나 불참한 적이 없었다. 험난한 세태를 멀리하고 오로 지 전원의 자연을 벗 삼아 자손 훈도와 후진육성에 최선을 다 했다. 때문인지 입향 350여년이 지난 지금에 후손들은 추보재를 중심으로 추원보본하고 돈독한 정을 나누며 효우(孝友) 충신 (忠信)하니 지역에서도 가벼히 여기지 아니하고 토호세족으 로 남다른 대우가 뒤따라 명문가로서 책임과 의무 또한 다하 고있어귀감이되고있다. 추보재는 경북 군위군 부계면 가호리 279번지에 소재한다. 구산군(龜山君)의 11세손 휘 금화(琴華) 공께서 동림(桐林) 마을 입향 이후 일가를 이루면서 덕을 쌓아 인재를 양성하고 훈육하여 문풍(文風)이 일어나 마침내 입향조로 부터 4대에 걸쳐 군자감정(軍資監正), 공조참의(工曹參議), 한성부좌윤 (漢城府左尹), 영의정(領議政)의 관직이 증직되어 인근에서 그 공적을 찬양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자손들이 조상의 유덕 을 널리 후대에 알리고자 일문중이 분연히 일어나 조상이 기 거하시던 곳에 중시조(中始祖)의 15세손 휘(諱) 두동(斗東, 호星山)의재사(齋舍)를건립하고자마음을모았다. 재호(齋號)를 추보(追報)라 함은 사자소학 “追遠報本 祭祀 必誠”집자것이다. 이는 항상 조상의 덕을 생각하며 제사에 정성을 다하고 자 기가 태어난 근본을 잊지 않고 은혜에 보답하라는 의미이기 도하다. 수년간에 걸친 피나는 열정과 노력 끝에 1946년 현재의 위 치에 대지 150평, 건평 50여 평의 재사를 마련하는 역사를 이 루었다. 이는 자손들의 본보기가 됨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뿐 만 아니라 자손들의 효도를 더욱 돈독히 하고 조상의 유덕을 길이빛나게한쾌거라고아니할수없다. 초창기의재사는볏짚으로된지붕이라쉬이건물이상할까 문중에서 염려하여 다시 기와로 교체하기로 하고 3년 후인 19 49년에기와로교체하였다.(1차정비) 문중에서 재사를 쓸고 닦고 다듬고 하여 관리에 최선을 다 하였으나 지은 지 30여 년이 경과함에 따라 마루,기둥의 색이 퇴색하고 기와는 낡아 떨어지고 누수위험이 있어 1970년도에 기와를교체하였다.(2차정비) 2 차 정 비 후 3 4 년 이 흘 러 기 와 는 낡 아 떨 어 진 곳 이 여 러 군 데 있고 처마부근 누수,남측 툇마루는 낡았고,벽체는 떨어지 고, 문틀 뒤틀림, 문살 일부 망실, 대문간은 서측으로 많이 기 우러져 있어 전 문중원의 결의 및 참여로 2004년에서 2005년 까지2년간에걸쳐3차정비하여지금에이른다. /박광옥명예기자(대구광역시) 구산박씨집성촌군위군부계면가호2리(동 림마을) 뱚집성촌 탐방 뱚입향약사 입향조묘역 뱚추보재(追報齋) 추보재 200여명의 문하생을 배 출 하 는 등 유 학의 계승발 전과 인재양 성에 힘써온 인암 박효수 (忍菴 朴孝 秀) 선생의 학덕을 추모 하는 후학들 의 모임인 양정계회(養正契會)가 지난 11일 오전 11시 경북 청도군 이서면 신 촌리 척첨당(陟瞻堂)에서 계원(契員) 과 지역 유림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 데열렸다. 이날 총회는 손자인 철규 성균관 부관 장(전 시조왕릉참봉)의 환영사에 이어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장인진 교수 (문학박사)의 ‘인암 박효수 선생의 문집 내용과 가치’ 특강, 예병순 유사의 인사 말, 결산보고, 기타토의 순으로 이어졌 다. 장손인 철규 성균관부관장은 바쁘신 중에도 불구하고 원근에서 “인암 박선 생 추 모 양 정 계 회 ”에 많 이 참 석 해 주 셔 서 감사드린다고 말하고 2년마다 양정 계회를 개최하는데 저의 부친께서 별세 함에 따라 3년 상이 지난해 11월 30일 끝 나고 오늘 모임을 갖게 되었다며 환영사 에갈음했다. 예병순(前 청도향교 전교) 유사는 선 생의 높은 학덕을 추모하는 일에 소홀함 이없도록노력하자고말했다. 양정계는 인암 선생 생전인 1960년에 계가 창설되었다. 『양정계첩(養正楔 帖)』은 추연 권용현(秋淵 權龍鉉) 선생 의 서문을 받아서 학음정(鶴陰亭)에서 작은책자로간행하였으며,간행당시의 계원은 87인이었는데, 그 후 추가로 입 계하여 현재 195인이 되었으니, 선생을 추숭한사람들이많이늘어나고있다. ▶관련기사7면 /박상섭 편집국장(parkss1012@hanmail. net) 인암박효수선생추모및양정계회(養正契會 )성료 1997년선생타계유림최고의예우유림장(踰月葬)치러븣42권22책문집남겨 인암 박효수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한 행사가 지난 11일 개최되었다. 사진 예병수 유사가 내빈을 소개하고있다. 인암 박효수선생존영 고려 불사이군의 충절을 보인 송은 선 생과 두 아들 아당공·졸당공의 높은 학 덕을 기리려는 지역 유림들의 발길이 이 어진 가운데 지난달 20일(음3월 中丁) 신계서원 정충사에서 유학자 문영환(文 泳煥, 산청 신안) 선생의 집례로 숭혜전 김세환(金世煥, 진주) 참봉이 초헌관으 로 헌작하고 뒤이어 유학자 강옥현(姜 玉鉉, 사천), 김수만(金樹晩) 선생이 각 각 아헌관과 종헌관으로 헌작하고 하일 규(河日逵,단성)축관으로 독축으로 40 여분에걸쳐엄숙봉행되었다. 이날 제향은 참례하는 유림인들이 각 자 도포를 지니고 제례에 참석 엄격한 절차와 전통예절을 속에 진행되어 전통 문화가 퇴색되어 가는 현시대에 많은 귀 감을남겼다. 신계서원(新溪書院)은 경상남도 산 청군 신안면 문대리 진태마을에 고려시 대 8은(八隱)의 한분이신 충숙공 송은 박선생(忠肅公松隱朴先生)을 주벽(主 壁)으로 모시고, 예조정랑 아당 박선생 을 동배위로 모시고, 이조참판 졸당 박 선생을 서배위로 모시고 있는 정충사 (貞忠祠)가 있다. 창건은 단성(丹城)의 유림들과 단계 (丹 溪 )에 살 던 후 손 상 채 (後 孫 尙 采 )와 그 외 운잉(雲仍)들의 협력으로 경영 (經營)하기를 1836년(丙申 헌종2)에 시 공(始工)하여 1869년(己亥)에 工役)을 마쳤다. 헌종 5년(1839) 신계서원 정충 사(貞忠祠)에 송은 박익선생을 주벽으 로 영정(影幀)을 봉안하고 아당(啞堂), 졸당(拙堂) 두분의 배행하고 춘(春) 3 월 추(秋) 9월 중정(中丁)에 유림에서 봉향(奉享)하였다. 1868년(고종5 무진(戊辰))에 조정의 서원 철폐령으로 인하여 모든 서원이 훼 철되니 신계서원 역시 1871년(辛未)에 훼철됨으로 향사 받드는 일이 중단되고 선생의영정또한봉안하지못하였다. 1875(고종12 乙亥)년에 子孫들의 합 모(合謨)로 응봉산 중턱 현 위치에 영정 각(影幀閣) 3칸과 세한재(歲寒齋) 3칸 을 건립하여 송은선생의 영정을 봉안하 고 후손들이 춘추로 향화(香火)를 받들 었으며 학당(學堂)으로 이어졌다.그 후 1917(丁巳)년에 향중(鄕中)의 유림들 의 공의(公儀)로 송은선생 위판(位版) 을 복설(復設)하여 3 월 중정일에 석채 례(釋菜禮)로봉향했다. 1985년(乙丑) 3월 채례시(菜禮時)에 유림들이 신계서원을 복원하자는 공의 (公 儀 )가 있 은 뒤 후 손 들 이 그 일 을 맡 았고, 유림들이 도와 經營하니 사우3칸 과 내삼문 그리고 대문3칸을 중건하고 주위를 정화했으며 제기 18점이 지방문 화재 제135호로 지정되어 관리당국에서 문화재 보호각(東齋)3칸을 중건하였으 며 원우(院宇)를 번와하고 보수를 하였 다. 1989년 3월 11일 신계서원 복원을 조 성하니 송은 선생을 주벽으로 봉안하고 아당,졸당두분선생을배향하여3월중 정일에배향한다. /박순제명예기자(경남산청군지부) 산청신계서원춘향봉행 송은박익선생과두아들 아당·졸당공3부자높은학덕기려 신계서원춘향이 지난 달 20일봉행된가운데지역유림들이 아침일찍모여개좌를열고있다.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 시 왕명 을 받아 승지 최온과 같이 호남에서 의 병을 일으켜 상경하니 주화파(主和派) 들의 건의로 강화(講和)되었다는 소식 을 듣고 통곡하며 시를 짓기를 븮偸生非 是 男兒事(투생비시 남아사) 억지로 살 고 자 하 는 것 이 사 내 가 할 일 이 아 니 다 愧恨不從 三學士(괴한부종 삼학사) 삼 학사를 따라죽지 아니함이 부끄럽구나븯 하고서 곧 남쪽 산동(山洞) 고향(故鄕) 으로 돌아와서 호를 무은(霧隱)이라 하 고 은거한 무은공(휘 세중)의 춘향이 지 난 달 25일 전북 남원시 대강면 풍산리 곡촌마을 풍양사(부조묘)에서 방계후 손인 본보 상섭 편집국장의 집례로 용 식, 상준, 윤석 현종이 각각 헌작하고 순 정회장의독축으로봉행되었다. 무은공은 고려 벽상공신 박춘 선생의 8세손으로 광해10년(1618년)戊午年 23 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인조원년(1623 년)인조개옥(仁祖改玉)에 참여하여 정 사원종공신(靖社源從功臣), 인조 2년(1 624년)甲子年 4월8일 어모장군(御侮將 軍) 행 월관진(行月串鎭)수군첨절제사 (水軍僉節制使)로 이괄(李适)이 변란 을 일으켜 서울로 쳐들어오니 대가(大 駕 : 어가)가 공주(公州)로 옮겨갔을 때 황급해서 옥새(玉璽 : 임금의 인)를 빈 궁중에 두고 나왔다. 그러나 누구하나 칼날을 무릅쓰고 먼저 들어갈 자가 없으 되 공이 앞장서 나와 돌격을 하니 드디 어 옥새를 받들고 와서 행재소(行在所 : 임금님이 임시로 있는 곳)에 갔다 바쳤 으며난을평정하는큰공을세웠다. 1625년 4월 12일 교권지(敎權知) 훈 련원 봉사겸 절교위용양위 부사과를 거 쳐 1625년 7월 26일 진무원종공신 2등 녹권과 어명상사(御命賞賜) 노비를, 16 25년 9월 01일 정사원종공신 1등 녹권과 어명상사(御命賞賜) 노 비를 각각 받았 다.인조6년(1628년) 무진년 6월25일 어 모장군 행 훈련원 부정, 등 주요관직을 걸쳐 인조 13년(1635년)乙亥年 12월 25 일 가선대부행호분위부사맹겸 내금위 장을역임하였다. 숙종8년(1682년) 壬戌年에 부조묘지 전하여 1686년 을축년에 전북 남원시 대 강면 풍산 261-3번지에 풍양사를 건립 하고, 2000년 6월 23일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풍양사)제155호로 지정받았다. /박흥식명예기자(광주광역시) 무은공박세중장군부조묘시향봉행 진무원종·정사원종공신으로 병자호란에창의 박춘식 현종(신라오능보존회 서울특별시본 부 부회장)의 장남내외가 미국 유수의 대학교에 서 기계공학박사와 교육학박사 학위를 취득하 였다. 장남인 형채 박사는 서울과학고등학교와 서울 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삼성장학회의 장학 생으로 미국 스텐퍼드대학교에서 석사와 박사학 위를 받고, 실리콘밸리에 있는 벤처기업에서 레 벨5의자율주행차를연구하고있으며. 자부인 김지현 박사는대구生으로서울대학교 와 동대학윈에서 석사를 마치고 미국에 있는 조 지아주립대학교에서 교육학박사 학위를 받음으 로서 서울대학교 출신 부부박사가 탄생하여 우 리 박문의 명예를 높인바 있으며,앞으로 두 부부 박사는 모두 전공분야에서 큰 역할이 기대되고 있다. 박 춘식 현종 아들 내외 부부박 사 탄생 븣 자율주행차연구 박춘식현종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