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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식은 대구(大邱) 사람이다. 1919년 3월 8일의 대구 서문외(西門外) 장날을 이용하여 이만집(李萬集)·김태련(金兌鍊)·김영서(金永瑞)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3월 초경 계성중학교(啓聖中學校) 학생으로서 이만집 등이 서울의 이갑성(李甲成)과 연락을 취하며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자 계성중학교 학생 대표로서 권성우(權聖佑)와 함께 비밀리에 전교생을 규합하는 등 사전계획에 적극 가담하고, 3월 7일 독립선언서 20여매를 가지고 칠곡군 인동면 진평동(漆谷郡仁同面眞坪洞)으로 갔다. 3월 8일 오후 3시경 동부시장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으며,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일제의 무력행사에 부상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그는 체포되지 않아 옥고를 면하였으며 이해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의 궐석재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6월형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내성(李乃成)과 함께 인동면 진평동을 찾은 그는, 즉시 그곳 유지 이상백(李相柏)을 만나 독립선언서를 보여주면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종용하여, 3월 12일에 다시 3백여명의 시위군중이 모인 가운데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또한 4월 2일에는 역시 계성학교 학생이던 김수길(金壽吉) 등과 함께 대구시내의 조선상인들에게 폐점, 철시와 일본인과의 거래를 끊도록 종용하는 동정표시경고문(同情表示警告文) 제1호 3백여매를 등사하여, 시내와 서문외 시장에 배부한 결과 80여호가 이에 호응하여 폐점, 철시를 단행하였다. 3일에는 김석진(金石鎭)의 집에서 김수길·이종식(李鍾植) 등과 함께 전날의 동정표시경고문 제 1호를 받고도 이에 호응하지 않은 서문외 시장의 포목상 김응수(金應壽)와 경동(京洞)의 비단상 김경부(金敬夫)에게 방화하겠다고 위협하는 협박문을 우송하였다. 6일에는 다시 김석진의 집에서 김수길 등과 함께 대구경찰서장 백정의삼랑(伯井義三郞)에게, 지난 3월 8일의 서문외 시장 독립만세시위 때 많은 시위군중을 체포한 것에 항의하고, 암살하겠다는 경고장을 우소하였고, 조선 상인들에게 폐점할 것을 촉구하는 동정표시경고문 제 2호 4백여매를 등사하여 시내 요소에 배부하였다. 7일에는 다시 명일 아침부터 조선 상인들에게 일제히 폐점·철시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는 동정표시경고문 제 3호 3백여매를 등사하여 상가에 배부하였다. 13일에는 일제가 친일파를 앞세워 자제회(自制會)라는 기구를 설립하여 많은 조선인을 가입시켜 독립운동을 차단하려고 획책함에 분개하여, 중추원 참의(中樞院參議) 박중양(朴重陽) 및 수성동 2가 구장(壽城洞二街 區長) 박응훈(朴應勳)에게 암살하겠다고 하는 경고장을 우송하여, 그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등 계속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1921년 6월 2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출판법 및 제령 제 7호(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위반, 협박 등 혐의로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6년에는 일본의 신호신학교(神戶神學校)에 유학하면서 교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다가 동부용합(東部茸合) 경찰서에 1주일간 구류되기도 하였으며, 1927∼1936년까지 대구 서문교회(西門敎會)의 목사로 시무하며 교인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켜 일제의 끊임없는 감시를 받았다. 또한 1941년 9월부터 이듬해 말까지는 만주 간도성 명월구(滿洲間島省明月溝)의 제일교회 목사로 시무하면서 교민들에게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는 한편 최만혁(崔萬赫)에게 군자금을 지원해 주는 등 계속적인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한다. 광복 후 1977년에는 사이판 티니아섬에서 2차대전 한국인 희생자 5천여명의 유해를 반장하여 '망향의 동산'에 안장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