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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5월31일 금요일 2 (제149호) 기 획 930년 정월, 왕건은 고창에서 북동쪽 30리, 예안에 진을 쳤 다. 이곳은 원래 좋은 골짜기란 뜻의 선곡(善谷)으로 불렸다. 그러다 이곳의 재지세력 이능선의 귀부가 있자 왕건은 예로써 평안해졌다하여예안(禮安)이라개명했다. 예안이그렇다한들남쪽고창은전쟁이한창이었다. 원래 고타야군이었던 고창(古昌)은 경덕왕 때 바뀐 이름이 다. 옛날의 창성함이 넘친다는 뜻을 가진 그곳은 지금 견훤의 군대로 넘쳤다. 고려의 군사 3천이 지금 그 소굴에 갇혀 있었 다. 그들은 빗발같이 구원을 요청하는 파발을 띄워 왔다. 덫에 갇힌 짐승마냥 그들은 고립무원의 처지에서,도움의 손길만 애 처로이기다리는형국이었다. 왕건이 공산에서 일패도지당한 이후 판도는 완전히 견훤에 게기울었다. 왕건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고 다시는 공세를 취하지 못했 다. 딱한 처지의 고려 군사를 구출하기 위해 겨우 군사를 정돈 해 내려오긴 했으나 왕건은 못내 이길 자신이 없었다. 까닭에 군략을 의논해야 할 자리에서 왕건은 조심스레 이런 자신의 속 내를제장에게비쳤다. -싸워서이기지못하면어찌하랴…(븮고려사高麗史븯권92열전5유금필) 왕건의 목소리는 떨리고 어두웠다.견훤에 비해 왕건은 무용 에서 떨어졌다.게다가 자신감마저 잃은 처지이고 보니 전황은 암운이드리울수밖에없었다. <태조> 12년 견훤이 고창군(古昌郡 안동(安東))을 포위할 새 유금필이 태조를 따라 가서 구원하고자 하였다. 예안진(禮安鎭 안동(安東))에 이르 렀을 때 태조가 여러 장수와 더불어 의론하기를, “싸움이 만약에 불리할 때에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하니 대상(大相) 공훤(公萱)과 홍유(洪儒)가 말하기를, “만약에불리하면죽령(竹嶺)으로 좇아 돌아올 수는없으니 미 리 간도(間道)를 닦아 둠이 좋겠습니다.” 라고 하니 유금필이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병은흉기요싸움은위태한 일이라하였으니,죽는다는생각 이 있고산다는마음을없앤다음에야가히결전(決戰)할것입니다.지금적 을앞에두고먼저달아날 것을염려함은어찌된일입니까. 만약에구원하 지못하게된다면고창(古昌)의3천여중(衆)을고스란히적에게넘겨줌이 니어찌통탄하지않겠습니까. 신은진군하여급히공격하기를바랍니다.” 하니태조가이를따랐다.(븮고려사븯(高麗史)권92열전5유금필) 12월에 견훤이 古昌郡을 포위하였으므로 왕이 가서 이를 구원하려고 禮安鎭에이르러여러장수와의논하기를, “싸우다가이기지못하면장차 어떻게하겠는가.”하니, 大相 공훤과 洪儒가아뢰기를, “만약우리가이기 지못하면마땅히샛길로 갈것이요, 죽령(竹嶺)으로 갈수는없습니다.”하 였다. 유금필은 아뢰기를, “신이 듣자옵건대, 군사는 흉한 것이요, 전쟁은 위태로운 일이라 하니, 죽을 마음만 가지고 살려는 계책이 없어야만 최후 의승리를얻을수있는것인데, 지금적군앞에나아가싸워보지도않고먼 저패배할것을염려함은무슨까닭입니까. 만약급히구원하지않으면고 창군의3천여명을그냥적에게주는것이니어찌원통하지않습니까.신은 진군하여 급히 공격하기를 원합니다.” 하니, 왕이 그 말에 따랐다.(븮고려 사절요븯권1태조신성대왕12년12월조) 금세 대상(大相)공훤(公萱)과 홍유(洪儒)가 차례로 퇴로를 마련할 것을 청했다. 진보의 선필이 동쪽 배후를 받치는 상황 에서도그들은진공이아니라퇴각의문제를염려했다. -만일 이기지 못하면 마땅히 샛길로 퇴각해야지, 죽령(竹嶺)을 택해서 는안 되니, 마땅히미리샛길을닦아야합니다.(븮고려사高麗史븯 권92열전 5유금필) 왕건과 공훤,홍유는 다투기라도 하듯 소백산맥을 넘어 퇴각 할 고갯길을 닦자고 외쳐대고 있었다.소맥산맥을 뚫는 신작로 의 건설이 견훤과의 싸움을 앞두고, 그들이 희망을 걸고 있는 유일한군략이었다. 경애왕을 향해 ‘견훤의 악이 차 스스로 자멸하기만 기다리겠 다.’고 토로했던 왕건의 천성은 아직 바뀌지 않은 채, 그대로였 다. 경애왕의 요청에도 도움을 외면했던 그가, 이제는 눈앞에 자국 군사 3천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줄행랑을 고려 하고 있었다. 연도를 끊어 싸움을 승리로 이끈 회음후 한신의 일은그들에게는잊혀진지오래였다. 지금왕건의곁에서도망할길을닦자고외치는공훤은927년 10월 경애왕의 구원 요청에 지원군 1만을 거느리고 출병하는 척 했다가, 군사와 더불어 종적을 감춘 문제의 인물이었다. 죽 기를 각오하고 싸워도 승패를 장담하기 힘든 전장에서 퇴로를 마련하자고공훤은지금외치는중이었다. 그런 그였으니 설령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내려왔다 한들 어지간히견훤과사력을다해싸웠을지의문이었다. 이 한마디로 공훤이 구원병의 역할을 온전히 해내지 못하고 자취를감출만했음이확인된다. 이런 점에서 공훤이 일대의 지리에 밝은 풍기 출신인 점과, 왕건이 그런 인물을 주장으로 임명했던 점은 생각할 여지를 남 기고 있다. 어쩌면 왕건은 공훤에게 밀지를 내려 출병의 생색 만 내도록 한 뒤 일대에 숨어 있게끔 지시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자 925년 10월 왕건의 소극적 태도를 반박하며 결사 항 전을 주장했던 장군 유금필(庾黔弼)이 다시 비분강개하여 나 섰다. -병기는흉기이고싸움은위험한 일이니,죽을마음만 있고살려는계책 이 없는연후라야승리를거둘 수있습니다. 이제적진에임하여싸우지도 않고먼저꺾여패배할것을생각한것은무슨까닭입니까.급히구원하지 않으면 고창의 3천여 무리를 손도 써보지 못한 채 적에게 내어 주는 것이 니, 어찌통탄할일이 아닙니까. 신은군사를전진시켜 급히공격하기를원 합니다.(븮고려사븯(高麗史)권92열전5유금필) 927년,경애왕의 요청에 응한 1만 구원군의 주장은 유금필이 어야 했다. 그랬다면 1만의 군사는 노도같이 내려왔을 것이고 견훤은 경애왕과 유금필, 그리고 김락의 협공에 괴멸되었을지 몰랐다. 왕건은 문득 싸움의 흉내만 내다 사세가 불리하면 돌아서려 했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이제 더 이상 군사를 되돌 릴겨를도,도망칠형국도아니라는생각이들었다. 구원군이 구원의 역할을 포기하는 것은 견훤에게 포위된 3 천 군사의 생명을 견훤에게 거저 넘겨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은 지난날 경애왕의 목숨을 견훤에게 내준 왕건의 전력을 되풀이하는셈이기도했다. 그러나 군대를 부릴 지휘관부터 퇴각을 논의하는 상황이니 군사들의 전의가 온전할 리 없었다. 유금필의 강력한 요청에 일단 군사는 내었으나,이미 땅바닥에 떨어진 사기를 되돌리기 엔역부족이었다. 30리를 행군하여 정월 21일,미명에 왕건은 북쪽 병산(甁山) 에 진 을 치 고 , 견 훤 은 석 산 (石 山 ) 에 진 을 쳤 다 . 서 로 떨 어 진 거 리가 5백 보(步)라 숨 쉬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였다. 해가 뜰 무렵시작된싸움은해가질때까지승부가나지않았다. 병술(丙戌)에 왕이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고창군(古昌郡) 병산(甁山) 에 진(陣)을 치고 견훤(甄萱)은 석산(石山)에 진(陣)을 치니 서로간의 거리 가5백보(步)가량이었다. (븮고려사븯(高麗史)권1세가1태조13년정월조) 하루 동안 흘린 피가 흥건히 얼어 빙판을 이루었다. 날이 지 면 고창의 지형에 익숙한 견훤이 승기를 잡고 공세를 퍼부을 공산이 컸다. 그러면 상황은 끝날 것이고 왕건은 치욕의 전멸 을당한채어딘가로다시몸을숨겨야만할것이다. 퇴로를 마련하지 못한 것을 걱정하며 왕건은 얼굴에 진땀을 흘렸다. 저수봉(猪首峯)에 있던 유금필은 돌파의 호기를 잡지 못해 애가 탔다. 그러나 사세는 돌이킬 수 없었고 그저 기적만을 바 라는상황이었다. 그러던 순간 견훤 진영의 한축이 급속히 허물어졌다.그토록 강성함을자랑하던견훤의진영이유령을만난듯깨어졌다. 분노를 머금은 군사의 정체는 김선평(金宣平), 김행(金幸)븡 장길(張吉)이이끈고창결사대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변수 앞에 견훤은 물론이고 왕건마저 놀 랐다. 고창의토호들은경애왕의죽음에한과독을품어왔다. 김행은 나라의 종성(宗姓)인데… 中略… 무리에게 의논하기를, 견훤이 경애왕을죽였으니견훤과는의리상하늘을함께 할수없다. 어찌왕공(王 公)에게귀순하여우리의치욕을씻지않으랴했다.(븮신증동국여지승람븯권 24안동대도호부 인물조) 김행은 나라의 종성(宗姓)인데, 견훤이 경애왕을 시해했다는 소식을 듣 고(참아오던중이 때를당하여)무리에게의논하기를,“(견훤이 우리의임 금경애왕을죽였으니)견훤과는의리상하늘을함께 할수없다.어찌왕공 (王公)에게귀순하여우리의치욕을씻지않으랴?”하고드디어고려에항 복했다. 고려왕이 기뻐하여 이르기를, “행은 능히 기미에 밝고 권도에 통 달하였다.”하고는 성(姓)을 권씨(權氏)로 내렸다.(븮동사강목븯5下 김부 4년 정월21일조)()안의내용은필자가전후내용을고려하여추가한 것임. 그럴수록 왕건과 견훤에 대해 담아둔 반감은 커질 수밖에 없 었다. 견훤이 경애왕을 직접 핍살로 몰아 부친 원흉이라면 왕 건은 경애왕의 죽음을 멀찍이서 방관한 자였다.난신적자인 그 들은 서로의 득실을 다투다 그 사이에 끼인 신라왕을 죽였다. 왕건과 견훤은 존왕의 관념을 헌신짝처럼 버린 결과 그들에게 모두증오의대상일수밖에없었다. 위기에 처한 왕건을 돕자는 의견도 있었고 그냥 방관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왕건이란 말 자체에 깊은 거부감을 가진 이도 있었다. 하지만 경애왕의 설분을 위해서는 증오하는 대상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점이 그들을 괴롭힌 숙명이었다. 처음 둘의 싸움을 방관했던 그들은 뒤늦게 누구를 복수의 대상으로 삼을 지결정을내렸다.실로암울한결정이었다. -견훤과는의리상하늘을함께 할수없다.적수가우리의지경에들어왔 거늘 어찌 차제에 치욕을 씻지 않으랴.(븮동사강목븯5下 김부 4년 정월 21일 조) 왕을 처참한 주검으로 만들고 비빈을 겁간한 순간, 견훤은 인간에서일개금수로추락해버렸다. 시정잡배와 금수로 자신을 한없이 추락시킨 견훤은 혹독한 대가를 치를 때가 왔다. 금수는 금수로 대해야 마땅하다고 여 긴 그들은,이제 예리하게 갈아 온 창칼을 쳐들어 그 무도한 금 수를죽이려일어섰다. 한데 왕건을 도우기로 의견은 정해졌으되 선뜻 누구도 먼저 나서려 하진 않았다. 왕건을 향한 앙금이 쉽사리 마음 한 구석 에서 지워지지 않은 까닭이었다.전황이 급격히 견훤에게 유리 해지고서야견훤을향한그들의복수는시작됐다. 적의 후미를 파고든 그들은 야음을 등에 업고 분노를 머금어 공격에 나섰다.지형지물에 밝은 그들은 한밤이 되어서도 운신 에 한계가 없었다. 화살을 맞고서도 달려들어 적을 도끼로 쳐 죽이고 이미 숨이 끊어진 적의 등짝을 다시 수없이 난도질했 다. 견훤의 진영은 추위에다 새삼 불어 닥친 공포로 주눅이 들 어수족의굴신이얼어붙은듯자유롭지못했다. 유금필은 견훤의 혼란을 야수처럼 읽었다.날쌘 군사를 이끌 고 적진의 좌우를 돌파했다. 백제의 전군은 주검을 밟으며 도 망치기에 급급했다.패배를 몰랐던 견훤군은 죽음의 공포를 느 끼고 다투어 사방으로 달아났다. 시랑(侍郞) 김악(金渥)이 말 을 타고 도망치다 떨어져 사로잡혔다.백제 군사로 죽은 자 8천 여인이었다. 드디어싸워저녁에이르러서견훤(甄萱)이 패하여도주하니시랑(侍郞) 김악(金渥)을 사로잡고 죽인 자가 8,000여 명이었다. (븮고려사븯 권1 세가1 태조13년정월조) 전쟁으로 단련된 정예 군사를 크게 잃자, 견훤은 분노로 치 를떨며남쪽을향해길게도망쳤다. 왕건과 견훤의 쟁패에선 무릇 두 개의 커다란 고비가 있다. 포석정 사건과 그에 이은 공산 전투가 견훤의 승세를 굳힌 결 정적 사건이었다면 고창 전투는 다시 왕건에게로 승세를 굳히 게한,하나의결정적인반전이었다. 고창 전투 이후 일대의 민심은 견훤에게서 결정적으로 돌아 섰다. 견훤은 고창 전투의 여파로 대외적인 열세와 더불어 심 각한후계분쟁을겪으며급속한몰락을경험했다. 한데 눈여겨 볼 것은 포석정 사건, 공산 전투와 고창 전투 모 두 경애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포석정 사건으로 경애왕은 비운의 죽음을 맞이했고,그 경애왕의 설분을 명분으 로 내세운 왕건이 견훤과 접전한 것이 공산 전투였으며, 다시 경애왕의 설분을 외치며 고창의 토호들이 견훤에게 일제히 맞 서저항한것이고창전투였다. 이야말로 격동기의 시대 상황 속에서 경애왕이 점하고 있는 역사적 위치와 역할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명징한 예라 할 것이 다.그와관련된기록을뽑아보면다음과같다. 12월에견훤이 고창군古昌郡을포위하였으므로 왕이 가서이를구원하 려고 예안진禮安鎭에 이르러 여러 장수와 의논하기를,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면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하니, 대상(大相) 공훤과 홍유(洪儒)가 아 뢰기를, “만약우리가이기지못하면마땅히샛길로 갈것이요, 죽령(竹嶺) 으로 갈수는없습니다.”하였다. 유금필은아뢰기를, “신이 듣자옵건대, 군 사는흉한 것이요,전쟁은위태로운일이라하니,죽을마음만 가지고살려 는계책이 없어야만 최후의승리를얻을수있는것인데, 지금적군앞에나 아가싸워보지도않고 먼저패배할 것을염려함은무슨까닭입니까.만약 급히구원하지않으면고창군의3천여명을그냥적에게주는것이니어찌 원통하지 않습니까. 신은 진군하여 급히 공격하기를 원합니다.” 하니, 왕 이 그 말에따랐다.(븮고려사절요븯권1태조신성대왕12년12월조) 김행은 나라의 종성(宗姓)인데… 中略… 무리에게 의논하기를, 견훤이 경애왕을죽였으니견훤과는의리상하늘을함께 할수없다. 어찌왕공(王 公)에게귀순하여우리의치욕을씻지않으랴했다.(븮신증동국여지승람븯권 24안동대도호부 인물조) 경인(庚寅)에 고창군(古昌郡) 성주(城主) 김선평(金宣平)으로 대광(大 匡)을 삼고 권행(權行)과 장길(張吉)로 대상(大相)으로 삼았다. (븮고려사븯 卷2世家2太祖213년정월조) 고창 성주 김선평(金宣平)을 대광(大匡)으로 삼고, 김행(金幸)ㆍ장길(張 吉)을 대상(大相)으로 삼았으며, 군을 올려 안동부(安東府)로 삼으니, 이 에 영안(永安)[지금의 풍산현(豊山縣)하곡(河曲)신라의 곡성현(曲城縣)이 니, 고려가 임하현(臨河縣)으로 고쳤는데, 지금은 안동에 속한다. 직명(直 明)명(明)을어느본에는영(寧)이라하였는데지금일직현(一直縣)으로서 안동에 속한다ㆍ송생(松生)지금의 청송부(靑松府)에속한다] 등30여군현 이 고려에항복하였다.(븮동사강목븯5下김부 4년정월21일조) 김행은 나라의 종성(宗姓)인데, 견훤이 경애왕을 시해했다는 소식을 듣 고(참아오던중이 때를당하여)무리에게의논하기를,“(견훤이 우리의임 금경애왕을죽였으니)견훤과는의리상하늘을함께 할수없다.어찌왕공 (王公)에게귀순하여우리의치욕을씻지않으랴?”하고드디어고려에항 복했다. 고려왕이 기뻐하여 이르기를, “행은 능히 기미에 밝고 권도에 통 달하였다.”하고는 성(姓)을 권씨(權氏)로 내렸다.(븮동사강목븯5下 김부 4년 정월21일조)()안의내용은필자가전후내용을고려하여추가한 것임. 위의 기록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930년 1월, 고창(古昌) 전 투는 후삼국 판도의 일대 반전을 이끌었던 가장 중요한 전투였 다.그런데이전투의승인에경애왕이개재되어있다. 더 주목되는 것은 경애왕 최후를 부정적으로 전한 븮삼국사기 븯 ,또 고려 당대의 기록을 수합한 븮고려사븯등이 모두 위 고창 전 투의 승인(勝因)이라 할 경애왕과 관련한 대목을 철저히 누락 하고있다. 이 점은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매우 공교로운 일이 아닐 수없는일이다. 고창전투가 있기 전년인 929년 12월, 왕건은 예안에서 공훤, 홍유와 군략을 의논하기에 이른다.이 자리에서 왕건은 패전할 경우에 대비하여 퇴로를 마련하자는 제안을 했었음이 확인된 다. 한데 그런 극단적 선택까지 논해야만 했었던 절박한 입장의 왕건은 이듬해 1월, 고창전투에서 백제 군사 8천을 격살하는 대승을거뒀다. 왕건이 초조하게 퇴로를 만들자고 주장한 만큼,견훤에 비해 열세였던 고려로선 전혀 의외의 대승리를 거둔 셈이 된다. 예 상을 벗어난 고려군의 승인은 도대체 무엇일까.기록은 유금필 의분전을내세워설명하고있다. 유금필이 저수봉(猪首峰)으로부터 분격(奮擊)하여 크게 이를 파하였 다. 태조가 그 군(郡)에 들어가 유금필에게 이르기를, “오늘의 승리는 경의 힘이다.” 라고 하였다. 태조 14년에 참언(讒言)을 입고 곡도(鵠島)로 귀양 을갔다.(븮고려사븯92열전5유금필) 한데 유금필 혼자만의 분전으로 열세였던 군세가 우세로 돌 아섰다고 믿긴 어렵다.만일 유금필의 분전이 결정적 승인이었 다면 유금필의 분전이 븮삼국사기븯 에 적시되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하다. 또 유금필의 활약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는 왕건 이, 왜 예안에서 초조해 하며 퇴로를 걱정한 것일까.더 이상한 것은 고창 전투에서 수훈을 세운 유금필이 ‘참언’이라고 하는 매우 모호한 이유로 이듬해 곡도로 귀양을 갔다는 점이다. 후 삼국 전쟁의 향방을 바꾼 전쟁 영웅의 병권을 갑자기 박탈한 점자체가이상하다. 그렇다면 고창전투에는 또 다른 고려군 승인이 있었을 것이 라 짐작된다.그 단서는 위의 자료에서 찾을 수 있는 바와 같이 고창 세력의 참전 때문이 아니었던가 하는 짐작이 가능하다. 이에대한지적이있다. 고창전투에서 승리한 후 김선평에게 대광 (大匡)을, 권행과 장길에게 대 상(大相)을주었는데이는고려에귀부해온 여타호족들에게주어진관직 과 비교할때, 극히이례적인고위직이었으며, 또한 아래의사료에보이는 바와같이 고창군의읍격도안동부로 승격되는데중략…위의사료에의할 것같으면930년의고창전투에서김선평, 권행, 장길 등이 이끄는향군(鄕 軍)의 활동이 안동부 승격의 원인이었고 그 시기도 고창전투에서의 승리 직후라는 것이다. 이처럼 각별한 포상은 당시 김선평 등 향군의 공이 컷 (컸)다는 의미와 아울러 당시 전투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고도할수있다. (류영철, 븮고려의후삼국통일과정연구븯, 경인문화사, 200 4,pp.162~163) 앞서 제기한 일련의 자료에는 당시 재지세력의 동향을 비롯 한경애왕과관련한단서가나타난다. 첫째,이들 고창세력들이 견훤에게 적의를 품었고 또 경애왕 의설욕을명분으로내세웠다는점이눈에띈다. 둘째,왕건은 고창전투가 있기 직전 예안에서 퇴로를 고민한 적이있다. 이점에서 왕건은 그들 고창 세력의 협력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왕건에게 즉시 내응하지 않았으며, 그 결 과 왕건은 고창 전투를 놓고 고심한 것일까. 이는 뭔가 왕건과 이들 고창세력 사이에 일정한 거리감, 괴리가 있은 것이 아닐 까. 셋째,경애왕의 죽음에 적의를 품을 만큼 충군애국을 흉중에 지녔던 그들이 정작 고창 전투가 끝나자마자 신라왕 김부를 등 지고 하나같이 왕건에게 귀부해버린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러한이율배반을어떻게해석해야만할것인가. 고창전투에서 재지세력의 동향이나 활약 및 유금필의 분전 은 븮삼국사기븯에는 완전히 누락돼 있다. 또 븮고려사븯에도 뚜렷 한 설명 없이 김선평 등에 대한 관직 임명 사실만 기록돼 있다. 왜 이들 사서는 후삼국 판도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고창 전투 의과정,승인을철저히누락하고있는것일까. 이런 의문들은 927년 11월 포석정 사건 당시 왕건의 방관적 자세, 김부와 견훤의 유착 등에 대한 재지세력들의 반감이 행 동화한 것이란 관점에 비추어보아야만 풀릴 수 있다고 생각된 다. 그들이 경애왕에 대한 충심을 되새긴 점에서,왕건에게 귀부 한 것은 경애왕 죽음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견훤과 김부에 대한 반발이다. 동시에 왕건에게 즉시 귀부하지 않은 것 역시 왕건 이 포석정 사건을 방관한 것에 말미암은 일정한 반감 때문이었 다고해야할것이다. 븮고려사븯나 븮삼국사기븯에서 고창 전투의 승인을 누락했다.이 것은 재지세력의 협조를 부가할 경우 경애왕에 대한 부분이 거 론돼야 하기에, 경애왕 죽음을 방관한 왕건의 전죄를 감추려 이 모두를 아예 배제하려 한 일단이었다고 판단된다. 즉 고창 전투의 승인인 경애왕의 설분과 고창 향군의 분전 역시, 잊어 서 저버린 것이 아니요, 부끄러워서 이것을 숨긴 것일 따름이 다. 애초 사기를 잃은 고려군이 승기를 잡을 수는 없었다. 왕건 의 고창 승전은 퇴각하려다 어부지리로 얻은 승리였다.그러니 승리는고려의몫이아니었다. 결사항전의 힘을 불어 넣은 군사는 엄연히 고창의 결사대였 다. 그들은 마음속에 경애왕을 담고 견훤의 응징에 나섰다. 저 마다 경애왕으로 부활한 그들은 살아 있는 견훤을 철저히 응징 했다. 호수에 던진 돌은 이내 자취를 감추지만 물그림자가 호수 전 체로 퍼지듯, 살아서 남긴 왕의 영향은 죽어서 더욱 크게 번졌 다. 경애왕만 죽이면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던 견훤은 새삼 사 면초가에 빠졌다. 왕의 죽음이 걷잡을 수 없는 자신의 몰락과 추락으로이어지자견훤은실색했다. 삼국의 판도에 영향을 미쳤던 경애왕은 죽고 난 뒤에도 그 파장이 컸다. 힘이 없어 참았던 자들은 이제 화산이 분출하듯 반견훤의기치를노골화했다. 조용히 잊힌 듯 보였던 경애왕 죽음의 영향은 요원의 불길처 럼 번져갔고, 급기야 후삼국간 새로운 판도의 변화를 가져왔 다. 경애왕(신라55대왕.재위924~927 ) 뱚역사비정(29) 뱛Ⅰ. 경 애 왕 에 의 설 욕 이 담 긴 고 창 전 투 박 순 교 뱛Ⅱ.고창전투가던지는의미 뱛Ⅲ.침몰하는견훤 뱚▶다음호에계속 목 차 Ⅰ.경애왕에의설욕이담긴고창전투 Ⅱ.고창전투가던지는의미 Ⅲ.침몰하는견훤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