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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5월31일 금요일 12 (제149호) 기획 1910년한국이일제에의해강제로병탄된뒤한국의의병·열사들은일본의부당한침략에항거하여전국각 지에서봉기했다.조선총독부는강력한무 단통치를감행하여가혹한탄압을자행하는한편,민족고유문화말살,경제적지배의철저화로한국민족의 정당한민족적저항의기반을없애고자하 였다.그리고1919년3월1일을기하여한민족은국내외에서조선의독립을외치는거족적인만세운동을펼쳐 져전국으로확산되었다. 한국방송공사(KBS)가올해3·1운동100주년을기념해제작한만세지도에따르면1919년4월1일서대전에서 수백명의군중이태극기와함께대한독립 만세를부르며대전시내로진입하려다가일본군의저지를받고지금의선화동(宣化洞)에서해산했다. 그리고선화동만세운동의주역으로박종병(朴宗秉)열사가있어소개해보면서분연히일어난구한말의병들 과광복을맞기까지거룩하고도아름다운 역사를써주신조상님에게고맙고감사한마음을함께전한다. 선생의 본관은 충주(忠州)이다. 충주박씨는 우 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족보(성화보,1474) 가훈 (가전충효 세수돈 목,家傳忠孝 世守敦 睦)으로 대전을 중 심으로 거주하며 그 상계를 보면 충주박 씨는 고려부정을 역 임 한 휘 영 ( 英 )을 관 조 ( 貫 祖 )로 하 여 세 계를 이어오고, 이 후 개성소윤을 역임 하고 사복시정에 증 직된 8세(世) 휘 광리 ( 光 理 )의 두 아 들 진 ( 풂), 소(蘇)에 이르러 참의공파(參議公派)와 판 서공파(判書公派)로 각각 분파되어 세계를 이루 고있다. 참의공 휘 진( 풂)은 개성소윤을 역임하고 사복 시정에 증직된 휘 광리(光理)와 합천이씨(陜川 李氏)의 아들 삼형제중 둘째로 1366년(공민왕 丙 午)에태어났다. 진사(進士)가 되어 나라가 어지러워짐을 알고 공명의 뜻을 버리고 동생 소(蘇, 판서공)와 함께 호서 덕진현 유성리에 은거(隱居)하여 후학을 가 르치며 여생을 유유자적(悠悠自適)하다 조선조 에 이르러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고,이어 진해·직 산감무가 되어 많은 치적을 남기고 1422년(세종 4,壬寅)년에 하세하니 향년 57세로 손자 형무(衡 武)의 귀(貴)로 인하여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으며, 본리(本里) 도솔봉(兜率峯) 아래 신좌원(辛坐原)에예장(禮葬)되었다. 부인 보안임씨(保安林氏)와의 사이에 아들 넷 을 두었으니 효함(孝 ) 충함(忠 ) 제함(悌 )신함(信 )으로 문중은 크게 번성되었으니 선 생은 셋째 휘 제함(悌 )의18대종손이다. 참의공의 삼남 제함(悌 )은 무과에 급제하 여 제주판관과 단천, 서천, 회령부사를 거쳐 내직 에 들어와 대호군 겸 군기시정이 되었다. 둘째아 들 형무(衡武)의 귀(貴)로 병조참판에 증직되었 다. 세 아들을 두었는데 특이할 만하다. 공(公)이 제주판관에서 전직하여 돌아올 때 태풍을 만나 배는 부서지고 사람들은 모두 죽었는데 홀로 나 무 조각에 의지하여 한 섬에 닿았다. 고요히 인적 이 없어 따르는 자 모두 죽음을 안타까이 여기고 살아날 길이 없음을 슬퍼하여 운수로 알고 영영 죽었구나 하는데 꿈에 신인(神人)이 바다 속에서 나와 고하기를 ‘공은 죽게 됨을 걱정하지 말라 내 일이면 배가 와서 공을 싣고 돌아가게 될 것이다. 돌아가면 반드시 귀자(貴子) 셋을 낳을 것이니 큰 아들 이름은 형문(衡文)이라하고 다음 아들은 형무(衡武)라 하고 그 다음은 형(衡) 아무라 하 라’라고 하였다. 공(公)이 돌아와 형문과 형무는 기억할 수 있는데 셋째 아들 이름이 형 아래글자 는 기억할 수 없었다.그 이튿날 과연 지나가는 배 가 있 어 공 을 싣 고 돌 아 왔 고 그 후 에 과 연 세 아 들 을 낳았으므로 신이 가르쳐준 대로 이름을 짓고 막내아들 이름은 형 아랫자를 치(治)자로 정했는 데요절(夭折)을면치못했다한다. 참판공(휘 제함)의 장남 형문(衡文, 17대조)은 1469년에 생원이 되고 1475년(乙未)에 부여현감 으로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육진어사(六鎭御 使) 사헌부지평, 장령, 임천군수 창원부사, 진주 목사, 종부시정 좌통례 등을 역임하였고 1548년 (弘治 戊申)창원도호부사를 사임하고 돌아와 집 동쪽에다 정사(精舍)를 짓고 이예당(二藝堂)이 라 편액하여 후학을 양성하는 즐거움을 삼았으니 곧그의주손이애국지사종병(宗秉)선생이다. 병조참판 박제함의 18대 종손으로 아버지 휘 영태 (泳泰) 公과 어머니 진주강 씨 사이에서 독자로 1889년 대전 중구 침산동에서 태어 났다. 일찍이 서당에서 학 문을 익혔고, 깨끗한 선비 후예로 성장하였다. 나이 2 1세가 되던 해 한일합방(韓 日合邦)으로 뼈아픈 실의에 젖어 평소 친하게 지 내던 삼괴리(현재 삼괴동)의 김직원(金直源)과 같이 나라 잃은 서러움에 한탄하며 나날을 보내 다가 한때는 외국으로 망명할 계획도 해보았으 나, 박씨 가문의 18대 종손이요 편모슬하에 외아 들로 대를 이을 자식도 아직 두지 못한 때문에 어 머니와 집안 어른들의 간곡한 만류로 통한의 세 월을 보내고 있던 중 일본의 학정이 갈수록 심해 져 마침내 국내에서 항일운동이 전개된다. 1919 년 3월,전국에서는 고종의 국장을 앞두고 민심이 들끓고 있을 때, 서울에서 민족대표 33인의 독립 선언문 발표하고,이로부터 독립만세운동은 전국 적으로 확산하여 곳곳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죽어간 동포가 수없이 늘어나고 나날이 격렬한 시위로 많은 애국지사들이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이때 대전지역에서 박종병과 김직원이 거사할 것 을 약속하고 인동시장에서 어물상을 경영하는 김 창규를 찾아가 거사의 뜻을 설명하고 뜻있는 동 지 윤 명 화 외 수 명 을 규 합 하 여 협 의 끝 에 4 월 1 일 대전장날을 기해 대전지방이 일제히 대대적인 만 세 시위를 하기로 결정한 후, 삼괴리의 김직원 집 에 연락본부를 두고 행동을 시작하였다. 이때 서 울에서 입수된 독립선언서를 수백 매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든 다음 3월 20일경 김직원의 당질인 김성철을 시켜 등사한 독립선언서 300매를 인동 시장 김창규의 집에 전달하고 4월 1일의 거사를 위한모든준비를하도록하였다. 그 런 데 3 월 2 7 일 경 시 장 에 서 윤 명 화 가 독 립 선 언서 한 장을 가지고 동지의 집에 들어갈 때 부근 에 사는 일본인이 미행하는 것을 윤명화가 알아 차리고 즉시 김창규를 찾아가 미행당한 상황을 설명하였다. 이들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 하고 인동시장에서 만이라도 거사를 앞당겨 하자 는 상의 끝에 즉시 동지들을 규합하여 독립선언 서를 시장에 뿌리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일본경찰이 출동하여 시위 군중을 무력 으로 강제 진압하고 김창규·윤명화 등 여러 명이 체포되었다. 이 소식을 전달받은 박종병·김직원 은 당황하여 김정철을 피신시키고 거점을 다른 곳으로 옮겨 놓고 양승환 등 동지들을 규합하여 4 월 1일 거사는 계획했던 대로 실행하기로 하고 유 천면(현재 유천동), 동면(현재 추동부근) 등지로 사람을 보내 이 사실을 전달하였다. 마침내 4월 1 일 맞이하여 지역에서 태극기를 감추고 장보러 가는 것을 가장하여 이날 정오 즈음 대전 시장에 수백군중이 집결하였다. 이에 박종병·김직원· 두 사람은 군중 앞에 나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총궐기할 것을 호소하면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외쳤고, 수백 군중이 따라서 만세를 외치 며 시장을 누비니 일본경찰이 출동하여 칼로 시 위 군중을 마구 찌르자 시위군중도 이에 맞서 투 석으로대항하였다. 이날이 장날이라 장을 보러 온 군중들도 합세 하여 수천 군중이 되었고, 이에 경찰(순사)들로 서 진압이 어렵게 되자 군대가 출동하여 시위 군 중을 향해 사격을 가하였다.이때 박병권·정대귀· 방춘실 외 많은 사람들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임 동빈 외 수십 명은 부상을 당하였으며, 양승환은 일본순사의 칼에 배를 찔려 배를 움켜쥐고 만세 를 외치다가 죽어갔다. 이날 박종병·김직원은 주 동자로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1919년 4월 18일 공주지방법원 대전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죄 로 2년 징역형을 받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나라 잃은 백성이 나라를 찾기 위해 독립만세를 외친 것이 무슨 죄가 되냐며 판결에 불복, 경성복심법 원에 항소하여 법정투쟁 끝에 5월 10일 징역 10월 로 감형되었으나 또 다시 불복하고 고등법원에 상소했다가 기각 당하였다. 그리하여 공주 교도 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0년 4월에 출옥하였다. 그러나 체포된 날로부터 출옥 때까지 받은 혹독 한 고문으로 깊은 상처와 골병이 들었고, 출옥한 후에도 일본 경찰들이 가해오는 압박으로 견디기 어려워, 1921년 동지들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건 너가 일본에 있는 동지들과 항일운동을 계속하였 다. 1926년 귀국하여 향리에서 은둔생활을 하다 가, 마침내 1945년 8·15 광복을 맞아 독립은 되었 으나, 반평생 독립운동으로 인한 고초로 병고에 시달리며 가난 속에 살다가 1971년 9월 11일 타계 하여 침산동 선영 방화봉에 안장되었다. 지사(志 士)는 은진송씨와 결혼하였으나 옥바라지 등 갖 은 고초로 인해 사별(死別,1924)하고 강릉김씨와 의 사이에 아들 희준(熙埈,대전 중구의회 초대의 원), 희증(熙增), 희균(熙均), 희장(熙璋), 희돈 (熙墩) 등 5남과 1녀 희숙(熙淑)을 두었다. 정부 에서는 1990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이하여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하고 묘역을 국립묘지로 이장 을 건의하였으나 자녀들이 침산동 선산에 제주공 (휘 제함)이하 18代가 나란히 모셔져 있으니 이 장할 마음이 없다고 사양하여 묘(墓) 앞에 노태 우 대통령 이름으로 공적을 찬양하는 비석을 세 워주었다. 대전 선화동 만세운동의 역사적 기록은 독립운 동사3권에기록되어있는데다음과같다. [독립운동사 원문] 4월 1일 대전시장의 장날 약 4백 명의 군중들은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독 립만세를 절규하며 시장을 만세시위로 누비고, 이에 대항하는 일제 경찰과 충돌하여 적 3명에게 부상을 입혔는데, 구원 차 출동한 일제수비대의 야만적발포로순국자2명과부상자8명이났다. 이날의주동인물인산내면(山內面)삼괴리(三 槐里) 김직원(金直源), 산내면 침산리(砧山里) 박종병(朴宗秉)의재판기록대요는다음과같다. ‘김직원(金直源)·박종병(朴宗秉)양인은 4월 1 일 대전면 본정 2정목 소재 대전(大田)시장에서 다수 군중이 모인 것을 호기로 한국기를 흔들면 서 군중을 선동하고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 였다.’ 이로써 4월 18일 공주지방법원 초심을 거 쳐 5월 1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각각 10월의 언도 를받았다. 이날 출동한 유천(柳川)에 주둔한 적 제80연대 제3대대의 1개 소대는 본정(本町) 1정목(一丁 目)[지금 원동(元洞)] 소재 일인 소학교 근처에 매복하여 만세를 부르는 장꾼에게 총을 난사하고 지금 인동(仁洞)쪽으로 만행을 감행하여 시장은 수라장이 되었다. 이리하여 박병권(朴秉權) 외 1 5인이 순국하고 임동빈(任東彬) 외 수10명이 부 상하였다. 산내면(山內面) 삼괴리(三槐里) 양승 관은 적병의 총검에 찔려 사경에서도 대한독립만 세를 연호하였으며,대전 읍내의 정대귀(鄭大貴) 와 방춘실(房春實)이 순국하고, 동면(東面) 신촌 리(新村里)의 김국보(金國甫)도 유탄에 맞아 희 생당하였다. 이때 부근 일대의 산은 흰옷 입은 군 중으로 모두 덮혔다. 대전병원에서는 적의 압력 으로우리부상자의치료조차거절하였다. 4월 1일 서대전(西大田)에서는 수백 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전 시내로 들어가다가 적의 저 지를받고지금의선화동(宣化洞)에서해산하였다. [제1차 만세운동]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3월 4 일자 ≪동경조일신문(東京朝日新聞≫의 경성 특 파원(京城特派員)3일발속보(續報)에의하면, ‘인산에 대비하여 전국의 헌병을 서울에 소집 하여 각지방의 소요 진압에 심한 곤란을 가져왔 다’고 보도하고 평양(平壤)·황주(黃州)·창원(昌 原)·진남포(鎭南浦)·원산(元山)·대전(大田) 등 에서 폭민이 봉기하여 와석(瓦石)을 던지는 소요 가있었다.’고보도하였다. 이에따라대전에서제1차만세운동은3월3일처 음있었던것으로독립운 동사는기록하고있다. [제2차 만세운동] 제2차로 3월 12일 장날을 이 용하여 천도교를 중심으로 시위운동을 전개 하려 는 계획을 세웠는데 사전에 주동 인물이 검거되 었다. [제3차만세운동] 제3차로 3월 27일 하오 3시부터 5시까지 장날 을 이용하여 대전 시장에서는 수백 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독립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때 약 3백매의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 및 ≪국민회보≫가군중에게뿌려졌다. [제4차만세운동] 4월 1일에는 당시 대전 시장이었던 인동장날 (음력 3월1일)을 기점으로 인동장터와 선화동에 서는 수 백 여명이 만세운동을 펼쳤으며 그밖에 도 갈마리, 회덕면, 산내면에서 만세운동을 펼쳐 대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만세운동이 벌어진 날 로 기 록 하 고 있 다 . 독립운동사와 당시 대전에 거주했던 일본인들 이 남겨놓은 대전의 기록을 토대로 4.1 선화동 독 립만세운동의전개를추정해보면다음과같다. 1919년 4월1일 (음력 3월1일)은 인동장터(대전 시장)의 장날로 당시 대전시장은 대전주민 뿐만 아니라 인근의 옥천, 영동, 금산등에서도 많은 사 람들이 몰려와 채소와 약재, 옷감등을 거래하였 다고 한다. 대전에서는 3월 3일과 3월 17일 그리 고 3월 27일날 총 3차례에 걸쳐 만세운동이 있었 지만 일제의 저지 속에 무산되거나 단발적인 만 세운동에 그쳤다. 이에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지 만 처음 만세운동이 벌어진지 한 달이 되는 4월1 일에 대전시장의 장날을 기점으로 다시 한 번 대 규모의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약속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 유 는 그 이 전 까 지 는 단 발 성 만 세 운 동 있 었지만 4월 1일에는 대전시장 뿐만 아니라 선화 동(발암리)에서 수백 여명이 만세운동을 펼쳤으 며 그밖에도 갈마리, 회덕면, 산내면에서 만세운 동을 펼쳐 대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만세운동이 벌어진 날로 기록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날 서대 전역 개통으로 지금의 오류동에 거주하던 주민들 과 당시 유천면으로 분류되었던 태평동, 문화동 일대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대전시장에서 벌어지 던 만세운동에 동참하기 위해 지금의 용두동 근 처로 모여 당시 대전역과 서대전역을 잇던 도로 였던 지금의 계백로가 지금의 센트럴뷰아파트 자 리에 있던 일본 헌병대의 눈을 피해 용두동과 선 화동을 잇는 호수돈여고 언덕쪽 길(당시에는 산 중에 있던 작은 오솔길이었다고 함)을 택해 대전 시내로 진입하려다 출동한 일본 헌병대의 저지를 받고 지금의 선화동 202번지 근처에서 수백 명이 만세운동을벌이다가해산한것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대전에서는 현재 행정구 역으로 범위를 확대해서 볼 때 총 9곳에서 만세운 동이 벌어졌으며 특히 4월 1일에는 당시 대전 시 장이었던 인동장날(음력 3월1일)을 기점으로 인 동장터와 선화동에서는 수백 여명이 만세운동을 펼쳤으며 그밖에도 갈마리, 회덕면, 산내면에서 만세운동을 펼쳐 대전에서 가장 큰규모의 만세운 동이벌어진날로기록하고있다. 100년이 지난 지금 당시 선화동 만세운동에 참 가한사람들의이름이나인원을정확히알수는없 지만 독립운동사와 애국지사들의 증언에 따른 선 화동 만세운동은 결코 가벼이 넘기거나 묻어둘 수 없는 중구관내에서 벌어진 중요한 독립운동이다. 참가한규모로는대전에서세번째로규모가큰만 세운동이었다. 따라서 중구와 중구민은 역사 속에 묻혀있던 선조들의 호국보훈문화를 계승하고 일 제 식민지하에서도 굴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일어 선숭고한독립정신을이어나가야할것이다. 올해는 3.1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이 되는 해이다.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피와 땀을 기반으로 하여 지금에 대한민국이 존재한 것이 다. 그러나 지금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행방을 모 르고있어보훈청에서는그후손들을찾고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다.오 죽하면 이런 말이 나올까 지금까지 역대정부는 이들을 왜면 해 왔기 때문에 그들의 후손들은 생 활고에 시달리면서 그 행방을 찾지 못한 것이다. 이제라도 이들에 대한 예우에 만전을 기해줄 것 을기대해본다. 그리고 대전 4.1 선화동 독립만세운동의 계승 및 발전을 위해 기념비 건립과 만세운동이 일어 났던 선화동에 독립운동가의 거리를 조성하고 독 립운동을 했던 애국지사들의 홍보관을 건립하여 학생들에게는 학습장소로 시민들에게는 독립운 동 정신을 고취하는 장소로 활용 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본다. 정부는 기미년 3·1만세운동 100주년을 기념하 고 충남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한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한 기념사업 일환으로 지난 달 묘역을 정비하고 고유제를 봉행하였다. 이에 지 난호 기사에서 고유문의 일부 오탈자가 있어 정 정하여실어본다. [고유문]己未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어 느덧 100년이 흐른 오늘 효손(孝孫) 봉기(鳳基) 할아버님유택앞에무릎꿇고삼가告합니다. 1910년 경술국취(庚戌國恥) 이후 일본 제국주 의의 혹독한 탄압에 숨죽여 오던 우리 민족은 미 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에 호응하여 기미년 3·1 민족대표 33인을 중심으로 대한독립을 선언하고 전국적인 비폭력 만세운동 을 전개하였습니다. 이는 독립선언서와 공약삼장 (公約三章)에 나타나듯 무력이 아닌 비폭력 운동 으로 저 유명한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대영제 국을 상대로 벌였던 비폭력운동과 쌍벽을 이루는 세계사적거사였습니다. 할아버님께서는3·1운동이일어나자대전군인 근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기미년 4·1 인동장터에 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니 그 수가 수천여명에 이르렀고 그 함성 또한 천지를 진동케 하였으니 일제의 야만적(野蠻的)인 진압으로 수십 명이 절 명하고 참여했던 수백 명이 일경에 체포(逮捕) 구금(拘禁)되니 이때 할아버님께서도 영어(囹 圄)의 몸이 되시여 기약 없는 수감생활을 시작하 시니 이때 30세(歲)의 청장년이셨습니다. 이후 일제 법원의 판결로 2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일경 의 혹독한 고문 후휴증(後遺症)으로 지병을 얻어 10개월 만에 출소하셨으나 일제의 불영선인(不 逞鮮人)이라는 낙인 때문에 감시대상에 포함되 어 8 · 1 5 광 복 때 까 지 2 5 년 간 은 둔 (隱 遁 ) 의 세 월 을보내셨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항복으로 광복이 되었 으나 이미 60을 바라보는 몸과 마음이 병든 초로 (初老)의 노인이셨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 력(無氣力)한 야인으로 향리에 은거하다 1970년 향년 81세로 파란만장한 생(生)을 마치셨습니다. 다행이도 사후(死後) 20년만인 1990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는 할아버님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습니다.그 사이 우리 제손(諸孫)들은 사회적 박대(薄待)와 찢어지는 가난으로 할아버님의 유훈을 제대로 받 들지 못하였으니 흔히 말하기를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한다는 웃지 못할일이저희앞아다가왔습니다. 하오나 할아버님 저희 제손들은 영광스럽고 자 랑스러운 독립유공자 집안이라는 자부심과 긍지 를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유학의 근본 인 공맹(孔孟)의 도(道)를 지키고 할아버님의 숭 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귀감으로 애국지사 후손 의 품위를 지키며 부끄럽지 않는 가계(家系)를 이어가겠습니다. 오늘 할아버님 묘역(墓域)을 정비(整備)하고 주과(酒果)를 올리오니 흠향(歆饗) 하시옵고 그 토록 사랑하시던 조국 대한민국이 평화롭고 영광 스러운 세계일류국가로 우뚝 서도록 굽어 살펴주 시옵소서[박경석제주공종중장의撰] /자료제공대전중구청구보편집실 글정리·사진 박상섭 편집국장(parkss1012@ha nmail.net) 3븡1운동 100주년 기념 대전만세운동의주역박종병지사(志士) 선조 유지를찾아븣 애국지사 박종병의 선원 세계 애국지사박종병선생묘소-대전중구침산동305번지선영. 박종병 선생 尊影 박종병志士의생애(生涯) 1990년서훈 묘비전면 묘비후면 4.1선화동독립만세운동의역사적기록 대전만세운동일지 4.1선화동독립만세운동의전개 4.1선화동독립만세운동의의의 맺음말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